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밀턴의 『실낙원』, 이 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본 사람도 거의 없다. 중·고등학교 때 세계사 과목에서 달달 외우고, 국가시험 볼 때에도 책명과 연도와 작가를 열심히 암기했지만, 막상 책을 사서 손에 잡고 읽은 일은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일반 서점의 서가에 책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둘째, 문학 장르상으로 이 작품은 잘 안 읽혀지는 서사시(敍事詩), 해석조차 어려운 17세기 고전 영어로 쓰인 글이니, 영문학 전공자가 아닌 나 같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손을 댈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고전(古典)들도, 우리가 수도 없이 내용을 들어 잘 아는 괴테의 『파우스트』도, ‘희곡(戱曲)’이라는 형식적 장벽과 ‘눈에서만 떠다니고 머리에는 들어오지 않는’ 번역어들의 난해함 때문에, 막상 책을 붙잡고 즐겁게 완독한 사람은 아주 극소수인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내가 밀턴의 실낙원을 도통 읽으려 들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이라는 책의 종교성 제목으로 인하여 이 책을 ‘너무 뻔한 답(答)’을 되풀이하는 책으로 지레 짐작하고 멀리한 것이다. 교회를 다니지 않던 시기, 인간의 힘으로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인본주의(人本主義)와 휴머니즘의 신념으로 살던 시절에 나는 기본적으로 성경 얘기도 싫어하고 기독교문학도 싫어했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인간의 이상주의로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의 한계에 절망을 느끼고 신본주의(神本主義) 쪽으로 기울어 종교서적들을 섭렵하던 시절에도, 나는 굳이 ‘실낙원’을 읽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성경 창세기 3장에 자세하게 설명된 추락(墜落, The Fall)의 스토리에 추가해서 무슨 특별히 읽을 만한 이야기가 더 나올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로 성경의 교훈을 가르치려는 문학작품은 성경보다 재미가 없고, 성경에 반대하는 문학작품은 성경과 관계없는 딴 소리들을 한다. 그래서 둘 다 재미가 없다. 나는 그 유명한 밀턴의 실낙원도, 아마 ‘오리지널’ 성경보다도 훨씬 재미없게, 성경이 내린 ‘답’을 지루하게 되풀이하는, 상투적인 ‘가리지널’ 기독교문학일 것으로 짐작하고, 아예 쳐다보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관심 없던 내가 ‘실낙원’을 읽게 된 계기는, 우연히도 최근 아들 녀석이 읽고 난 메리 셸리(1797~1851)의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년 작품)을 주워 읽은 일이었다. 우연히 읽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생각보다 꽤 괜찮았고, 아들 녀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깊은’ 작품이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주인공은 의외로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 사체(死體)의 조직들을 모아서 만든, 이름도 없는 ‘피조물(Creature)’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Creature)’은 이후 많은 공포영화나 소설을 통해 흉측하게 생기고 힘이 센 근대 괴물(怪物, Monster)의 원조처럼 되었지만, 막상 소설 속의 피조물은 훨씬 인간적이고 ‘깊고’ 철학적이며, 오히려 이 소설의 조연인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은 그에 비해 훨씬 연약하고 어리고 비겁하며 무책임하고 ‘얕고’ 즉자적이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는 흥미롭게도 네 개의 ‘잃어버린 낙원(Paradise Lost)’이 있었다. 

첫 번째 실낙원은, 불쌍하게도 만들어지자마자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소설의 처음부터 끝 장면까지 세상 속에서 혼자 고독하게, 사람들과 어울려 공감과 사랑을 받으려고 몸부림치지만 모두에게 버림받는 「실패한 피조물(Creature)의 실낙원」이고, 두 번째 실낙원은, 지식(Knowledge)에 대한 열정으로 생명체를 창조해 내지만 자기가 만든 생명의 불완전함(흉한 외형)에 놀라 도주해 버리는 무책임한 창조자, ‘자기의 이브’를 만들어달라는 피조물의 요구를 거절하고, 피조물의 복수로 ‘자기의 이브’인 아내 엘리자베스와 가족들을 모두 잃고는, ‘자기가 만든 괴물의 형상을 따라’ 복수심에 불타는 또 하나의 괴물(another Monster)로 전락하는 「실패한 창조자 프랑켄슈타인의 실낙원」이다. 

세 번째 실낙원은 불행한 작가의 인생으로,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산고로 엄마를 잃고, 17살에 유부남 시인 퍼시 셸리와 사랑의 도피를 벌여 셸리의 본부인이 뱃속에 아이를 가진 채 물에 빠져 익사하는 참극을 경험하고, 그 사건 전후로 낳은 두 딸의 생명을 모두 갓난아기 때 놓쳐버린, 「메리 셸리, 버림받은 딸(피조물)이자 실패한 엄마(창조자)의 실낙원」이고, 네 번째 실낙원은 이 소설의 원전 격으로, 소설의 주인공 피조물(Creature)이 우연히 구해서 읽으면서 그 속에서 인간의 언어와 역사를 독학으로 배우고, 자신의 고독과 절망의 모델로서 ‘창조주에게 버림받고 창조주에게 대항하는 사탄’을 발견한 책, 「피조물(Creature)의 추천도서 존 밀턴의 실낙원」이었다.

