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그로노블 대학에서 사회심리학을 가르치는 로랑 베그(Laurent Begue)의 2011년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원제는 '선과 악의 심리학'(Psychologie du bien et du mal)인데, 한국어 제목은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이다. 부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제목과 함께 표지에 있는 "철학이 묻고 심리학이 답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도 매우 인상적이다. 한국 사회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도덕주의(moralism)의 폐해를 고민해왔던 사람들의 직감이 투영된 것이다. 사실 프랑스어의 책제목은 일반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너무 심심하기에, 오히려 한국어 제목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표지에 등장한 '철학적 질문의 심리학적 대답'이라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있을듯 보인다. 만약 이것이 저자의 주장이라면, 그리고 이러한 주장이 단정적이라면, 철학을 옹호하는 입장과 심리학을 확신하는 입장 사이의 한바탕 접전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물론 "도적 지성이 어떻게 사회적 교류를 통하여 계발되고 발현되는가를 보려는 것"이라는 저자의 목적은 절대적 진리나 도덕적 편견을 강요하려는 입장에 대해 불편하게 느꼈던 모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9쪽). 집단지성이 성립되려면 '다양성'이 보장되어야하고 '이견이 충분히 숙고되어야'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일 때, 이런 구성주의적 태도는 큰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악을 좋고 나쁨과 동일시하고 타인의 행동이 사회적 기대에 얼마나 잘 부응하는지만 볼 때가 많다"는 행태경제학적 주장은 철학자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10쪽). '절대적 가치'에 대한 회의를 넘어 상대주의적 '도덕'의 사회심리학적 정당화가 과연 보편적 '도덕' 또는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들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것이다.
2.
책의 내용도 재미있다. 나 스스로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느낌도 들고, 실제로 사회생활 속에서 내 스스로가 '도덕적 인간(homo moralis)'으로 자위하면서 타인을 일반적 상식이라는 잣대로 얼마나 평가했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일화들이 수두룩하다. 몇 가지만 소개해 보자.
첫째, '자아가 기억을 조작한다.'는 일반적 태도 속에 내재된 '자기중심적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은 누구나 '특별한 존재'이고 싶어한다는 오랜 철학적 명제가 스쳐지나가고, "나와 관련된 정보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얼마든지 건망증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에 실소가 터져나온다(35쪽). 사실 '보고싶은 것만 본다.'는 자조섞인 푸념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로 '자기가 고결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무자비한 폭력에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켜온 것을 보아왔다. 그러기에 집단적 잘못에 무뎌진 도덕적 고결함이 곧 우리의 자아가 통제하는 도덕이라는 장치가 갖고 있는 맹점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어렵지않게 동의할 수 있었다.
둘째, '타인의 시선이 발휘하는 도덕적 제재'에 대한 논의다. 실제로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처럼, 아니면 몇 해전에 개봉되었던 '투명인간'이라는 영화처럼,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드러나는 방종은 매우 오래된 우리의 인간행동에 대한 상식이다. 그 결론이 CCTV가 아니라 가로등인 점이 다행스럽지만, 동물적 인간에게 규범이라는 것은 상호관계와 시선이 제공하는 규제 또는 규율에 불과한듯 보일 때는 조금 낯이 뜨거워진다. 이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우리는 침팬지나 코끼리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셋째, '사회적 평판'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아픈 부분들 중의 하나다. 저자에게는 도덕이라는 것 자체가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서로의 시선으로부터 독립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도덕은 곧 '구별'을 가져온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리기위해 '표식'(stigma)을 하듯, 거부당한 사람과 수용된 사람이 어떤 공동체이든 등장한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나 사회에서 고질적으로 배척당하는 느낌"은 곧 폭력에 노출되거나 폭력적인 인간을 만든다(94쪽). 저자의 설명이 없이도, 이런 병리적 현상은 오랜 철학적 숙제였다. 너스바움(Martha Nussbaum)이 쓴 <Hiding from Humanity(2004)>에서 보듯, 인간은 '수치심'을 이용해서 사회적 규제를 강화하거나 집단의 의사를 강요해왔다. 그리고 이 수치심은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동시에 인간으로서 존엄을 파괴하는 결과를 갖고온다.
3.
좀 더 쟁점이 될 문제들은 해결책에 있다. 우선 어떤 행동에 대한 예측되는 결과를 통해 행위를 통제하려는 '조작적 조건화'라는 심리학적 제안과 관련된 문제를 짚어보자. 저자는 '물질적 보상'과 같은 것으로는 좋은 행위를 유발할 수 없다고 본다. 실험적 결과에 대한 의구심은 떠나지 않지만, 보상이 주어진 행동에 대해 행위자는 자신의 '내재적 동기'에 의해 수행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118쪽). 아울러 '힘의 행사'나 '애정의 철회'와 같은 것 또한 행동의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했다(126쪽). 그래서 얻은 결론은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라는 호주의 브레이스웨이트(John Braithwaite)와 같은 학자들의 '사회적 편입'을 통한 행동규제다.
