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폭이 늘어나는 것은 마치 좋은 일처럼 보인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 보기를 꽤나 즐겨하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당시에는 공중파 방송만 있어서, 선택의 폭이 얼마 안 되던 시기였다. 민영방송 채널이 하나 생기자, 텔레비전 보는 재미가 솔솔해졌다며 희색이 만면하던 그 미소가 떠오른다. 음식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보인다. 맛있어도 한 가지 음식만 계속 먹으면 우리는 물릴 것이고, 좋아하던 것도 싫어진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욕망하는 경향이 있다.
선택지가 늘어나는 것은 풍요로움을 뜻한다. 근데 중요한 것은 그런 경향도 정도 문제라는 것이다. 일정 정도까지는 선택지가 늘어나면 그에 비례해 선택의 즐거움도 늘어나는 반면, 선택지의 양이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처음의 감동이 급격히 줄어든다. 텔레비전의 공중파 채널 5개만 있다가, 어느 시기인가부터 케이블 TV가 대중화되어 선택 가능한 채널 수가 200개 이상이 되었지만 즐거움은 별로 비례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지 가능한 ‘주의력’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인지적 체력의 일반적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 정보가 소음이 되어버린다. 주어진 모든 정보를 끌어모아, 그 중 가장 최적의 선택을 한다는 고전적 경제모델의 주체가, 근래 각광받는 행동경제학에서는 실제의 ‘인간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인간은 때로 합리적이지만, 주로는 제한된 합리성을 갖는다. 인간은 때때로 주의 깊게 뭔가를 보고 집중하기도 하지만, 종일 깨어 있는 모든 순간순간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이나 뇌과학자들은 그런 인간 주의력의 한계를, 인간이 갖는 ‘세로토닌’(뇌에 작용하는 호르몬 중 의욕과 주의력에 관련됨)이라는 총알은 유한하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주의력을 손상시키는 수많은 좀비 같은 스트레스들 앞에서, 세로토닌의 총알을 다 쓰고 나면, 대다수는 주의 집중과 자기 통제의 긴장도를 놓아 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끊었던 담배에, 자제하던 단음식에 다시 손이 가는 것이다.
인간의 합리성이든 주의력이든 이것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을 적당히 아끼고, 적절한 곳에 배분해야 할 소중하고 제한된 자원임을 알게 된다.
2. 약탈되는 우리의 주의력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은 우리의 소중하고 유한한 ‘주의력’이라는 자원이, 거대 IT기업이 만든 약탈적으로 설계된 SNS에 의해 심하게 착취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부작용은 상당히 심대하기 때문에 방치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 문제를 개인이 혼자 해결해야할 것으로만 봐선 안되며, 공동체의 정치적 합의에 의한 사회적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저자는 주의력을 손상시키는 요인으로 추가적으로 수면부족, 불건강한 영양섭취, 시험성적 위주의 학교교육 방식, 경제적 빈곤, 자본주의의 자기 확장적 속성에 의해 강제되는 소비추구경향 등 다양한 요인을 지적한다.
저자는 저널리스트적인 균형감각으로 자신이 동의하는 주장뿐 아니라 반대편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며 객관적으로 소개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기 입장에 해당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간섭을 주장하는 ‘규제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이곳저곳에서 드러난다. 왠만한 문제는 사회가 알아서 혹은 시장이 알아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내비둬’주의자는 아닌 것이다.
3. 집중력 위기라는 주장은 사실인가
저자는 자기 조카의 인생 경로를 예시로 들면서, 한 인간의 삶이 길을 잃어가는데(조카는 15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집에서 멍하니 전자기기 화면을 바라만 보고 있는 상태) 핸드폰과 SNS가 얼마는 큰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그것이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다수가 21세기 초반에 겪고 있는 집중력이 무너지고 있다는 감각으로 확장한다.