이처럼 우연히 집어든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소설 전체를 가득 채운 ‘실낙원’ 모티브를 읽으면서, 나는 이 소설의 비극적 영웅 피조물(Creature)이 ‘강추’하는 권장도서 존 밀턴의 『실낙원』을 읽고 싶은 충동을 비로소 가지게 되었다. 과연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원전에 해당하는 밀턴의 실낙원에서는 피조물인 인간의 운명과 절망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creature)의 모델인 사탄은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궁금증을 느끼면서.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나의 선입견과 달리, 밀턴(1608~1674)의 『실낙원』은 전혀 ‘뻔한 답의 책’이 아니었다. 세 가지 점에서 밀턴의 실낙원은 나의 예상과 달랐다. 첫째, 실낙원 주인공들의 역할과 비중이 생각과 달랐고, 둘째, 청교도혁명의 주역이었다가 왕정복고(1659) 후 은둔생활을 하게 된 작가의 인생배경이 짐작과 달랐으며, 셋째, 자유(自由)와 순종(順從), 신과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작품이 보여주는 내면적 갈등과 헷갈림의 정도가 내 예상과 달랐다. 이 세 가지 점, ‘주인공’과 ‘작가’와 ‘주제’의 문제는 서로 연결된 것이기도 한데, 결론적으로 이 세 요소가 서로 어울려 이 작품을 상투적 ‘답’의 책이 아닌 진지하고 솔직한 ‘질문’의 책으로 만들고 있다.       

전공자도 아니고 연구자도 아니고 그저 이 책을 한번 읽어본 일독(一讀)자로서 이러니저러니 의견을 말하는 것에는 아주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걱정이 있다. 작품을 읽고 나서 참고자료들을 찾아보니 우리나라에는 이미 밀턴학회도 있고 문학적으로나 정치학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밀턴을 아주 진지하게 연구하고 고민해 온 분들이 많았다. 그러니 밀턴의 책을 한권 달랑 읽은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고 틀리는 얘기를 마구 해댈까봐 겁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서는 조금 어설픈 생각이라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헌법상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있고, 지식의 생산자뿐만 아니라 지식의 소비자들도 선의의 감상을 자유롭게 얘기하는 것이 두루두루 모두에게 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급적 작가의 정확한 생각과 감정의 톤(tone)을 느끼려고 존 밀턴의 17세기 영어 원문과 쉽게 풀어쓴 현대어 영문본(in plain English)과 한글 번역본의 세 버전을 함께 놓고 읽는 정도의 성의는 보인 독자로서, 한편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해서 혁명의 시대가 주는 낙원의 느낌을 조금 맛보고 그 뒤 혁명이 사라진 시대가 주는 실낙원의 허망함과 의식의 혼란을 충분히 겪은 이 시대의 일원으로서 사백여년 전에 평행체험을 한 혁명가 존 밀턴의 의식세계를 조금은 이해할 만 하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일독(一讀)’의 어설픈 감상문을 용감하게 내어놓기로 한다.

이하에서는 실낙원의 주인공에 관해서, 실낙원의 작가에 관해서, 실낙원의 주제에 관해서, 각 항목을 나누어 독후감을 써 본다. 

우선 주인공들의 역할과 내러티브가 예상과 크게 달랐다. 실낙원의 원본인 성경의 창세기 3장 ‘추락(The Fall)’ 내러티브의 핵심 주인공은 선악과를 먹어서 망(亡)한 ‘사람(아담과 이브)’과 사람의 배신으로 마음이 상(傷)한 ‘하나님’이다. 성경에서 이브를 유혹하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 뱀(사탄)은 제3의 중요한 배역이기는 하지만, 감정이 살아 움직이는 투톱 주연인 사람과 신에는 미치지 못하는 주조연 급이다. 

그런데 전공자가 아닌 일반 독자의 눈으로 읽은 『실낙원』의 핵심 주인공은 ‘사람’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오히려 ‘사탄’이었다. 시(詩) 안에서 성경의 주인공인 사람과 신은 오히려 비극적 저항과 좌절의 주인공인 사탄이 노리는 대상(인간)이거나 사탄이 저항하는 대상(신)으로 무대의 배경 노릇을 하는 주조연급 배역처럼 보였다.

성경의 창세기는 제1장에서 ‘하나님’부터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라고. 그런데 12권으로 구성된 밀턴의 실낙원은 제1권과 제2권에서 하나님에게 대항했다가 패배하고 지옥에 떨어진 ‘사탄’이 다른 마신(魔神)들을 모아 재기를 도모하면서 저항전쟁을 선포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밀턴의 『실낙원』에서, 감정과 의지가 살아있고 내레이션(narration)에 감동이 있고 독자의 감정이입이 가능한 대상은 사실상 ‘사탄’ 하나뿐이다. 이 작품이 그리는 사탄은 「하늘의 천사장으로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천상의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배하여 지옥에 떨어지고 / 반란군의 수장으로서 만마전(萬魔殿, pandemonium)에 수천의 마신(魔神)을 모아 재항전을 위한 타락천사 총회를 개최하며 / 몰록의 주전론(主戰論)과 맘몬의 주화론(主和論) 대신 하나님의 야심작인 인간 프로젝트를 공격하여 망가뜨리는 정밀타격론(精密打擊論)을 주창하고 / 살신성인의 태도로, 인간의 동산인 지구에 단신(單身) 홀로 날아가 / 스스로 몸을 낮추어 뱀의 몸에 들어가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하고 /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연설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게 하여, 하나님이 만든 사람을 망가뜨리는데 성공하고 / 지옥에 돌아와 타락천사들에게 승전보를 보고하다가, 갑자기 자신과 마신들이 모두 뱀의 모습으로 변하는 비참한 몰락에 처하는」 ‘비극적 영웅’의 모습으로 극 전체를 주도한다.  

