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장은 어떤 근거에 나온 말일까? 실제로 그리스 문명의 기원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서양고전학자들은 없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헤시오도스의 <신통기>와 <일과 날>에 대한 웨스트 (M. L. WEST)의 주석과 부르케르트의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남경태 옮김, 사계절)를 읽어보면, 이는 쉽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통기>의 원천 이야기의 바탕에는 근동의 신화들이 깔려 있음을 입증하는 문헌이 웨스트의 주해이다. 아무튼, 한 마디로, 버낼은 ‘그리스는 없다’고 주장하는 셈인데, 과연 그럴까? 소위 그리스가 독창적으로 만든 고유의 무엇은 없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일 텐데, 내 생각에, 고대 그리스는 존재했다. 적어도 그 존재는 텍스트를 통해서 온전하게 살아 있다. 

세상에 “나” 만으로 구성된 내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람이든 문명이든 모두 그 구성의 부분들은 어찌 보면 모도 다 남이다. 내 살은 원래는 누구의 땀방울일 것이다. 이렇게 내 안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수한 “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나인 것은 나를 나로 묶어주는 어떤 힘이 있어서다. 이 힘이 바로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힘인데, 소위 ‘자기화’라고 부르고자 하는 어떤 힘이다. 그런데, 자기화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는 공간이 바로 텍스트이고, 사실은 그리스의 존재함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가 그리스의 문헌 텍스트들이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의 존재 자체마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텍스트를 연구하는 학문이 고전학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전학은 “백인이 중심이 되는 유럽 문명의 우월성과 순수성을 지키려는 것”을 위한 학문이 결코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이런 일을 주로 담당한 학문이 고전학(古典學: Classics)이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억지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소위, 서양의 주류 역사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던 소위 비주류 계의 대표적인 학자들 모두 고전학의 수혜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니체, 마르크스, 소쉬르, 프로이트 등은 실은 모두 고전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또한 그리스 고전 텍스트로부터 지혜를 빌었고 혜택을 가장 본 사람들이 이들이다. 물론 나도 <블랙 아테나>가 세계 역사에서 서양 근대가 일으킨 인류사적인 측면에서의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비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바야흐로, 세계가 다원화되는 시대에 이런 비판과 문제 제기가 이렇게 늦게 나왔다는 것이 오히려 서구 중심주의, 혹은 오늘 논의의 핵심인 소위 유럽 중심주의가 아직도 굳건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가 될 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블랙 아테나>는 서구 인종주의를 정면으로 비판하기 위해 저술된 책이다. 그런데 인종주의와 유럽중심주의를 직접 연결한 것은 성급하다고 본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버낼의 “유럽중심주의” 담론이 문제가 된 것은 인종주의 때문이 아니고 유럽 통합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소위 구대륙 유럽이 통합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보는 신대륙 사람(미국 사람)들의 노련한 반박 정도로 보는 것이 나는 합리적이고 본다. 왜냐하면 유럽 통합의 과정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되었던 문제가 바로 서양 역사와 문명의 정체성과 기원 및 계승 문제가 중심 논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에 기초한 통합 시도가 당연히 이제는 서양의 대표 주자이자 세계의 대표라고 여기는 미국의 패권주의자들에게는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버낼의 주장도 이러한 현실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나는 버넬의 유럽중심주의 비판은 미국 중심의 서구의 신대륙과 유럽 중심의 구대륙간의 일종의 견해 충돌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물론, 버낼의 표현 전략은 매우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다. 소위 서양 고대의 역사적 계승자라고 자임하는 유럽중심주의자들과 이를 위해서 서양 고대의 문헌을 연구하는 서양고전학자들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낼의 표현 전술이 이렇게 정교한 것은 미국 학문 세계의 소위 주류라고 하는 서양고전학자들에게 화살을 겨냥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미국의 주요 대학에서 서양고전학을 전공하는 학자들의 학문적 뿌리가 대개는 독일 서양고전문헌학 전통에서 기원한다. 소위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버낼의 교묘한 공격은 따라서 한편으로는 미국의 인종 문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의 패권주의의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라고 본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미국 내의 백인우월주의가 그리스의 문명과 그리스 문명에 대한 찬양하는 소위 근대 헬레니즘에서 비롯되었다는 식의 억지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차라리 <블랙 아테나>가 지적했어야 했던 문제점이 있었다면, 다음의 두 가지일 것이다. 국가주의, 제국주의가 바로 그것들이다. 