또한 개인적인 서사를 통해, 자신이 중독적으로 참여하며 존재감과 자부심의 원천이었던 SNS와 인터넷과 3개월간 결별하며, 소위 디지털 디톡스 체험을 통해, 그 힘듬과 갱생의 과정을 현장감 있게 들려준다.
그의 주장은 맞는 거 같다. 지하철을 타면 열에 아홉은 핸드폰에 고개를 집중하고, 뭔가에 열심이다. 계속 스크롤을 하며 대부분 화면에 경도된 모습을 보이고, 그런 모습은 가정 내에서도 반복된다. 거실의 텔레비전 뉴스나 드라마라도 같이 보던 시절은 가고, 각자 방에서 핸드폰이나 태블릿 패드를 스크롤하며 뭔가 열심히 중독적인 것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이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어 달전 어느 모임에서 이 책, <도둑맞은 집중력>으로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참석자의 반 정도는 책이 괜찮다고 평했지만, 나머지는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저자가 자기 체험적인 방식으로 얘기하면서 설득력을 높이려고 하는데, ‘근거의 박약함을 자기 서사로 커버 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빤한 이야기를 깊이 없게, 근거 불충분하게 주장한다는 말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저널리스트 특유의 전달력 있는 글쓰기의 모범이라 생각된다고 말했다. 또한 빤한 것이 실제 현실에서는 수많은 변수와 이슈에 시달린다. 그래서 현장 특유의 복잡성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알려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자 출신의 어느 참석자는 책 제목을 문제 삼으면서, 과연 인간들에게 도둑맞을 집중력이 있기나 했나, 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이 질문에는 나도 조금 움찔했는데, 진화적 단위인 수백만 년까지 가지 않더라도, 정착 생활을 시작한 농업혁명 이후의 1만 년의 짧은 세계를 일별해볼 때도, 인류가 광범위하게 문자를 해독하고 공유하는 시기는 인쇄술 발명과 중산층 성립과 대중 교육을 통한 문자 해독률이 증가 된 최근 1백 년 될까말까 한 잠깐 동안의 일이지 않은가.
SNS의 중독적 위해성으로, 독서하는 사람이 감소하고, 직접 체험을 통해 성장하는 기회가 박탈되고 어쩌고는 일종의 호들갑일 수 있지 않는가, 라는 주장이다.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큰 위험’을 대비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옳겠지만, 그것을 침소봉대하여 과민에 빠지면 규제가 지나치게 많아지고, 그래서 혁신을 막고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좋기만 한 것은 없고, 공짜도 없다. 어떤 제도가 사회적으로 적용될 때는, 그것의 비용과 손익을 따져야 한다는 것이다.
집중력 위기라는 주장의 논거의 충분성에 대해서는 이후에 더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고, 일단 저자는 집중력의 위기가 사실이며, 최근 들어 SNS가 그 문제를 크게 확대하는 방식으로 설계되었음을 주장한다는 정도만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4. 인터넷과 SNS를 구분해서 대처하자
먼저 가장 중요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 SNS(Social Network Service, 사회 관계망 서비스 주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을 말함) 사용의 문제점에 대한 저자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저자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SNS 사용 문제'는 막연하게 인터넷 사용 전체를 칭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반 문명주의자도 아니고, 인터넷이 갖는 잠재력과 효능을 공격하는 입장도 아니다.
인터넷은 다양한 정보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하고, 손쉽게 확장하게 해주며, 새로운 기회를 준다. 오프라인이라는 개인의 환경적 제약을 돌파할 수 있게 해준다. 가령 외국에서 나온 최신 저널의 논문을 구하려고, 굳이 멀리 있는 전문 도서관을 찾아갈 필요가 없게 된다. 인터넷을 통한 클릭 몇 번이면 원하는 최근 논문을 앉은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인터넷이라는 효율적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일반적 행동이 아니라, 특정 SNS에 계속 머물게 만들어진, 그들의 중독적 설계를 지적하는 것이다.
