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의 나에게 있어 만화책이란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그림들의 나열이 아니었다. 책가방을 매던 시절엔 로봇찌빠로부터 우정과 과학을 배웠고, 변성기 시절엔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꿈과 사랑과 열정을 경험했으며, 나의 첫번째 삼국지는 고우영 화백의 작품이었다. 지루한 일상의 유희의 수단이자 상상력의 원천이었고 명작 이상의 작품이었다. 늘 그렇게 생각해 왔고 앞으로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을듯 싶다. 때문에 주변에 만화책이 눈에 띄면 내용을 막론하고 무작정 들여다 봤던 기억이 있다.
현재까지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심오한 내용의 소설부터 과학, 역사, 세계문화 등에 대한 정보의 대부분은 단언컨데 만화로부터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 봤을때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의 첫장을 넘기는것이 얼마나 설레였는지 모른다. 그동안 다양한 매체로(이를테면 서적, 영화, 드라마, 다큐멘터리, 교육컨텐츠 등으로) 가공되어 전달되었던 조선왕조의 시작과 끝을 만화로 볼 수 있다는것은 그만큼 나에겐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막연하게나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갔던 조선의 왕들에 대해 궁금해 하면서도 시간이 되면 한번 찾아볼까? 라는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해오던 나자신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독서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얄팍한 나의 역사지식에 조금이나마 자신감이 추가된 된 듯하여 뿌듯하기까지 하다.
2. 만화라는 매력적인 표현기법
만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은 역시 사실적인 액션의 묘사가 아닐까 싶다. 이를테면 이런거다. "그는 어스름한 달빛아래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허리춤의 무영검을 치켜들어 고함과 함께 큰 원을 그리며 휘둘렀다"는 장면을 연상하기 위해선 50자 남짓의 글자를 읽고 단어가 의미하는 이미지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어 그에 걸맞는 분위기를 상상해 내야 한다. 하지만 만화책에선 오직 한컷이면 충분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전달 수단이란 말인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생각해 보라. 두줄 정도 읽다보면 당췌 뭔 이미지를 설명하는건지 머리가 터질지경이니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컷의 이미지로 인해 자칫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어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부분에서 박시백 작가는 나름 객관적인 합일점을 찾은 듯 보인다. 기본적으로는 실록의 기록들을 서술하고 그에 따른 인물들의 행동을 묘사하는 식이다. 거기에 풍부한 참고자료를 토대로 작가 개인의 적극적인 해석이 가미되어 지루할 틈이 없다 (물론 해석상의 차이가 가져올 '객관성'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관점에 따라 생길 수밖에 없겠다).
주요 내용의 주인공들인 왕들에 대한 묘사는 탁월하지만, 그 주변인물에 대한 묘사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래도 '조선왕조실록'이니 그렇다고 해 두자.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수많은 사건과 투쟁을 거쳐 권력의 중심에 서기까지, 권력 주변의 피나는 노력과 적거나 크게 벌어지는 대립이 내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갈증이 해소된다.
3. 정치적 배경과 인물들의 재해석
500년의 파라만장한 역사를 단 20권으로 압축한다는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분량만 1,893권 888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 아닌가? 다양한 시대적 배경과 수많은 위인들의 업적에 대해 역사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만화로 재현하고자한 것이다.
이는 고우영 화백과 같은 작가주의 만화를 추구하는 박시백 화백의 고집도 있겠지만, 단순히 묘사에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만평작가다운 촌철살인의 감각으로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인물들을 현대정치에 빗대어 재해석할 수 있는 박시백 작가만의 탁월한 능력때문이기도 할것이다.
조선왕조의 시작을 알리는 제1권 '개국'의 공양왕 편을 보면 그 묘사와 해석이 놀랍기 그지없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이자 집권세력의 허수아비왕으로 인식되어온(적어도 내가 알고있는 한) 공양왕이 정몽주 세력과 이성계 세력 사이에서 어떻게 자신의 위치와 고려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지 엿보면, 비록 그 결과가 고려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할지라도 단순히 허수아비왕이라 치부해 버리기엔 죄송스러운 맘이 들게 된 것이다. 마지막권인 제20권 '망국'의 고종에 대한 묘사에서 작가의 의견은 보다 명확해진다.
"우유부단함과 심지어 비굴함으로 일관했던 그의 처신은 이해할 만도 하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황제에서 퇴위될 때 이상의 결연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나라보다 쓰러져가는 왕실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점에선 똑같아 보이는 듯 하지만 공양왕에겐 너그러운 해석을, 고종에겐 단호한 해석을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에게 내린 단호한 해석에 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 작가의 손으로 새롭게 창조된 찬란한 왕조의 기록을 함께 하면서 때론 고개를 끄덕이며 때론 허탈해 하며 일종의 애착(역사에 대한)이 생겨난 것이 아닐까? 그에 따라 왕조의 마지막이기에 조금은 더 영웅적이고 극적인 행동을 기대했던게 아닐까 싶다.
4. 마치며
수십 권의 분량이라도 재미있는 만화를 읽고나면 작가에 대한 기대가 생기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종교적인 믿음과도 같아서 작가가 가지고 있는 철학과 원칙에 흔들림이 없다면 독자들은 계속해서 그의 작품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기다리게 된다.
처음 앉은자리에서 무심코 집어든 1권을 다 읽고 어느새 다음 권의 첫장을 넘기고 있는 내 모습에서, 책의 머리말에 청소년과 성인들에게 두루 읽혀질 수 있는 역사서를 그려낸다는 작가 개인의 원칙은 충분히 지켜진 듯 보인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으로 조선왕조 이전과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기록도 그의 손끝에서 전달되기를 희망해 본다.
그림을 그려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인지 충분히 알고 있는 나로선, 13년간 작가의 엄청난 노력, 그것도 오로지 작가 혼자서 감내해온 산물에 그저 경외심을 가질뿐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2, 2013년 10월, 류강수, 포캣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