먼저 그는 국가주의에 대해 비판했어야 했다. 서양고전문헌학의 전성기를 주도했던 사람들이, 예컨대 드로이젠 같은 고전학자가 실은 독일 국가주의의 사상적 기초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이 국가주의에 맞서기 위해 제안된 기획이 근대의 헬레니즘 운동이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요컨대 드로이젠이나 몸젠 같은 역사학자들이 주도한 “대(大)독일운동”의 모델은 로마 제국이었다. 이에 맞서는 기획 프로그램이 헬레니즘 운동이었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강철구 교수의 ‘근대의 헬레니즘’에 대한 생각도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헬레니즘은 원래 그리스인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헬레니즘은 그것보다 훨씬 폭이 넓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헬레네스 대 바르바로이로 구분한 그리스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18세기 이후의 유럽 사람들이 유럽 대 비유럽, 나아가 서양 대 비서양이라는 더 큰 틀로 확대했기 때문이다.(2) 

소위 근대 헬레니즘은 소위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교육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원천 기획자는 빈켈만과 하이네이고, 실행에 본격적으로 옮긴 사람이 빌라모비츠다. 초인 교육을 부르짖던 니체와 싸우게 된 것도 이 사정과 관련이 있다. 고양된 민족 정서 따위보다는 합리적 이성에 기초한 보편 교양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 빌라모비츠의 핵심이다. 정치적으로도, 문화와 학문과 예술이 꽃피었던 그리스의 작은 도시 국가 모델로 독일을 근대화시키자는 것이 빌라모비츠가 제안했던 교육 프로그램의 골자이다. 이는 단적으로 빌라모비츠가 그리스의 비극 시인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이야말로 가장 현대에 맞는 텍스트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 작가에 대해서만 72편의 논문을 썼다는 데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버낼은 물론 강철구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사실 관계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 대신에 그는 “유럽 대 비 유럽”, “서양 대 비 서양”의 대립 구조 안에서 서양고전학자들은 유럽인의 순수성과 정체성을 지키기에 급급했다고 비판하는데,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주장을 함부로 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음으로, 버낼이나 강철구는 제국주의를 비판했어야 했다. 이와 관련해서 강철구의 유럽 대 비유럽의 구별을 통해서 유럽을 지키려는 유럽중심주의를 강화했다는 주장도 신중하게 제기되었어야 했다고 본다. 적어도 이 문제는 19세기의 서양고전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고, 그들의 주요 관심 연구가 실은 제국주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이런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이들이 실제로 히틀러나 무솔리니인데, 이들이 모방했던 제국이 로마 제국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로널드 사임의 <로마 혁명사> (한길사. 허승일/김덕수 옮김)를 보라. 이런 이유에서, 유럽 문제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하게 접근했어야 했다고 본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 개념 자체에 대해서 관심과 이목이 집중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이탈리아 시에나 대학에서 활동했던 고 이득수 교수의 “유럽”개념의 형성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1989년 냉전시대의 종말, 이어 독일 통일과 함께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유럽 연합의 정치적 통합 노력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실은 유럽 의회의 요청으로 시작된다. 다양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유럽 제-국가를 하나의 통합적 공동체로 묶어내기 위해서 유럽 연합은 이러한 다양성을 보장해 주면서 ‘하나’임을 보장해 주는 공통 개념을 찾아내는 것이 절실하게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이 공통 개념이 “Europa” 개념인데, 이 개념이 고대에서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발전하고 있는지를 추적하는 것이 이득수 선생 연구의 핵심이다.(3) 그러니까 이득수 선생은 “유럽”이라는 개념이 유럽인의 의식 속에 어떻게 자리 잡아가게 되는지에 대한 경위를 추적하는 셈이다. 이 추적을 통해 이득수 선생이 새로이 밝히고 있는 바를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서양 고대 신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Europa”는 원래 페니키아 왕의 공주로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는, 예컨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작품에도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중세에 들어오면 “Europa”개념이 고전 그리스-로마와는 다른 의미를 획득하고 있음을 이득수 선생은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Europa” 개념은 근-현대 유럽인이 생각하고 있는 현대적 의미의 비중 있는 개념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Europa”개념이 유럽인의 자의식에 착근하는 시기는 중세였고, 중세 유럽 지식인들은 일종의 수사학적 호소(evocatio)로 “Europa”라는 단어를 “이방의” 혹은 유럽 중심에서 보면 “야만의 문화와 세력”에 대응하는 포괄적 경계-구획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계-구획 의식은 종교적 대립 상태에 있던 이슬람 세력과의 경계-구획 의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분으로, 종교적 대립 구도에서 나온 구분이 아닌(4) 새로운 구분으로 문화적-지리적 구분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즉 “Asia”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Europa” 개념이 이미 중세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Europa” 개념은 지리적으로 “Scythia”와 경계를 맺고 있는 지역을 지칭하며, “Europa” 개념이 유럽의 시발점(initium)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 경계–구획 의식은 이후 아틸라 대왕의 흉노족의 이동 등 소위 “Asia”의 서진 혹은 “Asia”와의 충돌에서 생겨난 개념이 아닌지를 추정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한 것이 이득수 선생 연구가 역사학계에 던져 준 새로운 연구 과제이다. 