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에 출간된 고종석 선생의 {감염된 언어}라는 책의 한 꼭지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이 있었다. 복거일의 영어 공용화론을 옹호한 글로 알려져 논란을 빚은 적도 있었으나, 정작 그 글의 주지는 영어공용화론이 아니라 “번역”이었다. 외국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번역은 필연적인 일이며, 그 때문에 일어나는 자국 언어의 뒤틀림을 인정하고 오히려 장려하자는 것이었다. 영어 공용화론 같은 뜨거운 정치적 담론을 옹호하는 글 치고는 지나치게 인문학적인 향취가 넘치는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내가 그 글을 다시금 떠올린 이유는 글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제목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라니? 무슨 뚱딴지 같은 이야기인가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글을 읽지 않은 이들을 위해 덧붙이지만, 여기서 “우리”란 20세기 주변을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들을 가리킨다. 왜 우리가 그리스인일까? 고종석 선생은 우리가 절대적인 영향을 받고 사는 서양문화의 뿌리가 고대 그리스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말을 썼던 것이지만, 약간의 수사학적 멋부림도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서양문화의 뿌리가 고대 그리스 또는 희랍(고대 그리스와 희랍은 거의 같은 뜻의 말이고, 나도 희랍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지만 여기서는 고종석 선생의 글 제목 때문에 부득이 혼용하게 됨)에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이야기 같지만, 한국인들이 이 말을 어느 정도 실감하고 있는지는 분명치가 않다. 나는 이미 강대진 선생의 {잔혹한 책읽기} 서평에서 그리스어(희랍어)의 중요성을 상세히 이야기했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희랍어는 낯설고 이상한 언어일 것이다. (하물며 평생을 공부하는 영어조차 그러한데, 한번도 공부할 기회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 희랍어가 오죽하랴!)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라고 선언한 고종석 선생도 희랍어를 본격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외람된 이야기지만 선생이 언급한 “그리스”는 서양문화를 대표하는 일종의 대유(代喩)였던 것 같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으로서 희랍어가 서양인들에게 중요한 언어라는 정도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그것이 언제 어떻게 쓰였으며, 어떤 사전이 유통되고 있으며, 영미권이나 유럽에서 희랍어가 어떻게 연구, 교육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읽게 된 “모든 필로소피(철학)는 필롤로기(문헌학)에서 시작한다”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호통(<일본근대정치사상사 연구>의 서문 참조)은 나의 게으른 정신에게 회초리가 되었고, 나는 꽤 늦은 나이에, 서양과 서양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서양의 고전어인 희랍어와 라틴어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고종석 선생도 이야기하셨듯, 우리(서양문화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는 현대 한국인)는 모두 그리스인(서양식 문화와 사유에 영향을 받는 이들의 대유)이다. 그런데 정작 현대 한국인이 대부분의 소중한 시간을 바쳐 공부하는 언어는, 희랍어가 아니라 영어다. 그러면 영어와 희랍어는 무슨 관계인가? 여기서부터 한국 인문 학술계의 일천한 수준이 드러난다. 한국인들 가운데 영어와 희랍어의 관련성을 설명할 수 있는 학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한번 외람된 이야기를 하자면, 영어영문학과의 교수들조차 이 문제를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죄송한 말씀이다. 혹시 누군가가 영문학계에서 이런 문제를 단독으로 다룬 저서가 있는지 알려 주신다면 나의 과문함을 탓하고 이 말을 철회하겠다). 내가 지난 서평에서 강조했듯이, 내가 알기로 현재까지 한국어로 된 최고의 희랍어학 안내서(희랍어 문법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희랍어 공부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책)는 강대진 선생의 {잔혹한 책읽기} 뿐이다.

   

나는 지난 서평을 쓰고 난 뒤, 강대진 선생을 개인적으로 한 번 뵐 일이 있었다. 나보다 연배도 10년 이상 높으신 분이고, 평생을 학문(공부라고 해도 좋다)에 바치고 있음을 금세 알아챌 수 있는 이였다. 내 생각에 강대진 선생이라면 희랍어와 영어의 관련성을 어느 정도 권위있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은 그럼 그 공부를 어디서 했는가? 외국 유학을 한 것도 아니었다. 정답은 간단하다. 특정 대학을 언급해 안됐으나, 서울대 철학과와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이다. 선생의 스승은 한국 서양고대철학 최고의 권위자이신 이태수, 김남두 선생님이시다. 두분 모두 서울대 철학과에서 평생을 봉직하셨고, 현재 한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희랍어, 라틴어 연구자의 상당수가 이 두 분의 제자이다.

국문과 출신인 내가 왜 이렇게 “철학과 만세”를 늘어놓는 걸까? 나 또한 언어 전공자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세계의 모든 언어를 놓고 가장 치열하고 깊이 있게 탐구하는 이들을 길러내는 곳이, 최소한 한국에서는, 철학과이기 때문이다. 논의를 하면서 서울대 철학과를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나 자신이 그나마 그곳 사정을 제일 잘 알기 때문이고(그렇다고 아주 잘 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나는 구경꾼에 불과하다), 우수한 철학도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 다른 의도는 없다. 혹시라도 마음 불편하실 분들이 있다면 양해를 부탁드린다. 

