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人間)’과 ‘신(神)’에 대한 놀라운 스토리텔링 - 토마스 만(Thomas Mann)의 “요셉과 그 형제들”
1. 인생과 사건들의 ‘원형(原型)’ - 과거의 재현(再現), 그리고 다소간의 변형(變形)
가. ‘야곱과 에서’, ‘요셉과 그 형제들’, ‘이삭과 이스마엘’,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창세기의 주요 캐릭터들이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상식적, 교양적인 차원에서 많이 알려진 이름과 스토리들이다. ‘요셉과 그 형제들’이라는 소설의 제목을 볼 때에 과연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는 잘 알려진 성경의 이야기에서 더 이상 어떤 내용이 나올 수 있을지 다분히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토마스 만은 1926년부터 1943년까지 17년간, 50세부터 67세까지 그의 노년(老年) 대부분의 기간을 투여한 이 소설에서 세계대전의 참혹함과 나치즘의 광기어린 집단적 폭력, 망명의 유랑생활을 거치면서 축적된 그의 인생에 대한 사색과 신에 대한 이해를 심후한 내공(內攻)으로 하여, 원전인 창세기의 등장인물과 사건들을 오늘의 현실 속에 더 생생하게 살려내는 놀라운 초식(招式)을 발휘하고 있다.
3천 년 전의 인물과 사건에 생명력을 주고 오늘의 우리 인생 바로 옆과 앞에서 벌어지는 일로 인식하게 만드는 이 소설의 가장 강력한 표현방식은, 과거에 있었던 인생의 원형(原型)과 사건의 전형(典型)들이 마치 교향곡의 주제(主題)처럼 요셉의 생애에서 재현(再現)되고, 그러나 다소간의 변형으로 변주(變奏)되어 더욱 다채롭고 풍부하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이다. 창세기의 사건과 인물들을 ‘과거의 재현’과 ‘다소간의 변형’이라는 방법으로 재구성한 이 소설의 story telling은 창세기의 요셉 장(章)을 전혀 훼손하거나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그 본뜻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더욱 풍부하게 살려내는 다소 신비하기까지 한 미덕을 창출해 내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요셉의 생애를 통해 재현되고 변형되는 과거 인물의 원형들과 사건의 전형들은, 3천년 이후 현세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변주되는 것으로 느껴져 더욱 생생한 공감과 능력을 가지게 된다.
나. 이 소설에서 나타나는 인물의 원형과 사건의 전형들 중 몇 가지를 살펴본다. 우선 아버지의 편애 속에 ‘형제들’의 질투와 미움을 받는 ‘요셉’은, 형 ‘에서’의 장자권과 축복을 훔친 아버지 ‘야곱’의 재현이다. 그리고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요셉의 열 형제(동생인 벤자민을 빼고)는 야곱의 속임수로 장자의 축복을 빼앗기고 목 놓아 통곡하는 숙부 ‘에서’의 재현(再現)으로, 오늘도 세상과 인생에서의 축복과 형통을 놓고 갈망하고 실망하고 다투고 다치고 상처받는 우리들 인생의 생생한 원형(原型)들이다. 그런데 이 인생의 원형들은,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쳐서 20여년을 살고 돌아올 때 다시 만난 형 에서에게 보복을 당하지 않고 넘어간 것과 달리, 그 아들인 요셉은 열일곱 살 인생의 초입부에서 열 명의 형들에게 집단적으로 폭행 당하고 인신매매를 당해서 이집트로 팔려가는 것으로 그 사건이 변형(變形)되어 재현된다. 이러한 변형은 과거 장자권을 사취(詐取)했으나 형의 보복을 면(免)했던 야곱이, 자기의 자식 대에서 또다시 요셉에 대한 자신의 편애를 통해 형제들 간의 장자권을 둘러싼 분쟁을 스스로 재현, 반복시킨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해석된다.
