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민주주의: 조안 트론토(Joan Tronto), <돌봄 민주주의(Caring Democracy, NYU Press, 2013)>
1. 돌봄 민주주의, 어색한 조합의 신조어?
‘돌봄 민주주의.’ 수식어를 동반한 흔한 민주주의 신조어로 보기에 그 조합이 생소하다. 생소하다 못해 어색하다. 그러나 이 조합이 조금이라도 어색하게 느껴진다면 이는 돌봄과 민주주의, 그 어느 하나도 본연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조안 트론토(Joan Tronto)의 <돌봄 민주주의(Caring Democracy)>는 돌봄과 민주주의가 서로의 가치를 그 핵심 개념으로 삼고 있으며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필연적으로 연결됨을 보여준다. 이전의 수많은 돌봄 논의와 민주주의 논의가 서로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면, 이는 이들 논의가 두 용어의 의미를 충분히 바르게 이해하고 있지 못함이다.
그렇다면, 돌봄과 민주주의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어떻게 서로의 가치를 품고 있는가? <돌봄 민주주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표를 선출하는 절차도, 사회갈등을 해소하고 분배의 몫을 정하는 메커니즘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우리 모두를 사회 구성원으로서 평등하게 대우하는 것이다. 서로를 평등하게 대우함은 누구도 차별하거나 배제하지 않고 의사결정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을 그 필수 전제조건으로 한다. 즉, 차별과 배제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실제로 민주주의는 시민권을 확대함으로써 차별과 배제를 철폐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초기 귀족 및 특권 계급에 한정되었던 시민의 범위에 자본가 계급, 노동자 계급, 흑인, 여성 등 예전에 차별받고 배제되었던 사람들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실천과 진보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민주주의는 누군가에 의존하는 개인이나 의존하는 개인을 돌보는 이들을 시민의 부류에서 여전히 차별하고 배제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돌봄 책임을 민주주의의 과제로 다루지 않는 이상 해결될 수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본질은 돌봄 책임을 분배하는 것이며, 이러한 돌봄 책임을 민주주의 과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민주주의는 아직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돌봄이 핵심 주제이듯, 돌봄 역시 진정 민주주의 문제라고 <돌봄 민주주의>는 지적한다. 돌봄은 왜 민주주의 문제인가?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번번이 불평등하고 특수하다. 특히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인종적, 계급적 편견뿐만 아니라 젠더화된 가정에 전제되어 진행된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분리시킴으로써 여성에게 ‘자연스럽게’ 돌봄의 의무가 부과되거나 인종적, 민족적, 계급적 위계를 가정함으로써 특정 부류의 이들에게 ‘부담 없이’ 돌봄의 의무가 부과된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과 가정은 모든 인간이 취약하고 허약한 존재이며 결국 우리 모두는 돌봄의 수혜자이자 제공자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즉, 우리 모두가 돌봄의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적 돌봄이라 함은 돌봄 의무에 전제된 한계와 허구를 바르게 인식하고, 돌봄 책임에 대해서 보다 넓은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며, 우리 모두가 우리와 타인을 돌보는 직접적이고 친밀한 돌봄의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결국, <돌봄 민주주의>는 사적 이슈로 치부된 돌봄과 공적 이슈로 칭송 받는 민주주의가 서로 얼마나 관련되며 서로를 얼마나 내포하는지 증명해 보인다. 또한 공/사 분리를 전제하는 현 제도가 얼마나 현실을 오독하는지, 우리 모두가 상호의존적인 인간임을 간과하는지, ‘자연스럽다’라는 전제 아래에 불평등을 각인시키는지, 궁극적으로 정의를 왜곡시키는지 보여준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위기는 돌봄의 위기이자, 돌봄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이를 달리 풀면, 민주주의 위기는 돌봄으로 해결될 수 있으며, 돌봄 위기는 민주주의로 해결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트론토는 민주주의 결핍(democracy deficit)과 돌봄 결핍(care deficit)의 상관성을 언급한다. 민주주의 결핍은 정부제도가 시민들의 생각과 실제 가치를 반영하지 못하는 불능상태이며, 돌봄 결핍은 주로 선진국에서 국민들, 즉 아이들, 부모와 친지 및 병약한 가족구성원을 돌봐줄 돌봄인(人)을 충분히 찾지 못하는 불능상태이다. 민주주의 결핍은 민주주의가 돌봄의 책임을 다룸으로써 차별과 배제를 해소할 때 해결될 수 있으며, 돌봄 결핍은 돌봄이 보다 민주적으로 되어 우리 모두가 돌봄을 맡을 준비가 되어있을 때 해결될 수 있다.