{잔혹한 책읽기}를 읽어보신 분은 알겠지만, 그 책은 세계의 여러 나라 언어로 된(영어, 독어, 불어) 책의 한국어 번역이 제대로 되었나를 따지는 책이므로, 해당 언어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쓸 수가 없는 책이다. 게다가 원서를 쓴 영미인, 독일인, 프랑스인들은 서양의 고전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므로 당연히 희랍어나 라틴어 구절들을 인용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 자국어(영어, 독어, 불어)로 번역하지 않은 채 원문을 그대로 싣기도 한다(우리나라 사람이 글을 쓰다가 한문 구절을 아무 설명 없이 끼워넣는 경우에 상응한다고 보면 되겠다). 따라서 그 번역을 따지기 위해서는 서양 각국의 현행 언어뿐 아니라 고전어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한국의 인문대학(혹은 문과대학)은 서양어를 가르치는 데서 중요한 결함이 있다. 일단 영문과, 독문과, 불문과 등을 갈라 현대의 국민국가를 단위로 가르친다. 이거야 실용적이고 행정적인 제도이니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이로 인한 부작용은 너무나 심각하다. 한 과에 소속된 사람은, 그 학과를 일종의 가족 공동체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 다른 외국어에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면 관심을 두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비교가 불쾌하긴 하나, 서양은 이렇지 않다. 유럽인들은 같은 대륙에서 생활했으므로 상호간에 인적, 물적 교류가 매우 빈번했고, 국민국가 성립 이전에는 더욱 그러했다. 중세 내내 서유럽의 학술언어는 라틴어였고, 근대 이후에는 새로이 발견된 희랍어가 추가되었다. 영어, 독어, 불어가 현재의 모습으로 성립하고 표준화된 것은 기껏해야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라이프니츠(1646~1716) 같은 학자는 라이프치히 출신(현 독일)임에도 주요 저술을 라틴어와 불어로 남겼으며, 독일인(정확히 말하면 프로이센인) 칸트(1724~1804)는 영어로 씌어진 스코틀랜드인 데이비드 흄(1711~1776)의 경험론 저술을 곧바로 읽고 자극받아 {순수이성비판}으로 반격했던 것이다.

당연한 귀결로, 오늘날의 라이프니츠 연구자는 최소한 불어, 독일어, 라틴어, 희랍어에 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칸트 연구자라면 영어, 독일어, 라틴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도 아니고, 그냥 “기본”일 뿐이다. 한국인들은 어떤 사람이 외국어(대부분 영어)를 섞어 쓰면 재수없다고 여기거나 뒤에서 욕하기 일쑤다. 또 한편으로 “몇개 국어를 한다”고 하면 “와~” 하면서 무슨 외계인 쳐다보듯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거니와, 철학도에게 외국어는 자랑거리도 아니고, 젠체하는 수단도 아니며, 오직 “철학을 연구한다”는 자기 정체성을 정직하게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다. 자기 정체성을 간직한다는 것은 인간다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아닌가.

이제 독자들은 “모든 필로소피(철학)는 필롤로기(문헌학)에서 시작한다”는 도올 선생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칸트의 철학을 논하려면 칸트의 문장을 읽을 수 있는 독일어 실력부터 기르란 말이겠다. 멋있는 말로 “문헌학(필롤로기)”이라고 해서 그렇지, 사실 문헌학에 해당하는 영어 “필롤로지(philology)”는, 단순히 “말(logos)을 사랑하는 것(philein)”을 뜻한다. “세계의 여러 언어와 문자를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자세”가 필롤로기이고 문헌학이다. 결코 다른 뜻이 없다. “철학”을 뜻하는 영어 “필로소피(philosophy)”는 “지혜(sophia)를 사랑하는 것(philein)”을 뜻한다. 그리고 어원 설명을 위해 곁에 적어둔 로고스(logos, λόγος), 필레인(philein, φιλειν), 소피아(sophia, σοφια)는 모두 희랍어이다. 내가 앞서 살짝 이야기했던 “영어와 희랍어의 관계”란 이런 것을 가리킨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혜롭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많지 않으며, 지혜롭게 되는 길 또한 간단하지 않다. 성과가 크지 않고 답답해 보이더라도, 그나마 가장 안전한 길은 옛 성현들의 말씀을 듣고 그들이 남긴 글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성현들은 얄궂게도 외국인인 경우가 많다(나는 지금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과 같이 급격한 외래문화의 충격을 받은 경우 이 말은 결코 농담일 수가 없다). 그러니 지혜롭게 되기 위해 그들이 쓰던 언어(외국어)를 익히는 것은 선택이 아닌 절체절명의 과제가 된다.