인간의 역사에서 사람들은 왜 싸우고 형제들은 왜 계속하여 싸우는가? 인생에는 왜 끊임없는 경쟁이 있고 개인 간, 집단 간, 계층 간 및 계급 간의 경쟁은 왜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는가? ‘요셉과 그 형제들’, ‘야곱과 에서’, ‘이삭과 이스마엘’, 거슬러 올라가 ‘아벨과 가인’ 간의 갈등이라는 창세기 인물들의 원형과 사건의 전형들은 이 소설의 내러티브 속에서 다음과 같은 원리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세계 모든 나라에 살아가는 우리들 인생의 현실로 재현, 변형, 반복된다.
“사람들의 속마음에 대한 무관심과 그에 대한 무지는 요셉의 눈을 멀게 했다. 아담과 하와의 날 이후, 하나에서 둘이 만들어진 그 날 이래, 이웃의 심정이 되어 보지 않고, 또 다른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진실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자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속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상할 수 있는 능력, 상대방의 속내를 읽고 이에 공감하는 것, 이것이 칭찬받을 능력으로 끝나는가? 아니다. 이건 살아남는 데 꼭 필요한 수단이기도 하다 (요셉과 그 형제들 2권 162면).”
과거의 재현과 변형은 형제들 간의 분쟁뿐이 아니다. 야곱이 집을 도망하여 20여 년간 머슴으로 노동하고 재산을 만들며 체류한 동쪽의 밧단아람(어머니 리브가의 고향)은, 요셉이 그 형제들에 의해 팔려가서 종과 죄수와 집사와 총리로 20여 년간 체류한 남쪽의 이집트로 재현(再現)되어, 야곱과 요셉은 똑같이 ‘아래 세상’ ‘세상 나라’에서 살아가게 된다. 밧단아람에서 야곱과 속이고 속는 쟁투를 벌이며 아래 세상을 상징하는 대척자인 야곱의 숙부 ‘라반’은, 요셉의 이집트 생활에서 요셉에게 호의적이지만 결국에는 요셉을 감옥으로 보내게 되는 ‘파라오의 신하 수비대장 보디발(이 소설에서는 페테프레)’로 변형(變形)되어 재현된다. ‘야곱과 라반’, ‘요셉과 보디발’이라는 ‘관계의 전형’은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의 인생에서 청춘의 고난과 인생의 시험을 주는 세상의 대표자, 대척자로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무쌍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또한, 젊은 때에는 요셉이나 야곱의 자리에 앉았다가 나이 든 후에는 우리 자신이 라반과 보디발의 역할로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과거의 재현은 미래의 선취적 발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폭행하고 던져 넣었던 ‘빈 구덩이’, 폭행당하여 거의 죽은 사람처럼 된 요셉을 유다를 비롯한 형들이 다시 꺼내어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아넘겼던 그 ‘빈 구덩이’는, 2천년 후 예수가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하여 십자가형을 당하고 3일간 묻혀 있다가 다시 살아난 ‘빈 무덤’이 미래에서 과거로 소급적으로 발현된 것으로 그려진다. 어린 요셉이 이 구덩이 속에서 자신의 경망함과 지나친 자부심의 대가로 깨닫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되어 미련 없이 이집트로 떠난다는 이 책의 설명은, 예수의 죽음과 다시 삶의 선취적 발현이다. 과거의 재현은 또한 다른 인물의 고통과 경험의 재현과 반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고 또한 그를 해친 혐의를 진 나머지 열 명의 아들들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려,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야곱의 슬픔’은 사탄의 시험으로 모든 것을 상실한 ‘욥의 비탄’의 반복적 재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야곱의 도전적 질문은 욥의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철학적 신학적 질문들과 동일한 내용이며, 오늘의 세상에서 인생의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나님에게 던지는 질문들 속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다. 이 소설에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는 파격적인 원형의 변형과 재현은, ‘보디발의 아내’를 ‘라헬’의 변형된 재현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소설의 3편 4권에서, 밧단아람에서 야곱의 사랑과 열정의 대상이었던 ‘라헬’의 원형은, 이집트에서 요셉을 유혹하여 강간미수범으로 만들어 투옥시킨 ‘보디발의 아내’의 열정으로 변형되어 재현된다. 우리가 알다시피 인생은 복잡하고 선과 악은 단순하지 않다. ‘요셉은 의롭고 순결한 청년이고 보디발의 아내는 성욕에 눈이 먼 경박한 악녀이다.’ 