일차적으로 '배제'와 '처벌'만이 강조되는 교정적 규제가 옳지않다는 주장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얼마전 아포리아 북리뷰에 소개된 하워드 제어의 <회복적 정의란 무엇인가?>(KAP 2011)에서처럼, 재범율을 낮추고 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을 높이기위해 '엄중한 처벌'에만 초점을 맞춘 형법이해가 얼마나 조야한지는 더 많은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특히 '청소년'의 교정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호 이해하고 또 화해할 수 있도록해야한다는 주장은 '처벌이 범죄를 줄인다.'거나 '죄는 반드시 처벌해야한다.'는 식의 논리에 빠져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그것이 '도덕규칙'("경험 그 자체, 특히 자기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를 관찰함으로써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것" 171쪽)일 경우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관계를 절연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확충하는 것, 바로 이것이 진정한 회복이라는 주장에 누가 반대할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회복적 정의도 집단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 또는 반영될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이 말하는 '평판'은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체면'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전자는 이미 배제의 폭력적 효과가 개개인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걸러진 곳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판단들이 응축된 결과일 수 있다. 따라서 충분히 숙의할 수 있는 토양, 개인을 지켜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적 규범이 있다면 충분히 '도덕' 또는 '윤리'로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조금 다르다. 공동체 또는 가족에 의해 부여된 기대, 또는 공동체가 부여한 도덕적 지침과 이미 결부된 행위양식이 개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즉 이런 경우에 '회복적 정의'를 위한 구체적인 집단행동의 양식은 폭력적 강요나 '다시 한번 왕따'로 귀결될 수 있다.
제 3의 기관 또는 회복적 정의의 '원칙'이 개개인의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도록 명시적으로 주어지지않는다면, 회복적 정의는 또다른 배제를 가져올 수 있다. '나의 도덕성 포장하기'와 '도덕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유혹'이 어떻게 서양 사회만의 특징이겠는가. 아울러 타인과의 공존을 인정하며 동일한 목적을 향해 경쟁하는 이기심에 대한 관대한 태도에 요구가 어떻게 행태경제학이나 사회심리학의 전유물이겠는가(233-234쪽).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한 때부터, 인류는 상호관계를 통해 드러난 행위규범이 좋음과 나쁨을 넘나들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타자를 향한 나름의 탐색'에 모든 것을 던지지 말고, 이러한 탐색들이 가져온 결과 중에서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숙의를 거쳐 제도로 만드는 것이 중요할 듯 싶다.
4.
책을 덮고보니 또 다른 책이 눈에 들어온다. 스티브 아얀의 <심리학에 속지마라>(부키 2014)는 책이다. 같은 출판사에서 하나는 '심리학'으로 철학적 질문에 답하려는 책을 내고, 다른 하나는 사회심리학을 비롯해서 모든 심리학에 내재된 '단정적 해석'에 반기를 든 책을 출간했다. 후자에 따르면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불안감에 기대여 그럴듯한 이야기로 모두를 환자로 만드는 과정, 그리고 미디어가 이러한 과정을 흥미거리에서 진실로 조작하고있다고 비판한다. 마인드 컨트롤의 자기개발부터 사회심리학적 설명까지 모두 어쩌면 하나의 이론 또는 해석일 뿐이라는 것이다. 참 재미있는 논박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철학자들은 어떤 형이상학적 원칙을 비판할 때, 어떤 이론 또는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가급적이면 피하려고한다. 이유는 여러가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이 상대에게 상처를 적게주면서도 논리의 모순을 충분히 밝힐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근 이러한 비판적 태도는 '설명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거나 '납득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후퇴했다. 지식사회에서 상대주의적 경향이 강화되고, 다양성에 기초한 철학적 회의가 규범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철학적 질문'에서 출발해서 '사회심리학적 결과'로 대답하는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다.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관련된 철학적 논의를 통해 일관성을 확보하고, 사회심리학적 실험을 통해 독자를 납득시키려는 것이다. 물론 심리학적 실험의 조작성을 의심하거나, 사회심리학적 단정에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최초부터 거부감을 주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이라는 허울 속에 신음하기보다 인간의 본성을 긍정하고 나름의 방식을 찾는 것에 주목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3, 2014년 3월, Scient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