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30대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사연 들으면서 많이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뒤로 제가 한 일이 없는 거에요. 10년마다 사고가 나는 나라에서 제도를 바꾸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서 제가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SNS하면서 울고만 있는 젊은 사람들, 10년 뒤에 부모 되면 저처럼 돼요. 봉사하든 데모하든 뭐든 해야 돼요".(1)
어떠한 슬픔이든 다른 슬픔과 비교당하기를 원치 않지만 원인이 인간의 탐욕에 있다면 그 슬픔은 극단적으로 증폭됩니다.
어떤 국면에서든지 사람들이 다른 선택을 하였더라면 그러한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사태를 다르게 바꿀 수도 있었으리라는 판단, 앞으로는 달라져야 한다는 희망이 우리들의 세상에서 윤리와 정치를 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참사를 천재(天災)라고 한다면, 인간의 과오와 탐욕이 개입한 참사를 인재(人災)라고 부릅니다. 그에 비해 집단학살은 국가권력의 계획적인 잔혹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지금 행동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절규는 앞의 모든 유형의 참사에 다 유효합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운명을 달리한 분들과 유족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살아남은 자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2. 「목마른 신들」과 「쇠와 살」
밭에서 골라 낸 돌들로 쌓은 제주도의 밭담이 만리장성보다 길다고 들었습니다.(제주도 밭담 사진) 4.3에 얽힌 아픈 사연은 그보다 길 것이며, 이 화산섬이 사라지더라도 슬픔과 상처는 바다를 떠돌 것입니다. 그 원혼들이 바로 「목마른 신들」입니다. 오늘 저는 현기영 선생의 유쾌한 작품을 말하면서 여러분의 마음에 깊이 박힌 돌을 하나라도 덜어냈으면 합니다.
작가는 이 세계의 불행을 제거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특수한 책무를 지닌 존재입니다. 오로지 언어만이 인간들 사이에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더 높은 차원으로, 말하자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가들은 누구나 빼어난 실존주의자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책무가 특별한 몇 사람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까지 확대되지 않을까요? 그 책무는 학식과 경륜의 높고 낮음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자율성과 각성, 역사적 책임, 한 마디로 진정성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의무를 합당하게 이행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현기영 선생은 이러한 책임을 다하는 드문 사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기영 선생은 『순이 삼촌』, 『바람타는 섬』, 『변방에 우짖는 새』, 『마지막 테우리』등을 통해 4.3사건과 제주도 민초들의 삶을 집요하게 다루어 왔습니다. 아마도 제주4.3사건의 목마른 신들이 작가 현기영을 영매로 보유했다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이 작가 선생님께 또 하나의 무거운 돌을 얹으려 하거나 낙인을 찍으려 하는 수사는 아닙니다. 또 4.3의 작가라고 규정받으면 어떻습니까? 자신의 영혼에 박힌 가시를 밀치며 어떠한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지가 진짜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현기영 선생의 작품집 『마지막 테우리』에 실려 있는 단편소설 「목마른 신들」과 「쇠와 살」을 강연의 소재로 올렸습니다. 두 작품은 모두 1992년에 발표된 것입니다. 「목마른 신들」은 국가범죄의 청산과 화해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온 저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쇠와 살」은 여러 짧은 일화들을 엮어 4.3사건의 서사를 완성하고 있기에 역사기술자로서 작가의 비장한 태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첫 인상은 야심적인 대작―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위한 작품노트처럼 보였지만, 그 자체로 제주4.3학살의 약사(略史)였습니다.(2) 「쇠와 살」은 르포 형식의 소설이라기보다는 10여년 뒤에 나온 진상조사보고서의 리허셜 같았습니다. 그 작품을 발표한 1992년에는 작가가 제주4.3특별법의 제정(1999년)이나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2003)>의 발간까지는 예상치 못했을 거라고 봅니다. 「쇠와 살」이라는 제목도 제게 신랄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그 의미를 이 글의 마지막에 현재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질문으로 바꿔보겠습니다.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사진]