『실낙원』의 아담과 이브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詩)에서 이들은 시종일관 주체가 아니라 객체처럼 행동한다. 처음에는 신이 창조한 아름다운 에덴동산에 놓인 행복한 ‘인형(人形)’처럼, 중간에는 뱀으로 변한 사탄의 웅변에 ‘양심과 갈등의 뜸 들이는 시간조차 없이, 주체적인 고민의 망설임도 없이’ 그냥 휙 넘어가 버리는 ‘백치(白痴)’처럼, 뒷부분에는 ’불순종과 추락으로 인한 좌절감과 절망으로 자신이 겪어야 할  영혼의 고통과 몸부림을 충분히 감당하지도 않은 채’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미리 예비되었다고 알려주시는 구원을 너무 손쉽게 받아먹는 ‘응석받이 아이들(spoiled children)’처럼 그려져 있다. 한마디로 밀턴의 실낙원 속의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담당하는 주인이 아니라 자기의 운명을 구경꾼처럼 쳐다보는 무책임한 캐릭터이다. 똑같이 하나님과 사람과 사탄의 싸움을 다루는 성경의 ‘욥기’에서, 인생의 모든 고통을 자기 한 몸과 자기의 영혼으로 감당하며 울부짖는 대장부 욥(Job)의 절규가 성경 전권을 통틀어 우리에게 가장 감동과 공명을 주는 대목인 것과는 전혀 딴 판으로, 밀턴의 『실낙원』 속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의 맹하고 찌질한 모습에는 우리가 함께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함께 울고 함께 절망할 ‘영혼의 울림’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실낙원』의 하나님 캐릭터는? 솔직히 말한다면, ‘별로’다. 나는 옛날에는 하나님에게 관심도 없었고, 지금은 상당히 친근한 느낌을 갖고 있지만, 『실낙원』에서 묘사된 ‘갈등 없이 선포만 하는’ 하나님에는 영 정이 가지 않는다. 원본 오리지널 성경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면서도 인간의 배신에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집요하게 인간을 붙잡고 씨름하는 격정의 하나님이라서 정(情)이 가는데, 사본 가리지널 실낙원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기만 하고 인간의 배신이라는 대형 재난, 심각한 계획의 파탄을 맞이해서도 아무 충격이나 괴로움 없이 준비된 일만 착착 진행하는 분 같아서 인격적인 느낌이 매우 적다.

실낙원에서 사탄(루시퍼) 다음가는 제2의 마왕으로 나오는 ‘베엘제붑’은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작 ‘Lord of Flies (파리大王)’의 제목으로, 우리가 좋아하는 허영만 작가의 만화 ‘타짜’에도 등장한다. 1997년 개봉되어 꽤 히트했던 알 파치노,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법정영화 ‘데블스 애드버킷(The Devil’s Advocate)에서 알 파치노가 분장한 ‘변호사로 변장한 악마’의 영화속 이름은 알고 보니 ‘밀턴 & 아무개’ 로펌의 대표 ‘존 밀턴 변호사’였으니, 존 밀턴 본인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나는, 그래도 나름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신앙의 종교개혁을 추구했던 존 밀턴이 사탄을 좋아하거나 사탄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생각으로 『실낙원』에서 사탄에게 영웅적인 대사와 역할을 주었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신앙적으로 논란거리가 될 만한 빌미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밀턴이 에덴동산의 주인공인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고 그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그로 절규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게 하였다면, 전혀 다른 얘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재미는 적어지겠지만, 훨씬 안전하고 논란거리가 없는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뭔가 밀턴이 그럴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다음 항에서는 작가인 존 밀턴의 인생을 보고, 그가 왜 사탄을 『실낙원』의 사실상 주인공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알고 보니 실낙원을 쓴 존 밀턴은 청교도 혁명정부의 대유럽 선전부장 격으로 왕정폐지와 공화주의를 이념적으로 변증한 대표적 혁명가이자, 실패한 혁명 이후 겨우 살아남아 왕정복고시대를 살아간 반역자였다.

프랑스대혁명(1789)보다 무려 150년 전에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혁명은 왕권을 부정하고 자유를 쟁취하는 ‘민주주의’의 혁명이자, 카톨릭과 영국 국교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신앙을 추구하는 ‘종교개혁’의 혁명이기도 하였다. 중산층의 자녀로 태어나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정신으로 가득했던 존 밀턴에게, 청교도 혁명은 그의 정치적 신념과 신앙적 이상을 ‘자유’와 ‘개혁’과 ‘해방’의 실천으로 가득 승화시킬 수 있었던 눈부신 낙원(樂園, Paradise), 존 밀턴의 에덴동산이었다.

