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치철학적으로 볼 때, 테러(terror)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정치심리학적 측면으로, 테러에는 신의 영역에 속해 있는 ‘우연’ 또는 ‘불확실성’을 폭력으로 선취 또는 장악하려는 인간적 욕심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은 ‘공포’(paura)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자연적인 한계,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공포의 원인이 된다. 그러기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공포는 인간 한계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불가피한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정치적 사려로 우리를 인도한다. 반면 ‘테러’는 조작된 ‘공포’를 통해 일방이 상대방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적 폭력이다. 따라서 테러는 목표가 된 사회 구성원들에게 철학적 성찰이나 정치적 사려를 위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 사회에 잠재되었던 폭력성을 비이성적으로 분출시키거나 또 다른 형태의 갈등을 수반하기도 한다.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테러에서 보듯, 빈 라덴과 알카에다는 수많은 아까운 인명을 앗아감으로써 세상을 공포에 빠뜨렸고, 이 사건으로 인해 형성된 미국 시민들의 ‘공포’는 2001년 아프간 전쟁, 2003년 이라크 전쟁, 그리고 지금도 끝나지 않은 ‘테러와의 전쟁’을 촉발했다. 이렇듯 의도된 테러는 공포를 조작함으로써 인간의 욕망을 채우려는 의도의 예견된 결과, 즉 인간의 정치심리학적 흠결 그 자체인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정치사회적 측면으로, 테러는 힘의 불평등이 초래한 ‘지배와 비(非)지배’ 관계에 대해 국제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잘 가늠하게 해 준다. 최근까지 국제사회는 1차 대전 전후 제국주의 시대에 빈번하게 발생했던 반제국주의 테러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여전히 갖고 있었다. 나라를 잃은 사람들의 절규, 독재 속에 신음하는 시민들의 애환, 그리고 노예적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에 대해 국제사회는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실제로 폭력적 수단, 무분별한 민간인에 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비난의 수위를 결코 낮추지 않지만, 국제사회는 테러를 유발한 ‘지배와 비(非)지배’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두 손을 걷어붙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기에 최근 테러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분은 ‘지배와 비(非)지배’ 관계의 개선이라는 반제국주의와 반독재 운동이 갖던 ‘테러’의 의미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잇단 근본주의 테러단체의 무분별한 폭력에 대한 국제사회의 반감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테러’는 더 이상 ‘지배와 비(非)지배’ 관계의 청산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으며, 테러는 일방적 폭력을 통해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사악한 의도일 뿐이라는 공감이 형성된 것이다.

 

2.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크게 세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이 책은 우리에게 ‘분단’이 초래한 비극을 통해 인간적 흠결에 대한 ‘연민’이 분단의 평화적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Hirshman은 그의 책 The Passioins and the Interests(1997)에서 인류의 문명사를 ‘쾌락, 지배, 그리고 명예에 대한 비이성적 욕구를 ‘이익의 추구’라는 합리적 욕구로 대체한 과정으로 이해했다. 즉 비이성적인 욕구들이 가져오는 파괴적 속성을 ‘시장’과 ‘법’이라는 합리적 제도로 다스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이야기하는 ‘비극,’ 그리스 말의 ‘하마르티아’(hamartia)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즉 ‘이익’ 또는 ‘국가이익’이라는 동기조차도 매우 ‘비이성적’일 수 있으며, 그러기에 인간의 비이성적 동기를 제어하는 방법은 ‘이익’이 아니라 ‘연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Poetics)에서 ‘최고의 비극은 동정(eleos)과 공포(phobos)를 유발하는 것’이라고 말했듯이(chapter 6), 이 책의 저자는 ‘이념’ ‘정의’ ‘민족’ ‘자주’ 등 엄청난 명분을 앞세운 국가권력에 의해 망가진 한 젊은이의 삶을 통해(170쪽), 우리에게 ‘이익’뿐만 아니라 ‘연민’도 분단이 초래하는 ‘공포’를 해결할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이래 정치철학자들이 말하던 ‘절제’가 가져다줄 수 없는 바를 ‘연민’을 통해 보완하려던 그리스의 극작가들처럼, 저자는 인간적 흠결에 대한 ‘연민’이 ‘이익’만큼이나 분단의 평화적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 책은 분단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이 저지를 수 있는 ‘진부함’(banality)을 경고하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을 떠올렸다. 주지하다시피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유대인 학살을 지휘했던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면서, ‘악의 진부함,’ 즉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도 잔인한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을 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른다는 점을 통탄한 바 있다. 나는 처음에 이 책을 이런 방식으로 읽었다. 전사로 훈련받은 개인, 이 개인의 평범함,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인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책의 중간부터 말미까지 지속된 남북 지도자들의 오판에 대한 지적, 그리고 이런 오판에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246-247쪽), 나는 곧 저자는 우리 모두의 ‘악의 진부함’을 경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악이란 뿔이 달린 괴물이 아니라, 분단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쉽게 용인하는 ‘악’ 속에서 기생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국가범죄,’ 국가의 정치권력이 개인 또는 집단에게 불법적으로 또는 비민주적으로 자행하는 폭력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국가범죄’가 ‘국가이성’(raison de’tat)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취해야하는 비판적 태도를 포기할 때가 잦다. 그러나 이 책이 지적하듯, 이런 태도는 ‘테러 이외의 방법은 없다’는 북한 집권층의 오판, 이런 오판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북한체제의 유지, 그리고 이런 오류를 반복적으로 정당화시키고 있는 분단의 지속을 도와줄 수 있다(50-65).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아웅산 테러는 시민의 정치권력에 대한 견제력이 전무한 북한 지배층의 자의적 통치의 결과물이다. 그러기에 북한은 국제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쉽게 저버릴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북한은 “명백한 증거와 국제적인 비난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자신들의 관련을 부인할” 수 있는 체제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책은 소위 ‘숨겨진 통치’(arcana imperri)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필요성, 그리고 민주적 통제를 제도화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얼마나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세 번째 측면에서 이책은 독자들이 기대할만한 몇 가지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지를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첫째, 정치권력의 '숨겨진 통치'에 대한 민주적 시민의 제도적 견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이 책은 '강민철'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북한 테러리스트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기에 '숨겨진 통치'에 대한 시민적 견제는 논의의 핵심이 아니었을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의 정치체제가 자행한 행위에 대한 논의였기에, 시민적 견제를 언급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당시 남한 정부의 부실한 후속 처리과정을 언급했듯이, 아웅산 테러와 강민철의 죽음은 '연민'이라는 기제를 통해 '인간애'로 치유할 수 없는 정치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바로 '다수의 안전'을 빌미로 민주주의 사회에서조차 은밀하게 행해지는 '숨겨진 통치'의 정치적 책임, 그리고 '숨겨진 통치'가 초래한 결과를 시민들 모두가 떠안아야하는 정치사회적 문제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예외적 통치행위'를 필요로 하고,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권한을 통치자에게 부여함으로써 투명한 정보공개와 민주적 심의를 우회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구비해놓고 있다. 그러나 예외적 통치행위를 인정하는 것과 '예외적 통치행위'에 대한 책임에 무관심한 것과는 동일한 말이 아니다. 어떤 특정 사안이 신속한 판단과 은밀한 행동을 요구했더라도, 사안의 처리 이후에 그 사안의 성격과 이 사안에 대응하기 위한 '통치 행위'가 과연 적절했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예외적 통치행위'는 더 이상 예외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자의적 지배에 무력한 시민의 일상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변함없이 전제적이고 폐쇄적인 북한은 논의에서 제외하더라도, 민주화 이후에도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묵인되고 있는 수 많은 '숨겨진 통치'에 대해 한번 지적하고 넘어갔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숨겨진 통치'의 사후적 처리에 대해 우리의 민주적 절차는 얼마나 민감한지를 당연히 물어보았어야 했다. 

