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산업사회의 가장 진지한 비판자로 손꼽히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의 "소수의 부가 모두에게 혜택을 미치는가? (Does the Richness of the Few Benefit Us All?)"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동녘, 2013)이다. 원제는 '다수'와 '소수'의 문제, 즉 '낙수 효과'(trickle down)와 같이 대기업이나 부자가 성장하면 중소기업이나 일반 대중의 삶도 나아지는지, 아니면 '매튜 효과'(Matthew Effect)와 같이 가진 사람은 더 가지게 되고 갖지 못한 사람은 더 빈곤하게 되는지에 대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필요를 부각시킨다. 반면 한국어 제목은 양극화와 빈곤의 대물림에 대한 일반적 분노에 지나치게 편승하려는 느낌을 준다.
2.
바우만은 서문에서부터 "경제성장 근본주의"(economic growth fundamentalism)가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2쪽). 그리고 그는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사람들"과 "부유하고, 낙관적이며, 자신감에 차고, 활기찬"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심해지고 있다고 한탄한다. 즉 '소수'와 '다수'의 문제, '소수의 부자'와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대를 이어 지속되는 불평등의 문제를 꼬집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the prime victim of deepening inequality will be democracy"(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주된 피해자는 민주주의, 2-3쪽)라고 말이다. 즉 지금의 불평등은 소수와 다수의 갈등을 민주적 절차로 풀어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우만의 지적은 책의 목적이 '절대적 평등'을 실현해야 할 도덕적 책무를 가르치거나 사회적 부조리를 개선할 집단적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암시한다. 일차적으로 그의 비판은 '민주적 절차'를 통한 '심의'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에게, 당신들의 신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불평등'의 문제를 고민해야한다는 경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플루토크라시(부가 지위를 결정하는 정치)나 메리토크라시(능력이나 실적으로 지위가 결정되는 체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자유주의의 기반이 불평등의 심화로 크게 흔들리고, "개인적 이익 추구가 공공선의 추구를 위한 최선의 메커니즘도 제공한다"(the pursuit of individual profit also provides the best mechanism for the pursuit of the common good)는 소위 '시장중심주의'의 정당성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다(3쪽).
다시 말하자면, 바우만은 인류의 삶과 함께 시작한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감정적 접근을 의도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지금의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이면에 존재하는 뿌리깊은 편견과 잘못된 원칙들을 다시 살펴보자고 한다(5쪽).
3.
'매튜 효과'에 대한 좋은 책이 하나 있다. 산 안토니오에 있는 세인트 매리(St. Mary) 대학의 다니엘 릭니(Daniel Rigney)가 쓴 책이다. 제목이 "The Matthew Effect: How Advantage Begets Further Advantage"(Columbia University Press, 2010)인데, 기독교 성경 마태복음 13장 12절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구절에 기초한 논쟁에서 책 제목을 따온 것이다.
바우만의 주장과 관련해, 릭니의 이론에서 눈여겨 봐야할 부분들이 있다. 첫째, '가능성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이 다르다는 점이다(Rigney 7). 특히 릭니는 '성공할 기회(an opportunity to succeed)'는 '성공할 수 있는 균등한 기회'(an equal opportunity to succeed)라는 말과는 엄연히 다른 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우리도 '개천에서 용나던 시대는 끝났다'고 개탄하고, '반전이 불가능한 사회'라는 이야기를 하듯, 릭니는 '더 이상 미국이 기회의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 속에서 '성공할 가능성'의 불평등이 갖는 문제점들을 부각시키고자 한 것이다.
둘째, 파이가 커질수록 나누어 먹을 것이 커진다는 이야기의 허상을 지적한다. 소위 상대적인 매튜 효과, 즉 큰 몫은 부자가 먹고 작은 여분을 가난한 사람이 먹더라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더 잘살 수 있다는 신화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바로 바우만이 지적하는 '낙수 효과'의 실패, 그리고 크리스티아 프리랜드(Christia Freeland)가 지적하듯 새롭게 등장하는 초국가적 거대 부자가 오히려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만든다는 주장인 것이다.
4.
