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의 구조>가 불러일으킨 큰 파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개념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쿤의 스타일 때문일까? 이 책에 대한 반응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쿤이 제시한 개념들이 과학에 상대주의적 이미지를 덧씌워서, 과학 활동을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활동으로 만들었다고 강력히 비판한다. 반대편에서는 과학사를 통해 과학 활동의 독특한 이미지를 제대로 포착해 내었다고 옹호한다.

먼저 쿤의 논지를 간략히 따라가 보고, 어째서 쿤이 이러저런 오해와 반발을 일으켰는지를 그가 사용하는 ‘패러다임’이라는 단어의 이중성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또한 쿤이 과연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의가 상대주의적인지 여부를, 그 논란을 불러일으킨 ‘공약불가능성’이라는 핵심 개념을 통해서 검토해보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생산적으로 읽어낼 것인지 시도해볼 것이다.

쿤의 기본적 태도는, 자연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사회과학 분야의 동료들보다 확고하고 영속적인 답변을 가지고 있다는 일반적인 인식(자연과학은 사회과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을 의심하는 것이다. 쿤은 그것을 과학사에 대한 고찰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쿤이 비판적으로 보는) 과학의 일반적 이미지는, 교과서에 기록된 대로 주로 완결된 과학적 업적들의 연구로부터 형성되어왔다. 과학이 사실, 이론, 방법의 집합이라면, 과학의 발전은 과학 기술과 지식이 차츰차츰 쌓여가는 자료 더미에, 하나 혹은 여러 개 항목을 덧붙이면서 진행되는 과정이 된다. 과학을 축적에 의한 발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로부터 얻어진 과학이란 개념은 마치 한 국가에 대한 이해를 관광안내책자에서 끌어낸 격으로, 실제 활동과는 잘 맞지 않는다고 쿤은 보고 있다. 축적에 의한 발전이라는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수많은 과학사에서의 역사적 사실들과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대다수 과학의 초창기 발전 단계는 자연에 관한 각기 다른 견해들 속에서 끊임없는 경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들 다양한 학파를 구별 짓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과 세계 속에서 과학 활동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들은 동일한 표준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지식의 토대나 전제에 대한 것이다. 

그 방식들은 관찰과 경험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개인적 그리고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진 임의적인 요소가 항상 주어진 시대의 어느 과학자 사회의 믿음에까지 그 구성 성분으로 끼어든다. 하지만 임의적 가정에 대한 옹호야말로 오히려 과학적 성공의 바탕이 된다.

임의적 요소의 항상적 끼어듦은, 과학적으로 질문하고 답하는 방식의 틀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기가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쿤이 제시하는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용어는 바로 그러한 임의성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쿤은 패러다임을 어느 일정한 시기에 전문가 집단이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인식체계라고 전형적으로 정의한다(이런 뜻으로 쓰이는 패러다임을 패러다임A라고 정의하자. 여기서 A는, 이후 뜻이 다르게 확장되어 사용되는 ‘패러다임’이란 단어의 의미와 구분하기 위해 임의로 붙인 표시이다). 인식이 모든 방면에서 완벽히 다 합리적일 수는 없다. 인간은 인지적 한계를 갖고 있고, 그래서 제한된 합리성 속에서 자신의 합리적 이성을 확대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제한된 합리성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런 ‘임의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인지적 일관성을 제공해주는 편안한 기반이 요청되는 것 같다.

일단 쿤이 제시하는 과학사의 시기구분을 따라가면서 그의 주장을 음미해보자. 그는 ‘패러다임 이전시기’, ‘패러다임의 성립과 정상과학의 시기’, 이상 현상과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통한 ‘과학혁명의 시기’ 그리고 과학혁명에 뒤따르는 다른 패러다임으로의 이행 등으로 과학의 역사를 구분한다. 