2010대부터 광범위하게 대중화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에서는, 로그인하고 들어가면 나의 인터넷 사용 기록 하나하나가 정보로 쌓인다고 한다. 내가 무엇에 더 끌리고, 혹은 무엇에 무덤덤한지를 상대 회사가 알게 된다. 이용자가 특정 인터넷 사이트나 앱 이용에 머물도록 하는 요소들이, 알고리듬에 의해 증폭이 된다. 목표는 물론 자기 회사의 최고의 이익을 위해, 사용자를 가급적 오래 머물게 하는 것이다. 사용자는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것에 끌려서 계속 클릭을 하거나 스크롤을 올리게 말이다.
거기에 ‘좋아요’와 ‘하트’버튼의 기능도 크게 한몫한다. 만약에 시간차를 두고서, 월말 결산 ‘좋아요’ 누적 개수를 알려준다면, 그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피드백은 즉각적이어야 사람은 그것에 중독적 도파민 회로가 작동하면서, 그 사용 패턴을 나도 모르게 습관화한다. 그렇게 사용자가 ‘자신도 모르게’ 습관화하게 만드는 수많은 행동과학적 전략들을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이 하고 있으며, 이는 사람들의 주의 집중 능력을 빼앗아가서, 진득하게 뭔가 다른 일을 할 힘을 없앤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회 집단적 차원에서는 또 다른 부작용이 나타난다. 특히 청소년에서는 SNS의 과도한 사용에 의한 집중력의 착취가, 임상적으로 우울증과 불안증,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급증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상관관계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책에서 직접 언급은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인물인 조너선 하이트가 최근작 <불안 세대>에서, 전문적 연구자 특유의 꼼꼼하고 성실한 통계적 데이터 분석을 통해, 청소년의 SNS사용과 여러 심리적 질병의 인과관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널리스트 저자 주장의 학문적 취향성을 상당히 보강해 준다. 하이트는 청소년의 SNS 과사용과 오프라인 놀이문화의 부족에 국한해서 문제제기와 정책 대안을 말하고 있고, 수면, 영양부족, 경제적 문제와의 관련성은 다루지 않았다.
5. 스키너의 행동주의와 미하이의 몰입
우리는 자신이 자유로는 존재라고 믿는다. 스스로 선택을 내리고, 어디에 주의를 기울일지 결정하는 정신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키너의 행동주의적 관점에서는 그건 다 환상이 된다. 자극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통한 행동 강화를 중시한 스키너에게 우리의 자유는 그동안 살면서 경험했던 강화 훈련의 총합일 뿐이다. 스키너적인 표현으로는, 그러한 적절한 반사반응의 묶음이 인간인 것이다.
스키너는 대표작인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에서, 노골적으로 인간 선택의 ‘자유’와 인간 고유의 ‘존엄’이라는 개념은 단지 넘어서야할 몽매적인 장애물이라고 주장한다. 나름의 입장에서 과학의 이름으로 삶의 미스터리를 넘어서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선택을 내린다는 의미에서 인간 정신은 없다고 생각한다. 소위 관찰 가능한 환원주의의 방식으로 자극과 보상체계로 인간이든 누구든 설계자에 의해 재설계 될 수 있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여기에 대조하여 소개되는 인물은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다. 그가 보기에 스키너의 관점은 인간에 대한 매우 제한적 관점이며,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인간에게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러한 활동의 훌륭한 예시가 예술 활동에 있다고 보고, 시카고 화가들을 설득해 그들을 작업을 지켜보고, 그들의 심리적 과정을 알아내려고 연구했다.
미하이는 여기서 놀라운 점을 발견하는데, 예술가들이 창작 중일 때는 시간이 사라진듯, 최면에 빠진 듯이 보였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보상을 얻거나 처벌을 피하거나 하는 스키너적 관점에서는 설명되지 않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는 것은, 외부적 보상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과정 자체와 관련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는 내면적으로, 외부와 무관하게 지극히 자기만족적인 것이다. 이런 현상은 화가만이 아니라, 암벽 등반하고, 장거리 수영을 하고, 체스를 두는 사람들에게도 나타났다. 위험하고 지치고 아무 보상이 없어도 그 자체의 활동을 좋아한 것이다.
