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헌법학의 권위자인 마크 V. 터쉬넷은 헌법을 정치법(political law)으로 바라본다. 그는, 헌법텍스트의 해석을 통해 그 의미를 추출하는 통상의 법학방법론을 떠나, 헌법을 구성하고 실천해 나가는 종국적인 요소는 정치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권력분립과 법치주의에 입각한 입헌민주주의(constitutional democracy)가 바로 이런 정치를 통제하는 핵심적인 틀이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비판법학의 영향권 안에 있다. 비판법학은 도그마틱으로 점철되었던 법학을 부정하고 법원의 법창조적 기능을 강조하였던 법현실주의의가 지나치게 사법과정에만 집착하였다고 지적하면서 법이 작동하는 보다 거시적이고 동태적인 구조를 분석하고자 한다. R. 웅거나 D. 케네디, M. 호위츠 등을 필두로 한 일단의 연구자들은 법의 자율성, 중립성, 객관성이라는 신화를 허위의식으로 간주한다. 법의 해석이나 법원의 판결 같은 것들은 정해진 규범의 틀을 따라 논리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익집단이나 계급, 경제제도 등의 이해관계가 각축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결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마르스크주의나 구조주의 혹은 현상학과 같은 분석틀을 이용하여 법의 이면에 존재하는 정치적 역학관계 또는 경제적 토대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법현상 혹은 법과 사회의 관계들을 분석해 내고자 하였다.  

터쉬넷은 이런 비판법학을 두고 “정치법”이라는 말로 요약한 바 있다. 비판법학은 한마디로 법의 결정요인을 정치에서 찾고자 한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비판법학은 80년대를 지나오면서 다양한 분파와 조류들로 발전, 분화되어 나갔지만 법의 자율성이라는 신화 이면에 존재하는 이런 정치성의 문제는 학술연구에서뿐 아니라 법실천이라는 점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관심점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터쉬넷은 이런 “정치법”의 맥락에서 자신의 연구틀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규정하면서도(유럽의 맥락에서는 과연 마르크스주의자라 할 수 있을런지는 별론이지만) 동시에 자유주의적(liberal) 지향을 가지고 있는 그는 계급적 갈등을 비롯한 다양한 세력관계들을 포함한 “정치”의 관념으로써 법의 진보에 대한 자신의 희망을 논증해 왔던 것이다. 

이 책은 “헌법은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렇게 헌법은 다른 사회현상과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에 설 때 이 질문은 명백히 잘못되었다. “중요”하다(matter)라는 말의 주어가 되려면 그 자체 독자적인 영향력이나 결정력이 있어야 하는데, 터쉬넷의 관점에서 헌법은 독립변수가 아니라 제반의 정치적 요소의 작동여하에 따라 그 내용이 결정되는 종속변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에 제대로 어울리는 제목은 “헌법은 왜 중요하지 않는가?”이어야 한다. 다만, 이 책은 예일대학교출판부가 “○○은 왜 중요한가?”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시리즈물의 일환으로 발간된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반어적 의미로 이해해도 괜찮을 듯하다. 

사실 이 책은 일관하여 헌법의 법(law)으로서의 의미를 한켠으로 제쳐두고자 한다. 터쉬넷은 L. 크래머의 󰡔정치법으로서의 인민입헌주의󰡕(Popular Constitutionalism as Political Law)라는 책의 서평에서 정치와 법을 지향성에 따라 구분한 적이 있다. 그는 법은 과거회고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정치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이루어진다고 본다. 법은 과거의 결단에 현재가 매이는 것이지만, 정치는 미래의 전망이 현재를 구성하는 것이라는 것이 그의 개괄적인 구분선이다. 

그가 이 책의 첫머리에서 제시하는 기본권이라는 것은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또한 이런 구분 속에서 정리된다. 그에 의하면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이 우리의 삶을 떠받치며 그런 의미에서 헌법은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도 형식적이고 일면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그 기본권이라는 것이 과거 헌법제정자들의 결단이나 혹은 그 결단이 문서화되어 있는 헌법텍스트로부터 연역되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기본권들은 법원―특히 연방대법원―이 어떠한 법상태를 기본권으로 인정하고 선언하였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연방대법원은 대통령과 상원이 지명하고 인준하는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다시 정치의 중요성이 드러난다. 이 지명과 인준의 절차 자체가 정치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치는 정당정치에 의해 좌우된다. 그래서 터쉬넷은 헌법이 중요한 이유는 정당이 중요하기 때문이고 헌법은 이 정당체제의 작동에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며 그 수준에서 헌법은 중요한 것이 된다는 결론이 이르게 된다.