지금까지 한 말의 귀결은 이것이다. 우리 한국의 인문학계에서, 가장 언어에 민감하고 가장 언어를 많이 공부하는 집단은, 어문계열의 학도들이 아니라, 철학도들이라는 것이다. 영문과, 불문과, 독문과 등은 자기 언어만 어느 정도 알면(그것 하나도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은 것이지만), 그럭저럭 학자로서 최소한의 임무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철학도들은, 위에서 말한 사정 때문에, 결코 어느 한 언어를 공부하는 것으로 완성될 수가 없다. 서양의 철학자들조차 그러할진대, 서양어를 (생물학적 언어 발달이 사실상 끝난) 10대 후반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접하게 되는 한국인은, 서양철학을 연구할 때 훨씬 더 큰 난관에 봉착하게 되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정작 내가 오늘 소개하려는 책은 철학책도 아니고, 외국어 공부를 하자는 책도 아니다(물론 간접적으로는 관련된다). 프랑스의 무용교육 전공 교수 클로드 르노(1932~)가 쓴 {플라톤은 아팠다}(푸른숲, 2001)라는 소설책이다. 불어의 발음을 과장해서 원문을 읽어 보자면 “쁠라똥 에때 말라드(Platon etait malade)” 정도가 될 것이다. 스승 소크라테스를 잃고 방황하던 젊은 날의 플라톤을 묘사한 소설인데(한국 소설 <젊은날의 초상> 같은 것을 떠올려도 좋겠다), 불문학 교수 고재정 선생의 번역으로 한국어로 옮겨졌다. 제목 “플라톤은 아팠다”는 작가의 창작이 아니라,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맞는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기록한, 플라톤의 가장 유명한 대화편 <파이돈>의 한 구절에서 따 온 것이다. 차차 설명하겠지만, 플라톤의 스승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는 방법으로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정작 그의 열렬한 정신적 추종자였던 제자 플라톤은 당일날 몸이 아파서 출석하지 못한다(박종현 옮김,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서광사, 2003, 271면 참조).

즉 “플라톤은 아팠다”는 작품의 제목은, 플라톤 본인이 스승의 임종(臨終)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몸이 아파서 그랬다고 변명하는, 재미있다면 재미있는 구절이다. 작가 르노는 자기의 상상력을 덧붙여, 플라톤이 아팠던 이유를 소설로 만든다. 스승의 처형일을 하루 앞두고, 번뇌를 이기지 못해 술을 잔뜩 마신 플라톤이 이질에 걸려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품의 원어에서 “에때(etait)”는 “~이다”를 뜻하는 동사 “에트흐(Etre)”의 반과거(단순과거와 달리 생생한 느낌을 주는 과거) 형태로 보이는데, 사실 “아팠다”는 말로 그 느낌이 완전히 전달되지는 않는 게 사실이다. 부연을 하자면 “그때 참 아팠었다”, “아파서 딴 일을 못 할 정도였다”는 것을 함축한다.

잠시 우리 한국의 독서 상황을 떠올려 보면, 이 책은 현재 품절 상태이고, 중고서점을 제외한 일반 서점에서 구할 순 없다. 내가 이 서평에서 밝히고 싶은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책이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철학에 대한 훌륭한 입문서라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이렇게 좋은 작품이 우리 독서시장에서는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 보고 싶은 것이다. 고종석 선생의 말마따나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인데도, 이 책은 품절되고 말았다. 왜일까? 우리 한국인들은 어쩌면 그리스인이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닐까? 서양문화의 뿌리인 그리스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거의 의식하면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페이시스트라토스, 펠로폰네소스, 아리스토텔레스, 데미우르고스, 에피다우로스 등 고대 희랍의 사람이름이나 땅이름, 낱말들은 평범한 한국인들에게 뜻풀이는 고사하고 읽기조차 쉽지 않다. 지리적으로 보나, 언어의 낯섦이라는 면에서 보나, 한국인과 그리스인의 관계는 간접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예컨대 한국 민주주의의 기원은 그리스에서 찾을 수밖에 없지만,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우리가 직접 배워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저 로마의 공화정으로 이어졌고, 프랑스 혁명을 통해 낭만적 이념으로 변형된 뒤, 개척과 자립을 강조하는 미국식 민주주의 이념과 혼합되면서 근대 초기 이후에야 한국에 이식되었다. 이것을 가져온 이들은 아펜젤러니 언더우드니 하는 낯선 이름을 지닌 푸른 눈의 선교사들이었다. 흔히 한국이 서양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수박 겉핥기 식이라고 비판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플라톤은 아팠다}가 출간된) 프랑스는 한국과 사정이 다르다. 예컨대 “프랑스인은 모두 그리스인”이라는 명제가 있다면, 이는 비유가 아니라 사실로 주장될 수 있다. 프랑스를 과도하게 높이 평가해서가 아니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증거가 있다. 루브르 최대의 보물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일 것이다. 밀로는 그리스 앞바다인 지중해 동부 에게 해의 섬 가운데 하나로, 희랍어 식으로 읽으면 “멜로스”이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발달한 희랍어 문명권에 속하는 섬이었다. {플라톤은 아팠다}를 보면, 기원전 399년에 스승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한 뒤 정신적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청년 플라톤(당시 28세)을 돌보는 남자 노예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 노예의 이름은 멜레지아스로, 멜로스 출신이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어찌 보면 근대 프랑스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멜로스 섬의 조각상을, 마치 제 것인 양 버젓이 전시해 두는 프랑스인들의 정체성 감각이다. 지중해를 드나들던 프랑스 해군이 이 문화재를 사실상 약탈한 과정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프랑스인들의 문화재 약탈은 한국인들에게도 외규장각 도서 문제로 인해 알려진 바가 아니었던가) 프랑스인들이 “멜로스의 비너스상”을 자기들의 제작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동시에 그것을 “남의 것”이나 “낯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임도 분명하다. 비너스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푸스 12신의 하나인 ‘아프로디테’의 라틴명 ‘베누스’를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며, 그리스 신화는 15세기 르네상스 이후 모든 서유럽인들의 정신적 뿌리로 간주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들을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연관짓는 서유럽인들의 “자기규정”을 허구적인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서유럽인들이 희랍어를 공부하고 고대 그리스 문화를 자기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이후였으며(물론 이탈리아인들은 단테와 페트라르카가 살았던 13세기부터 이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서유럽 전반을 가리킴), 그 이전 즉 중세의 서유럽인들은 기독교에 찌들려 고대 그리스의 신화와 문학을 이단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외자인 우리 한국인이 중세의 망각을 빌미삼아 프랑스인들에게 “고대 그리스가 우리에게 낯선 것인 만큼, 사실은 너희들에게도 낯선 것이었다”고 반발한다면, 그들은 아마 이렇게 반격해 올 것이다. 즉, {플라톤은 아팠다}와 같은 소설책을 내밀며, “너희들은 이런 거 없잖아?”라고.