다만 아쉽게도 이득수 선생의 논문에는 “몽고의 서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어떤 식으로든 몽고의 서진이 “Europa” 개념이 유럽인의 자의식에 완전히 자리 잡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을 것인데, 이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되지 않아 아쉬운 대목이다. 이에 대해서는 누군가 앞으로 연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유럽중심주의라는 생각 자체가 본격적으로 문제시된 것 자체가 최근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단적으로 유럽 개념에 대한 논의 자체가 최근에 제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버낼이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 뿌리가 근대 헬레니즘과 서양고전학의 역사에 있다는 지적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버낼의 유럽중심주의 비판이 미국 내에서 큰 지지를 받는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서구의 대표 주자 자리 선점을 위해 벌이는 미국과 유럽의 헤게모니 다툼의 일환에서 신대륙의 입장을 강화시켜주는 주장이기에 그렇다. 다시 말해서 서구의 대표 주자, 혹은 세계를 이끌어가는 대표 주자는 이제 구대륙이 아니라 신대륙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저술된 책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버낼이 선택한 서술 전략은 인종주의 문제이다. 적어도 다양한 세계의 여러 인종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그렇게 해왔던 나라가 신대륙 미국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구대륙 유럽은 한 걸음 뒤쳐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뒤쳐지게 된 이유 중에 하나가 서양고전학이라는 낡은 학문 탓이라고 변죽을 올리고 있는 책이 <블랙 아테나>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이와 같은 변죽이 과연 어떤 반향과 효과를 만들어내는지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답변은 양가적이다. 우선 버낼 효과는 작다고 볼 수 있다. 버낼의 주장에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거나 그렇다고 해서 버낼의 입장에 영향 받아 학문적 입장과 노선을 변경하는 서양고전학자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학문적으로 보면, 하나의 작은 에피소드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현실 역사의 차원에서 보면, 버낼의 효과는 어쩌면 클 수도 있다. “클 수 있다” 함은 버낼의 문제 제기가 자칫 다른 종류의 정치적 논의로 변질되어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우려에 불과하지만, 이런 종류의 논의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발전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니까, 버낼의 문제 제기는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종류의 물음이다. 그런데 소위 오리엔탈리즘이 비판하는 옥시덴탈리즘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는 나도 십분 동의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비판은 근본적으로 일종의 문화상대주의를 전제로 한다. 물론 서구 문명만이 보편 문화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컨대 중화 문명만이 중심 문화도 아니다. 문화에는 주변부와 중심도 없고, 더 좋고 더 나은 문화도 없다. 그럼에도 현실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 어찌되었든 유럽은 지리적 개념에 기초해서 유럽의 역사, 문화, 경제- 정치적 다양성을 아우르는 포괄적 개념을 창출하기 위해 시도하고 있고, 중국도 이와 유사한 통합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중원” 프로젝트인데, 중국의 소위 “대일통(大一統)“ 사상이 그것이다. 가령 동북아 공정도 이와 연결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만약 문명의 관점에서, 예컨대 중국의 ‘중원’, 혹은 ‘중화’ 프로젝트(5) 혹은 중국 중심의 “천하체계(天下體系) ”(6) 기획이 유럽의 통합 운동과 혹은 미국의 대표 주자로 하는 서양의 세계화 운동이 문명의 관점에서 충돌한다면, 이는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아마도 충돌한다면, 표면에 등장할 논리가 문화 상대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문화 상대주의는 근본적으로 양날의 칼이다. 한편으로 타자의 인정이라는 점에서 보면, 문화와 문명의 교류와 소통을 촉진하고 도울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정체성의 형성과 관련해서 집단 구획 의식을 강화시켜주는 논리적 기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문명과 문화 사이의 소통을 가로막는 요소로도 작동할 수 있기에. 예컨대,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소위 문화 상대주의가 문명과 문화간의 이해와 소통에는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오히려 악용되고 있고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랍 세계와 서구 세계의 긴장의 강화를 더욱 고조시키는 것은 아닌지를 묻지 않을 수 없기에. 그런데 이 긴장이 정확하게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 문명 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 문명이 서로 만나고 혹은 충돌하는 지점에서 그 전선을 형성하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때에, 과연 문화 상대주의의 저 날카로운 양면의 칼날 가운데에서, 어떤 쪽의 칼날이 먼저 작동하고, 더 강하게 작동할까? 어떤 쪽의 칼날이 더 강하게 작동할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에 대한 우려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이다.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소위 문명 혹은 문화 담론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악용되는지에 대한 역사적 사례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는 서양 고대에서 문명 담론이 어떻게 발전했고, 어떤 과정으로 변모되었는지를 간단하게 소개할 것이다.   