이를 통해 미하이는 그동안 연구되지 않던 인간의 핵심 본능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며, 그 상태를 ‘몰입’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푹 빠져 자아 감각을 잃은 상태를 말한다. 몰입은 가장 깊은 형태의 집중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현재 세상의 많은 부분을 장악한 기술이 스키너적 관점에 기초한다고 본다. 임의적 보상을 간절히 열망하게 인간을 훈련시킬 수 있다는 스키너적 통찰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보상을 얻기 위해, 일정한 버튼을 누르는 생쥐처럼 우리는 행동하지만, 마치 자신이 그런 행동을 선택했다고 믿는다.
표면적 자극이 주의를 빼앗는 문화에서 미하이의 ‘몰입’에 대한 강조는, 우리 내면에 집중하고 즐기는 힘이 있으며, 그것이 적절한 환경 속에서 발현되면 우리가 더 행복하고 건강해지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몰입은 집중의 바람직한 한 형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바람직함이 그렇듯이 거기에는 따르기 힘든 모범과 당위의 그림자가 보인다. 이 책에의 저자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미하이의 ‘몰입’에는 뭔가 범속한 사람들에게 적용되기 힘든 엘리트주의의 냄새가 난다. 아마 적용가능성과 확장에 제한이 있을 것 같다.
6. 이용자는 고객이 아니라 상품일 뿐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트위터는 공짜이다. 상당히 막강한 기능과 새로운 네트워크의 구축이 가능한 기회를 제공하지만 돈이 안드는 것이다. 그런 고마운 무료 플랫폼 혹은 앱을 비난하는 것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저자는 그 이유를 회사가 우리가 돈을 지불하는 고객이 아니라 상품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실제 고객은 광고주들 뿐이며, 그들에게 우리 ‘사용자’는 광고주에게 맞춤 정보를 제공하는 적절한 상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막강한 IT기업들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는 데는 하등 신경을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저, 우리가 올린 정보나 클릭하는 패턴을 통해 사용자 성향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우리의 정신건강과 상관없이, 단지 시선을 프로그램에 붙잡아둘 방법에 전적으로 집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공하는 매력적이고 중독적인 맞춤형 알고리즘을 클릭하는 동안, 주의력은 소진되며 다른 할 일을 못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말한다. 이들 기업에게 사람들을 산만하게 만들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석유 기업에게 석유를 시추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이런 관점의 타당성은, 책에서 소개된 페이스북 회사에서 있었던 윤리위원회 에피소드를 이해하게 해준다. 페이스북 내에서 ‘인간을 위한 좋은’ 시스템을 만들려고 했던 어느 직원의 기특한 노력이, 윤리위원회 비슷한 것을 만들어지게 했다. 하지만, 그 직원의 진정성과 상관없이 회사 시스템의 필연적 경향에 의해 그것이 얼마나 손쉽게 무력화되었는지, 아니 무력화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말이다.
7. 소셜미디어의 형식에 대한 비판
저자는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매클루어를 소개하면서, 그가 <미디의 이해>라는 책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말했던 주장을 소개한다. 매클루어는 당시 새로운 미디어였던 ‘텔레비전’의 등장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놓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런 변화는 너무 강력해서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것이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의 의미는 미디어의 형식 자체가 특정한 함의를 갖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책이든 텔레비전이든 트위터든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할 때에는, 마치 고유의 색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저자 본인의 직접 경험이 묻어나는 탁월한 분석이 나온다.
“트위터에 접속하면 메시지를 읽고 그 메시지를 팔로워에게 전송하게 된다. 그 트위터의 형식이 함의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첫째, 오래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280자로 된 짧고 단순한 발언을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매우 빠른 속도로 세상을 해석하고 자신 있게 이해해야 한다. 셋째, 우리의 짧고 단순하고 신속한 발언에 사람들이 즉시 동의하고 박수를 보내느냐다.