번역자인 고재정 선생은 {플라톤은 아팠다}를 읽기 위해서 플라톤의 철학을 알 필요는 없다고 역자 해설에서 언급하셨지만, 사실 이것은 독자들을 격려하는 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사전지식 없이 이 책을 읽을 경우, 거기에 나오는 낯선 지명과 인명들 때문에 일단 실감나는 읽기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스승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플라톤이 에우리피데스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살라미스의 동굴에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무는 장면이 있다. 에우리피데스가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상연된 고대 그리스의 앗티케(아테나이와 그 주변 지역을 가리킴. 현대 한국의 수도권 개념과 비슷) 비극에 합리성을 부여한 작가이고, 소크라테스와 정신적으로 유사한 성향을 지녔다는 사실을 모르고서 읽는다면? 살라미스가 아테나이 앞바다에서 멀지 않은 섬이며, 그곳에서 테미스토클레스라는 아테나이 해군 제독이 페르시아 함대를 궤멸시켰다는 것을 모르고서 읽는다면? 작품의 재미는 반감될 것이고, 재미는커녕 읽어 나가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이 현재 간행중단된 이유도 이러한 독자들의 “예상되는 반응”과 관계가 없다고 하기 어려울 터이다.

외국도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데 필요한 덕목은 단순한 외국어 어휘력과 한국어 문장력뿐이 아니다. 외국도서가 다루는 분야에 대한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갖춰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역주가 풍부하지 않다는 것은 큰 아쉬움이다. 나는 이 시기의 사건들을 공부해 가면서 읽은 덕분에 다행히 실감나는 읽기를 할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독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책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찬 서평을 읽고 책을 집어들었다가 포기하는 상황”을 만드는 서평은 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차라리, 이 무궁무진한 지적 보화를 간직하고 있는 이 책을 읽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지식과 포인트들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책을 쓴 르노 교수는 플라톤의 철학과 삶에 깊은 조예를 갖춘 인물인 것 같고, 무용교육을 전공한 교수답게 예술 전반에 실제적인 감각을 갖추었다. 그러나 사실 플라톤은 예술에 적대적이었다고 하는 통념이 있다. 이른바 “시인 추방론”이다. 오히려 우리는 플라톤 하면 대체로 “이데아 이론”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이데아란 간단히 말해, 가변적이고 덧없는 감각적인 현실 세계와 달리 “언제나 한결같은 상태로 있는 사물의 본모습”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처럼, 인간은 대체로 감각적인 세계가 가져다 주는 고통(혹은 덧없음)보다는, 그 쾌락의 맛에 집착하는 까닭에, 감각적이고 현상적인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플라톤은 물질이 풍족한 귀족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 소크라테스의 억울한 죽음 이후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세계에 대해 환멸에 빠지게 되었고, 정신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이데아)을 추구하는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플라톤(기원전 427~347)의 스승이었으나, 두 사람은 40세가 넘는 나이 차이에서 짐작되듯 그렇게 가까운 사제 관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플라톤이 항상 엮여서 언급되는 이유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단 한 권의 책도 남기지 않은 반면, 플라톤은 평생 동안 수십 권의 책을 썼으며, 그 책들의 거의 전부가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철학적 대화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이한 관계가 성립하게 된 배경은,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를 검토하면 충분히 밝혀질 수 있고, 실제로 서양의 고전문헌학(필롤로기) 연구자들은 이 전반적 사정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혀놓았다.

