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분노와 슬픔! 어느 것이 더 셀까? 답하기 어려운 물음이다. 확실한 것은 이것들이 인간의 마음보다는 힘이 더 세다는 것이다. 분노는 참아낼 수는 있지만, 찾아오는 분노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슬픔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마음먹은 대로 부릴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견딜 수는 있지만 내쫓아 낼 수 없기에, 요즘이야 감정이라 부르지만, 옛날 그리스 인들에게 분노와 슬픔은 하나의 신(神)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강한 신에게 맞서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견디는 것 이외에 다른 뾰족한 수는 없다. 시간이 약(藥)일 수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아니다. 분노와 함께 찾아오는 몸의 통증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맘의 고통은? 단지 시간이 흐른다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면, 맘의 고통을 낫게 해주는 약은? 아예 없을 것 같지는 않다. 요컨대, 진시황이 구했던 불사의 영약은 아니기에. 어쩌면,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시작한다.

 

 

서양 문학의 효시인 <일리아스>의 초사(招辭)다. 인용에서 “수많은 혼백”들은, <일리아스>의 주인공이었던 아킬레우스의 적군이었던 트로이 군인들이 아니고, 자신의 동지이자 친구였던 그리스 용사들이다. 이 점에서 <일리아스>는 독특한 작품이다. 전쟁 이야기의 대부분이 적들을 용감하게 물리친 무용담이기에, 반면 <일리아스>는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아군과 동료에게 죽음을 가져다 사건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묻자. 과연, 수많은 동료들에게 죽음에 가져다 준 저 아킬레우스의 저 분노는,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었는지 간에,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 뜻밖에도, 호메로스에 따르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정당하다. 이는 단적으로, 호메로스가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그리스어 메니스(Menis)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명백하다. 메니스는 사실 평범한 말은 아니다. 본래 신의 분노(Ira Dei)를 지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니아(Mania)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신들인 사람처럼 뭔가에 사로잡힌 사람을 지칭하는 이 말에서 메니스의 오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어쨌든, 서양 문학의 아니, 서양 문명의 처음에 등장하는 말이 “분노” 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2.
분노의 발단은 이러했다. 그리스 군이 트로이를 포위한 지 10년이 넘은,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어느 날에 아가멤논의 막사에 한 노인이 찾아온다. 태양신 아폴론의 사제인 크뤼세스였다. 자신의 딸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가멤논은 그의 청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그를 내쫓아 버리고 만다. 이에 절망한 크뤼세스는 자신이 섬기는 아폴론에게 복수를 부탁하고, 이에 아폴론은 아흐레 동안 그리스 군의 진영으로 역병(疫病)을 나르는 빛의 화살을 쏟아 붓는다. 수많은 병사들의 시신들이 개와 독수리의 먹이로 내던져지게 되자, 특히 백성의 죽음에 가슴 아파했던 아킬레우스는 모든 장병, 즉 모든 백성들을 집회장에 소집한다. 여기에서 전체 집회를 소집한 이가 바로 아킬레우스이고, 사제의 딸을 돌려주어서 백성들의 죽음의 고통을 피할 수 있도록 주장하는 이가 아킬레우스라는 점이 중요하다. 참고로, 아킬레우스라는 이름은 고통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케(Ache)와 백성을 뜻하는 라오스(laos)의 합성어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름 풀이를 하면, 아킬레우스는 “백성의 고통”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렇다면, 아킬레우스라는 이름에는 그를 백성의 대변자로 내세우려는 호메로스의 깊은 뜻이 담겨있는 셈이다. 어쨌든, 욕심 많은 아가멤논은 사제의 딸을 돌려주는 대신에 아킬레우스의 애인 브뤼세이스를 차지하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격노한다. 그리고 그는 일체의 전투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아킬레우스의 첫 번째 분노였다. 자신의 몫과 명예에 대한 모욕이 그 원인이었다. 그 순간을 호메로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넙적 다리에서 날카로운 칼을 빼어 들고 사람들을 모두 쫓아버리고 그 자신은 아가멤논을 죽여버릴까, 아니면 분을 삭이고 마음을 억누를 것인가를 따지면서, 이런 저런 일들을 마음속으로 재면서 칼 집에 큰 칼을 빼려는 순간에, 하늘에서 아테네 여신이 내려왔으니(<일리아스> 제1권 190행-194행)” 라고 말이다. 분(憤)은 났지만, 그것이 노(怒)로 표출되지는 않았다. 대신 아킬레우스에게 찾아 온 것은 “슬픔(제189행)”이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일차 결산을 내려보자.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과연 정당한가? 요즘 같으면, 아킬레우스의 대듦은 상관에 대한 불복종 행위다. 그러니까, 군법회의에 소환되어 마땅한 처신이다. 하지만, 호메로스의 생각은 다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정당하다. 잘못을 저지는 이는 실은 아가멤논이었기 때문이다. 아킬레우스의 주장이다.