저는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의 역사와 철학, 인권법 등을 공부하고 가르칩니다. 법학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다루는 학문은 해석적인 활동입니다. 해석한다는 것은 텍스트, 의도, 작가의 맥락뿐만 아니라 해석자의 맥락까지 교차시키는 작업입니다. 문학작품, 법령, 성서까지도 정신의 창조적 결과물인 동시에 창조적인 해석을 기다리는 반제품입니다. 해석의 대상들간에 존재하는 차이를 무시할 수 없지만, 정신활동과 역사는 재해석과 변혁의 영구적 지속입니다. 어떤 법철학자가 해석작업을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해석은 (작가가) 앞서 생각했던 바를 나중에 (해석자가) 따라가서 생각하는 것(Nachdenken eines Vorgedachten)이 아니라 (작가가) 생각했던 바를 (해석자가) 궁극에까지 생각하는 것(Zuendedenken eines Gedachtnen)이다.” (3) 「목마른 신들」을 뼈대로 삼고 「쇠와 살」의 에피소드들을 활용하면서 나름의 글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군경은 전국적으로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지난 노무현 정부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과로 학살의 윤곽이 대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1948년 제주4.3사건은 그러한 집단학살의 서막이었습니다. 「목마른 신들」을 다른 말로 하면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 무참하게 찢겨지고 망각된 존재들이 벌이는 인정투쟁입니다. 화해극 또는 화해굿으로서 「목마른 신들」에는 억울한 피해자, 악행자, 무고한 매개물, 화해자가 등장합니다. 제주4.3사건에서 억울하게 죽은 열 일곱 살 영수의 혼령, 가해자였던 서청노인, 억울한 혼령의 자장에 갇혀 죄를 상속받은 손자, 4.3사건의 협력자(죄인)이면서 피해자인 심방(화자)이 등장합니다. 열일곱 질풍노도의 세 인물이 기억과 상처 속에서 교차하며 공명하는 작품입니다.
유신시대에 발표된 「순이삼촌(1978, 창작과비평)」(4)은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꿩약을 먹고 자살함으로써 4.3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고발하였습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화자)는 유년기에 4.3이라는 그 화마의 소용돌이를 겪고 최소한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순이삼촌의 불행한 종말까지 담담하게 서술하였습니다. 그러나 「목마른 신들」에서 작가(화자)는 4.3의 아픔을 가해자이자 피해자(회색지대의 인물 (5))로서 겪고 체념 속에 자살을 시도하지만 살아남아 화해자(peace-builder)로 발전합니다. 「순이삼촌」에서 작가는 ‘살아남은 자가 그때 이미 죽은 자’(6)라고 말함으로써 많은 여운을 남겼지만 「목마른 신들」에서 살아남은 자는 문제의 해결자로, 고통의 구제자로 이행합니다. 어쩌면 유신시대와 신군부의 시대를 견디어 내고(살아남아) 87년 이후 민주화 시대를 맞은 작가의 낙관적인 정치적 전망이 드러납니다. 더구나 억울한 혼령이 나타나 가해자의 후손에게 들어붙어 전격적으로 연금(年金)방식의 진혼의무(제사)를 촉구하는 부분에 이르면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귀신들은 원래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밤중에 야식가게에 치맥을 주문할 때 그렇게 하지요.
「목마른 신들」은 한라산 중산간마을 눈메드르를 고향으로 둔 환갑을 넘긴 심방이 열일곱 나이에 뜻하지 않게 서북청년단의 쓰리코타 운전사가 되어 살육의 행로를 안내하는 아픈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도 재치와 꾀로 고향마을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을 막고자 노력했지만, 본인의 눈 앞에서 참상이 자행되는 것을 피했지만 무자비한 초토화작전에 결국 어머니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 후 6.25전쟁에서 트럭운전사로 군대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려고 수면제를 먹었습니다. 죽지 못해 살아납니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 이것이 학살 이후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옴팡밭에서 학살이 있던 날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순이 삼촌과 달리 이 청년은 삶을 수용합니다. 화해의 양식으로 심방의 길로 들어섭니다. 화자는 어린 시절 무당인 어머니를 무던히도 멸시하였는데 이제 죽은 어머니를 진혼하면서 내림굿을 받습니다. 그는 특별히 사설을 늘어놓고 대화하고 치유하는 힘을 가진 존재로 발전합니다. 그는 몇 차례 4.3피해자의 넋을 위로하는 굿을 하며 40여년의 세월을 더하다가 이번에 뜻밖에 사건을 만납니다. 어느 여염집 17세 학생이 시름시름 앓고 이상행동을 보인 것입니다. 그 집을 방문하여 굿으로 달래보는데, 이 청년을 붙들고 있는 혼령은 40여 년 전에 4.3사건에서 죽은 자였습니다.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혼령이 왜 이 청년에 붙었는지를 궁리하다가 역사적 업보(業報)가 드러납니다. 바로 이 청년의 할아버지가 제주4.3사건에서 끔찍한 만행을 자행했던 서북청년단의 일원이었습니다.