소크라테스가 책을 쓰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생각을 대화로 전개함으로써 진실이 대화 당사자들 사이에서 스스로 드러나게 되기를 원했다. 그렇게 드러난 진실은 소크라테스의 것도, 그의 대화 상대방의 것도 아닌, “공유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고 해서 소크라테스가 게으르거나 불철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웬만한 집중력 있는 글쓰기에 못지않게 긴장된 대화를 추구했다. 그는 상대방(특히 제자들)에게 “나를 믿지 말고 로고스(이성)을 믿으라”고 말하며, 논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것보다 “알지 못하면서도 안다고 착각해 탐구를 중단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가르친다. 이러한 다부지지만 집요한 태도는 많은 아테나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404년 종전. 아테나이 패전)과 잇다른 내전(민주정치를 전복한 과두파[oligarchy]의 집권과, 곧이은 민주파의 반격으로 인해 404년 이후 몇 년간 아테나이는 상당한 피를 흘렸음)으로 독오른 아테나이 시민들은, 과두파의 주요 인물들과 친밀했던 소크라테스를 기소해 처형했다. 

소크라테스가 살았던 기원전 5세기의 아테나이는 최고의 전성기에서 시작하여 최후의 몰락기로 끝난다. 기원전 492년부터 479년에 이르기까지 동방의 대제국인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낸 아테나이는 더 이상 작은 폴리스(흔히 도시국가로 번역함)가 아니었다. 아테나이는 막강한 해군력과 인류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제도를 꽃피웠으며, 해군력에 뒷받침된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아테나이의 자존심은 자만심으로 변질됐고, 강소국을 넘어서 제국(帝國)을 꿈꾸었다. 아테나이의 군함과 상선은 오늘날의 그리스 영토에 해당하는 발칸반도 북동 해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희랍 문화권으로 여겨졌던 오늘날의 터키 서부해안(이오니아)은 물론이고, 흑해 북부, 이탈리아 남부에까지 식민지를 세웠다. 그들은 그곳에서 금은 등을 채굴했고, 그곳 사람들에게 세금 명목으로 식량을 뺏았으며, 그곳 땅에 자국민을 이주시켰다.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행태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면만 있었던 건 아니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나이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놀라울 정도로 문화가 발달한 시공간이었다. 도대체 왜 이 시기에 이곳에서 이처럼 찬란한 문화가 활짝 만개하고, 100여 년의 번성을 겪은 뒤 벚꽃 시들듯이 쇠락해 갔는지에 대해, 일찍부터 세계의 쟁쟁한 고전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이디스 해밀턴의 <그리스인의 길The Greek Way>이나 바우라의 <그리스적 경험The Greek Experiences> 등을 참조하기 바란다. 전적으로 신뢰하긴 어렵지만, 다행히 모두 번역본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시기는 단순히 정치적으로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라, 희랍어로 된 문학과 역사가 최고로 만발한 시기이기도 했다. 

희랍어는 인류 최초로 자음과 모음을 구별한 문자를 지닌 언어다. 희랍인들이 페니키아 알파벳을 개량하여 희랍어의 알파벳(알파벳이란 25개 내외의 자모를 나타내는 표음기호들의 집합을 가리킨다. 이 정의에 따르면 한글도 알파벳의 일종이다. “알파벳”이라는 이름은 알파, 베타, 감마, 델타... 로 이어지는 희랍문자의 첫 두 글자를 따서 붙인 것임)을 만든 것을 대략 기원전 8세기 전후라고 보는데, 이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가 씌어졌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언어가 위대해지는 것은 그것을 가지고 많은 훌륭한 말과 글이 남아 있는 경우인데, 호메로스 이후 참으로 희랍어는 영광스러운 발전을 거듭해 왔다. 

대표적인 것만 들더라도 헤시오도스의 서사시(기원전 7세기), 아르킬로코스와 핀다로스의 서정시(기원전 7~6세기),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앗티케 비극(기원전 5세기) 등이 연이어 나왔으며, 오늘날 전권이 남아 있는 세계 최초의 역사서인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최초의 사회과학적 역사서술이라 할 만한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도 기원전 5세기에 완결되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우리가 희랍문화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플라톤(기원전 4세기 초반)과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4세기 후반)의 철학도, 희랍 문화의 가장 마지막에 핀 꽃이자 문화의 결산라고 볼 수 있겠다.

