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마 히로키는 현재 일본 최고의 비평가로 손꼽히는 사람이지만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오타쿠 연구서’를 낸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서 아즈마 히로키는 거대서사가 몰락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인간은 ‘동물화’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동물화’는 절대적인 의미와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허무주의적인 상황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러한 허무주의적인 시대에서 의미와 가치는 심층에 있는 ‘무의식의 데이터베이스’와 표층에 있는 인간의 의식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작은 이야기’에 의해 생겨난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진단은 내가 비평하려는 그의 다른 책에서도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이 책에서 참조하는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즉 아즈마 히로키 식으로 번역하면 ‘동물화되라’는 격언을 남긴 장 자크 루소이다.(그리고 이러한 격언은 다시 ‘인간의 질서’를 따르지 말고 ‘사물의 질서(자연의 질서)’를 따르라는 명령으로 해석할 수 있다.)
루소는 근대적 정치사상의 기둥을 놓은 사람 중 한 명으로 생각되어져 왔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학교에서 비록 수박 겉핥기식이긴 하지만 그의 사상을 배워야 했다. 이러한 학교 교육의 영향으로 많은 사람들은 루소를 위대한 사상가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근대 민주주의가 확립되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 정보통신 환경 속에서 루소를 재검토한 저작이 있다.
아즈마 히로키의 <일반의지 2.0>(현실문화, 2012)은 고색창연한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하는데 성공한 저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재해석을 저자의 말대로 루소를 ‘확대해석’ 혹은 ‘과장해석’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러한 해석이 수백년 전의 루소가 품었던 ‘실제 생각’에 대한 실증적인 탐구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책이 전개해나가고 있는 기존의 어떤 <사회계약론>에 대한 해석과도 상이한 해석을 ‘원래의 <사회계약론>’과 비교해서 비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아즈마 히로키의 새로운 해석은 루소 사상의 일관성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루소의 사상은 얼핏 보았을 때 비일관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의 ‘자연인’으로 상징되는 개인주의와 <사회계약론>에서의 ‘일반의지’로 상징되는 전체주의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근저에서는 일관성이 성립한다. 왜냐하면 (아즈마 히로키에 의하면)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말하고 있는 일반의지는 인간과 인간과의 소통이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존재로서 소통이나 사회적인 관계없이 개인들의 욕망과 의지 각각의 방향과 크기가 주어지면 그것들의 벡터합으로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해석에 따르면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 모두에서 ‘인간의 질서’가 아닌 ‘사물의 질서(자연의 질서)’에 따르기를 요청했다고 볼 수 있다.
2.
아즈마 히로키는 루소의 ‘일반의지’가 기술매체의 발달에 따라 구체적으로 가시화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일반의지 2.0’이라고 부른다. 그가 ‘일반의지 2.0’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데이터베이스화된 무의식’인 것이다. 그는 이러한 소통없이 생성된 ‘일반의지 2.0’을 통치와 정치에 반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일반의지 2.0’을 반영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요한 근거중 하나는 이러한 ‘데이터베이스화된 집합적 무의식’이 ‘집단지성’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즈마 히로키는 이 ‘집단지성’ 혹은 ‘떼 지성’이라는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인공지능 연구등의 분야에서 펼쳐지는 난해한 논의”(p.33)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집단지성’의 “보다 사회적이고 세속적인 함의”(같은 곳)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고 쓰고 있지만, 이 “사회적이고 세속적인” 함의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하워드 라인골드의 <Smart mobs>라는 책에서도 영리한 군중(smart mobs) 혹은 집단지성은 사회적 네트워크와 협력 그리고 소통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워드 라인골드는 <Smart mobs>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몇 초기 연구 논문들은 적절한 유형의 온라인 사회 네트워크가 그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개별 공동체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적절한 방식으로 연결되고 대화하면 집단을 이룬 인간들은 일종의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다.”(Howard Rheingold, 2002)