이 책의 제1장은 그 중에서 헌법과 정당정치의 관계에 대해 설명한다. 헌법이 정하고 있는 연방주의는 소선거구제의 선거방식과 결합하여 양대정당체제를 구성해 낸다. 그리고 헌법이 명령하고 있는 권력분립의 틀이 이에 결합하면서 미국의 정치에서는 여대야소의 단점정부뿐 아니라 여소야대의 분점정부까지도 출현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헌법의 몫은 여기까지다. 실제 중요한 것은 단점정부인지 분점정부인지, 혹은 각각의 정당들이 이념적으로 통일되어 있는지 아니면 분열되어 지역 단위의 정당들의 연합체에 불과한 것인지, 그 정책의 결정주체는 주정부인지 연방정부인지 등의 문제이다. 기본권의 인정이나 그 기본권의 내용은 이 과정에서 결정될 따름이 된다. 미국의 헌법은 정당조항이 아예 없지만 실제 이 헌법의 내용과 실효성 여하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정당이 되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수정헌법 제1조와 같은 규정들은 선거운동이나 정치자금의 문제와 관련하여 나름의 의미를 가지기는 한다. 그러나 그조차도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그 내용이 결정될 따름이다. 요컨대, 헌법이 중요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헌법이 미국의 정당체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작동되는가의 윤곽 정도만을 구성한는 것이다. 그것도 헌법 그 자체로써 그런 것이 아니라 연방대법원이라는 또 다른 기관이 헌법텍스트를 해석하여 헌법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판결들에 의해 윤곽이 그려질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헌법을 해석하는 연방대법원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말은 정당한가? 이 책의 제2장은 연방대법원조차도 정치에 비하면 그 역할이 상당히 제한적일 뿐이라고 대답한다. 연방대법원조차도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정치체계의 한 부분이자 그 결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즉, 연방대법원의 헌법해석은 그때그때의 정치체제에 따라 혹은 대통령의 리더십이나 정당과의 관계 등에 따라 달라진다. 그 헌법해석조차도 정치가 그 내용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사법심사제도 자체가 정치적 선택의 결과이다. 뿐만 아니라 연방대법원의 판결 또한 정치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선고된다. 정치인들이 원하는 것이나 스스로는 하기 싫거나 하기 까다로운 결정들을 연방대법원이 대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은 그 단적인 예가 된다. 프라이버시에 관한 판결이나 인종통합교육에 관한 판결 같은 것들은 정치적 혹은 지역적 이단자들로 하여금 전국적인 기준에 복종하게 만드는 일을 연방대법원이 대신한 것이다. 그리고 연방대법원이 수행하는 이런 정치적 역할들은 대법관지명제도로부터 파생된다. 대법관을 지명하는 과정 그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지명권을 가진 대통령은 물론 그에 대한 인준권을 가지는 상원과 상원의원들 또한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즉, 자신들이 이해하는 대로 헌법을 해석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대법관으로 지명하고 또 인준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이해하기 위해 굳이 구체적인 헌법이론을 파고들어야 할 필요는 없게 된다. 대통령의 통치체제, 그를 지명한 대통령, 정당과 정부의 관계, 의미 있는 사회운동의 존재여부 등만 제대로 파악한다면 그 자체로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보이는 주된 흐름은 포착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진보적 자유주의자인 저자는 입헌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헌법이 중요한 이유는 헌법이 정치의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정치의 구조가 우리의 뜻에 부합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우리는 헌법을 재구성할 필요는 있다. 