3. 형이상학적 죄
제주4.3사건을 다루는 작가의 내면과 의식, 주인공들의 그것을 형이상학적 죄/책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철학자 야스퍼스가 제2차세계대전후인 1946년에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와 전쟁범죄에 대하여 독일인들은 도대체 어떤 죄/책임을 지는지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강연했습니다. 그 때 야스퍼스가 처음 사용한 개념입니다. 살인죄, 절도죄도 아니고 형이상학적 죄와 같이 별난 개념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우리네 삶과 정신은 복잡하고 오묘하고 무진장합니다. 그래서 형이상학적 죄가 지칭하는 인간의 징후들을 부정적으로만 규정하고 나자빠질 것이 아니라 이를 긍정적으로 전복해야 할 것입니다.
[좌로부터 Jaspers, Brecht, Levi]
야스퍼스는 그 강연에서 네 가지 죄를 제시하였습니다. 그것은 법적인 죄, 도덕적인 죄, 정치적인 죄, 형이상학적 죄입니다. (세월호 참사사건에서 보듯이) 이런 논의에 기대어 모두가 죄인이라는 물귀신 작전으로 나갈려 치면 가차 없이 비판해야 하겠지요. 야스퍼스는 이것을 무분별하게 혼용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것도 아닙니다. 상호삼투합니다. 최종적으로 책임은 분산이 아니라 통합을 통해서 확보됩니다. 저는 야스퍼스의 구별을 존중하지만 그의 경건주의적 결론에는 구애받지는 않겠습니다. 일단 설명해보겠습니다.
법적인 죄는 살인, 방화, 민간인학살, 고문, 인간실험, 강제노동, 재산탈취, 성폭력, 인도에 반한 범죄 등 국내법과 국제법을 위반한 행동을 말합니다. 법적인 죄를 저지른 사람을 범죄자라 부르고 형벌을 가합니다. 과거 뉘른베르크 재판이나 수없이 많은 형사재판들을 예시할 수 있습니다. 법적인 죄를 저지른 사람은 전쟁지도부, 나치당, 돌격대, 특공대, 보안경찰, 수용소간수, 밀고자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는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범죄자의 정책을 지지하거나 협력하거나 방관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허위, 자기기만도 작동합니다. 협력자의 범죄, 태도와 마음의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인종이나 유대인에게 직접적으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편견을 가지고 행동했다면 바로 도덕적인 죄를 짓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재와 억압의 시대에 권력에 편승하며 도덕적인 죄를 짓습니다. 사회대중들이 한결같이 독재자를 비판하고 협조를 거부하고 지속적으로 항의한다면 그러한 독재와 야만은 멈출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적극적으로 독재와 투쟁을 하거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을 상대로 주나라의 무왕(武王)이 반란에 성공하자 산으로 들어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이른바 도덕적인 죄를 짓지는 않았습니다.
정치적인 죄는 본인이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야만을 자행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국가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지는 책임이기에 다소 운명론적으로 들립니다. 예컨대 국민이 된다는 것은 그 나라의 전통, 역사, 정체성을 공유하고 국가가 주는 편익을 향유하고 근본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과정에 참여하므로 그 나라가 초래한 정치적 결과에 대하여 국민은 객관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평화주의자가 온 생애에 걸쳐서 자국의 전쟁광들을 비판하고 투쟁하다가 오랫동안 감옥에서 고초를 겪었다고 합시다. 그는 침략전쟁과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법적인 죄도, 도덕적인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담하지도 않았고, 방관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야만을 자행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정치적 죄(책임)를 피하지 못합니다. 그가 국민의 일원으로서 전쟁과 야만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백이와 숙제도 역시 반란을 막지 못한 데에 정치적 책임이 존재합니다.(7) 국민이라는 점 때문에 개인적으로 범죄자라고 처벌받지는 않지만 피해자들에 대하여 국민의 일원으로서 다양한 책임을 집니다. 이러한 정치적 책임은 개인적인 책임이 아니라 집단적인 책임입니다.