“씨족에서 부족으로 국가로 시장으로 또 네트워크로의 도약을 야기한 지식과 기술들은 모두 하나의 특성을 공유했다. 그들은 모두 개인들이 생각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확대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공유하는 능력을 증대시켰다....로스앨러모스 연구팀은 인간의 사회적 진화를 촉진했던 ‘스스로 조직하는 사회 체계’는 스스로 조직되고 분산된 정보 체계와 의사소통 체계에 의해 강화될 것이라는 그들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수집했다....로스앨러모스의 연구원들을 비롯한 연구자들이 닦아 놓은 연구의 진로는...영리한 군중의 힘을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의 차원으로 증대시킬 수 있다.”(Howard Rheingold, 2002,)
또한 네그리와 하트는 최근의 인공지능 연구를 검토하면서 떼 지성 혹은 집단지성은 협력과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소통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떼 지성은 근본적으로 소통에 기초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계산법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 이 떼의 행태를 이해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계산법을 최적화하는 알고리즘을 짜는 데 유용하다. 컴퓨터들 역시 재래식 중앙집중적 처리 모델보다 오히려 떼 구조를 사용하여 정보를 더 신속히 처리하도록 설계될 수 있다."(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조정환·정남현·서창현 옮김,<다중>(세종서적, 2008,pp.127~128)
여기서 떼 구조라는 것은 중앙집중적 통제 없는 자생적 협력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여기서 떼 구조라는 것은 중앙집중적 통제 없는 자생적 협력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성과는 인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인간도 '집단지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소통하고 협력해야 한다. 이러한 소통과 협력, 사회적 네트워크를 사상(捨象)시킨 '데이터베이스화된 무의식'이 '집단지성'을 가질 수 있는지가 참 의문스럽다. 물론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이 책 전체에서 ‘집단지성’은 일종의 ‘수사’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대중들의 무의식을 정치나 통치에 반영하는데 근거를 부여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박 말이다. 실제로 아즈마 히로키는 이 책 후반부에서 ‘의식적 이성에 근거한 숙의’와 ‘무의식적 욕망에 근거한 데이터베이스’를 구별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분법에 따르면 ‘데이터베이스화된 무의식’으로서의 ‘일반의지 2,0’은 ‘비이성’이 된다.
3.
그런데 이러한 구분법은 타당한 것인가? 이러한 구분법은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구분법에 의해 ‘소통’은 전문가 또는 엘리트들의 ‘숙의’ 속에만 존재하게 되는데, 이는 종종 전문가들보다 뛰어난 집단지성을 창출하는, 일상적인 대중들의 웅성대고 재잘거리는 의사소통을 ‘소통’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고, 이것은 저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엘리트주의적 함의’를 띄는 것이다.
이러한 엘리트주의는 사회를 ‘심리학적 유비’에 따라서 의식에 해당하는 부분과 무의식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나누는 잘못된 구분법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리 저자가 ‘의식과 무의식의 화해’를 강조한다고 해도 이렇게 결정권을 지닌 엘리트와 그렇지 않은 대중의 구분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부드러운 엘리트주의’가 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학적 유비를 인정한다고 해도 이렇게 ‘의식’에 해당하는 부분에 결정권을 부여하는 것은 ‘사물의 질서(자연의 질서)’를 따르라는 루소의 명령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데이터베이스’에 나타난 대중들의 욕망을 숙의에 참여하는 전문가나 엘리트들이 단지 ‘참조’만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렇게 근본적인 수준에서의 정치의 변형을 꾀하는 게 아닐 수 있다. 대의제적인 정치구조를 그대로 나둔 채, 대중들의 욕망을 조금 더 반영하거나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엘리트들의 ‘폭주’를 막는 정도를 ‘꿈’이라고 부르는 그의 상상력은 너무나 빈곤해 보인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대중들의 ‘욕망’은 너무나 프로이트적이고 극장적인 것으로서, ‘스크린’ 속에서 ‘표상’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들뢰즈를 따라 욕망을 생산적인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 대중들의 욕망은 소통과 협력, 그리고 사회적 네트워크를 생산해내는데, 이러한 생산은 그 자체로 ‘정치적 효과’를 가진다. 그리고 기술 매체의 발달로 인해 이러한 ‘미시적인 정치적 효과의 집적’은 순식간에 ‘거시적인 정치’에서의 변혁을 일으킬 수 있으며, 하워드 라인골드는 <Smart mobs>라는 책에서 필리핀에서의 정권 퇴진운동과 시애틀에서의 반신자유주의 운동이 이렇게 소통, 협력, 네트워크가 거시적인 ‘정치적 효과’를 불러 일으킨 구체적인 사례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과정’을 가속화시킨 것이 바로 소통기술의 발달이다. 이렇게 소통기술의 발달은 정치의 개념자체를 바꾸어 놓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의적 구조를 극복하지 못하는 <일반의지 2.0>의 ‘정치’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변화된 정치이다.
