일전에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후에 오랜만에 2번째로 그의 작품을 읽게 되었다. 저자의 서론을 읽고 기분이 좋았다. 뭔가 수준 있는 내공이 느껴지는 이 정치철학자의 말투 때문이었다.
근래 좀 수준 떨어지는 저자들의 책을 읽어서인지, 아렌트의 밀도 있는 표현, 정합적이면서는 때로는 위태롭지만, 그럼에도 뭔가 영감을 주는 개념의 제시 등이 매력이었다.
이 책은 지난주에 내 스스로를 세게 다그치듯 읽어서 4일 만에 읽었다. 이해 안 되는 부분 부분 부분 있었으나, 전체적인 저자의 입장이나 말하고자 하는 바는 캐치 할 수는 있었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정치적 상황에서 중시했던 ‘행위’를 복원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그 행위란 정치적 행위를 말하며, 이것은 생존을 위한 노력인 ‘노동’과 구분되며, 장인적인 혹은 예술적인 지속되는 물건을 만드는 활동인 ‘작업’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정치적) ‘행위’를 지고의 가치로 여겼는데, 왜냐면 삶에서 나머지 활동인 노동과 작업은 생존을 위하여 혹은 생계를 위해서 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것, 그러니까 삶의 구속된 조건 속에서 하는 수 없이(자유 없이)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계과 생존에 대한 걱정 없이 하는 활동인, 오직 (정치적) '행위‘만이 자유로운 행동, 자유인만이 가능한 행동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관점이 가능했던 것이다.
언뜻 들으면, 아렌트가 말한 자유의 활동인 (정치적) '행위‘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과 노예가 있어서 생계에 신경 안 쓸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만 가능한 것이지 않는가, 라는 의심이 가능하다. 그래서 아렌트가 중시하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적 핵심 가치인 ‘행위’에는 뭔가 특권적인 냄새가 난다. 이것은 근대의 능력주의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고, 전근대적인 세습적인 특권에 해당할 ‘귀족적’인 무엇이다.
여기서 잠깐. 아렌트의 주장이 살짝 재수 없는 주장일 것 같다는 본능적 반감을 느끼는 분들(저도 그랬음)에게 잠시 그 감정의 유보를 부탁하며, 아렌트의 주장을 좀 더 따라가 보자.
그런 폴리스 시절이 끝나고 근대와 현대의 세계가 열리면서, 오히려 전도되어(?) 장인적인 작업의 가치를 중시하는 것을 넘어, 범속한 생존을 위한 ‘노동’을 제일 중시하는 세상이 되었다며, 아렌트는 개탄을 한다. 그러면서 묘한 개념 구분을 시도한다.
바로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구별이다. 근대로 넘어오는 순간 ‘사회’혹은 사회적인 것의 개념이 생겼으며 이후, 정치적 것의 공간 혹은 공론장이 소멸되었다고 얘기한다.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개발 경제학자 장하준씨가 정치를 정의하면서, 한 국가가 벌어들인 세금을 어떤 방향성으로 재분배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간명하며 핵심적인 정치에 대한 기능적 정의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으로 좌파와 우파 정권의 방향성이 갈리며, 그에 따라 우리는 투표하고, 정권을 교체한다.
그런데 아렌트는 그런 경제 중심주의에 해당하는 좌파든 우파든 둘 다, ‘사회적인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지 ‘정치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인 것은 한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적 이익단체들이 자기 이해와 필연성에 따라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자신이 이익을 위해 국가 정책을 좌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상충하는 여러 이익단체들의 간의 대결과 조율이 정치이지 않나, 그런 사회적인 것과 아렌트가 강조하고 싶은 ‘정치적인 것’은 무엇이 다를지 처음에는 의야했다.
아렌트는 정치적인 것은 자유의 행위이므로 (자기 이익의 필연성에 구속된) 사회적 이익 단체에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것이 보편주의로서의 정치적인 것임을 말한다. 가령 녹색당은 에너지를 덜 써야 하며, 전기세나 탄소유발 원료의 가격 인상에 찬성한다. 생계에 석유값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서민에게는 가혹한 소리이며, 전기나 화석원료을 많이 사용하는 기업에게는 불편한 주장이다.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아니 실은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환경적 정책으로 더 이상 많이 벌고 많이 쓰는 번영을 중시하는 경제가 아니라, 축소 경제를 삶의 질을 중시하는 방향성을 주장하는 것은 (번영과 유복함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중시하는) 좌파 혹은 우파 어느 정치 세력에게도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공시적인 차원에서 여러 집단들의 갈망을 수렴하는 것이 '사회적인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이 포괄하지 못하는 것, 통시적인 차원 문제를 받아 안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이것은 중장기적으로 인류의 지속을 위해 쓴소리를 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해 보이는 공론장을 말하는 것 같다.
귀족적이며 특권적이지만, 동시에 불편부당을 지양하며,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사유하는 공론장이 아렌트가 말한 ‘정치적인 것’에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아렌트가 50여 년 전에 정치철학적 차원에서 개념적으로 제시한 아이디어일 뿐이라도, 작금의 정치가 실종되고 사회만이 남아 있는, 더 가속적으로 위기에 빠지는 인류에게 제시하는 매력적 개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