그러나 찬란했던 청교도혁명은 호국경(護國卿) 올리버 크롬웰의 사망(1659) 이후 무기력하게 흘러내리고, (국민들의 환호 속에) 왕정복고의 시대가 돌아와 청교도혁명의 주역들은 대부분 처형된다. 혁명시대의 말엽 이미 장님이 된 존 밀턴은 잠시 도피하였다가는 겨우 살아남아 그의 나머지 인생을 실패한 반역자, 정치적 은둔자로 살아간다. 혁명의 시대에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 이상과 신앙의 자유를 웅변하던 그에게 이제 어떤 자유와 즐거움이 남아있겠는가? 혁명이 무너진 후 장님에 전직 반역자로 살아가는 왕정복고 치하의 스산한 만년(晩年)은 그의 잃어버린 낙원, 존 밀턴의 실낙원(失樂園 Paradise Lost), 세상에서 쫓겨난 에덴의 동쪽이 되었다. 

‘정치적으로 실낙원’한 존 밀턴에게, 혁명가에서 반역자로 전락한 노년의 밀턴에게 청교도혁명이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유효한 자유의 소망이었을까? 뭔가 불완전했던 반란에 대한 의구심은 생기지 않았을까? ‘종교적으로 실낙원’한 밀턴에게, 청교도 종교개혁이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눈부신 신앙의 자유이었을까? 신과 세상으로부터 배척당할 무모한 교만이었을까?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고 세상은 왕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다. 자유는 무엇이고 순종은 무엇인가? 하늘의 왕에게는 순종하고 땅의 왕에게는 반란하는 ‘자유의 순종, 순종의 자유’는 불가능한 것인가? ‘하늘의 순종은 땅의 순종을 요구하고’, ‘땅의 자유는 하늘의 불순종으로 되는가?“ 하늘의 왕은 땅의 왕에게 반역한 자들을 함께 버린 것인가? 왜 자유를 추구하는 자들은 버림을 받고 자유를 억압하는 자들은 형통하는가? 자유를 함께 추구해야 할 국민들은 왜 공화정과 혁명을 버리고, 우둔한 왕에게 환호하고 순종하는가? 다시 자유의 반란을 일으킨다면 성공할 수 있을까? 과연 다시 자유의 날은 올 수 있을까?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 겨우 살아남은 혁명가, 실패한 반역자 존 밀턴의 만년에는 이런 고민들이 풀리지 않는 숙제로 차 있었을 것이다. 

존 밀턴은 혁명이 지나간 ‘그의 실낙원’에서, 성경에 근거한 서사시 『실낙원』을 집필했다. 두 개의 실낙원, 밀턴의 실낙원과 성경의 실낙원이 서로 부딪친다. 성경에서 사탄의 반란은 악하지만, 세상에서 영국왕에 대한 반란은 선한 것이었다. 사탄의 하나님에 대한 자유선언은 악하지만, 국민의 폭군에 대한 자유선언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에 반역한 자는 낙원에서 쫓겨나야 하지만, 왕에게 반역한 자가 낙원에서 쫓겨나는 것은 억울하고 부당하다. 이 모든 작가의 고민과 갈등이 밀턴이 쓴 『실낙원』의 구성과 내러티브 속에 반영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막상 읽어본 서사시 실낙원은 창세기 3장의 실낙원과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 안정된 인생의 스승이 분명한 답을 풀어주는 글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여러 가지 고민과 고통과 고뇌와 혼란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요구와 땅에 대한 저항의 요구가, 모순되게 섞이고 엇갈리고 부대끼는 것으로 느껴졌다. 

잠시라도 혁명의 맛을 본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한 사람의 한계와 연약함을 극복시키고 한 사람의 인생을 인류 전체의 무게로 확장하며, 순수하고 깨끗한 열정을 솟구쳐 오르게 하는지, 적어도 세상에 매였던 한 사람이 자기의 인생을 무기로 세상 전부에 맞서는 엄청난 해방감을 주는지, ‘혁명이 주는 열정과 찬란하게 빛나는 인생의 낙원(Paradise)’을 잊기가 어렵다. 그러나 잠시라도 혁명의 맛을 본 사람들은 또한, 혁명이 기쁨이 지나간 후에 혁명이 패배하여 지나가거나 혁명 자신의 약점으로 무너진 자리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왜소함과 열정의 연약한 추락과 이상주의적 소망의 자신감 없는 흔들림으로 ‘혁명이 사라진 자리의 공허감과 열정을 잃어버린 인생의 허무함이라는 실낙원(Paradise Lost)’을 힘겹게 경험해야 한다. 한번 무너진 자는 다시 일어날 힘을 갖지 못하지만, 다른 것으로 그 허무함을 채우려고 또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혁명은 인간의 이상에 대한 신뢰와 인본주의를 고양시키지만, 혁명의 실패는 인간의 이상에 대한 의심과 인본주의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먼저 4백여년 전에 혁명의 낙원을 짜릿하게 맛보고, 반혁명의 실낙원을 또한 뼈저리게 경험한 존 밀턴의 허무함과 혼란과 막막함을 우리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세상의 싸움에서 패배해서 정치적으로는 회복하기 어려운 은둔자 존 밀턴에게, 남은 유일한 길인 문학적 성공으로 그의 인생의 영광을 회복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는 것도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과거만을 씹어먹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실패한 혁명가/반역자 존 밀턴의 실낙원에는, 작가의 정치적 실패와 성경의 신앙적 공리가, 작가의 자유에 대한 열망과 성경의 순종에 대한 요구가, 혁명가 밀턴의 이상에 대한 열정과 반역자 밀턴의 이상에 대한 회의가, 그리고 작가의 이미 무너져 내린 정치적 절망과 다시 쌓아 올리려는 문학적 욕망이, 서로 대립하며 혼합되어 있다. 