인스타그램은 어떨까? 첫째,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겉으로 어떻게 보이느냐다. 둘째,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겉으로 어떻게 보이느냐다. 셋째,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겉으로 어떻게 보이느냐다. 넷째,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의 겉모습을 좋아하느냐다.”
날카로운 통찰이라고 말하고 싶다. 저자는 새로운 미디어의 형식과 그것이 함의하는 메시지에 대해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세상은 복잡하다. 세상을 제대로 고찰하려면 보통은 긴 시간 동안 한 가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길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말할 가치가 있는 내용 중 280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드물다. 어떤 생각에 대한 나의 반응이 즉각적일 때, 내가 그 주제에 대해 수년간 전문 지식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 반응은 얄팍하고 별 볼 일 없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즉시 나에게 동의하느냐 아니냐는 내가 하는 말이 옳은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아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종이책이라는 매체에 담긴 메시지가 시사하는 바를 아래와 같이 꼽는다.
“첫째, 삶은 복잡하다. 삶을 이해하고 싶다면 깊이 숙고할 시간을 충분히 마련해야 하며, 속도 또한 늦춰야 한다. 둘째, 다른 걱정을 제쳐두고 한 가지에 주의를 기울이며 한 문장씩 따라가는 경험은 가치 있는 일이다. 셋째,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고 생각하는 방식은 깊이 사고해 볼 만하다. 다른 이들에게도 우리처럼 복잡한 내면의 삶이 있다.”
저자는 책이라는 매체 형식에 담긴 메시지에 동의하면서 그 메시지들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메시지가 인간 본성의 가장 훌륭한 면(깊이 집중하는 순간이 많은 삶이 좋은 삶이라는 사실)을 북돋는다고 생각한다. 전적으로 동의되는 말이다.
8. 수면, 영양, 교육, 경제적 빈곤과 집중력
이 부분이 책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저자가 인간의 집중력, 주의력 저하 현상을 파헤치고자 하면서 너무나 많은 분야를 산만하게 건드린다는 것이다. SNS의 악영향이 주이고 나머지는 사이드 메뉴처럼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다. 동시에 여러 이슈를 다루면서 한두 가지 사례에 근거해서 주장을 한다든지, 전반적으로 불충분한 논거에 의존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의 수면 부족으로 인한 영향, 신선 식품이 아닌 정크 푸드를 대량으로 소비하면서 발생하는 문제, 그리고 학생 각자의 의욕을 살릴 수 있는 개별화 된 맞춤교육이 아닌 근대 이후의 획일적 성적 위주의 교육 등을 지적한다.
그리고 경제적 빈곤 또한 집중력을 저하시킨다고 말하면서, 주 4일제를 시행하면서 기업의 생산성을 저하시키지 않았던 특수 사례를 제시하는데, 역시나 각각이 증거수준의 신뢰도에서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9. 좋은 삶을 위한 자본주의 재편의 요구
그러한 저널리스트 특유의 오지랖 넓은 주장은, 좋게 보면 욕심 많은 마당발의 부지런함이라고 하겠다. 개인적으로 이런 저자의 부지런함은 좋아 보였다. 그가 현대인의 ‘주의력 결핍’ 문제를 사회의 어떤 징후로 보고, 그것을 둘러싼 이런 저런 문제들을 일일이 지적하며 진정으로 사회를 좋게 바꾸고 싶어하고 그만큼 노력하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판데믹 수준의 전염병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수준의 노력들이 당연히 필요하듯이, SNS 과사용에 의한 전염병처럼 번지는 청소년 정신건강의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노력이 요청된다. 그리고 혼자 마스크 쓰는 수준의 개인적 해결책이 아닌 공동체 수준의 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저장의 주장은 상당히 타당해 보인다. 어려운 시도이긴 해도, 결국 제도적 변화가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사회학자의 공통 견해이지 않는가.