2. 돌봄의 무임승차권을 회수하라
<돌봄 민주주의>에서는 돌봄 불평등이 민주 사회의 정치적 과제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정 부류의 사람들, 즉 젠더, 계급, 인종 또는 경제적 상황에 근거하여 일부 사람들은 돌봄의 책임을 떠안음으로써 민주 정치에서 배제된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배제는 또 다른 일부 사람들에게 돌봄 책임을 면책시키는 효과를 준다. 예를 들어, 많은 남성들은 사회를 보호하며 생산적인 경제활동에 투신한다는 이유로, 매일 매일의 돌봄 활동에 동참하는 것에서 면제된다. 더불어 이들은 정치적으로 배제된 이들에게 돌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편익 또한 얻게 된다. 트론토는 이를 돌봄의 ‘무임승차권(free pass)’이라고 표현한다. 현 사회·정치 제도는 일부 사람들로 하여금 돌봄의 짐을 짊어지게 하며, 일부에게는 그것을 회피할 수 있는 돌봄의 ‘무임승차권’을 발매하고 있다. ‘무임승차권’은 젠더화된 역할을 강화시키고 이렇게 분리된 경제적 영역의 존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돌봄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과제가 된다면 돌봄의 ‘무임승차권’은 회수될 수밖에 없으며 또한 회수되어야 한다고 이 책에서는 주장한다.
돌봄의 ‘무임승차권’을 회수하는 정당한 근거는 인간의 취약성에 있다. 우리 각자가 필연적인 돌봄 수혜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 사람은 유아일 때, 병약할 때 혹은 고령으로 노쇠해 질 때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 외에도 모든 사람은 평생토록 돌봄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우리의 돌봄 필요를 인정한다면 다른 사람의 돌봄 필요도 인식하게 될 것이며, 더불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우리 그리고 다른 사람을 돌보는데 필요한지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모든 행위자가 자신을 돌봄 수혜자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단지 자율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의존적인 수혜자로 보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게 되며, 또한 더 이상 돌봄 수혜자를 타인으로 간주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문제에 대해 판단하는 것과 같이 타인에 대해서도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로써 진정한 ‘동감’에 근거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결국, 우리 모두가 돌봄의 수혜자임을 각인하고 ‘동감’에 근거하여 서로를 되돌아보게 된다면, 돌봄 책임을 방기하는 무임승차권(free passes)은 정당하게 회수될 수 있다. 보호와 생산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혹은 부유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또는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에 대한 무임승차권은 그 누구에게도 자동적으로 발부되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독립적인 사람부터 의존적인 사람까지 모든 사람은 민주주의 테이블에 마주대고 앉아서 돌봄 책임을 정치적 의제로 협상해야 한다.