패러다임(패러다임A) 이전 시기는, 자연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 간에 부단한 경쟁으로 특징지어진다. 광학의 역사에서 이 시기는, 고대로부터 17세기 말까지에 해당하는데, 빛의 본질에 관해 널리 수용된 단일한 견해가 나타난 적은 없었다고 한다. 대신 다수의 경쟁하는 학파들과 그 분파가 산재했고, 대부분이 에피쿠로스주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또는 플라톤주의 이론의 다양한 변형을 신봉하고 있었다. 어떤 학파는 빛을 물체로부터 발사되는 입자들이라고 보았고, 또 다른 학파는 빛을 물체와 눈 사이에 자리한 매질의 변형으로 보았다. ‘해당 학파들은 각각 어느 특정 형이상학과 관련시켜서 세력을 키웠으며 이 각각의 패러다임적 관찰로서 그 고유 이론이 가장 잘 설명해낼 수 있는 광학 현상의 특수한 부분을 강조했다’(이 문장은 책의 원문 그대로이다. 이 문장에 포함된 패러다임은, 처음 패러다임을 정의했던 패러다임A와 다른 용법으로 그 단어를 처음 사용하고 있는 문장이다. 이런 사용에 대해 일단 패러다임B라고 구분하자).

(여기서 묘하게도 전형적 의미의 패러다임이 성립되기 이전 시기를 논하면서, 경합하는 형이상학적 주장들에 대해서까지 패러다임이라는 표현을 수사적으로 쓰고 있다. 이렇게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확장해서 사용하는 경향은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심해진다. 한 시대에 공유되는 전문가집단이 갖는 신념체계로서의 패러다임(패러다임A)이 아니라, 신념들의 세부적인 구성요소들 하나하나의 의견 차이를 만드는 기반으로까지 패러다임(패러다임B)의 의미를 확장하면서 쿤은 개념적 혼돈을 초래하고 있다.) 

뉴턴은 선대의 기법과 개념들을 통일적으로 수용하여 18세기에 물리광학의 패러다임을 최초로 끌어냈다. 이 분야의 패러다임은 뉴턴의 <광학>에 의해서 제공되었는데 그것은 빛을 물질의 입자들이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 당시 물리학자들은 고체에 부딪히는 빛의 입자에 의한 압력의 증거를 찾으려고 했다고 한다. 

19세기 초 광학에 대한 영과 프레넬의 저술들로부터 유도되었던 패러다임에서는 빛은 횡파 운동이었고, 20세기 초에 플랑크, 아인슈타인 등이 진전시킨 패러다임의 결과로서 오늘날의 물리학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빛은 광자(photon), 즉 파동과 입자의 특성을 아울러 나타내는 양자역학적 실체라고 가르치고 있다. 

 

쿤이 전형적 의미로서 패러다임이라는 표현을 쓸 때 그 단어 안에는, 과학 활동이 경쟁을 통해 반대편 옹호자들의 무리를 떼어낼 만큼의 전대미문의 성취를 함의하고 있다. 동시에 패러다임으로 재편된 연구자들이 지속적으로 해결하도록 많은 문제를 남길 만큼의 상당히 융통성도 있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 뉴턴의 <프린키피아>와 <광학>, 프랭클린의 <전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기록>, 라부아지에의 <화학요론>등의 책들이 바로 그러한 패러다임적 성취를 이뤄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패러다임과 밀접한 단어인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란 개념은 과거의 과학적 성취에 의해 확고하게 정립된 공통 기반을 토대로 한 연구 활동을 뜻한다. 특정 과학자 사회가 일정 기간 동안 진척되는 활동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이것들은 과학사학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또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 또는 ‘뉴턴의 역학’ 등의 제목 아래 기술하는 정합성을 가진 모델을 제공한다. 

어쩌면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미리 짜여진 상자 속에 자연을 밀어 넣으려는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정상과학의 목적은 새로운 현상을 환기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 상자에 들어맞지 않는 현상들은 보이지 않거나 무시되는 경우가 많으며, 정상과학적 연구는 패러다임 틀 내에서의 명료화를 지향한다. 

패러다임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되는 연구영역의 제한들은 과학의 발전에서 오히려 필수적인 것이다. 상당히 심오한 문제의 작은 영역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자연의 어느 부분을 상세히 깊이 있게 탐구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러다임 성립과 정상과학의 시기는 이상 현상과 새로운 발견에 의해,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과학혁명의 시기를 예고한다.