문명 담론이 처음 등장한 것은 문명과 야만의 구분에서부터다. 이 구분이 처음 등장하는 텍스트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 작품이다. 여신 칼립소의 오귀기아를 떠나 20일간의 항해 끝에 간신히 육지에 발을 딛은 오뒷세우스의 말이다.  

호메로스의 구분이 흥미롭다. 한편에는 오만, 야만, 불의가 다른 한편에는 관대, 친절, 정의와 짝을 이루며 대조되고 있다. 소위 야만과 문명의 대립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호메로스가 소개하는 문명의 세계는 다음과 같다. 다행히도 오뒷세우스가 처음 찾아 간 곳은 문명의 세계인 파이아케스였다. 공주 나우시카의 말이다.

인용에서 호메로스는 문명의 기준과 관련해서 다음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것은 인간다움(humanitas)이다. 이는 불행과 곤경에 빠진 이를 돕는 것이 인간답다는 것이다. 물론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제우스가 내리는 행복과 불행에 대한 언급에서 우리는 인간은 누구나 행복과 불행 앞에서 평등한 존재라는 인간 조건(condicio humana)의 뿌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까 소위 호메로스의 시각에서 볼 때, 소위 문명의 나라란 이런 인간다움이 살아있는 곳을 말한다. 이는 야만의 지역을 살필 때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퀴클롭스의 지역으로 항해해 가 보자. 오뒷세우스와 폴리페모스가 나누는 대화다. 

대화에서 들을 수 있듯이, 폴리페모스는 도움을 청하는 오뒷세우스에게 아주 “비정(非情)”하게 거절하고 있다. 폴리페모스는 거절에서 거치는 것이 아니라 식인(食人)까지 할 정도의 잔인한 자로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겠다. 인간적인 것과 잔인함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그러면 문명의 형성에 대한 호메로스의 생각을 좀 더 살펴보자.