하지만 저자의 사회적 주장은 단순히 착취적 SNS를 설계한 IT기업을 규제하는 수준을 넘어서 더 멀리 나아간다.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현재의 생산방식과 가치관 자체의 반성이 있지 않으면 주의력 되찾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나아가나?
저자는 노르웨이 사회인류학 교수 토마스 휠산 에릭센을 인용하면서 산업혁명 이후 경제상장이라는 개념이 급진적인 주장이었음을 말한다. 경제성장은 경제의 규모가 매년 커져야 한다는 믿음인데, 이것이 오늘날 성공을 정의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에릭센에 의하면 성장은 2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기업이 새로운 것을 개발하거나, 새로운 지역에 상품을 수출함으로써 가능하다. 두 번째는 기업이 소비자에게 소비를 늘리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먹고, 덜 자면서 그 시간을 소비에게 쓴다면 그것이 경제 성장의 원천이 된다. 에릭센은 오늘날 두 번째 방법으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은 우리가 텔레비전을 보며 소셜미디어를 보기를 바라게 된다는 것이다. 삶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자본의 구조적 요청이고, 이러한 경제성장의 필요가 집중력을 저하시키는 여러 원인을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체제는 수면 부족과 집중력 부진을 요구한다.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이 결국 집중력을 소진시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적을수록 풍요롭다>의 저자인 경제 인류학자 제이슨 히켈까지 소개한다. 그는 전세계에서 경제성장 개념을 가장 강력하게 비판하는 인물이며, 대안으로 평형 상태 경제로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평형 상태’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경제 추동 원칙으로서 성장을 포기하고 다른 목표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고소득 국가들이 이미 오래전에 GDP와 사회적 지표들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깨졌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좋은 삶은 양질의 공공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 괜찮고 저렴한 주택 공급, 적절한 수준의 임금이다. 경제를 자본축적 중심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생태적 안정성을 중심으로 재조직해서, 적은 에너지와 자원을 가지고도 충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결국 경제 성장률을 높여야 한다는 믿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집중력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저자는 스케일을 확장 시킨다. 논리를 확장하며 연결시키는 중간고리들이 아슬아슬해 보이지만, 그래도 저자의 좋은 의도를 믿고 따라가 보자.
집중력을 되찾기 위한 반란은 근본적으로, 이 성장 기구 자체와 싸워야할 것이라고 말한다. 집중력 해방을 위한 투쟁은 기후위기 해결과 연결되며, 우리 시대를 정의하는 도덕적, 정치적 투쟁일 것이라고.
의도는 선하고 대체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여기서도 앞서 언급한 미하이의 ‘몰입’에서 나타난 유사한 엘리트주의적 모습이 보인다. 바람직해 보이지만 성취 가능성은 지난하니, 비판을 아끼고, 일단 좋은 용기를 가졌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좋은 의도의 지향이 억지춘향의 가짜 지상천국이라는 가면극이 되지 않으려면, 중간 중간 민주적이며 시민 참여적인 매개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10. 주의력 혹은 집중력, 그리고 좋은 삶
이 책의 원제는 ‘Stolen Focus’로 직역하자면, ‘도둑맞은 주의력’ 정도 될 것이다. 이것이 번역자의 고심 끝에 주의력을 집중력으로 바꾸면서, 한국판 책 제목에는 묘한 뉘양스가 첨가 되었다. ‘집중력’이란 단어에는 ‘주의력’에서는 없는 근성(책 <그릿>을 연상해보자)과 모범생 특유의 집요한 능력인 집중하는 힘이 함의되는 것이다. 제목을 바꿈으로서, 출판사의 책 홍보 차원에서 상당한 성공에 기여한 것 같다. 이 책은 판매량 뿐만 아니라 열독률도 매우 높은 책이다.