정상과학의 패러다임으로 해명할 수 없는 이상 현상들이 만연하게 될 때 새로운 이론은 출현하게 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심각한 이상 현상에 부딪쳤을 때 신념을 잃거나 다른 대안을 궁리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위기로 몰고 간 그 패러다임을 바로 폐기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이상 현상들이 발견되더라도 그것을 반증 사례로 여기지 않는데, 이것은 흔하게 있어온 과학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일단 하나의 과학 이론이 패러다임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면, 그것은 자연과의 직접 비교에 의해서 허위 증명을 통해 폐기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 이론은 그 지위를 차지할 만한 다른 후보 이론이 나타난 경우에 한해서만 쓸모없는 것이 된다. 이는 과학자로 하여금 기존의 수용된 이론을 거부하도록 이끄는 판단 행위가, 자연과 직접 비교하는 행위 이상의 것에 근거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쿤의 주장은 그의 인식론이 고전적 진리 개념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식이 대상(자연)과 일치하는 경우가 고전적 진리 개념의 내용이라면, 쿤은 자연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마 어떤 특정 매개체(불투명하고 특수한 인간의식)를 경유하여 인식이 가능함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 같다. 이런 관점은 근대 이후의 철학이론이나 인지과학적 측면에서는 너무 당연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위기에 처한 패러다임으로부터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과학의 또 다른 양상을 함축한다. 패러다임이 전환된다는 의미는, 과학 발전이 축적된 지식의 확장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기존의 이미지를 부정하는 것이다.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는 축적의 확장이 아니라 새로운 기반으로부터 그 분야를 다시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적 진보의 이런 측면에 주목했던 다른 이들은 그런 변화를 시각적 게슈탈트에서의 변화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처음에는 한 마리의 새로 보였던 그림이 이제는 영양으로 보인다든가 하는 것이다. 

패러다임 논쟁을 특징짓는 논리적 접근의 불완전성을 말하면서 쿤은, 패러다임이 패러다임 선택에 관한 논쟁에 끼어들게 되면, 패러다임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순환성을 띠게 된다고 말한다. 그룹마다 제각기 그 패러다임을 옹호하고 평가하는 방식에 자기 고유의 패러다임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논쟁에서 논리적 접근이 힘든 또 다른 이유는, 어느 패러다임도 그것이 정의하는 모든 문제를 풀어낸 적이 없으며 그리고 두 가지 패러다임이 풀지 못한 문제들이 모두 같은 것도 아니기에, 패러다임 논쟁에는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개입된다는 것이다. 어느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보다 의미가 있는가? 가치 평가에 대한 이런 질문은 총괄적으로 정상과학의 외부에 위치한 기준에 의해서만 답해질 수 있다고 쿤은 주장한다. 이는 패러다임이 결정되는 방식이 마치 의미를 설정하는 주체(혹은 집단)의 결단의 문제로 소급되는 것으로서 보인다. 이런 관점은 개인의 윤리를 정초하거나 사회적 가치를 결정하는 패러다임에는 아주 적절해 보이나, 과학적 패러다임에서도 적절한지 여부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혹자는 쿤의 이러한 패러다임 개념에 대해서, 자연과학 이외에 여러 다른 분야(사회, 예술, 문학 등등)에도 확장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전도된 주장이다. 가치들이 대결하는 분야, 자기폐쇄적 순환논리를 피할 수 없는 분야들과 비교해 자연과학도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여러 정치 사회적 담론들의 대결 속에서, 그리고 미술과 문학 등에서 자기의 고유함과 탁월함을 주장하는 수많은 유파들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가치 평가하는 체계인 공약불가능한 패러다임들을 이미 무수히 보아오지 않았던가.

저자 서문에서 쿤은 패러다임을 생각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과학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쿤은 ‘과학적 문제와 방법의 본질’이 그다지 영속적이고 확고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에도 사회과학자들 사이의 공공연한 의견 대립과 유사한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천문학, 물리학, 화학 또는 생물학의 과학 활동이 사회학자들이 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기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그러한 차이의 근원에 ‘패러다임’이 있다고 본 것이다. 과학이 시간이 갈수록 분지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게 만드는, 적어도 한 시대에 (하나의 분야에서) 전문가 집단을 구심력으로 묶어주는 무엇이 바로 패러다임(패러다임A)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패러다임에 대한 쿤의 논의는 패러다임의 언어적 사용을 다양하게 늘려가면서 그 최초의 고유한 의미를 상실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에 대한 아슬아슬한 주장은 10장에서 더 심각하게 드러난다. 여기서는 패러다임을, 사람이 무엇을 보는가를 선험적으로 틀 지우는 지각 작용 자체의 우선조건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감각 경험이란 순수하게 중립적일 수 없으며, 중립적인 관찰-언어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패러다임의 의미는,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사실을 평가하는 선험적 주관성의 색채를 농후하게 띠게 된다. 그래서 자연과학 내의 전문가 집단이 공유하는 체계(패러다임A)라기보다는, 개인의 경험을 해석하는 토대로서의 가치체계(패러다임B)로서 패러다임을 묵시적으로 재-정의하면서, 처음 정의 내렸던 패러다임의 구체적 의미와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패러다임의 의미가 패러다임B처럼 쓰이게 되면 외연이 자꾸 넓어져서, 신념들의 구성요소 하나하나의 의견 차이를 만드는 기반으로까지 확장되어 버린다.  