인용에서 흥미로운 점은 퀴클롭스들의 지역의 특징에 대한 묘사이다. 실은, 퀴클롭스의 지역이 바로 유토피아다. 아마도 유토피아의 기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묘사에 따르면, 모든 물자가 풍족하고, 일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먹을 것이 제공되는, 그야말로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호메로스는 이 곳을 무법 천지에 불경스럽고 회의장도 없고 법규도 없는 지역으로 묘사한다. 이 묘사를 음미해보면, 아마도 생존에 필요한 물자가 충분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사람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겠다. 즉 단순 생존이 아닌 사람이 살기 위해 요청되는 제도와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단순한 생존이 아닌 생활이 있는 곳이 문명이라고 호메로스의 생각이라 하겠다. 문명에 대한 호메로스의 이러한 생각은 이후 내내 서양 역사를 지배하게 되는데, 그 증인으로 키케로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존재일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 상태의 야만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틀 안에서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가능케 해 준 근본적인 원인으로 키케로는 말 잘하는 사람과 그 수단인 언어를 들고 있다. 말 잘하는 기술, 곧 수사학을 배우는 일은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이라고 키케로는 강조한다. 물론 이에 대해서, <연설가에 대하여>에서 키케로는 전혀 다른 입장을 소개하기도 한다. 즉 문명을 기초하게 된 것, 곧 사람이 모여 살게 되고 거기에서 문명과 문화를 가꾸고 살게 된 것은 ‘말 잘하는 사람’ 덕분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그 수단은 말이 아니라 지혜(이성, 철학)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키케로는 말의 힘을 문명의 기원과 발전 원리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주장은 키케로 고유의 생각은 아니다. 물론 문명의 기원에 대한 논의가 물론 키케로의 초기 저술인 <발견론> 서문(1.2-5)에도 나오지만, 문명에 대한 고찰은 키케로 자신의 독창적인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발견론>의 경우, 키케로가 18세에 저술한 작품으로서, 그러한 연배에 문명의 기원에 대한 사유를 한다는 것이 사실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발견론> 자체가 희랍 텍스트를 통해서 들은 내용을 책으로 묶은 저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명론에 대한 키케로의 논의의 원천은 네 갈래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우선으로 <발견론>의 소위 저술의 바탕이 되었던 텍스트일 가능성이 제일 높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소크라테스의 <연설문> (3.5-8, 15.253-7, 4.48)에서 왔을 가능성도 또한 높다. 그러나 우리는 제3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플라톤이다. 플라톤의 경우는 약간 복잡한데, <프로타고라스>(320c8-324d1)이거나 <파이드로스>편이 바탕이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키케로가 <연설가에 대하여> 여러 곳(제1권 20-23장, 제2권 서문 등)에서 <파이드로스>편의 대화 도입 방식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이 작품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고, 다른 한편 플라톤의 여러 작품 중에서 <파이드로스>편은 말의 힘에 대해서 그리고 로고스의 구성과 역학, 그리고 효력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정리하자. 문명 담론 형성 과정 자체는 폴리스(로마의 경우, civitas)의 성립과 직결되어 있다. 폴리스라는 개념에서 서양인들은 문명의 담론에서 항상 등장하는 하위 개념들을 끌어낸다. 폴리스라는 말에서 국가의 개념을, 폴리스라는 말에서 도시의 개념을 끌어내고, 다시 도시의 개념에서 세련됨을, 세련됨에서 닦음, 길들임, 수양과 예의를 끌어낸다. 그 반대가 잔인하고 무례하며, 조야하고 거칠며, 들판과 산에서 흩어져서 살며 나라도 없는 곳이 바로 야만이 지배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3. 

이제는 역사적으로 이렇게 형성된 문명 담론이 어떻게 변했는가를 살펴보자. 르네상스 이래로 확산된 서양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감동과 흥분은 아마도 서양인들에게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야말로 인류 최고의 문명이고 보편적인 문화라는 인식을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심어주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 인식이 백인 우월주의 혹은 유럽 중심주의의 중핵이라 하겠다. 이에 대해서 나는 물론 어느 정도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명의 우월 의식의 원천은 실은 저 멀리 그리스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을 우월하다고 보는 근거는 특히 자신들이 교양인이라는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교양인이라는 의식을 통해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이방의 야만인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 인들에게서 보이는 특성은 아니다. 이 특성은 여느 독자적인 역사와 고유한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국가나 민족들에게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리도 “한국인의 위대한 저력”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을 오늘날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바르바로스(βάρβαρος)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말은 원래 야만인하고는 거리가 먼 단어였다. 이해하기 어려운 외국어를 지칭하는 의성어였기 때문이었다. 원래 야만에 해당하는 단어는 들판, 촌스러움을 뜻하는 아그리오스(ἂγριος)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교양인에 대비되는 야만인의 의미로 바르바로스(βάρβαρος)인을 사용한 사람은 이소크라테스였다. “우리는 공통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아테네의 “교양” (παίδευσις)을 지닌 사람들을 헬레네인이라고 칭해야 할 것이다” 주장에서 그는 교양을 강조하는데, 이 대목에서 이소크라테스는 범 그리스를 통합하는 가치로 공동 혈통이 아닌 교양을 들고 있다. 이렇게 해서 교양이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소크라테스가 헬레네인들을 강조하는데, 여기에서 “헬레네인들” 이라는 표현은 당시 강국이었던 페르시아인들에 대비되었던 말이었다. 비극시인 아이스퀼로스의 말이다. 