안타깝지만 작가에게도, 작품에서도, 대립되는 가치와 갈등하는 명제 간에 변증법적 종합은 이루어지지 않고, 물이 소금에 녹는 화학적 결합도 이루어지지 않고, 물에 밀가루 탄 것처럼 뿌연 혼합과, 물에 기름이 뜬 것 같은 이질적 분리만이 이곳저곳 보인다. 작가의 고전적 학식과 문학적 야심으로 온갖 화려한 배역과 장면들이 등장하는 위쪽 길(High path)과, 혁명에 패배한 정치적 은둔자의 좌절감과 정신적 방황이라는 아래쪽 길(Low path)은 서로 어울리지를 못하고 각자 돌림노래처럼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생은 유전(流轉)하고 시대도 유전(流轉)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과 전에 살던 사람들의 인생에는 비슷한 점이 있고, 우리의 시대와 과거의 시대에도 놀랄 정도로 많은 유사점이 있으니, 과거 사람의 고민은 오늘 우리의 고민과 공명을 일으킨다.  민주주의 혁명의 승리의 낙원에서 거닐다가 혁명의 패배로 낙원을 잃고 선악을 알기 어려운 좌절과 방황의 수렁으로 빠진 1600년대 존 밀턴의 인생과 고민은, 마찬가지로 수많은 젊음들이 자유와 민주와 평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민주주의 혁명의 낙원에 살았다가 이제는 시대의 구호가 무엇인지 시대의 이상이 무엇인지 그 선악을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급기야 ‘민주주의를 모르고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오늘의 한국 우리들의 인생과 고민에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그러나 인생과 시대는 그저 돌고 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가기도 한다. 밀턴의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비록 밀턴은 혁명의 승리를 보지 못하고 1674년 반역자와 은둔자로서 숨을 거두지만, 그의 사후 14년인 1688년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를 무혈으로 몰아내는 명예혁명(Glorious Revoluton)을 일으키고, 1689년 국왕의 전제권한을 거의 다 박탈하는 권리장전(Bill of Right)을 제정하여 ‘왕의 무력화’에 성공하여, 근대 최초의 입헌민주주의를 확립하는 성공한 혁명을 이룬다. 

밀턴은 혁명이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좌절감 속에 죽었지만, 뉴욕 양키스의 포수 요기 베라의 유명한 말처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1689년 영국의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은 이후 1789년 프랑스혁명과 인권선언으로 이어지고, 그 뒤로 200여년 동안 전 세계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 가운데 왕을 없애거나 왕을 무력화하는 민주주의 혁명과 정치적 자유의 시대를 열었으니, 실로 밀턴의 혁명은 실패한 반역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요한복음 12:24)’ 거대한 혁명의 밑거름이었던 것이다.

노년의 밀턴이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 절망할 필요는 없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사람은 자기 사후의 일을 알지 못한다. 또한 정치적 실낙원에서 고통스럽게 살다 죽어간 밀턴에게 사후의 정치적 복락원(Paradise regained)은 별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작가를 보니 작품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앞에서 유보했던 질문, 왜 밀턴의 『실낙원』에서는 사탄이 사실상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는지, 그 질문의 답을 이제 한번 풀어본다. 이유는 밀턴의 『실낙원』 속에는 두 개의 실낙원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는 밀턴이 경험한 실낙원이고, 다른 하나는 성경이 가르치는 실낙원이다. 작가는 하나의 『실낙원』 속에서 자기의 실낙원과 성경의 실낙원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밀턴의 실낙원’은 절대권력에 대한 ‘반역의 승리’에서 ‘혁명의 패배’로 넘어가면서 생겨났다. 여기에는 자유에 대한 갈구와 강요된 순종에 대한 거부감과 패배의 울분과 여전한 반란의 충동이 남아있다. ‘성경의 실낙원’은 절대자인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하나님과의 분리’로 넘어가면서 생겨난다.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의심과 한탄이 들어있고 반란충동의 거세가 요구된다. 밀턴의 낙원과 실낙원에서는 ‘땅의 왕과의 분리/자유’가 구원(Salvation)의 길이고 ‘땅의 왕에 대한 순종’이 추락(Fall)의 길이지만, 성경의 낙원과 실낙원에서는 ‘하늘의 왕과의 연합/순종’이 구원의 길이고, ‘하늘의 왕에 대한 분리/반란’은 추락(Fall)의 길이다. 마치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서로 엇갈리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를 추구하고 순종을 거부하는 밀턴의 실낙원을 에덴동산에서 평화롭게 살던 아담과 인간에게 적용하면, 스토리가 완전히 꼬인다. 행복하게 사는 아담에게는 자유를 추구할 필요도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거부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왕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고 왕에 대한 순종을 거부하는 밀턴의 실낙원 감정은 ‘하늘의 왕(하나님)에게 반항하고 패배하였으나 하늘의 왕에게 다시 반항하는’ 사탄에게 투영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밀턴의 정치적 실낙원은 『실낙원』 속 ‘사탄의 실낙원’으로 투영된다. 