 

 

참으로, 거침없다. 왕 혹은 통치자에게 거침없이 대들고 항거하는 내용을 담은 아킬레우스의 이 연설은 서양 문헌에서 등장하는 최초의 공적 정치 연설이라는 점에서, 아킬레우스의 연설은 이를테면, 정치학과 수사학의 관점에서도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 어쨌든, 호메로스가 서양 고대는 물론 중세와 현대에도 가장 중요한 고전이라는 점에서, 또한, 아킬레우스의 연설이 이른 바 지배자와 통치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서양의 한 원형(archetypes) 사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킬레우스의 주장은 과연 내용적으로 설득력이 있을까? 하나의 원형적 사례가 될 수 있을까? 있다.

 

아킬레우스가 지적하는 아가멤논의 잘못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용기가 없다는 것. 사실, 이는 큰 잘못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자의 정당한 몫을 부당하게 빼앗는다는 것이다. 이게 큰 것이다. 물론, 싸움터에 나설 용기가 없음으로 다른 사람의 몫을 강탈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아킬레우스의 주장이다. “백성을 잡아먹는 왕이여”라는 일갈이 인상적이다. 여기에서 다시 백성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자로서의 아킬레우스가 돋보인다. 아무튼, 아킬레우스의 말에서 아가멤논은 “각자의 몫은 각자에게(suum cuique)”라 요약되는 분배 정의를 위반하고 있다 셈이다. 싸움터에 한 번 나가보지도 않은 이가 다른 이가 가져온 것들 가운데에서 가장 좋은 것을 빼앗는 것은 불의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정당하다. 문명에 대한 거시 담론 차원에서 볼 때에, 서양 문학이 분노로 시작하고, 그 분노가 정의로 연결되고, 그 정의가 각자의 몫, 곧 각자의 권리로 이어진다는 점은 눈 여겨 볼 만한 사건일 것이다. 이는 또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이후 서양의 기본 정치 사상의 전형 사례로 읽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하겠다. 아무튼, 사정이 이러함에도, 아가멤논은 막무가내로 고집을 피웠고, 그는 아킬레우스의 애인이었던 브뤼세이스를 빼앗아버린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막사로 곧장 철수해 버리는데, 바로 이 순간으로부터 <일리아스>의 서사는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참고로, <일리아스>는 10년 트로이 전쟁에 벌어진 모든 사건이 아니라, 단 4일 동안 벌어진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다. 또한,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말미암아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에 어떤 결과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노래이다. 한마디로, “분노의 끝장보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이 <일리아스>인 셈이다.

 

4.
한편, 분노에 파묻힌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사라지자, 헥토르가 전장의 중심에 우뚝 선다. 그러자, 전세는 단박에 역전된다. 사실, 그리스 군대에서 아킬레우스는 바르셀로나 축구팀의 리오넬 메시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아킬레우스의 분노 덕분에 일리온 평온에 등장해서 용맹을 떨치는 헥토르와 트로이 군대에 의해서 죽어가는 그리스 병사들에 대한 호메로스의 묘사이다. 

 

 

모든 것이 아킬레우스의 분노 탓이었다. 초사에서 호메로스가 수천의 혼백을 개와 독수리의 밥으로 던졌다는 말도 과히 틀린 언표는 아닌 셈이다. 사정이 이러하게 되자,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사과와 화해를 청한다. 사과의 표시로, 그는 세발 솥 일곱 개, 황금 십 탈란톤, 번쩍이는 가마 솥 스무 개, 힘센 말 열두 필, …… 공예에 능한 일곱 여인, 브리세이스, 일곱 식민 도시 등으로 보상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이 모든 보상과 그리스 원로들의 합리적인 설득에도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분노를 거두지 않는다. 한편, 아킬레우스 없는 전선에서 그리스 군대는 뒤로 밀렸으며, 종국에는 함선이 있는 곳으로 내몰리게 된다. 수많은 동료와 동족들이 학살당하게 된다. 하지만, 아킬레우스는 요지부동이다. 이쯤 되면, 전투에 나서서 동료들을 구해줄 만도 한데 말이다. 그의 이름이 진정으로 “백성의 고통”을 뜻한다면 말이다. 이것이 아킬레우스의 과오(hamartia)였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백성의 구제가 자신의 의무는 아니겠지만, 그들을 지켜주는 것이 자신의 명예이자 덕성이라면, 단지 손상된 자신의 자존심 하나 때문에 아킬레우스가 백성을 지켜주는 일을 거부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인에 있어서는 과오가 아니겠지만, 결과의 심각함과 참담함에 있어서는 아킬레우스에게 과오를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킬레우스에게 법적 책임까지는 물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바로 이 때문이었을까?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했던 파트로클로스를 그 대가로 잃게 된다.

 

사연인 즉 이렇다. 사정이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자, 아킬레우스의 애인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였던 파트로클로스는 그를 대신하여 전투에 임한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갑옷과 무기를 들고서 헥토로에게 맞선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 입었기에 헥토르가 처음에는 모르고 무서워 도망갔지만, 파트로클로스는 무늬만 아킬레우스였기 때문이다. 한데, 파토르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는 다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참고로, 파트로클로스는 “아버지의 자랑”을 뜻하는 이름이다. 이런 존재였기에, 아킬레우스는 진노(震怒)한다. 이것이 두 번째 분노였다.