라고 단순하게 선악을 구분하는 것은 무언가 충분치 않아 보인다. 토마스 만은 이 소설에서 창세기 39장에 나오는 간단한 이야기를 무려 소설 1권 분량으로, 다음과 같이 각색, 보충한다. ‘형식적인 고관인 궁신(宮臣, 환관) 보디발의 아내로 생생한 사랑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형식적 아내인 보디발의 아내는, 수 년 동안 집안의 젊고 아름다운 청년집사인 요셉의 생명력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사랑을 갈구하는 욕망으로 빠져들게 된다. 그에 대한 요셉의 반응 또한 단순히 지고지순한 모범생, 의인의 그것으로 일관되기보다는 아름답고 원숙한 여인의 눈빛과 관심에 대한 청년다운 설레임과 동경, 미숙하고 자기기만적인 맞장구 치기로 사랑의 위기를 함께 심화시켜나가는 공범 역할을 한다. 요셉은 마지막 위기의 순간에 가까스로 그 위험을 벗어나지만, 자신의 경거함, 즉 '상대방의 애착을 불러일으키고 조장시킨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로 귀족 집안의 최고집사 지위에서 죄수의 처지로 다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보디발 아내 스토리의 재구성은 매우 현실적이고 생생하고 납득할만한 내용이다. ‘야곱과 라헬’,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라는 전형과 변형은 남자와 여자 간의 정열과 집착,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인생을 추동하는 열정의 강력한 힘, 그리고 그 열정에 대한 사람의 통제력과 통제 불가능함이라는 인생과 사건의 원형과 전형을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라. 성경의 내용을 이처럼 조금 변조, 보충한 토마스 만의 창작을 하나님은 과연 용납해 주실까? 먼저 이 책은 어느 정도 창작의 자유가 허용되는 소설이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함부로 따먹은 아담 이후로 이 세상에 죄 없이 순결한 의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성경의 전체 정신이다. 그렇다면 요셉의 연약함을 다소 드러내는 이 정도의 창작은 오히려 하나님의 진심에도 잘 부합하고 하나님이 충분히 봐주실 만한 정도의 센스 있는 위트가 아닐까? 이 점과 관련하여 토마스 만은, 하나님의 축복과 계획으로 이집트에서 만인을 ‘먹여 살리는 자’가 된 요셉이 바로의 주선으로 이집트 온(On)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외형상 이집트의 이방신앙과 어느 정도 타협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였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아래 세상에 내려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역할을 주신 이상 이 정도의 타협은 당연히 눈감아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요셉의 독백 장면을 통하여, 토마스 만 자신의 부분적인 창작과 보충 및 변주를 변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 토마스 만의 팡세 (수상록)
가.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글이 있다. 경제활동과 재판, 행정과 정치에 사용되는 실용적인 글들, 인생과 세상과 철학을 다룬 학술 논문과 에세이들, 정보와 오락을 주는 언론 및 문학작품 등, 각각의 글들은 그 기능과 용도를 달리하고, 형식과 내용도 크게 다르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사람과 그 글의 내공(內攻)이 어느 한계를 넘어 지극히 깊고 심후해 지면, 그 글과 언어는 모든 형식의 한계와 제한을 뛰어넘고 ‘인생과 세상에 대한 이해와 사상의 전달’이라는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으로 집중되어 모든 장르의 형식을 극복하고 통합한다. 토마스 만이 노년의 20년 거의 전부를 투여한 이 소설은, 모든 장르의 제한을 뛰어넘어 한 시대적 거장(巨匠)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모두 농축시켜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특히 창세기 27장부터 50장까지의 내용 중 한 줄 한 줄에 간단히 서너 글자로 익명이나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모든 사람과 사건들조차 총동원하여 우리들 인생과 사건과 사상의 모든 원형들을 재생시키고 변조해 내고 있는 것은 경탄스럽고 매혹적이다. 결국 이 소설의 형식은, 작가는 물론 요셉과 그 형제들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을 화자(話者)로 등장시켜서 토마스 만의 인생과 시대경험에 따른 모든 철학과 인간에 대한 사색, 신에 대한 이해를 표현해 내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소설이라기보다 토마스 만 자신의 만년에 기록한 철학적 팡세, 수상록이라고 불리기에도 전혀 모자람이 없다.