앞의 세 종류의 죄(책임)은 개인의 잘못(죄)이나 국가의 잘못에서 비롯된 죄와 책임입니다. 야스퍼스는 여기에 더하여 형이상학적 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로서의 면모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그가 형이상학적 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형이상학적 죄]
인간 상호간에는 연대가 있다. 이러한 연대는 세계에서 자행되는 모든 불법과 모든 불의에 대해, 특히 자신이 있는 곳에서 또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운데 발생한 범죄에 대해 인간 각자에게 공동의 책임을 지도록 한다. 내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바를 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 범죄에 대하여 공동의 책임이 있다. 내가 타인의 살해를 막기 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고 방관하였다면 나는 법률적, 정치적, 도덕적인 죄 개념으로 적절하게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책임을 느낀다. 그러한 범죄가 자행되었는데도 아직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내게 씻을 수 없는 책임을 부과한다. 어떤 행운이 우리를 이러한 상황에서 구제해주지 않는 한, 우리는 인간으로서 목적 없이, 즉 성공의 가망이 없는데도 무조건적으로 생명을 바칠 것인지, 아니면 성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생명을 보존할 것인지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한계에 직면한다. 이웃 사람들에게 범죄가 자행되는 경우, .... 죽음이든 삶이든 인간은 어디서든 함께 해야 한다는 원칙이 무조건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형이상학적 죄의 본질이다. ... 형이상학적 죄를 판단할 자는 신뿐이다.(야스퍼스, 독일인의 죄, 20쪽)
도덕은 항상 내면세계의 목표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어떤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나는 도덕적으로 내 자신의 생명을 걸 도덕적인 의무를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생명을 희생할지라도 아무 것도 달성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정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경우에는 생명을 희생하라는 요구는 도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목숨을 걸라는 요구는 도덕적으로 성립할 수 있으나 명백한 파멸을 선택하라는 요구는 도덕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앞의 두 사례에서 ‘세계의 목적상 부질없는 것을 행하지 말고 세계에서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을 보존하라’는 도덕적으로 대립적인 요구가 성립된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것과는 다른 원천을 가진 죄의식(Schuldbewusstsein)이 있다. 형이상적인 죄는 적어도 인간으로서 인간과의 절대적 연대가 결핍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도덕적으로 성립가능한 요구가 이미 멈춘 곳에서 형이상학적 죄는 씻을 수 없는 요구로 존재한다. 내가 있는 곳에서 불법과 범죄가 자행된다면 연대는 훼손된 것이다. 불법과 범죄를 막기 위해 용의주도하게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내놓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도덕적인 죄는 없겠지만 형이상학적 죄는 남는다. 내가 있는 곳에서 불법과 범죄가 자행되고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나는 살아남았다면, 내 안에서 하나의 소리가 들리고, 이를 통해 나는 안다. ‘살아남아 있다는 것이 나의 죄이다’.(야스퍼스, 독일인의 죄, 54쪽)
형이상학적 죄는 앞서 말한 여러 가지 죄의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불행 앞에서 모든 인간은 형이상학적 죄를 짓습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 죄를 짓지 않는 사람, 예컨대 수억만리 떨어진 태평양 연안에서 평화롭게 고기를 잡는 노인조차도 유대인의 죽음에 대하여 형이상학적 죄를 지고 있습니다. 타자의 아픔에 대하여 까닭 없이 아파하고 함께 울어야만 하는 어떤 존재(운명)의 중력이 형이상학적 죄입니다.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규정입니다. 형이상학적 죄는 인간의 결핍과 결함에 대한 근원적인 아픔, 트라우마, 근원적 죄감정, 종교적인 의미의 원죄를 연상시킵니다.
형이상학적 죄의 공식
나는 살아남았다.
고로 나는 죄인이다.
내 친구, 내 이웃이 대신 죽었기 때문이다. (8)
피해자의 의식으로서 죄책감과 가해자(학살자)의 죄의식은 다른 것입니다. 사실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승객이나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법적인 죄나 도덕적인 죄가 없습니다. 그들을 비난할만한 적절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살아남은 그들은 자신을 비난하고 때로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이를 생존자의 죄책감(survivor guilt)라고 부릅니다. 주변에서 아무리 네 잘못이 아니라 해도 죄책감은 막무가내로 불쑥불쑥 떠오릅니다. 나만이 느끼고, 신만이 판단합니다. 아마도 작가들은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가장 예민하게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브레히트는 “살아남은 자(der Uberlebende)”라는 시에서 형이상학적 죄를 표현하였습니다.
[시]
살아남은 자 (B.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프리모 레비도 “살아남은 자”라는 시에서 끔찍한 악몽을 잠꼬대로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악몽은 생지옥인 유대인수용소입니다.
[시]
살아남은 자의 아픔 (프리모 레비)
(전략)
“돌아가게! 제발 나를 내버려두고
돌아가게, 먼저 간 동료들이여!
난 아직 어느 누구의 것도 빼앗은 적이 없고
어느 누구의 빵 한 조각도 훔친 적이 없네.
그리고 지금까지
나 때문에 정말 단 한 사람도 죽은 적이 없네.