이 책은 공공 도서관마다 여러 권 구비되어 있지만, 빌려 읽기가 힘든 책으로 유명하다. 대부분 대출 상태이고, 대출 대기 인원도 상당히 있어서 도저히 빌려 읽을 힘든 특이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런 인기와 높은 열독률의 책은 경험상 매우 드문 일이다. 일설에 의하면 공부에 집중하고 못하고 주의 산만한 자식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는 듯한 책 제목에, 학부형들의 열독률이 매우 높은 책이라는 소문만 들었다.
한편 책을 찬찬히 읽어 보면, 주의력를 집중력으로 번역한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책을 유심히 보면, 저자는 자신이 쓰는 집중력이란 단어를 2중의 의미로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주목하는 집중력의 뜻 이외에, 세상에 대한 ‘메타인지로서의 집중력’, 소위 ‘반성적 성찰’의 뜻으로도 집중력이란 단어를 쓰고 있다. 그 집중력은 좋은 판단을 하고 좋은 삶을 살기 위한 힘이라고 말한다. 집중력이란 단어를 확장해 또 다른 의미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 단어의 확장적 사용은, 저자가 집중력 되찾기를 통해, 단순한 학습 능력의 향상만이 아니라 진정 중요하고 좋은 삶에 대한 추구를 지향하게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러므로 주의력을 집중력으로 바꿔서 번역한 것은 저자의 의도를 간파한 좋은 번역이라고 말하고 싶다.
11. 나오며
이 리뷰를 쓰는 와중에 이 책에서 주장하는 이슈와 관련된, 큰 뉴스가 나왔다. SNS의 청소년 사용자에 대한 규제가 제도화되서 유럽과 미국에서는 9월부터, 한국에서는 내년부터 시행 예정이라는 것이다.
커다란 정책 변화는, 그것에 관련된 이권이 걸린 거대 기업이나 단체에 의해 좀처럼 쉽사리 진행되기 힘들고, 사회적 논의 과정도 긴 편이다. 그런데, 이러한 급속한 진행, 규제의 이행은 놀라울 정도의 빠른 점이 인상적이었다. 혹자는 이것이 집단소송에 대비한 기업들의 기민한 움직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러 연구에서 청소년기에 SNS의 중독적 과사용과 우울증, 불안증 등의 심각한 정신질환 증가 문제에 상당히 유의한 수준의 근거가 드러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일단 환영할 만하다. 저자의 소원처럼 성장신화에 빠진 자본주의에 대한 조절까지는 못 갈지라도,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유의미한 시작이다. 기술이라는 삶의 위한 방편이 우리를 소외시키고 고생 시킬때 우리는 움직여서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한다.
앞으로 이와 관련된 더 충분한 데이터가 쌓이면, SNS중독이라는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우려가 되는 큰 위험’에 대해 적절한 규제였는지 아닌지가 분명해질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어느 학자는 SNS에 대한 규제를 미국에서 1950대 시행된 만화 검열에 비유했다. 만화가 청소년들에게 폭력과 비행을 조장한다고 하면서, 어떤 새로운 문제적 현상에 한쪽 면만 보고(주로 부정적인 면) 도덕적 우려와 공황상태에 빠진 어른들이 과도한 규제를 시행한 실수를 반복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상 이러한 사례는 여럿 있다.
또한 반대의 사례도 있다. 페인트와 휴발유에서 납사용의 안정성 문제에서, 연구자들의 노력과 시민적 정책 변화 노력에 의해, 납중독 환자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마약 사용에 대한 금지, 흡연의 위해성 입증과 청소년 흡연 금지 등등.
애매한 사례, 여전히 논쟁적인 사례도 있다. 유전자조작식품 사용은 안전한가, 말라리아 모기 잡는데 효과적인 DDT 규제는 과도 했나 정당 했나? 이슈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 사이의 논쟁이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다. 근거가 확실하고 정책으로 반영된 경우는 거의 논쟁이 되지 않는다.