나. 인생과 세상과 시대의 모든 거친 일들을 진지하게 견디어내고 사색한 토마스 만의 깊고 놀라운 수상들은 독자가 이 책을 일독하면서 곳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데, 그 중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죽음은 생명 안에 있고 생명은 죽음 안에 있다. 그걸 아는 사람이 바로 성별된 자이다." (2권, 168쪽).”
“재난은 수심과 근심에 젖어있는 인간의 상상력을 마비시켜, 다른 모든 것에는 생각이 미쳐서 이 구석 저 구석 샅샅이 훑는 인간의 상념이, 바로 그 재난이 닥쳤을 때에는 인간의 생각이 미치지 않은 천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박살내는 청천벽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2권, 233쪽)”
“아버지 야곱은 그와의 이별이 이처럼 힘들었다. 인간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엉뚱한 행동과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숙명의 시각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훗날 인간의 의식을 가린 장막이 걷혀, 모든 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게 되면 이러한 행동은 위로가 되기도 한다."(2권, 236쪽).
“식사는 끝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육신의 굶주림은 채워졌어도, 영혼은 굶주림과 갈증으로 바싹바싹 타고 있었다. 그랬다. 저마다 살 속에 가시가 하나씩 박혀 있었다. 뽑을래야 뽑을 수도 없는 가시가 주변의 살까지 파먹어 들어가 곪는 통에 얼마나 아픈지 말도 못했다. 그러니 기운이 어디서 솟겠는가. 이들은 뻗치는 혈기를 누르지 못해 고민이었던 예전의 사나이들이 아니었다. 원통함, 벌레, 주변의 살까지 곪게 만드는 가시, 속을 쓰리게 하는 굶주림이 이들로부터 남자로서의 기개마저 앗아간 것이다."(2권, 267-268쪽).
“이들은 계속 분노를 유지하고, 혹시 스며들지도 모르는 이성을 멀찌감치 쫓아내기 위해 가슴속 깊은 곳, 회환과 상심 속에 파묻어 두었던 파편을 밖으로 끄집어 올려 박자를 맞췄다."(2권, 282쪽).
“명예롭지 않은 시간은 없다. 어떤 시간이든 나름대로 영광스럽다. 따라서 절망할 수 없는 자는 올바로 사는 자가 아니다."(5권, 38쪽).
3. ‘하늘에 있는 거룩한 것을 아래로 가지고 와서 세속의 것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것’ - 성경의 소설적 주석(commentary)
가. 토마스 만이 신학자이거나 신학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창세기 요셉 장(章)의 모든 행과 모든 절을 섬세하고 진지하게 확장해 낸 장편소설 ‘요셉과 그 형제들’은, 원전인 창세기의 주제, 즉 ‘인간(人間)과 신(神)의 관계(關係) 맺음’에 대한 진지하고 깊은 사색을 지극히 풍성하게 전개하고 있다. 이 소설의 중심을 차지하는 요셉과 야곱이라는 인물은, (i) 아래 세상의 분투와 시험을 진지하고 건강하게 살고 견디어 내는 현실적인 인물 (야곱은 밧단아람에서 양을 치면서, 요셉은 이집트에서 보디발의 집과 파라오의 감옥과 나라를 관리하면서) 임과 동시에 (ii) 신적인 것에 대한 사색과 신과의 유대•동맹관계를 가장 중요시하는 신앙적인 인물의 원형으로 나타나 있다.