지금까지의 간단한 언급에서도 짐작되겠지만, 희랍어는 참으로 경탄스럽고 영광스런 언어이다. 독일, 프랑스, 영국 등 근대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완벽한 희랍어 사전을 만들기 위해 분투해 왔다. 희랍어 사전을 만든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호메로스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어휘까지만 수록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기원전 8세기부터 4세기까지의 어휘 변화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창기의 희랍 문화권은 오늘날의 그리스 본토인 아테나이 일대보다는 터키 서해안인 이오니아 지방이 중심지였던 까닭에, 이오니아 방언까지 표기해야 한다. 오늘날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는 리델 & 스콧의 <희랍어-영어 어휘사전Greek-English Lexicon>은 이러한 표기의 차이를 모두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어휘 풀이보다 변화형을 설명하는 부분의 분량이 더 많은 어휘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희랍 세계 전반, 특히 아테나이 일대의 정치적 중요성은 기원전 5세기 말에 철저하게 몰락한다(404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 5세기 중엽까지 해군력을 증강시키며 팽창정책으로 일관하던 아테나이는, 그리스 남서부의 커다란 반도인 펠로폰네소스의 내륙국가 스파르타 및 그 동맹국들과 필연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가혹한 교육의 대명사로 오늘날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 있는 바, 실제로 가혹한 군사교육과 검소하고 멋없는 생활태도, 전쟁준비를 위한 삶으로 일관하는 철저함 덕분에 당대부터 주목받던 도시국가였다. 스파르타인들은 육전에 강했고, 두려움을 몰랐다. 헐리우드 영화 중에 <300>이라는 것이 있는데, 페르시아의 수십만 대군을 스파르타의 최정예 무장병 300명이 테르모퓔라이라는 좁은 고갯길에서 막아내 조국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다는 내용으로, 실제로 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80년) 때에 일어난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스파르타인들은, 지상전 능력은 자기들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아테나이인들이 해군력만 믿고 지중해를 휘젓고 다니며 제일인자 행세를 하는 것을 아니꼽게 여겼다. 아테나이인들은 지중해 주변의 여러 도시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고, 두 세력은 막상막하였다. 아테나이 연합과 스파르타 연합의 이러한 세력다툼을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이라 일컫는바, 이 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아테나이는 스파르타를 제외하면 무력으로 최고의 지위에 있었고, 경제-문화적으로는 아마도 당대의 전 세계에서 상대할 세력이 없었다. 앞에서 말한 희랍 문화의 융성은, 그러한 세력의 표현이자 결과였다.

소설 이야기는 언제 하나 싶을 분들이 혹시라도 있겠는데, 이제 소설의 한 장면을 이야기하려고 하니,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16년, 앞서 말했던 밀로의 비너스상이 출토된 멜로스 섬에서 아테나이 군의 “양민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아테나이-스파르타의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많은 지중해 연안의 소규모 도시(국가)들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대부분 무력으로 위협하는 세력에게 굴복하여, 한쪽을 편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졌다. 이러던 와중에서 멜로스 섬은 중립을 지켰고, 아테나이 해군이 위협했는데도 굽히지 않았다. 분노한 아테나이는 멜로스 섬의 모든 성인남자들을 죽였고, 여자는 강간한 뒤 노예로 삼았으며,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플라톤은 아팠다}에서 플라톤의 시중을 드는 노예소년 멜레지아스가 멜로스 섬 출신임은 앞에서도 잠깐 말했는데, 이 멜레아지스는 방금 언급한 멜로스 학살사건 당시 어머니의 태중에 있었다. 그때 아이를 임신한 모친은 아테나이 군에게 강간을 당한 뒤 끌려왔으며, 다행히 태어난 멜레아지스는 역시 노예가 된 모친의 생사도 알지 못한 채 여러 주인을 떠돌다가 (스승의 죽음으로 상처입은) 젊은 플라톤을 시중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소설에서 중점은 스승의 죽음이라는 충격적 사건으로부터 회복하는 플라톤의 모습에 있지만, 플라톤이 아픔을 딛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멜레아지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의 패전과 몰락(404년), 그리고 곧이은 민주파와 과두파의 치열한 내전 등, 최악의 역사적 장면 직후에 거의 신경질적인 시민들의 배심 투표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고 죽었다. 젊은 플라톤으로서는 아크로폴리스가 꼴보기 싫을 정도로 아테나이가 혐오스러웠다. 아테나이는 더이상 조국이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버린 도시(152면)”였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앞서 말했던, 호메로스 이후부터 에우리피데스로까지 이어지던 찬란한 문화의 중심지 아테나이에 대한 자부심까지 버리는 것을 뜻했다. 찬란한 언어를,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면 뭐하는가! 조국은 패전했고, 스승은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플라톤은, 자기 노예인 멜레아지스의 고통에 주목할 수 있게 된다. 플라톤은 아테나이로 인해 스승만을 잃었지만, 멜레아지스는 아테나이로 인해 부모와 자유, 목숨을 비롯한 인간 존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잃었기 때문이다. 좀 길지만 소설의 한 부분을 인용하고 싶다. 플라톤은 멜레아지스에게 멜로스 학살에 대해 이야기해 주자, 멜레아지스가 대꾸하는 내용과 그에 대한 플라톤의 반응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스승의 죽음으로 인해 받은 충격에 더하여, 조국 아테나이가 죄없는 이들에게 저지른 만행의 결과를 눈앞에서 확인하고, 조국의 위대함 자체, 아니, 정치적 위대함이라는 것의 뒷면을 성찰하는 눈을 얻게 된다. 때는 기원전 399년. 아테나이가 스파르타에게 패전하여 지중해의 모든 패권을 잃은 지 5년째이고, 플라톤의 나이는 스물여덟이며, 플라톤 앞에서 절규하는 노예 소년은 열일곱 살이 되었다. 그리스의 찬란함은 이미 사라졌다. 패전 때문만이 아니었다. 과두파와 민주파의 내전은 패전 이후에 그나마 남아 있던 아테나이의 모든 찬란한 것들을 지워버렸다. 404년 아테나이를 꺾은 스파르타는, 아테나이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었으나, (불행 중 다행이라 할지)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권을 아테나이에 세우고 해군력을 몰수하는 정도로 만족했다. 