 

둘째, '조국에 대한 사랑'(amore della patria)이나 '헌신적 충성'(Die for country)이 국제사회의 일반적 가치기준에 부합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선행되었어야 했다. 조국도 민족도 버려버린 '강민철'의 쓸쓸한 죽음에서, 오늘도 국가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를 요구하는 민족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된다. 내 나라, 내 공동체, 내 가족을 지키다는 명목하에 자행되는 수 많은 폭력을 우리는 보아왔다. 특히 '개인이나 집단의 자의적 의지에 종속적인 체제' 하에서 자행된 '숨겨진 통치'의 잔인함을 우리는 보아왔다. 아이히만의 '진부함'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젊은이들의 '조국에 대한 사랑'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수 많은 국가범죄를 보게 되는 것이다. 과연 '애국심'이란 카텝(George Kateb)이 말하듯 '어떤 추상적인 것을 위해 죽고 죽일 수 있는, 이른바 자기애가 자기숭배와 집단도취로 전환된 것일 뿐일까?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연민'은 개별 국가차원을 넘어 인류 보편적 차원으로까지 확대 적용될 수 있는 정치적, 도덕적 원칙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었어야 했다. 즉 사해동포주의적 막연한 인류애와 폐쇄적인 민족주의의 편협함을 모두 극복할 수 있는 올바른 형태의 '애국심'에 대해 토론하고, 이러한 '애국심'이 기초해야할 정치사회적 원칙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했었다는 것이다. 사실 분단의 아픔과 쓰라린 전쟁을 경험한 우리이기에 더욱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조국'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서 '인간성'이라는 이름만으로 시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며, '인간성'에 대한 언급없이 '국가가 없이는 권리도 정의도 없다'고 말하는 운동이 얼마나 무모한지 알기에 더욱 그러하다. 만약 이러한 노력이 없다면, '숨겨진 통치'를 견제할 수 있는 시민적 능력도, '숨겨진 통치'가 가져온 결과에 대한 시민적 책임도, 그 어느 것도 모두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뒷 표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한 테러리스트의 삶과 죽음으로 보는 남북 대결의 비극과 국가폭력의 야만성"이라는 글귀다. 남북 분단의 비극 안에서 기생하는 '지배하려고 하는 욕구,' 그리고 이러한 지배하려는 욕구가 빚어낸 국가폭력의 야만성을 이 책은 애초부터 전달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실미도' 같은 곳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국가범죄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처와 견제를 요구하지 못했다. 민주주의 사회인 남한만이라도 이러한 '숨은 통치'가 가져올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하는지를 저자에게 들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저자가 상아탑에만 안주하지 않고, 직접 국정의 최일선에서 보고 들은 분이라 더욱 그렇다.         

 

*이 저술을 인터넷과 카카오페이지에 게재할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3, 2013년 11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