나. 토마스 만은 인간과 인생의 모든 사건들과 그 배후의 일들에 관심을 갖는 소설가답게, 요셉과 그 형제들, 야곱 및 모든 등장인물의 삶과 사건들과 생각과 행동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도,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신의 의지와 구상, 자신과 동맹을 맺은 사람에 대한 신의 영적 축복, 신적 축복이 가져다주는 요셉과 야곱의 힘, 요셉과 야곱의 인생에 대한 신의 계획과 의지, 그 계획과 의지에 대한 요셉의 확신과 그로 말미암아 요셉이 노예생활과 죄수생활에서도 품위와 고상함과 진지함과 사랑을 가지고 사람들의 호의와 경외심을 얻으면서 신의 축복과 계획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었다’는 성경의 메시지를 아주 힘 있게 그러나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 이 책에서 요셉의 맏형 르우벤이 경탄한 어린 요셉의 정체성은 ‘위의 것, 즉 하늘에 있는 거룩한 것을 아래로 가지고 와서 세속의 것에 적응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고(2권 189면), 파라오가 놀라고 사랑한 요셉의 미덕또한 ‘거룩한 하늘의 것과 세속의 것을 결합시켜 세속의 것을 보살피면서 거룩한 일을 보살폈다’는 것이었다(5권 343면).
다. 토마스 만은 파라오의 감옥시절이 끝날 무렵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러 불려가는 요셉의 독백(5권 206-207면)을 통해서 요셉의 삶과 행동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전개하고 있다.
“하나의 순환과정이 끝나고 이제 막 다른 것이 반복될 차례였다. (…) 그리고 이번에는 지난번보다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어야 한다. 그건 다른 게 아니었다. 주인님(요셉의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도록 그분을 도와야 했다. 거기에 실수가 있어선 안 된다. 혹시라도 자기 때문에 지장이 생긴다면 그런 어리석은 일이 없다. 그건 믿음이 없는 탓에 세상의 운행을 방해하여 발목을 잡는 셈이다. 신께서 자신과 함께 높이 올라가려 한다는 사실을 굳게 믿지 못하고 긴가 민가 한다면, 눈앞에 다가온 기회를 잡지 못하고 서투른 행동으로 만사를 그르치게 된다. (…) 다가올 순간에 대한 기다림은 신뢰이기도 했다. 그 안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에겐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께서는 자신을 유쾌하게 대하시며 사랑하시며, 또 중요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믿음, 이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믿는 마음으로, 깊은 신앙심으로 만사에 노련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5권 206-207쪽).
요셉은 이 믿음을 가지고 보디발의 집에서, 감옥의 전옥장(典獄長) 앞에서, 파라오의 장관으로서 그 앞에 놓인 모든 직무를 최선으로 해내고 그와 관계 맺는 사람들에게 진실 되게 대할 수 있었다.
오늘날 개신교의 위기 원인으로 지목되는바 ‘영적인 믿음과 세속적인 인생의 분리’,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개인화, 맹목성’이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때, 현실 속의 사람 토마스 만이 창세기를 원전으로 한 장편 ‘요셉과 그 형제들’에서 제시하는 ‘하늘의 것과 세속의 것을 결합하는 것이 곧 거룩한 것’이라는 명제와 4편 6권에 걸친 그 풍부한 전개는, 성경 창세기의 신학적 주석서에 못지않은 풍부한 분량과 질적 깊이를 가진, 성경의 소설적 주석서(commentary)라고 부를 만하다.