그러니 밀턴이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지, 밀턴이 사탄의 실낙원을 묘사할 때에는 ‘천국에서 노예로 섬기는 것보다 지옥에서 왕으로 다스리는 것이 낫다 I'd rather be a king in Hell than a slave in Heaven. (I-263.)’거나 ‘왕궁에서 노예로 사느니 척박한 땅에서 자유롭게 살리라 Better to be free in a hard land than slaves in a palace. (II-255)’는 등 작가의 영혼이 담긴 표현들이 빵빵 터지지만, 아담과 이브의 실낙원을 묘사할 때에는 뭐라고 특별히 작가의 영혼을 담아서 넣을 만한 표현이 안 생기는 것이다. 

글로 독자를 설득하는 사람은 먼저 작가 자신을 설득해야 한다. 소송을 할 때 변호사가 법관에게 어떤 변론의 주장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변호사 본인이 그 주장에 충분히 설득되어야 한다. 내가 이미 선동된 내용을 쓰면 어설프게 써도, 읽는 사람이 금방 알아듣고 쉽게 따라오지만, 내가 충분히 선동되지 않은 내용을 쓰면 아무리 화려하게 써도, 읽는 사람은 그건 아닌가보다 금방 깨닫고는 반대방향으로 설득된다. 그러니 밀턴이 사탄의 울분과 절규를 쓸 때에는 절로 밀턴의 울분과 절규가 흘러들어가, 우리 모두를 감동시키고 사탄의 이야기에 공감하게 만드는 ‘정신적 혼란’을 야기하지만, 밀턴이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쓸 때에는 그저 행복도 없고 갈등도 없고 영혼도 담기지 않은 맹한 느낌만 받게 되는 것이다. 결국 서사시 『실낙원』 속에 감동적으로 전개되는 ‘사탄의 실낙원’의 대사들은 사실상 사탄의 입만 빌린 ‘밀턴과 실패한 혁명가들의 실낙원’ 이야기, ‘인간의 실낙원’ 이야기인 셈이다.  

『실낙원』 속 아담과 이브의 ‘맹함’에는, 올리버 크롬웰이 사망하고 나서 청교도 혁명정부가 무너진 후 처형당한 챨스 1세의 아들 챨스 2세의 왕정복고를 환영하고 청교도혁명을 냉정하게 방기한 영국 국민들에 대한 존 밀턴의 실망과 혐오감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다. 즉 혁명을 잃고 희망을 잃은 밀턴의 회의감은, 자유를 위해 싸우지 않고 왕권에 복종하는 사람들 전체에 대한 회의감으로 확장되어, 밀턴은 ‘영국 민중의 맹함’을 『실낙원』에서 ‘인간의 맹함’으로 ‘아담과 이브의 맹함’으로 연장한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실패한 혁명가를 사탄에게 감정이입한 밀턴은 또한 무의식적으로 ‘정치적으로 무감각하고 맹목적인 영국 국민’을 아담과 이브에게 감정이입한 셈이다.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실패한 혁명가 밀턴의 절망과 절규는 실패한 반란자 사탄의 절망과 절규에 투영되었다. 여기까지는 밀턴의 실낙원, 인본주의적 실낙원 이야기이다. 마침내 절정이 되는 『실낙원』 제9권에서 사탄의 반격은 성공해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 하는 처지로 빠졌다. 실패한 반역자 사탄은 보기 좋게 반격에 성공했고, 왕(하나님)과 왕정에 순종하는 무지한 백성(아담과 이브)을 분리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어? 이제는 ‘성경의 실낙원’이 문제로 된다. 작가는 본의 아니게 ‘자유의 반란’이 전제자와 우민을 농락하는 스토리를 1권에서 9권까지 밀고 나왔는데, 성경을 차용한 이 책에서 반란의 대상은 땅의 왕이 아니고 하늘의 왕(하나님)이니, 자칫하면 ‘땅의 왕에 대한 작가의 반역’이 ‘하늘의 왕에 대한 작가의 반역’으로 이어질 위험이 발생했다. 그래서 작가는 제10권에서 서둘러 너무 커져버린 사탄을 뱀의 모습으로 ‘꾸겨서’ 찌그러뜨려 무대에서 갑자기 없애 버린다. 잘 나가던 드라마의 주인공이 갑자기 엑스트라처럼 되어 무대 변방으로 사라지는, 납득하기 어려운 극의 전개이다. 그래도 오해를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이어서  실낙원 9권의 ‘추락’ 이후 그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과 구원 예정을 그린 10권 이후의 장엄한 내러티브와 웅장한 무대장치와 화려한 대사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뭔가 감동적이라기보다는 ‘책을 읽는 것 같은 연기’처럼 성경의 구원 이야기를 그저 화려한 수식어만 넣어서 반복하는 느낌이다. 밀턴의 『실낙원』은 이제 비로소 본래의 선입관에 부응하여 성경의 답을 반복하고 부연하는 지루한 책으로 바뀐다. 결국 『실낙원』 10권 이하 12권까지의 내러티브는 9권까지 사탄을 너무 영웅(Hero)처럼 장렬하게 묘사한 밀턴이 뒤늦게 느끼게 된 신학적 비난의 부담을 화려한 치장으로 벌충(Cover-up)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신본주의의 신앙으로 돌아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찬양하고 교만한 사탄을 비난하는 존 밀턴을 보여주기 위하여. 마치 물과 기름처럼. 그러나 어쩔 수 있겠는가? 땅의 반역자가 하늘의 반역자까지 될 수는 없는 일. 우리는 충분히 밀턴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밀턴의 인본주의적(정치적) 이상과 신본주의적(신앙적) 신조는 통합되지 못하고 부정합된 상태에서 시종 갈등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자유와 순종, 왕정과 자유, 하늘의 왕과 땅의 왕, 순종과 맹종, 땅의 정치적 구원의 원리와 하늘의 영적 구원의 원리는 올라가고 내려가는 방향이 달라서 기본적으로 부딪히고 모순되지만, ‘하늘의 왕과 땅의 백성이 힘을 합하여, 땅의 왕을 물리치는’ ‘땅의 백성이 하늘의 왕에게 순종하여 땅의 왕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변증법적인 해결책도 나올 수 있는데 이미 지쳐버린 밀턴이 그런 힘을 내기는 무리였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책은 ‘답’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고민과 질문’을 제시하는 책으로 되었다. 사실 밀턴은 답을 내지 못했는데, 밀턴의 책 속에 ‘세상과 신앙의 통합,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조화의 답’이 들어있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찾아본다면, 우리는 밀턴이 겪은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실낙원에서 핵심이 되는 장면은 창세기 3장 6절의 ‘추락(The Fall)’을 그린 제9권이다. 여기에서 사탄은 이브에게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는 것이 왜 죄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오히려 진실의 나무, 지혜의 나무, 과학의 어머니가 아닌가? 사람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해서 하나님에게 무슨 피해가 있는가? 신이 선악 과실을 먹는 것을 금지한 것이 신의 인간에 대한 질투(Envy)로 인한 것이 아닌가?’라고 강렬(强烈)하고 설득력 있는 웅변으로 도전한다. 