인용에서 “헬라스”라는 표현은 페르시아 제국에 맞서기 위해 하나로 뭉친 범-그리스를 지칭한다. 그런데 이소크라테스에게서 헬레네인이 교양인을 지칭했다면, 아이스퀼로스에게서는 헬라스는 자유를 지키려는 시민을 지칭하고 있다. 이 정도면, 아직까지의 문명 담론은 그런대로 온순하고 받아들일 만하다. 참고로 그리스 말에는 문명이라는 표현은 없었다. 어쨌든 흥미로운 점은 페르시아와 전쟁을 거치면서, 아테네에서의 문명 담론은 국가 단위 내부 차원에서 벌어지는 논의가 아니라 국제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담론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제 헬라스 주의는 제국주의의 형태를 띠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는 요컨대 그리스의 제국화 현상(lingua franca)에서 확인된다. 소위 hellenismus 현상과 barbarismus 현상으로 규정된 언어 충돌 현상이 제국이 된 아테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제국의 성립과 함께 문명 담론도 그 내용적 본성을 달리하는데,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로마의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이다. 아마도 제국의 성립에 문명 담론을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일 것이다. 그는 <아이네이스> 제8권에서 “아이네아스의 방패”를 통해서 로마를 세계의 통치자이자 우주사의 집행자로 상징화시키면서 문명사적으로 로마가 세계의 지배의 될 수밖에 없는지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방패의 묘사에 따르면, 한마디로 로마가 곧 세계다. 시작은 자연적 힘에 불과했지만 그 힘은 로물루스로, 로물루스가 왕국로마로, 왕국로마가 공화국로마로, 공화국로마가 제국로마로, 제국로마가 천상과 지상과 지하세계의 곧 우주의 주인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바깥 원은 지하 세계와 천상 세계를 표현한다. 이를 통해서 방패 안의 세계는 천상-지하 세계의 입체적 공간을 형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입체 공간 안에 지상의 현재 세계가 표현된다. 하지만 지하세계에서 지상의 현재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제의 장치로 오케아노스가 새겨져 있다. 이 오케아노스 안으로 동방과 서방의 세계 전체가 들어가 있다. 이 세계는 다시 동방, 서방, 남방, 북방으로 범주화되어 있고, 그 중심에는 로마가 위치하고 있다. 로마는 더 이상 서방의 중심지가 아닌 셈이다. 구체적으로, 문명 담론 논의와 관련해서, 방패의 안 장면 아래쪽 왼편을 묘사하는 대목을 읽어 보자.

아이네아스 방패의 백미이자 절정이 새겨지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세력과 안토니우스 세력 사이의 전쟁과 전투의 절정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신들, 넵투누스, 베누스, 미네르바, 마르스 신이 모두 전투에 가세해서 이집트의 아누비스를 포함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종류의 괴물 형상을 신들과 우주사적 힘 겨루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투 장면을 설명하는 핵심어는 아마도 문명과 야만일 것이다. 소위 ‘문명 세계’ 신들이 소위 ‘야만 세계’의 괴신들과 벌이는, 한 치 물러섬 없이 벌이는 혈투가 압권이기 때문이다. 베르길리우스는 이 광경을 “하늘에는 한 치의 양보를 모르는 복수의 여신들이 근엄하게 서 있고, 갈기 갈기 찢긴 외투를 두른 불화(不和)의 여신이 즐기고 있구나. 바로 그 뒤에서는 전투의 여신이 피로 물든 채찍을 휘두르며 뒤따르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건국부터 로마를 괴롭혔던 불화가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말해야 할 것은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는 모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아들이었고, 또한 처남-매부 사이였다. 따라서 이 전쟁은 가족 간의 피 흘림이고 동족상잔이며 명백하게 내전이었다. 

그런데 이 점과 관련해서 베르길리우스는 안토니우스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전면으로 내세운다. 야만과 악의 상징으로서 말이다. 다음의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 전쟁이 내전이 아니라, 문명과 야만의 대결이기에, 천상의 세계를 대신하는 선과 정의의 세력과 온갖 악과 불의를 대변하는 괴물들 간의 전쟁이기에, 피해야 하는 내전이 아니라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전쟁이기에, 따라서 진정한 평화는 악의 세력과의 타협이 아니라 승리에 있음을, 곧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관련해서 이런 종류의 전쟁에 대한 베르길리우스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그에 따르면, 로마는 선과 정의의 집행자로, 곧 ‘세계의 지배자’로서 천명을 받았다고 한다. 베르길리우스 본인의 말이다. 