<일반의지 2.0>의 정치가 결정권자와 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자를 구분 짓는 정치라면, 이러한 정치는 다중 스스로가 소통과 협력을 통해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정치이며, 따라서 중앙집중적이고 통일적인 권력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새로운 정치이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에서 이렇게 다중들의 새로운 정치가 가시화되고 있으며, 따라서 ‘주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가 소통기술과 협력네트워크의 발달에 의해 가능해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민주주의’는 ‘욕망의 데이터베이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민주주의’ 속에서 다중들은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소통하며 결정을 내린다.
4.
아즈마 히로키는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 못된 것이다. 아즈마 히로키가 '민주주의 2.0'의 토대로 삼으려고 하는 '욕망의 데이터베이스화'는 푸코가 분석한 근대적 권력의 테크놀로지로서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아즈마 히로키도 인정하는 바이다!!!!!)푸코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진해오는 권력의 전면에는, 폭넓게 확산된 여러가지 성적 욕망들이 채집된 곤충처럼 나이/장소/취향 그리고 버릇의 유형에 따라 고정된다. 권력의 확대에 의한 성적 욕망의 세분화, 이 여러가지 영역별 성적욕망들 하나하나에 간섭하는 권력의 증대"(미셸 푸코, 이규현 옮김,<성의 역사1: 앎의 의지>(나남출판,1990,p.66)
권력은 이미 아즈마 히로키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욕망의 데이터베이스’를 ‘참조’해서 정치적 의사결정에 반영하고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는 실용적 의미가 없는 것이다. 권력에 의한 ‘욕망의 데이터베이스화’가 기술매체에 의해 더욱 발전한 이 시대에는 더욱 더 그렇다.
그리고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 자체가 문제가 많다. 루소는 진리와 비진리를 결정하는 기준이 일반의지 안에 있다고 말하면서 일반의지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며, 이러한 절대적 진리로서의 일반의지가 소통/대화 없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또한 루소에 의하면 이러한 일반의지는 분할불가능한 통일적 일자로서 결합된 주권자에 의해 표현된다.
루소는 개별자의 의지가 이러한 특성들을 가진 일반의지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철학은 자신이 ‘일반의지’를 대표한다고 하면서 개별성과 차이를 억압하고 ‘소통’보다는 전체에의 복종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파시즘에게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작별해야 한다. 우리는 <사회계약론>과는 반대로 ‘일반의지’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 즉 ‘대화’와 ‘소통’ 이전에 어떠한 진리도 존재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되며 진리는 ‘다중’의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대화와 소통의 과정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어떤 통일적 일자로서 결합된 주권자가 정치적 의사결정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되며, 반대로 ‘차이’와 ‘다양성’에 의해 구성되는 ‘다중’이 모든 정치적 의사결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3, No.3, 2015년 3월, 김상범, 포항공대 수학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