패배한 아테나이는 분열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개전이 민주주의 제도(투표)로 결정되었기 때문일까. 민주파들은 피로써 숙청되었고, 플라톤의 외당숙인 크리티아스와 외삼촌인 카르미데스가 과두파의 지배자가 되어 아테나이를 쑥밭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때까지도 소크라테스는 살아 있었고, 100% 순정 아테나이 시민이었던 그는 조국에 머물면서 이 모든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게다가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한때 소크라테스와 함께 친밀하게 교류했던 이들이기도 했다(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하나인 <카르미데스>에서, 내전이 일어나기 훨씬 전의 세 사람이 의미심장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있다. 참고로 <카르미데스>는 2014년 6월 현재 서울대 철학과와 서양고전학 협동과정에서 강의하시는 유혁 선생님께서 번역중이며, 곧 정암학당에서 출간될 예정임). 크리티아스는 소크라테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소크라테스는 끝까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그후 내전의 전황이 다시 뒤바뀌어, 민주파가 재반격했고, 스파르타에 힘입어 정권을 잡았던 과두파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는 모두 시가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그러나 민주파가 재집권했다고 해서 오늘날처럼 무슨 “민주주의와 정의(正義)가 회복되었다”는 식으로 상상해서는 안된다. 이때의 민주파는 민주주의 본연의 이념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전쟁으로 지치고 재산을 잃은 독오른 상인들과 일반 아테나이 시민들, 즉 귀족 아닌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었다. 이들에게 과두파는 아니꼬운 존재들이었고, 내전을 거치며 사실상 원수지간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파는 현명하게도 “더이상의 보복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더 이상 과두파가 숙청되지는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이 소크라테스가 처형되기 직전에 벌어졌던 일들이었다.

민주파들은 과두파를 정치적으로 보복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나, 앞서 말한 대로 인간성은 황폐화되고 많은 것들을 잃어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그들은 희생양을 필요로 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소크라테스였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과두파의 몇몇 인물들(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과 친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정치적 견해는 과두파의 것도 민주파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보편적 인간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걸어온 삶의 행적은 분명히 민주파들이 보기에 기분나쁜 부분이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철저한 탐구와 문답의 정신은 엄청난 지적 긴장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므로, 민주파의 지지기반을 이루는 상인이나 농민층에게는 큰 관심거리가 될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를 자처했고, 지혜를 탐구하는 학문은 예나 지금이나 여가를 필요로 하는 행위인 만큼, 귀족들을 중심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상인이나 농민들에게 소크라테스는, 생계책을 찾아 아테나이로 파리떼처럼 몰려들던, “말싸움을 대신 해 주고 이기면 보수를 받는” 일종의 변호사 집단인 소피스트들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처럼 늘 “입만 살아있는 놈”으로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의 “지혜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요구했는데, 이것은 신화와 종교에 지배받고 있던 평범한 아테나이인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이단적이며 위험한 모험이었다.

예컨대, 소크라테스를 기소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민주파 아뉘토스는, 가죽 제조업으로 큰돈을 번 뒤 정치권력까지 잡고자 애쓰던 자였다.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출세의 기술을 얻어듣고자 하나,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속물에게 진리에 관심을 가지라며 점잖게 면박만 준다. 성난 아뉘토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요즘 말로 “밤길 조심해라”는 식의 협박을 던진다. 그후 그가 소크라테스를 기소하여 죽게 함으로써 이 협박은 실현되고 말았다. 플라톤의 대화편 <메논>에 나오는 이 장면은, 당시 민주파와 소크라테스의 갈등,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놓였던 위험한 처지, 타락할 대로 타락한 아테나이의 상황을 보여주는, 플라톤 대화편의 생생한 묘사 가운데 하나이다. 

어쨌거나 아뉘토스를 비롯한 민주파의 계략에 걸려든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 섰고,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다”는 그의 신념대로, 배심원들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자신의 처지를 이성적으로 설득하려는 고지식한 자세로 일관했고, 결국 신과 종교 속에 찌든 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이성적 인간”이었던 죄로, 사형평결을 받는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죄목, “시민들이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알쏭달쏭한 기소 내용의 참된 해석일 것이다.

나는 이미 소설 {플라톤은 아팠다}을 소개한다는 명분을 내건 뒤 너무 많은 말을 해버렸지만, 지금까지 한 말들 가운데 소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플라톤의 아픔과 성장을 그린 이 작품은, 플라톤의 아픔의 원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죽은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문화 전체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정황 속에서 시민들의 신경질적 반응 때문에 희생되었고, 그의 죽음은 아테나이의 찬란한 정치-경제-문화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악법도 법이다”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둘러싼 기존의 논의는 사실상 부차적인 문제로서, 소크라테스의 굽히지 않는 악바리 정신과, 조국 아테나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지나치게 깊은 사랑”으로 이해하면 충분하다(이 문제를 다룬 재미있는 책으로 김주일,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를 참조할 것).