제국 로마에게 천명이 주어졌고, 그것은 바로 전 세계에 평화의 법도를 수립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로마 제국은 이렇게 탄생했고, 근대의 서구 몇몇 국가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제국의 모델이 되었던 로마 제국의 탄생을 베르길리우스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악티움 해전을 승리한, 아니 전 세계의 지배자로 로마가 등장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아니 카이사르가 로마에 세 번의 개선식과 300의 신전을 전 로마에 세우겠노라는 서원으로 상징된다. 로마인에게 3이라는 숫자는 시간적으로 영원함을 상징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실제로 300의 신전을 다 짓지는 못했고, 82개의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공간적으로 승리의 환호와 축제의 즐거움으로 가득차 있는 로마 거리와 이 거리를 따라 끌려오는, 로마인이 보기에 야만인들인, 패배한 이민족들, 오늘날 아프리카의 베두 족, 아시아의 스키타이의 한 부족인 겔로누스 족 (오늘날 우크라이나), 소아시아의 카라스 족, 서유럽 끝에서 끌려오는 오늘날 벨기에 거주했던 모리누스 족의 표현을 통해서, 서방을 가르고 있는 라인 강과 동방의 세계를 부드럽게 적시고 있는 에우프라테스 강과 남방의 나일 강과 북방의 저 길들여지지 않은 야만의 아락세스 강(오늘날의 아르메니아 지역의 강으로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간다)으로 지상의 동-서-남-북을 아우르는 제국으로 로마를 위치시키고 있다. 결론적으로 아이네아스의 방패는 문명 담론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되는지를 보여주는 최상의 예라 하겠다. 

이제 문명 담론의 위험성에 이야기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이에 대한 내 생각은 이렇다. 아이네아스의 방패 장면을 이왕 읽은 김에, 좀더 읽어보자. 