그리고 패러다임A에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패러다임B로의 의미 확장을 하면서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구분하지 않고 혼재해서 썼기 때문에, 그가 과학을 상대주의화했다는 비판을 받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패러다임A가 자연과학자 사회를 하나로 묶어주는 그 공동체의 사회심리적 성향에 대한 묘사라면, 패러다임B는 개별적 인간의 보편적 인지구조의 특수성을 파헤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인간은 아침에 일어나서 잠이 들 때까지, 수많은 사실들과 데이터를 만난다. 하지만 대부분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계나 생명활동과 관련된 것에 주로 집중한다. 인간의 인지능력은 근력과 비슷하게 구체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제한된 능력을 우선순위에 따라 적절히 배분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뇌는 근본적으로 제한된 합리성 속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인지적 집중의 대상을 한계 짓는 제한된 합리성만이 인간에게 가장 효율적이고 합목적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의 신경계의 특수성에 기인해서, 사람의 인식 체계의 특수성도 뒤따라올 것이다. 아마 쿤은 패러다임의 의미를 패러다임B까지 확장하면서 인간의 인지구조의 제한점과 특수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런 차원에서 패러다임A와 B의 개념을 구분해서 보면, 논란과 혼란을 일으켰던 개념들이 다소 명료해진다. 패러다임 간에 공통적으로 평가하는 틀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의 ‘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 혹은 (이 책에서의 표현으로는) ‘동일 표준상 비교 불능성’이라는 개념은 바로 패러다임B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논란의 여지를 많이 줄일 수 있다. 

과학을 지적 상대주의로 만들어 버렸다는 비판의 핵심이 바로 ‘공약불가능성’이라는 개념인데 이것이 패러다임A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어지는 쿤의 설명 속에서 드러난다. 패러다임 사이의 경쟁은 증명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패러다임B), 뒤이어 패러다임 변화를 둘러싼 싸움에서 더 효과적이었던 논증의 유형들을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옛 경쟁 상대보다 훨씬 우월한 양적인 정확성을 나타낸다든지, 새로운 이론이 심미적으로 보다 간결하고, 보다 단순하고, 보다 적합하다는 등등.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패러다임 간의 싸움에서 쿤은 패러다임을 패러다임A의 개념으로 다시 조정해서 쓰면서, 패러다임A들 간에 우월한 패러다임을 평가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논리를 펴고 있다. 패러다임A들 사이를 논할 때에는, ‘공약불가능성’의 개념을 유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패러다임의 개념을 이중적으로 쓰면서 그것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함으로서, 쿤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과학을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활동으로 만들었다는 비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쿤의 이 저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공격받을 책은 아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나는 자연과학 활동의 이면에 작동하고 있는 인지적 질서를 개인적(패러다임B), 사회적(패러다임A) 차원에서 포착함으로써, 과학적 추구의 실상을 (번드르르한 관광안내 책자의 방식이 아니라) 리얼한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사의 탐구를 통해, (통상적인 비판자의 견해처럼) 자연과학의 합리성을 불합리(irrational)하게 묘사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연과학의 합리성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으며, 합리를 가능케 하는 ‘비’합리(arational)(명시적 합리 이외의 모든 것)적인 근원적 가능 조건을 포착하고자 한 것이다. 요즘식으로 다시 표현하자면 쿤은 자연과학의 고유성을 지적 상대주의의 칼날로 공격한 것이 아니라, 인지과학의 섬세함으로 과학추구의 과정을 세련되게 다듬으려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