이 책에서 중동 및 이집트 신화를 다루는 부분의 일부 서술은 정통적인 기독교 교리와 다소 부딪히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는 이 소설의 창작배경으로서, 당시 망명객이던 토마스 만이 ‘히틀러의 나치즘이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 이념의 근거로 게르만 신화를 이용하던 것을 우려’하고 게르만 신화를 신화로 반박하기 위하여 창세기와 중동신화를 다소 거칠게 끌어들였던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보다도 이 책의 핵심 주제와 미덕이 ‘하늘의 거룩한 것을 세속의 것에 적용하여 결합시키는 요셉의 삶과 사상’이라는 점에 착안을 한다면, 역대로 이 소설만큼의 수준을 달성한 창세기 및 성경 주석서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라. 이 책의 또 하나 진지함과 극적인 냉정함이 드러나는 부분은 요셉의 삶에 관한 신의 편애와 냉정한 배척에 관한 장면이다.
요셉이 보디발 집안의 최고집사 지위에서 파라오 감옥의 죄수로 다시 전락하는 대목에서 토마스 만은 “실제로 그분의 축복은 자기가 특별히 아끼는 자에게 특별한 호의를 베풀려는 편애의 결과로 도덕적인 세상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여하튼 그 분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거들먹거리던 악동 하나가 구덩이에 빠진 것은 사실이었다. 꿈이나 꿔대던 이 악동은 스스로 그분의 인식수단이 될 한 자의 후손이었는데, 구덩이, 곧 지하 감옥에 떨어진 게 벌써 두 번째였다. 모두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이전에는 증오의 잡초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사랑의 잡초가 무성하여 머리 꼭대기 위로 뻗쳤던 것이다. 그분은 준엄한 자들의 나라에 영광을 돌리는 척 준엄한 칼자루를 들어 올렸으나, 도덕적 세상에 속한 이 징벌을 이용하여, 막다른 골목에 오히려 문을 열어젖혀, 다시 말해서 땅 아래의 출입구를 열어 빛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을. 실례지만 그분께서는 또 다시 호의를 베풀어 더 높은 곳으로 올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벌을 악용한 것이다. 더 크게 만들어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벌! 이보다 더 큰 농담이 있겠는가? (5권 18-19쪽)”라고 신의 요셉에 대한 선택과 편애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의 5권까지 요셉의 인생 스토리는 여러 고난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자리에서도 신적 축복의 능력으로 감독자의 경탄과 호감을 얻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슬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에는 요셉의 성공 스토리에 불과한 것 아닌가’하는 상투적인 불만을 자아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요셉의 영적 축복의 성격과 그 한계에 대하여 요셉이 이집트 총리 (또는 농림부 장관)로서 지극한 성공을 거둔 5권 말미에서 이렇게 부언한다.
“라헬의 첫 아들, 야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낯설어진 총리에게는 특별한 사정이 있었다. 그에게 베풀어진 관용과 면제는 대가를 요구했다 그것은 요셉을 속세에 묶어두는 사슬이었다. 그래서 이싸갈과 단과 가드의 종족은 나왔어도 ‘요셉 종족’은 나올 수 없었다. 그 분의 원대한 계획에서 그(요셉)의 역할은 (…) 이 큰 세상으로 옮겨져서 그분의 자녀들을 보존해 주고 먹여 살리고 구원해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정황으로 보아, 그 역시 자신의 이러한 사명을 의식했고, 그렇게 느낀게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낯설고 세속적인 자신의 생활방식이 배척당한 자의 그것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해 식구들로부터 분리된 자의 것으로 이해했다"(5권, 392쪽).