 

이쯤에서, 두 번째 결산을 내려보자. 첫 째 분노가 명예에 대한 모욕과 자존심에 대한 상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두 번째 분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생겨난 것이다. 첫 째 분노에서 아킬레우스는 참았다. 하지만 둘째 분노에서는 그는 폭발한다. 어마어마한 물질적 보상으로도 설득이 되지 않았던 아킬레우스가 전장에 이제는 자발적으로 복귀한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변하게 한 것일까? 과연 첫 번째 분노와 두 번째 분노 사이에 있는 차이는 무엇일까? 자존심의 손상에 의한 분노와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한 분노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 각설하고, 사태의 한 중심으로 바로 들어가자. <일리아스>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결투 장면이 그것이다. 하지만 싸움은 싱겁게 끝나고 만다. 복수의 화신으로 등장한 아킬레우스에게 헥토르는 마치 사나운 매에 쫓기는 비둘기였다. 호메로스의 묘사다.

 

 

반전은 여기에서부터다. 복수에 성공한 이후, 아킬레우스의 심정에 이상한 변화가 감지되기 때문이다. 시원하게 복수만 하면 다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그렇지 않았기에 말이다. 그러니까, 복수에 눈이 멀었을 때보다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더 큰 그리움과 더 큰 슬픔이 아킬레우스를 덮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호메로스의 관찰이다. “아킬레우스는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며 울었고, 모든 것을 정복하는 잠도 그만은 붙잡지 못했다.”(제2권 3행-5행) 따라서 복수를 통해서 분노가 완전하게 해소된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아무튼, 그럴 때마다 그는 죽은 헥토르의 시신을 마차에 메달고서 파트로클로스의 무덤을 빙빙 돈다. 이를 지켜보는 헥토르의 아버지 프리아무스의 탄식이다.

 

 

사랑하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에 복수의 화염에 활활 타올랐던 아킬레우스! 이에 대해서, “애를 끓는 슬픔”에 죽음마저 불사하고 아킬레우스에게 가서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부탁하겠다는 프리아무스!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프리아무스의 슬픔! 어느 것이 더 셀까? 슬픔이 더 셌다. 프리아무스는 죽음을 불사하고 아들의 시신을 되찾기 위해서 아킬레우스를 찾아갔고, 이렇게 애원했기 때문이다.

 

 

뜻밖의 방문과 애원에 놀란 아킬레우스! 하지만 그도 인간이었다. 이에 대한 호메로스의 노래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무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불구대천의 원수도, 적군도 아니었다. 그냥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은 인간들이었다. 이렇데 대략 16400여 행의 <일리아스>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들이 울면서 서로를 얼싸안으며 화해하는 장면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분노로부터 시작해서 슬픔으로 끝나는 작품이 <일리아스>인 셈이다.

 

마지막 결산을 내려야 하는데, 대신에 묻자. 과연 프리아무스의 슬픔이 없었다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해소되었을까?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그렇다면, 슬픔은 어떠했을까?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호메로스의 위대함이 빛을 발한다. 호메로스는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분노의 화신과 슬픔의 화신을 서로 만나게 하고, 이를 통해서 너와 나, 아군과 적군, 심지어 아버지와 아들의 구별까지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둘 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이용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붙을 수 있는, 예컨대, 남자, 여자, 청년, 노인, 아들, 아버지, 적군, 아군, 그리스인, 트로이인이라는 모든 딱지들을 떼어낸 후, 그 벌거벗은 인간 그 자체를 보여줌을 통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 결국 저 분노와 슬픔의 화신들을 모두 벌거벗겨 놓으니, 모두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인간들이고, 그런데 가장 비참한 존재들이기에, 서로 화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지 그것도 대규모 살상을 자행하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지에 대한 호메로스의 근본적인 물음과 회의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단적으로 아(我)와 적(敵)이지만,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무스가 결국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 그래서 아킬레우스에게 진정한 위로와 위안이 될만한 사람은 프리아무스 밖에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아킬레우스나 프리아무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슬픔을 극복할 만한 위안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동등한 위치에서 같은 처지에 있을 때, 진정한 위안과 위로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적과의 화해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일리아스>이고, 따라서 이 작품은 반전 문학의 효시로 보아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무스가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이었기에 진정한 위안이 성립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게 죽어야 할 인간이 견디어야 하는 분노와 슬픔에 대한 치료제가 바로 적인 “너”, 심지어 불구대천의 원수인 바로 “너, “인간”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작품이 <일리아스>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이 인문학이라면, 서양 인문학의 원천은 <일리아스>인 셈이다. 적어도, 그 어느 누구라 할 지라도, 설령 그가 적이라 할지라도 연민과 동정의 연대를 보낼 수 밖에 없는 그 “인간”을 역사(歷史)의 무대에 처음 소개하는 작품이 <일리아스>이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인간(homo nudus)”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