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피부에는 수많은 가시가 박혀있다. 성장과정에서 허물벗기를 거듭하였더라도 가시는 반복적으로 혹은 새로운 변신의 형태로 촘촘하게 심어져있다. 식민지 피지배국 역사에 깃들어 있을 여러 겹의 가시, 참혹한 전쟁을 치른 정전 중의 분단 체제에서 권력 장악을 위해 자국의 국민을 무참히 학살하는 국가폭력의 가시, 극한 경쟁과 돈이 최고인 말기 자본주의의 과점적 착취 경제의 가시, 거짓말과 위선과 몰염치의 ‘양아치’적 정치인들이 보여주는 모멸감의 가시, 그리고 모든 것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 세월호의 가시. 내 몸의 가시는 언제쯤에나 제거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는 피부」의 저자 미나토 지히로의 말대로 수 십 년, 수 백 년이 내 몸의 축적된 가시는 스스로 가시 이전의 원초적 상황의 도래를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경이로움
폴란드 시인 쉼보르스카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던진다. “나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요? /…/ 새들의 둥지가 아닌 사람의 집에서? / 비늘이 아닌 피부로 숨을 쉬면서? / 잎사귀가 아니라 얼굴의 거죽을 덮어 쓰고서? /…/ 무엇 때문에 天人도 아니고, 강장동물도 아니고, 해조류도 아닌 걸까요? / 무슨 사연으로 단단한 뼈와 뜨거운 피를 가졌을까요? / 나 자신을 나로 채운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시 ‘경이로움’ 중에서). 한 인간의 존재의미를 따지면서 인간이라는 ‘종’의 생성과 영속의 이유를 묻고 있다.
“가시는 우리 감각에 호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가 결코 완성될 수 없음을. 우리들은 항상 생성의 도상에 있음을, 그리고 그 순간을 항상 맞이해야(생각하는 피부, 35쪽)”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미나토 지히로의 문제의식과 상통하다. 그러므로 생성의 도상에 있는 ‘나’와 ‘인간’의 존재는 경이로운 존재이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결국 인간의 피부 감각이 인간성의 가장 깊은 곳에서(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나’와 ‘인간’의 감정과 판단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촉각은 대단히 중요한 감각기관이며 피부는 “뇌의 확장으로서 뇌를 개켜놓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기쁨이나 슬픔 등의 감정조차도 화학적 매커니즘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신경생리학의 발달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면서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피부는 가장 말초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가장 총체적인 모습을 띠며 인간의 존재와 문화를 형성하고 지속시켜왔기 때문이다.
미나토 지히로는 이러한 명제를 아프리카 자이레의 응콘데 조각, 세계 곳곳의 타투 문화, 인류의 말살을 불러올지도 모를 세계전쟁을 일으킨 인종주의에 깃든 피부의 내면과 왜곡, 피부를 모델로 한 다양한 조각작품과 미술의 변천사, 감각의 기보법으로서 아프리카 정글에 사는 종족들의 피부문화, 컴퓨터 영상기술의 발달로 인한 시각문화의 급속한 발달과 더불어 은연 중에 부상된 손의 복권가능성 등을 풍부한 사례들로 예증하고 있다.
그러면서 미나토 지히로는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피부는 육체를 감싸는 자루임과 동시에 외계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감각기관이기도 하”며 “신체 주변을 구성하는 피부는 인간의 본질에는 관여하지 않는 ... 인간의 표면이고 그 본질은 그 속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피부는 비본질적이다”라는 명제는 전복되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피부는 단순한 자루도 중추를 섬기는 말단도 아니다. 피부와 뇌는 계층적인 관계가 아닌 기하학적인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피부는 종속적이지 않다. 피부를 뇌의 확장으로서, 뇌를 개켜놓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본질은 피부에 있다.” 고 선언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책 읽는 즐거움, ‘생각하는 피부’ - 개켜진 뇌의 행복
우선 「생각하는 피부」가 주는 책읽기의 즐거움에 대해서 말해야겠다. 모름지기 책은 새로운 지식과 호기심, 정신을 충일하게 이끄는 깨달음을 자극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 「생각하는 피부」는 그에 충분히 값한다. 아프리카 자이레의 응콘데 조각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우리 문화에도 짚으로 사람을 만들어 누군가를 저주하고자 할 때 그 허수아비를 바늘로 콕콕 찌르며 주술을 거는 문화가 있었지 않는가. 문신의 문화사도 재미있다. 타투가 “다른 무엇보다도 남근, 근육, 무기체계와 깊은 관계를 맺어 왔다. 우리시대의 권력외교의 상징이었다”는 해석은 탁월하다. 처칠과 스탈린의 문신이야기는 역사적 인물의 피부사용 소사를 접하는 즐거움도 있다. 오달리스크와 베네통 광고에 대한 피부 문화론적 해석도 흥미롭다. 우리는 지금 “피부가 메시지”인 시대에 살고 있다. ‘유리로 된 남자’, ‘동정녀 마리아’, ‘바니타스-거식증에서 비롯된 알비노를 위해 살점으로 만든 드레스’, 모피의 비너스‘, 그리고 호주원주민의 신화세계인 ’드리밍‘, 브리온 기신의 ’드림머신‘ 등에 소개와 해석은 실로 ’피부와 문화예술의 사회사‘를 섭렵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책장을 넘기는 손, 개켜진 뇌가 느끼는 행복이다.
나는 이 책의 3장, 색소 정치학이 압권이라고 생각하는 데 인종주의의 근원과 그 전개과정이 근대 생물과학의 발달과 철학의 심화를 통해서 매우 뿌리깊게 유럽사회에 착안되어있음을 밝히고 있는 대목 때문이다. 이를 통해 최근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팔레스타인 공습의 근저에 여러 모습으로 ‘변신’한 ‘피부 정치학’의 이데올로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비전투대원의 대량학살은 공생의 기억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다”.(63쪽) 그리고 이러한 성찰을 통해서 “유럽이 키워 온 타자에 대한 사상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과 이문화異文化와의 접점이 피폐해져 일종의 문화적 면역 결핍을 일으키고 있”고 이렇듯 “공생을 부정한 곳에서 증식의 이미지는 과장된다. 모든 파시즘의 알이 부화하는 조건이다”는 성찰은 우리 사회의 상황과도 비교하여 깊이있게 성찰하여야 해석이다.
피부의 다양성, 인류 최대의 재산
저자의 말대로 현실은 시각문화가 압도하고 있다. “스크린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격리하고 고독을 조장하는 경향(269쪽)”이 있다. 촉각문화의 전체이자 첨병인 피부가 저자의 낙관적 희망처럼 “정보통신망이 제2의 피부로서 지구를 연결한다면 그 손가락들이 따로 움직여 만든 제3의 피부가 언젠가 세계를 뒤덮는 날(275쪽)”을 위하여 발달한 “퍼스널 미디어”의 과제를 지금의 인류는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나는 저자의 다음 문장에 더 촉각이 예민하게 반응한다.
“피부색의 다양성은 다시 말해 인간이라는 종이 어떤 인과에선지 이 지구상에 태어나 태양계의 시스템 속에서 기적적으로 오랫동안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이동 능력, 보다 정확하게는 보행에 의한 확산능력과 새로운 지리환경에의 적응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다양성은 또 하나의 다양성인 언어와 더불어 인류 최대의 재산이다.(103쪽)” 이 인류 최대의 재산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나의 피부를 이리 저리 찢어놓고 있는 저주의 가시를 뽑는 하나의 길이기도 할 것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9, 2014년 9월, 조진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