뭔지 맹하고 허영심도 있어 보이는 캐릭터의 이브(Eve)는 별 저항도 하지 않고 사탄의 주장에 공감하며 선악과를 먹는다. 이브가 선악과를 먹은 것을 발견한 아담은 조금 짜증을 내지만, ‘어차피 벌어진 일이라면 할 수 없지. 내가 사랑하는 이브가 혼자 멸망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나도 같이 먹고 사랑을 위해서 함께 멸망하리라’고 말하면서 선악과를 함께 먹는다. 아담은 마누라를 위해서 하나님을 버린다고 하는데, 글쎄... 여기에도 절절한 갈등이나 ‘깊은 고민’은 느껴지지 않는다. 작가는 이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이해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뭔가, 그저 마누라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찌질한 남편이 억지로 자기를 합리화하는 말처럼 들린다. 하나님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고, 마누라한테는 짜증을 내는 ‘얕은’ 캐릭터인 『실낙원』의 아담이다.

기독교와 세상 간의 관계에 있어서 ‘선악과의 질문’은 가장 결정적인 질문이다. 밀턴의 『실낙원』에서 사탄과 인간과 하나님 간의 결정적인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이다. 그런데 밀턴의 『실낙원』에서 이 변론(debate)의 승자는 인간이나 하나님이 아닌 사탄처럼 보인다. 인간이 망한 이유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인데, 「선악과를 먹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보이고 선악과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냥 지켜야 하는 ‘실정법’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이 책에서 나타나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치명적 갈등국면이기도 하고, 밀턴의 무의식적 내면의 발현인 것 같기도 하다. 

4세기의 교부 오거스틴은 그의 저서 신국론(City of God)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그는 선악과 질문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난관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전개한다. 오거스틴은 우선 ‘그 음식(선악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은 나쁘거나 해로운 것이 아니었고, 다만 금지되었을 뿐이었다. 하나님은 저 굉장히 행복한 곳에 어떤 나쁜 것을 만들어 두시지는 않았을 것이다.’(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역, 642면)라고 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취지로 설명한다. 이것은 『실낙원』의 선악과 질문은 그대로 받아 안는 설명이다. 

오거스틴은 이어서 ‘선악과 나무의 문제는 그 나무 자체가 악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순종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창조주 아래 있는 이성적 존재에게는 이 순종이 가장 위대한 덕성이다. 악하지도 않으면서 금지된 것을 건드렸을 때에는 그 불순종만으로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같은 책 642면)라고 선악과를 먹는 것이 죄가 되는 이유는 ‘불순종’이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은 불순종이 죄라는 말을 당연히 납득할 수 없다. 그러니 선악과 질문은 여기에서 끝난다. 이에 비해서 기독교 신자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죄’라는 것까지는 쉽게 수용할 수 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불순종의 지표가 하필이면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이냐?’는 것이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나쁜 것’을 불순종의 지표로 놓아두었으면 납득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금제품을 먹는 것은 죄이다’라고 하고 대충 넘어간다면, 굳이 그 금제품을 ‘좋아 보이는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 특정했던 성경과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생각해보지도 않고 무시하는 것은 아닐까? 