여기에서 저자는 요셉이 받은 축복의 한계를 넌지시 제시한다.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이집트에 들어온 다음 요셉을 만난 바로 그 대목에서 야곱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기대했던 요셉의 성공신화를 하나님의 냉정한 기획으로 재구성한다. 결국 야곱(이스라엘)의 장자권, 영적 구원의 계보는 야곱의 애타는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가장 밀접하게 따르던 요셉이 아니라, 요셉에 대한 집단폭행, 살인미수, 약취유인죄의 공범 중의 하나인 레아의 4번째 아들 ‘유다’에게로 넘어가고 만다.
이 장면에서 요셉에게 경탄하고 호의를 가지면서 지금까지 소설을 따라왔지만, 요셉의 지나친 성공과 형통과 신적 축복에 다소의 질투와 지겨움을 느끼게 되는 현세의 ‘요셉의 형제들’ 즉 우리들은 상당한 위안과 평안함을 얻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지만 모든 것을 다 주지는 않는다. 선택받고 편애받은 자가 부분적으로 버림받고, 하나님의 편애를 받지 못해 괴로워하고 열등감을 느끼던 자들이 상속을 얻고 구원의 족보의 조상으로 된다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적 공평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정의의 심오함에 대한 신뢰를 가져다준다.
세상에서 회자되는 요셉의 성공스토리는 ‘영적으로도 축복을 받고 세상적으로도 축복을 받고자 하는’ 성공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의 이중적인 탐욕을 부르기도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소설이 창세기의 원전을 충실하게 따르면서, 야곱의 아들 중 세상적 장자인 요셉이 영적 상속권, 즉 이스라엘의 12지파 자리에 이름을 함께 하는 명예를 박탈당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신앙을 통해 모든 것을, 즉 세상적 자랑과 영적인 자랑 모두를 한 손에 움켜쥐려는 우리들의 욕심에 ‘Stop’ 사인을 보내는 대목으로, 토마스 만이 ‘요셉과 그 형제들’을 끝내는 시기에 우리들에게 보내는 창세기 요셉 장(章)의 핵심적 주석이라고 하겠다.
4. 땅 속에 파묻힌 보물 – 잊혀진 소설을 추천하며
성경을 원전으로 하여 각색한 소설이 많지도 않지만, 몇 권의 성경 소설을 읽을 때마다 단조롭고 지루한, 실망스러운 느낌들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려 6권이나 되는 이 책을 집 안에 들여놓은 후 한참 동안 책장 속에 내팽개쳐 놓고 손에 잡기를 주저하다가 1년이 지나서야 읽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2012년 마침내 이 책을 손에 잡은 후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극도로 심후한 내공(內攻)의 힘과 초식에 압도되어 주야를 관통하여 1주일 만에 4편, 6권의 장편을 다 읽게 되었고, 지금도 그 영향권 내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40대의 늦자락에 접한 토마스 만의 장편소설 “요셉과 그 형제들”은, 나로 하여금 ‘도대체 이런 소설이 있을 수가 있다니!’ 하는 경탄과 놀라움을 가져다준 신비한 소설이다. 이 책의 한글번역 또한 번역서의 생경한 말투를 거의 보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하고, 오리지널 한글로 쓰인 글로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정확하고 깊은 사상들을 표현하고 있다.
토마스 만 본인은 이 책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뒤늦게 2001년 처음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초판에 그치고 있으며, 나아가 부분 절판되어 대형서점에서도 6권을 한질로 구입하기가 어려운 상태에 있는데, 이는 아마도 6권이나 되는 소설의 분량 때문에 대중적인 반향을 크게 얻지 못하고 다소 잊혀져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세계적인 거장 토마스 만의 만년을 건 대작으로 한글 번역 또한 극히 잘 되어 있으며, 인간과 세상과 신에 대한 초절정의 심후한 이해를 제시하면서 소설과 철학과 성경주석의 모든 장르를 종합해 버린 일세의 거작인 이 작품이, 인간과 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모색을 하고 있는 우리 독자들에게 보다 널리 제시되고 읽혀서, 오늘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사상과 신앙을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게 만드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 이병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