두 세력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서방을 대표해서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립파가, 동방을 대표하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맞서고 있는 형국이다. 원로원과 인민은 물론 조상신과 천상의 신들이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하고 있고, 이에 반해 맞은편에는 동방의 나라에서 약탈한 전리품과 오늘날의 인도, 아프가니스탄, 이집트에서 군인들이 안토니우스와 함께 하고 있다. 이렇게 형성된 전선이 호각지세를 이루며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나, 베르길리우스는 안토니우스 세력을 지극히 편파적이고 경멸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쪽은 정의를 수호하는 선의 축인 반면, 다른 한쪽은 불의를 숭상하는 악의 축으로 새기고 있다. 그러니까 한쪽은 문명 세력으로, 다른 한쪽은 야만 세력으로 몰고 있다 하겠다. 이를 위해서 베르길리우스는 “전쟁과 평화”, “선과 악”,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을 전략적으로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도시국가 로마의 묘사에서 사용했던 “정의와 불의”, “신의와 배신”, “자유와 억압”, “불화와 화합”과 같은 개념 쌍과는 분명하게 대비된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베르길리우스가 이렇게 표현의 전략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 물어야 할 것이다. 이는 아마도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전환, 즉, 로마 정체와 국체가 전환되는 것을 해명하고 정당화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도시 국가 규모에서 발생하는 사회 문제와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에 요청되는 기준과 규범들로 제국 로마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과연 감당할 만한 크기와 범위의 덕목들인지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 제국의 정당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마도 베르길리우스는 도시-국가 로마의 틀을 담당했던 기준들로 이미 규모 면에서 그리고 실제로 실질적으로 지중해 지역의 거의 모든 나라와 종족을 포괄하면서 그들을 통치해야 하는 위치로 성장해 버린 로마의 당면을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로마가 더 이상 도시 국가 로마가 아니라 세계의 지배자로서 로마가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로 틀을 다시 짜고 있다. 이러한 틀의 전환을 통해서 그는 로마를 정의와 선과 문명의 수호자로 거듭 나게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그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표현 전술을 취하는데, 그 중 하나는 오케아노스라는 제의 장치를 거쳐 지하세계의 로마를 다시 지상 세계의 로마로 다시 살려내는 것이다. 이는 부활의 디오니시오스 신을 상징하는 동물인 돌고래로 표현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로마 세계의 상징으로서 아우구스투스를 천상의 위임을 받은 로마 인민의 제일시민(princeps)이 아닌 황제(Caesar)로 등극시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그는 로마를 다루는 접근 프레임을 달리 해야 한다고 본 것 같다. 그러니까 그는 “전쟁과 평화”, “선과 악”, “문명과 야만” 등의 개념 쌍으로 아우구스투스 통치의 프레임을 짜고, 이 개념들로 이 체제를 정당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나는 이와 같은 문명 논의와 제국의 논의가 실제로 많은 내부적인 문제를 덮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어찌되었든, 세계를 바라보는 프레임의 전환과 함께 베르길리우스의 묘사 전략도 바뀌고 있음을 확인했는데, 의제 설정에 있어서 베르길리우스의 이와 같은 프레임 전환은 사실 많은 내부적인 문제들을 덮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결과 로마 공화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로마의 경우, 물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고쳐야 할 것은 고쳐야(mutatis mutandis)!” 했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지 못해서 로마-공화국은 망했다. 그런데, 로마-공화국의 몰락이 단순히 사회-개혁 실패에서 기인했을까? 물론 개혁-실패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지 않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로마의 사회-개혁은 왜 성공하지 못했나? 내가 생각하기엔, 인민 전체(populus totus)의 동의와 합의에 기초한 공통-의견의 수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 상황에서 이러한 의견 수렴은 어려웠다. 왜냐하면 로마는 단일 종족, 단일 언어, 단일 역사에 기초해 성립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은 외세와 대립 속에서 생겨난 통합 이외에 내적으로 귀족과 평민을 통합할 수 있는, 소위 공통의 이해와 가치에 대한 합의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별도의 실천-프로그램도 없었다. 즉, 공통화-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통성의 상실! 이것이 근본적으로 로마의 사회 개혁 실패의 원인일 것이다.“이것만은 고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가 붕괴된다”는 공통-준거로 작동하는 공통 가치와 이념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고 이에 기반해서 사회적 합의를 끌어냈다면 개혁은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을 한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묶어주는 가치와 이념 체계의 창출에 로마인들은 게을렀다. 최소한 같은 나라 사람이지만 실은 딴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지경에 이르게 된 로마를 내적으로 통합해 낼 수 있는 프로그램에 대해서 고민했어야 했다. 그러나 로마-공화국은 고민하지 않았다. 물론 공동의 소유, 공동으로 참여해서 운영하는 공동의 나라(res publica res populi) 전통이 그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공동 자산이었다. 이를 유지하고 지키기 위한, 곧 사회 통합을 위한 공통화-프로그램(Intergration)이 절대적으로 요청되었음에도, 이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없었던 나라가 로마였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 공화정이 황제정으로 넘어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베르길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를 “그의 이마에는 두 줄기의 광채가 품어져 나왔고, 정수리에는 아버지의 별이 맴돌았도다” 라는 표현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황제 등극에 권위와 정통성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니까 로마의 황제정은 하늘의 결정이고,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라틴말로 fatum, 곧 천명(천명)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작품이 아우구스투스의 황제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작업을 하고 있다는 지적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와 같은 문명 논의에 기초한 정치 이데올로기 작업의 성격은 단적으로 로마의 논의를 현재 미국의 대내 정책과 대외 정책에서 동원되는 구호들과 그들이 추진하는 외교 정책 전략과 비교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바야흐로 G2의 시대다. 문명의 충돌의 맥락에서 미국과 중국이 자신들의 문명에 대한 서로 우월하다고 한다. 외피의 표현은 소통과 이해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속내에 숨긴 칼날은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는 안되겠지만, 현실이 그렇기에, 나도 굳이 이를 돌려 말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문명 담론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왔고, 되고 있고, 될 수도 있고 될 것이라는 점이다.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문제일 것이다. 이 때문에 나는 오늘날 학계와 언론을 통해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과 담론들이 동서 문명의 충돌에 대한 나름 학문적으로 흥미 있는 주제들이긴 하지만, 실은 이것들이 때로는 내부의 많은 중요한 문제들을 의제 자체로 상정하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자 한다. 단적으로, 외부의 적을 통해서 내부를 단결시킴에 있어서 정의와 불의, 선의 축과 악의 축의 대립 구조를 통해서 내부 문제를 덮어 버리는 일들은 지금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작은 구도에서는 남한과 북한의 긴장이 남한의 갈등을 덮어버리듯이, 큰 구도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긴장이 중국과 미국 사회의 내부 모순과 불균형을 감춰 버리고 있듯이 말이다. 요컨대, 중국과 일본 아니 미국 사이에 형성된 긴장이 중국의 내부 문제를 덮는 데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굳이 이 자리를 빌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동양과 서양의 문명 충돌에 대한 논의는 그 자체로 학문적으로는 중요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인류가 아직 그렇게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족과 국가 중심의 역사관과 세계관을 넘어선 지평에서 인류 공통의 세계사와 세계 문명을 공정하게(aequabiliter), 하지만 인간적(humaniter)으로 묘사하고 서술하며 평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