이 고민까지 착안한 오거스틴은 ‘다른 종류의 과실이 풍부하게 눈 앞에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어떤 한 가지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으므로, 그것은 기억하기에도 간단하고, 지키기에도 쉬운 명령이었다.’(같은 책 678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논리의 설득력에 의문이 있다.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데, 한 가지만 먹지 말라는 것’은, 오히려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질문을 불러일으키고, 유혹을 일으켜, ‘가장 지키기에 어려운 명령’이 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순종’의 지표로만 보면,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간의 대화가 그 자리에서 끝난다. 신본주의는 순종을 당연시하고, 인본주의는 순종을 싫어한다. 선악과를 ‘선악을 알게 하는 인간의 지식’으로 보면,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논쟁을 하게 된다. 인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실낙원』 사탄의 변론처럼 선악과가 ‘진실의 나무, 지혜의 나무, 과학의 어머니’로 찬양의 대상이 되고, 신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부정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인간의 교만’을 경계하는 상징이 된다.

기독교 신자에게 신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 선악과 문제는 가장 열심히 풀어야 하는 문제이다.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가 가장 핵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왜 하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인가?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는 것을 잘 따져보아야 한다. 『실낙원』 사탄의 질문처럼 인간에 대한 신의 질투(Envy)는 아닐 것인데 여기에 신의 어떤 호의가 있는지 이해를 해야 한다. 선악과 질문에는 후속 연계 질문들이 수도 없이 많다. ‘하나님은 왜 동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 놓고,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였을까? 아예 그런 시험을 주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 질문도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묻는 질문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 좋다면, 아예 인간에게 그것을 먹고 말고 판단할 자유를 주지 말았다면 좋았을 것 아닌가’는 질문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질문이다. 나는 덮어놓고 믿는 것보다는 잘 따지면서 믿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너무’ 따지는 것은 곁길로 빠지게 할 위험이 있지만, ‘잘’ 따지는 것은 믿음의 진리와 자유를 깨닫는 길이며, ‘안’ 따지고 믿으면 내가 ‘뭘’ 믿는지조차 잘 알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인본주의 휴머니즘의 입장에서, 선악과 문제는 별 관심이 없거나 불편한 문제이다. 특히 인간의 이성과 과학기술이 막 발전해서 밀고 올라오던 17세기 밀턴 시대의 인문주의 휴머니즘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경계하는 선악과 금령(禁令)’이 인간의 자유와 발전을 가로막는 반지성적 장애물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현대의 시대에는 인간의 지적, 과학적, 합리적, 이상주의적 발전과 비전의 한계에 관한 문제가 오히려 세속적인 관점에서도 문제로 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이제는 세속 인본주의의 입장에서도 선악과 문제를 ‘신에 대한 순종’의 문제로만 보기보다는 ‘인간의 이성이 선악을 온전히 절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로, ‘개인적 차원의 판단, 집단적 판단, 계층적 판단, 정파적 판단, 민족적 판단’의 정확성과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안에서 어떻게 올바른 길과 방향을 잡아나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인식하고 현 시대의 중요한 질문으로 받아들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이렇게 신본주의의 입장에서는 조금 더 문제들을 지성적으로 ‘잘’ 따져보는 노력을 기울이고, 인본주의적 입장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선악과의 한계 문제를 조금 더 겸손하게 재검토하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밀턴의 『실낙원』에서 해결되지 못했던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갈등과 대립, 하늘과 땅의 대립은 조금 더 원만한 접근과 문제해결의 길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만일 밀턴이 성공한 청교도혁명의 시기에 『실낙원』을 썼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승리한 혁명가가 쓰는 『실낙원』은 패배한 반역자가 쓰는 『실낙원』과 다르지 않았을까? 성공한 혁명가가 쓰는 『실낙원』에서는, ‘땅의 왕, 땅의 폭군’은 ‘하나님께 반역한 사탄’이 되고 ‘땅의 투사, 땅의 혁명가’는 ‘땅의 왕(사탄)에게 잠시 속아서 실패하지만, 하늘의 왕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 땅의 왕과 싸워 이기는 강인한 아담과 이브’가 되고, ‘하늘의 왕(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자기의 몸을 바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고 선포하는 자유의 하나님’으로 등장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문제는 혁명의 시대에 존 밀턴은 너무 바빠서 『실낙원』을 쓸 시간도 없고, 혁명의 낙원에 있는 사람이 굳이 실낙원 이야기를 쓰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을 것이라서, 이런 상상은 별로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밀턴이 『실낙원』에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화합하는 ‘답’을 잘 주지 못하고, 혼란스럽게 헤매이면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갈등과 부조화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 오히려 이 책의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애매하게 ‘답’을 내는 것보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밀턴이 과감하게 서로 다른 방향의 벡터를 가진 땅의 실낙원과 하늘의 실낙원을 함께 다루려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시도를 한 것은, 그 자체가 오히려 아주 성공적인 시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밀턴이 질문만 던지고 답을 내지 못한 그 다음의 과제는 이제 나의 실낙원과 우리의 실낙원을 붙잡고 씨름하는 이 시대의 우리들이 차분하고 진지하게 해결해야 하는 우리들의 책임, 우리들의 낙원과 실낙원의 문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