바우만의 논의도 릭니의 것과 상당히 닮아있다. 비록 '좌파'라는 꼬리표가 붙는 단어나 학자들의 인용문이 뒤를 잇지만, '좌파'라는 꼬리표 속에 담긴 무지막지하고 대책없는 비판꾼이라는 비난과 그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양극화의 심화로 감정을 부추기보다, 부자들에 대한 질시와 분노를 유발하기보다, 진지하게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원칙부터 하나씩 짚어보려고 노력한다.
사실 바우만의 불평등에 대한 태도는 이미 이러한 문제를 시장 또는 자유주의 입장에서 지적해온 학자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조셒 스티클리츠(Joseph Stiglitz)를 '좌파'라고 한다면, 아마도 바우만의 비판도 좌파일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 중, 지금의 불평등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아마티아 센(Amartya Sen)도 마사 너스바움(Martha Nussbaum)도 모두 '불평등'이 가져올 폐해가 자유주의의 원칙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데 큰 위협이라고 지적하고, 그 대안으로 '기회'의 평등을 '가능성(capability)의 평등'으로 대체해야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바우만이 제시하는 이미 공인된 자료의 수치들은 우리의 보다 신중한 분석을 요구한다.
특히 2007년 금융위기 이후에 "재앙의 채찍"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아픔을 주었고, 글로벌한 자본이 개발도상국의 노동으로 몰려감으로써 선진 경제에서 일자리들이 사라져 소위 중산층의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로의 전락이 초래되었고, 세계는 이제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가 말하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한다는 점을 설명하는 부분에, 우리는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5.
물론 이 책도 몇 가지 진지한 토론을 벌여야 할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 첫째는 메리토크라시가 가져온 부작용이다. '재능 또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 다스려야한다'는 주장이나 '재능이나 능력에 따른 분배'에 대한 옹호는 소수의 부의 독점이 갖는 부작용으로 단순화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현상들을 수반한다. 반면 바우만의 메리토크라시나 소수의 지배에 대한 접근은 수사적으로 비효율적이고 비효과적이다. 특히 이런 생각들이 극소수 신자유주의자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단순화하려는 것이 문제다. 온건한 시장주의자들도 개탄하는 문제, 즉 모두가 동일 선상에서 출발하지 못하는 불공정한 경쟁을 부각시켰으면 좋았으리라는 아쉬움이 든다.
둘째, '경제성장'의 구호아래 은폐된 양극화의 심화, 그리고 이 경제성장의 구호아래에서 사회적 규제의 고삐에서 해방된 은행과 자본에 대한 이야기다. '경제성장의 신화'에 가려진 슬픈 역사를 우리만큼 뼈져리게 경험하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는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성장'은 신화로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인간의 욕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성장'과 '번성'에 대한 열망, '잘살아 보세'에 담긴 소망, 이러한 것들은 성장이 신화로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의 욕망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살펴봐야한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고민과 성찰이 없다면, 바우만의 지적은 곧 '대안없는 비판' 또는 '이상주의'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6.
짧은 책은 그것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이 있다. 한 마디로 바우만의 이번 책은 지금까지 자기가 말해왔던 바를 간결하게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기에, 이것만으로 그의 학문적 여정이 보여주는 첨예함과 학자적 위대함을 깎아내릴 수는 없다. 특히 '공공선'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들은 오늘날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이념적 지평을 개척하려는 저자의 숨결이 담겨있다. 그러기에 '불평등의 자연스러움'을 지킬 노력만큼이나 '불평등의 부자연스러움'을 막을 정치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그의 지적이 그만큼 큰 설득력을 갖는다.
지난 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불평등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이 갖는 문제점들을 탁월한 예술적 해학과 미학적 성찰을 통해 대중들에게 노출시켰다. 특히 '낙수 효과'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풍자가 돋보였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아무런 문제를 겪지 않는 높은 곳의 부잣집, 같은 비에 물난리로 삶이 파괴된 아랫 동네의 장면들이 극적으로 대비된 장면에서다. 부잣집 커다란 거실 창문을 촉촉히 적시던 비는 계단을 타고 내려와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의 집을 삼켜버렸다. 봉준호 감독의 사회학적 관찰이 바우만의 정치철학적 성찰과 맞닿은 지점이다. 구조적 개선없는 낙수 효과가 가져울 문제에 대한 경고라는 측면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