그러나,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우리는 아직 이 소설의 주인공인 플라톤에 대해 제대로 된 한 마디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저 청년 시절에 스승을 잃고 충격을 받아, 살라미스의 섬의 동굴에 틀어박혀 투덜댔다는 것 정도만 이야기했다. 누구나 스승을 잃을 수 있고, 상처받을 수 있고, 골방에 틀어박힐 수도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기억되는 이유는, 그래서 프랑스 여인 르노가 {플라톤은 아팠다}와 같은 찬란한 소설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살라미스의 동굴에서 나와, 눈부신(눈부시게 아름답다는 말이 아니다. 자세한 것은 이 책에 나오는 빛과 눈부심의 이미지를 참조할 것) 세상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토록 혐오했던 아테나이의 한가운데에 학원 아카데미아를 지어 스승의 사상을 가르치고, 스승을 주인공으로 한 수십 편의 철학적 대화편을 남겼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플라톤이 철학적 대화편을 썼던 시기는, 아테나이가 스파르타에게 몰락하고 “과거의 영광”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때였다. 더 이상 아테나이에서는 군함도, 각처의 황금과 곡식을 약탈하기 위한 상선도 출항하지 못했다. 잠깐 사담 비슷한 소릴 하자면, 예전에 나는, “눈에 보이는 것(현상)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데아)이 더 진짜”라고 요약될 수 있는 플라톤의 철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이라고 플라톤의 철학이 이해된다고 오만을 떨 생각은 없다. 단, 플라톤의 철학이 아니라 플라톤이 그런 내용의 철학적인 글을 쓰던 상황이 이해되기 시작한 지금에는, 그의 철학이 아닌 그의 마음씨가 어렴풋이 이해될 듯도 한 것이다. 그리고 르노 여사의 이 소설이, 그의 마음씨를 이해하는 데에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밖에도, 이 소설은 상당히 공들여 쓴 작품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작품을 세밀하게 읽는다면, 많은 부차적인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했던 멜레아지스를 <메논>에서 기하학적 정리(theorem)를 스스로 터득하는 노예 소년으로 설정한다든지, 대화편 <알키비아데스>나 <파이돈>의 저술 정황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 부분은, 독자들에게 발견을 재미를 줄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플라톤이 갖는 가치를 생각할 때, 이러한 수확도 결코 적은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어쩌면, 이런 것들은 부차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진정 중요한 것은 플라톤의 사상일 테니까. 소크라테스에 대해 잔뜩 이야기한 나는, 여기서 다시 플라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지만, 그 과업은 르노 여사에게 양보해야겠다. 이제 글을 정말 마쳐야 할 때이지만, 앞서 이야기한 한 가지가 정리되지 않아 그것만 언급하고 진짜로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그 한 가지란 다름이 아니라, “프랑스인의 그리스”와 “한국인의 그리스”가 갖는 차이였다. 나는 앞서, 루브르 박물관에 진열된 밀로의 비너스상에 대해, 프랑스인들은 어쩌면 그것을 “자기의 문화 유산”이라고 생각(착각)할 수도 있겠다는 언급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비너스상은 약탈물인데도 말이다. 우리가 예컨대 프랑스에서 로댕의 조각상을 훔쳐와서, 우리 국립박물관에 전시한 뒤, 그것을 우리 문화유산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 누가 납득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결코 프랑스를 편드는 것이 아니다) 밀로의 비너스상과 프랑스인들의 관계는, 최소한 로댕의 조각상과 한국인들의 관계보다는 가까운 것 같다. 최소한 이 소설을 근거로, 우리는 조각상이 발견된 멜로스 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살뜰히 살피는 한 프랑스 여인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들 때문에 혹시 나를 “서양문화 우월주의자”로 생각할 이가 계실지 모르겠다. 그렇게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이걸 어떤 보편성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싶다. 고대 그리스나 희랍어를 공부하려는 까닭은, 그것을 숭배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우리가 고대 그리스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때 그곳에서 “나의 사유(소크라테스의 발견임)”, “내전(민주파와 과두파의 대립)”, “민주주의(시민들이 신분이 아닌 수량적 평등에 따라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것)”, “변호사(소피스트)”, “희극(코메디)” 등 오늘날의 삶을 규정하거나, 그를 구성하는 개념-제도들이 시작되거나 최초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즉 그들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 되며, 이것이 “우리(한국인)는 모두 그리스인”이라고 한 고종석 선생의 말씀이 갖는 참뜻일 것이다.

프랑스인들, 나아가 서유럽인들은 고대 그리스를 자기의 조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은 공식교육에서 고대 그리스의 이러한 사정을 모두 배운다. 우리가 한문을 배우듯이 독일의 김나지움에서는 희랍어를 배우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서양문화가 우리에게 막강한 영향을 미쳤으되 “본래부터 우리의 것”은 아니었던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는, 이러한 모든 기초적 정보가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아무도 이런 이야기들을 내게 차근차근 들려 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처지도 비슷할 거라 느꼈고, 그래서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니나 어렵게 얻은 것들을 공유하고자 이 글을 썼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지 않던가. 그래서 혹시라도 {플라톤은 아팠다}가 재출간되는 소박한 꿈이 이루어진다면, 그건 뜻밖에 얻은 행복이 될 것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6, 2014년 6월, 배수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