제3장은 이 문제를 정책결정에서 패배한 사람이 취할 대안을 중심으로 다룬다. 그가 원하는 정책대안이 채택되지 못한 이유가 헌법에 반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치구조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 때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정치구조는 헌법이 만들어내었지만 그것은 너무도 단단히 얽혀 있고 우리의 생활을 결정하게 될 기본권들은 이런 정치구조의 결과로 제시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기존의 헌법이 얽어놓은 경직된 정치구조를 헌법개정을 통해 아예 바꾸어버리거나 혹은 그것을 우회하여 돌아가는 방법이다. L. 사바토나 S. 레빈슨의 헌법개정안들은 단단히 연결된 헌법체제를 개혁하는 중요한 지점들을 제시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또 다시 정치로 돌아가 헌법을 우회할 수 있는 관행이나 편법들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선거를 현재와 같은 간접선거가 아니라 전국을 선거구로 하여 실질적으로 직접선출하는 방식이라든가 연방대법관에 대하여 현재 종신제로 되어 있는 임기를 비교적 장기의 기간으로 인정하되 정기적으로 교체할 수 있도록 하는 임기제로 전환하는 방식은 그 예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다. 우리가 정치를 향해 나서는 일이 그것이다. 터쉬넷은 이 책에서 일관하여 헌법은 중요하지 않으며, 연방대법원의 결정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님을 논증해 왔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정치이기 때문이다. 이런 논의는 헌법 앞에서 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 요체는 헌법과 연방대법원에 주어진 자율성과 신성성의 신화를 깨는 데 있다. 헌법의 해석과 연방대법원의 판결이 정치의 산물이라면, 동시에 나의 주장과 나의 이념 또한 정치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을 통해서 나의 주장과 이념이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대항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을 대체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젖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패배하는 이유는 헌법이나 연방대법원의 판결에 제대로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판결이 나오게 되는 정치시스템 자체가 나에게 불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판결을 바꾸려 노력하기 보다는 정치의 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라, 라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 된다. 헌법을 정치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른 면으로는 우리가 정치적으로 능동적으로 되어야 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헌법적으로 이기기 위해서 굳이 로스쿨에 가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우리와 유사한 견해를 가진 대통령후보자를 찾아내고 그를 당선시키기 위해 거리로 나가는 것 혹은 나의 견해를 지지하는 시민단체를 방문해 보는 것 그것이야 말로 우리를 “모범적인 헌법시민”으로 만드는 길인 것이다. 

이 책에 대해 몇몇 서평은 “옳다. 하지만 ~”의 입장을 취한다. 어떻게 보더라도 헌법은 정치에 관한 법인 만큼 그것이 정치의 영향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치 자체를 규정하는 헌법의 법으로서의 힘 즉, 그의 규범력이 어떻게 도출되는가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논의들이 제시된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일단 두 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먼저 이 책은 주로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헌법과 정치의 관계를 다룬다. 터쉬넷이 언급한 Brown사건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이 판결의 정치적 배경은 미국의 남북전쟁을 야기하였던 Dred Scott사건에서부터 “분리하되 평등”의 원칙을 선언했던 Plessy 사건까지 연결된다. 긴 역사를 거쳐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던 노예해방-인종차별철폐의 정치가 자본주의의 발달사와 함께 이 판결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낙태를 허용한 Roe판결도 마찬가지다. 그 배경에는 여성운동의 긴 역사가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쟁취한 Warren법원(더불어 그를 계승한 Burger법원)과 그들을 임명했던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의 진보적 성향은 이들의 주장을 비로소 헌법적 권리로 선언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조금 다른 반론도 가능하게 된다. 적어도 이 사건 판결들을 내어놓은 연방대법원은 그 후 급격히 보수화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보수적인 성향의 대법관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성향의 Burger대법원장조차도 Brown판결을 파기하기는커녕 그 후속조치인 통학버스제도를 합헌이라 한 만장일치의 판결을 내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낙태를 금지하는 효과를 가지는 수많은 판단들이 연방대법원의 판결의 형식을 빌어 속출하였음에도 Roe판결은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 선례가 되어 다른 법원을 구속한다. 