우려는 있지만 그 위험성의 근거가 충분하지 않을 때 문제가 된다. 누구는 그런 문제에 대한 규제의 목소리에 침소봉대한다고 오버하지 말라고 한다. 다른 이는 혹시나 있을지 모를 위험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좋은 행동이라고 본다. 그런 위험성에 대한 판단은 새로움에 대한 개방성, 혹은 위험에 대해 예민한 신경성이라는 성격적 기질에 좌우될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실재는 개인의 기대나 바람에 무심한 그저 이질적인 것이다. 결국 잘 설계된 연구를 통해, 좋은 통계 데이터가 쌓일수록 베일에 가린 그 문제 해답이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기다리면서 의견이 다른 상대에 경청하고 신중할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1만 년 전 인간이 정주 생활을 하며 이루어낸 농업혁명이 문명을 시작하게 한 혁신이었지만, 인간 각자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수렵채집 생활인들에 비해 농업인들은 영양이 불균형했고, 각종 질병에 시달렸고, 삶의 질은 더 낮아졌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만들어지고 인간집단의 힘이 세졌지만, 인간의 평균적 삶의 질은 떨어진 대가를 치룬 것이다.
마치 그와 비슷하게, 자유 평등 박애의 근대사회혁명과 과학혁명, 시장경제를 통한 높은 생산성과 대량소비 문화의 발전은 개개인에게 소비의 안락함을 다수가 자기 능력과 잠재성을 펼칠 자유를 제공한 커다란 변화였다. 그것은 문명사적 필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변화(중산층이 만들어지고, 대량소비문화를 통해 평균적 인류가 이전 특권층만이 가능했던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고, 여행하고 등등)의 대가로, 우리는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대가를 치루고 있다.
빛에는 그림자가 있는 것이다. 계몽의 빛, 인간 해방의 빛은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탕진적 자원소비와 과도한 탄소배출로 인류의 지속가능성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었다. 이런 방향성이 불가피한 어떤 것으로 생각된다면, 영화 <메트릭스> 1편에서 스미스 요원이 모피우스를 고문하며 말한 인류를 비꼬는 표현이 그럴듯한 말이 된다. 인간은 바이러스와 가장 유사하다고. 지구에서 자원을 고갈시키며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번식하는 방식이 비슷하다고. 이 말이 비유가 아니라 사실이 되고 있다. 타 개체에 침입하여 단지 자신의 맹목적 증식을 위해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 된 바이러스. 더 이상 침입할 개체가 소진되면 바이러스 집단의 운명도 파탄이 난다. 환경적 제약에 무관심한 바이러스의 행동 패턴은 결국 자기 파괴적인 끝까지 가게 된다.
아메바든 박테리아든 대개의 세포계 생물체는 주변환경과 상황에 반응하며 생존지속을 위해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행태를 보인다. 바이러스의 행태는 세포계 생물체 입장에서는 어리석은 행동 패턴이다. 인간은 맹목적으로 증식하는 바이러스일까 아니면 환경을 감안하며 살아가는 세포계 생물에 가까울까? 운명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거 같지만 밝지도 않다. 지구 온난화의 원인으로 여기지는 탄소배출 규제와 관련 세계적 움직임이 활발히 있어 왔지만, 그 성적은 좋지가 않다. 기후 이슈는 전세계적인 큰 사안이지만, 그동안 단 한 번도 탄소 배출이 줄어든 적이 없고, 석유를 비롯한 탄소 기반 에너지 사용량은 늘기만 했다. 우리는 세포 정도의 항상성이라도 가졌을까? 아니면 여전히 바이러스식의 자기 증식이라는 성장적 환상에만 골몰하고 있는가?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에서, 문명 자체에 회의적인 젊은 사회운동가들에게 반론을 편다. 어짜피 인간의 문명은 항상 어떤 문제들을 발생시켜 왔으며, 그 문제들을 풀어내는 과정 자체가 인간의 삶이라고. 과연 그동안 우리는 어떤 문제는 해결을 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