3. 돌봄을 위한 민주적 조건을 조성하라
<돌봄 민주주의>는 누구에 의해서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돌봄 책임이 분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보다 엄격히 말해, 돌봄의 맥락성, 복합성, 연계성 등을 고려할 때 돌봄 책임의 분배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오히려 이 책에서 거듭 강조하는 점은, 돌봄이 정치적 의제로서 테이블 위에 올려져야 하며, 또한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서 이를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이 돌봄의 책임을 할당받는데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확신과 돌봄 책임에 대한 분담이 민주 정치의 중심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트론토가 언급하는 민주주의는 돌봄을 위한 정치적 논의의 장으로서의 민주주의, 즉 조건으로서의 민주주의이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민주적 조건을 조성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돌봄을 공적 가치로 본다는 것은 단순히 국가가 돌봄의 필요를 시민들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넘어선다. 이는 국가가 돌봄 서비스의 제공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 다수에게 돌봄을 넘겨줘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돌봄 활동을 지원하거나 제한하는 국가의 역할은 공적 토론의 주요 의제가 되어야 한다. ‘함께 돌봄(caring with)’은 정치로 풀어야만 할 필요가 있는 정치적인 관심사인 것이다.
<돌봄 민주주의>는 돌봄을 위한 민주주의를 조성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몇 가지 전제 조건을 언급한다. 첫째, 우리는 모든 사람이 평생 동안 충분한 돌봄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둘째, 모든 사람은 그들의 삶에 유의미한 돌봄 관계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점을 전제해야 한다. 셋째, 모든 사람은 사회가 앞선 두 가지 전제조건을 얼마나 보장하고 있는지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공적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만이, 우리는 돌봄을 ‘함께 돌봄,’ 즉 시민들이 항상 함께하는 하나의 활동으로 볼 수 있다.
4. 우리 사회의 돌봄 민주주의
최근 한 아이돌 그룹 멤버의 아버지가 봉양하던 치매 부모를 살해하고 본인도 자살하였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특정 개인, 가정, 젠더의 문제를 넘어섰다. <돌봄 민주주의>는 한국 사회가 긴급하고 처절한 문제로 직면하고 있는 돌봄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그 방향성을 제시하는데 도움을 준다. 건강보험, 무상보육, 기초노령연금 등 현재 한국 사회에서 쟁점화 되는 문제는 주로 돌봄과 관련된다. 더 나아가 장기요양보험, 간병인, 장애인 활동보조, 산모도우미, 가사도우미 등 사각지대에 놓인 돌봄 영역과 돌봄인의 문제는 인식되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현재 한국의 민주주의 위기는 돌봄으로 해결될 수 있으며, 돌봄 위기는 민주주의로 해결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돌봄 책임의 분담을 논의의 중심에 두어야 하며, 민주 시민은 이러한 분담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되어야 한다. 민주 사회가 최소한도로 기여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평등하고 포괄적인 - 수혜와 제공 모두의 - 돌봄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점은 특히 우리가 어린이, 노약자, 허약자 혹은 우리들 중 심신의 차이로 인한 다른 역량을 지닌 사람들을 돌보는 우리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현재 일고 있는 돌봄과 관련한 협동조합의 활성화는 돌봄과 민주주의의 병행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존재한다. 돌봄을 위한 충분한 자원을 제공하고 우리의 돌봄 책임성을 재검토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자신과 타인을 돌보는데 다시 한 번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뢰의 수준을 높일 수 있으며, 불평등의 수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며, 모든 이들을 위한 진정한 자유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는 임무는 기존 제도, 가족, 소비 시장, 혹은 지금의 정부 관료와 정책에 맡겨질 수 없다. 민주 시민은 돌봄을 제공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일에 모두 함께 구조적으로 연계되어있다. 상호의존성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하는 인간조건의 특징이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돌봄 역량이자, 우리가 돌보고자하는 것에 대해 기대하는 역량이다. Caring Democracy라는 책 제목이 직시하듯, 민주주의는 ‘함께 돌봄’이다. 이는 시민을 돌보는 서로의 책임, 즉 민주적 시민의 의무와 책임인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돌봄으로 민주주의가 채워지고, 민주주의가 돌봄을 중심으로 불평등을 줄여나가는 유능함을 보일 때 돌봄과 민주주의는 가장 잘 어울리는 동반자로서 시민의 진정한 가치이자 우군이 될 것이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1, 2014년 1월, 김희강,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