이들은 여전히 연방대법원의 판결이며 미국연방헌법의 한 부분이며 그것과 관련된 일련의 기본권들을 구성한다. 대통령선거 등의 정치과정에서 패배한 사람조차도 낙태를 금지하려 애쓰는 보수적인 행정부에 맞서서 낙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도 바로 이 헌법과 이 기본권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제도정치를 우회할 수 있는 통로가 존재한다는 것, 바로 그 사실로 인해 미국의 입헌체제는 또 다른 대표의 경로―연방대법원이라는 또 다른 정치적 아레나―를 마련하게 된다. 연방대법원의 존재 그 자체가 입헌적 민주주의체제하에서 대표를 강화하는 새로운 장이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반론은 미국의 사법체계가 가지는 내적 구속력에 터를 잡는다. 미국의 연방헌법은 연방대법원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것은 연방대법원의 하위법원 즉 연방항소법원이나 연방지방법원 등에 의해서도 해석되고 정서된다. 뿐만 아니라 각주의 각급법원들 또한 연방헌법 혹은 연방법원의 헌법해석례들을 참조한다. 더욱이 미국의 법률가사회는 이들 법원의 연방헌법 해석례들을 참조하며 분석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들이 담당하고 있는 업무나 사건에 적용하여 그 내용을 재생산하기도 한다. 그들은 연방대법원의 해석례에 구속되고 그에 복종하여야 할 의무를 지는 동시에 그것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평가하는 주체로 자리 잡는다. 또는 그들은 연방대법원이 심사숙고하여 판단하여야 할 사건들을 정리하고 분석하고 체계화하여 연방대법원에 제출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나름으로 헌법을 해석하고 사건을 포섭하며 그 결과들을 연방대법원에 소장이나 준비서면의 형태로 혹은 의견서의 형태로 제출하며 이를 통해 연방대법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연방대법원의 헌법판단은 이 모든 것들과 함께 이루어진다. 물론 연방대법원이 참조하는 대상은 (자신을 지명한) 대통령이나 그 체제 혹은 그의 정당 또는 당대의 사회운동의 향배 등이다. 그러나 동시에 연방대법원은 자신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일련의 법공동체에 대해서도 무언가 응답을 하여야 할 사실상의 의무를 지게 된다. 연방대법원은 그 법공동체가 사용하는 법률용어와 법논리들―이것이 법의 도그마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들이다―을 약간은 변경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전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는 없다. 물론 이런 논의들은 자칫 분석법학이나 개념법학의 관점으로 흘러들어가 터쉬넷의 논의가 터를 잡고 있는 준거와는 전혀 무관한 비판으로 흘러갈 우를 범할 수 있기에 주의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연방대법원이 미국의 사법체계라는 거대한 장 내부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단위라고 한다면, 연방대법원의 판단 하나하나는 이 사법체계와의 협업 내지는 공동작업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따라서 그 속에서 통용되는 개념과 논리 나아가 그것이 기대고 있는 기본적인 가치체계―예컨대, 권리와 의무의 결합, 인간상, 사회질서 등―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게 된다.

물론 위의 비판들은 터쉬넷의 관점에서 보자면 다른 유형의 정치를 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정치 전반에 걸친 거시정치가 아니라 연방대법원 내부 혹은 법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미시정치가 그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헌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터쉬넷의 판단은 다시금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연방대법원을 구성하는 권력을 가진 대통령과 상원, 그리고 이들을 통제하는 정당과 선거과정 등은 헌법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면서 우리의 주장과 이념들을 저버리기도 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능동적 유권자로서 ‘모범적인 헌법시민’이 되기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헌법적 결여를 우리가 주체가 되는 정치로 메꾸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연방대법원 혹은 사법부 내부에서의 정치는 비록 터쉬넷의 거시정치론에서는 크게 주목되지는 않았지만, 그 또한 우리의 헌법을 꾸며나가는데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정치가 된다. 헌법의 해석 혹은 연방대법원의 판결을 구성하는 헌법담론들을 우리의 것으로 전유하기 위한 정치가 그것이다. 여성해방의 담론들을 낙태와 결합시키고 이를 프라이버시라는 헌법적 용어로 전환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주장은 헌법적 정당성 혹은 입헌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터쉬넷의 이 책은 사법관의 지배(juristo-cracy)가 민중의 지배(demo-cracy) 즉 민주주의와 법의 지배를 압도해 버리는 우리나라의 현 상황을 되비춘다. 가열찬 민주항쟁은 현재의 1987년체제를 만들어내었지만, 이전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상태에서 법이란 민주주의를 배제하는 또 다른 권력수단으로 변형된다. 과거의 국가 통치술이 중앙정보부를 중심으로 행사되던 적나라한 폭력이었다고 한다면 절차적 민주화의 틀을 거쳐가는 현재의 국가 통치술은 법치로 포장된 또 다른 폭력이라는 것이다.

 

검찰이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자리 잡게 되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갑작스레 정치의 중심에 들어서는 양상은 이를 잘 보여준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성과로 지목되는 평화적 정권교체의 경험들이 대부분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로 얼룩져 버린 것이나, 남북정상회담의 대화녹취록의 공개라든지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한 공안검찰의 횡포와 같은 것들은 검찰 그 자체가 정치의 중요한 플레이어로 기능하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 