제발 그대들은 그대들의 세상으로 어서 돌아가게.
내가 아직 살아서
내가 아직 죽지 못해서
먹고, 입고, 잠자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는 게
어찌 내 탓이고 내 잘못이란 말인가!“ (9)
형이상학적 죄는 살아남은 자가 망자에게 대하여 느끼는 죄의식과 고통을 의미합니다. 좁은 의미의 가해자들은 상상을 불허하는 고통입니다. 이러한 죄책감(연대감)도 유형화해볼 수 있겠습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세월호 생존자와 같이 바로 친한 동료와 벗의 죽음을 눈 앞에 보면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먼 타국에서 자행된 참사와 만행을 바라보며 인간이라는 이유로 느끼는 죄책감, 과거의 만행 이후에 새로이 태어난 세대가 과거의 참사에 대하여 갖는 죄책감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죄는 결국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의 트라우마나 죄책감(sense of guilt) 그리고 책임감(sense of responsibility)입니다. 사실 트라우마와 죄책감은 구별하는 것이 옳습니다. 죄책감은 사망한 피해자에 대한 부분적이지만 가해자로서의 의식이고, 트라우마는 피해자로서의 상처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집단적인 희생 앞에서 가해자가 아니더라도 순전히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죄의식을 느낀다는 점을 수많은 증언자들이 말합니다. 유대인 수용소 생존자인 브루노 베텔하임은 <살아남은 자>에서 “죄책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죄가 없을 때에도 인간은 죄책감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한다.”(10)고 말합니다.
개인이 스스로를 영원히 트라우마나 죄책감에 가두어 둔다면 개인으로서나 사회적으로도 매우 우려스러운 사태입니다. 개인으로서의 삶의 의지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집단적 리비도, 집단적 삶에 대한 근원적 충동마저도 심각하게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타인, 공동체, 권위 그 모든 것에 절망하고 완전히 수동적인 무력감과 무망감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11) 다행히 요즈음 몇 년 사이에 트라우마, 힐링이 유행어가 될 정도로 소통하고 성찰하는 것을 중요하게 다루는 풍토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트라우마센터나 치유센터, 마음에 대한 공부그룹이 등장합니다. 광주에는 ‘5.18트라우마센터’가 있으며, 모진 고문을 당해 간첩으로 조작된 피해자들이 만든 ‘진실의 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소통하고 상처를 극복해야 하지만 유의할 점도 있습니다. 국가폭력, 국가범죄 앞에서 개인적인 치유는 한 국면이지 국면 전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상처로부터의 개인적 해방―이게 진정으로 가능한지도 의문스럽지만―일 수는 있으나 그 원인의 극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개인적 방어장치를 강화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공적인 방어기제가 필요합니다. 국가폭력의 재발방지의 보증(guarantee of non-repetition)이 공적이고 집단적인 차원에서 필요합니다. 트라우마는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사회정의와 정의감의 문제입니다. [다음 편에 계속]
(2) 예수회 신부였던 라스 카사스는 16세기에 스페인 정복자들의 만행을 인류에게 전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 Bartolome de las Casas, A Short Account of the Destruction of the Indies, Penguin, 2004.
(3) 라드브루흐/최종고(역), 법철학, 삼영사, 2002, 159쪽.
(4) 1949년 1월 17일 군대가 400여명의 주민을 학살한 조천읍 북촌리사건을 배경으로 삼았다.
(5) 완전한 선인, 완전한 악인을 상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는 수용소에서 수용된 유대인들도 얼마나 인간성이 파괴되어 가는지를 증언한다. 레비/이현경(역), 이것이 인간인가, 돌베개, 2010.
(6)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 죽음은 한 달 전의 죽임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 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7) 백이와 숙제를 끌어내어 고사리 캐먹는 행위를 비난한 사육신 성삼문의 절개시는 행위의 도덕적 의미와 정치적 의미의 차이를 전제한 것이다.
(8) 아감벤/정문영(역),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 2012, 새물결, 134쪽.
(9) 레비/이산하(역), 살아남은 자의 아픔, 노마드북스, 2011, 103쪽.
(10) 인용은 아감벤, 앞의 책, 141쪽.
(11) 허만/이현경(역), 트라우마, 열린책들, 2012.
** 이 글은 <문학카페 유랑극장>이 2014년 5월 10일에 제주에서 개최한 문학콘서트에서 발표된 글을 문학카페 유랑극장으로부터 전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함을 밝힙니다.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2, No.5, 2014년 5월, 이재승,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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