법원도 다르지 않다. 유난히 강력한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이끌고 있는 법원은 정치부문의 수요―이는 경제부문의 요구를 적극 수용한다―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경로가 되어 있다. 긴급조치를 비롯한 유신정권이 자행한 국가폭력을 사법적으로 지워나가기는커녕 그나마 이루어졌던 긴급조치 위헌 판결들을 되돌이키려는 조치들을 내어 놓고, 통상임금의 범위를 축소하고 KTX 여승무원들이 한국철도공사의 근로자가 아니라고 하는 등의 반노동적 판결들을 양산해 내는 모습은 정치로서의 법, 정치법으로서의 헌법이라는 이 책의 명제가 가장 조악한 형태로 현실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헌법재판소도 이런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행정수도이전을 위헌이라 선언한 결정이나 통합진보당에 대한 강제해산결정과 같은 것은 헌법해석의 결과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헌법을 빙자하여 헌법을 무력화하는 또 다른 국가폭력인 만큼 그것은 아예 이 책의 논점을 벗어나 버린다. 공무원이나 교원들에 대해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있는 것을 합헌으로 선언하며 국가보안법과 같은 공안관련법들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해버리는 등 민주사회로의 이행에 있어 중요한 국면들마다 가로막고 나서는 헌법재판소의 결정들은 헌법의 해석보다 중요한 것이 정치적 권력작용임을 잘 보여준다. 

요컨대, 우리나라에서의 법의 지배는 자율적이고 객관적인 법의 우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권력에 기생하는 혹은 또 다른 정치권력으로 전이된 사법관의 지배를 의미하며,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현실은 법과 헌법이 결코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물론 이런 모습은 이 책이 말하는 정치법으로서의 헌법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터쉬넷은 헌법의 의미 자체를 지워버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효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헌법을 전제로 그것이 규범력을 가지게 되는 원초적인 힘이 정치에서 나오는 것임을 설명하고자 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헌법이나 헌법적 결정을 바꾸려면 헌법전을 들여다보기 이전에 그 배면에 자리 잡은 정치의 문제를 먼저 직시해 볼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의 입헌주의는 아직도 여전히 헌법을 지워버린 상태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민주화의 틈새를 타고 사법관이 정치의 전면에 나선 상황에서 헌법은 법의 이름을 획득하기 보다는 여전히 사법관이 독점하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이자 또 다른 통치술로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미국의 경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미국의 법정치는 최소한 법의 형식 뒤에서 이루어진다. 정치적 결정들이 그대로 법원의 판결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법공동체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 나름의 헌법적 개념과 헌법적 논리들로 포장된 다음 법원이 판결로 세상에 나타난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법이 그대로 정치권력의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법관이나 검찰과 같은 사법관들은 당시의 지배권력을 위한 대행자(agancy)로서만 기능한다. 권력과 정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가능한 법담론들을 창출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터쉬넷의 모범적인 헌법시민이라는 명령은 우리의 경우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헌법은 정치의 법이기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헌법이 아니라 정치라는 터쉬넷의 정리는 우리에게는 헌법실천의 명령으로 수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이 책의 주된 메시지는 헌법의 탈신비화에 있다. 헌법은 헌법재판관이나 법관 혹은 검찰과 같은 사법관이 독점하는, 우리의 삶 저 편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이 그 헌법의 내용과 의미와 효력을 결정하게 되는, 그래서 우리의 삶으로 구성되는 일상의 정치가 헌법을 결정하는 주된 변수가 될 수 있음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 생명연장장치의 제거와 관련한 테리 쉬아보법이라든지, 낙태허용판결, 피임도구판매와 관련한 사생활권의 문제, 동성애자들의 권리에 관한 사건 등은 하나같이 우리의 일상생활 그 자체와 관련된 것들이다. 일상의 생활과정에서 발생하는 법문제를 우리의 이웃들이 소송의 형식으로 혹은 입법정책의 형태로 이슈화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이 이슈들을 평가하고 결정하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 있다. 법관을 비롯한 사법관들은 법 혹은 헌법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자신들만의 교리로써 그 이슈를 재단한다. 혹은 이 법관의 배후에 자리 잡고 그들의 결정성향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대통령, 상원의원 혹은 그들의 정당들―은 다시 이를 정치라는 이름을 내걸며 자신들만의 프로세스를 통해 마음대로 결정해 버린다. 이 책의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이 그들의 논리로 결정하는 것들을 우리는 헌법이라는 숭고한 이름으로 받아들이는―보다 정확히는 받아들일 것이 의무지워지는―잘못된 현실을 우리 스스로 고쳐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헌정체제에서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여기서 두드러진다. 촛불시위에 나선 시민들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조문을 목놓아 외쳤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바로 그 헌법을 전면에 내세우며 촛불시위의 대상이 되었던 이슈들을 하나같이 정당화하였다. 그들의 헌법은 우리의 헌법과 다른 것이었다. 이 책은 그 이유를 설명한다. 나아가 그들의 헌법이 우리의 헌법과 동일한 것으로 치환될 수 있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엄숙한 과제 하나를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