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11-13 11:05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바보, 자기만 욕하는 바보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4,003  


도서정보
저자명 블레즈 파스칼
저서명 팡세(Pensées)
출판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연도(ISBN) 1992(894470032X)
팡세(Pensées, 블레즈 파스칼 저, 서원모 역, 1992,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바보, 자기만 욕하는 바보
 
1. 파스칼의 팡세 – ‘Cynical’의 미덕
 
1.1. 책 읽는 나이와 독서의 의의 :  40대가 넘어서 파스칼의 팡세(명상록)을 읽었다. 너무 좋았다. 너무 좋고 맘에 들어서, 읽고 또 읽고 또 다시 읽는다. 파스칼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진지하면서도 시니컬한’, 인생(人生)과 세상(世上)에 대한 시각은 너무나 유쾌하다.
 
고등학교 사춘기 때, ‘인생(人生)이 뭘까?’하고 무척 궁금해 하던 시절, 한번 손에 잡았을 법 한 책이기는 한데...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는, 인생을 막 시작하기 전(前) 진리와 ‘꿈’을 쫓았던 이상주의적(ideal) 10대에는, 가사 이 책을 읽었더라도 이 책의 ‘진지하지만 인생을 비웃는 듯한 태도’에 공명(共鳴)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다. 인생을 시작하자마자 세상에 부딪혀, 광주(光州)와 5공(五共) 때문에 거리에서 싸우던 질풍노도의 청춘시절, ‘진지(眞摯)하게 세상과 다투는 책’만 읽었던 급진적(radical) 20대에, 팡세(명상록) 같이 한가해 보이는 제목의 책에 매력을 느꼈을 것 같지는 않다. 결혼과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밤새도록 서류를 붙잡고 일과 싸우며, 의외로 녹녹치 않은 직장생활에 적응하려고 진땀을 흘려가면서, 소시민적 감성으로 소소한 칭찬에 매달리며, 애쓰고 씨름하던 현실주의적(practical) 30대에는, 파스칼의 팡세를 읽고 인생을 논할 만한 우아함과 삶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산전수전을 다 거치고, ‘인생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그리고 ‘아무리 기를 써봐야 인생에 그리 대단한 것은 없다’는 씁씁한 진실을 알게 된 나이, 세상과 인생에 대해서 슬슬 시니컬(cynical)해 지기 시작한 40대의 나이에, 내 손에 들어온 ‘파스칼의 팡세’는 인생의 통쾌함과 유쾌함을 맛보게 해주는 큰 선물이었다. 인생과 세상에 대한 진지하면서 시니컬한 시각, 인간을 ‘진지(眞摯)함’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자유(自由)케 하는 ‘시니컬(Cynical)’의 미덕!  이하에서 팡세의 몇 구절을 함께 살펴보면서 같이 연구해 보자. 
 
1.2. ‘말하지 말라’ : 팡세의 44번째 문단은 이렇게 질문한다.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을 좋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가?』 ‘그럼, 당연하지! 누구나 이것 때문에 사는데~~.’ 우리가 눈치를 보고 아부를 하고, 잘 난 척을 하고 자랑을 하면서 사는 모든 일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우리가 직장을 얻고 일을 받고 돈을 벌고 보람을 찾는 모든 일은 사람들이 우리를 좋게 생각해 주어야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파스칼은 ‘우리가 사람들의 호의(好意)를 얻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심플한 의외(意外)의 답을 알려준다. 『말하지 말라!』
 
말을 하지 말라? 왜? 말을 하면, ‘숨겨왔던 나의 본색(本色)’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잘남’을 보여주고 싶어서 마~악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은 ‘나의 잘남’에 감동받지 않고 ‘나의 잘난 척 하는 속물(俗物)성’에 곧바로 [X] 표시를 한다. 내가 좋은 뜻으로, 후배들에게 인생의 좋은 경험을 전해 주려고 열~심히 ‘말을 하면,’ 듣는 인생의 후배들은 처음에는 ‘조금’ 감동을 받다가, 서서히 지루해 하고, 나중에는 지겨워져서 ‘눈을 뜨고 잠을 잔다.’
 
그러니, ‘식사 자리에서 80퍼센트, 90퍼센트의 발언권을 혼자 독점하는 직장상사(上司)와 권력자들이여’, 말하지 말라! 입 없이 귀만 있는 아랫사람들은 답답하고 지루해서 ‘속이 터진다.’ ‘잘 나가고 싶어서, 잘 보이고 싶어서, 수시로 끼어들며 말하고 자랑하는 사람들이여’, 말하지 말라! ‘당신의 입’ 속으로, 당신의 시꺼먼 ‘속이 다 보인다.’ ‘자신을 좋아하고 자기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당신에 대해서’ 남에게 너무 말하지 말라. 남들은 각자 자기 인생을 감당하느라 바쁘고 힘들어서 당신 인생에 돌릴 관심도 없고 박수칠 힘은 더더욱 없다. 말을 많이 오래 하면, 듣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잠이 온다. 아무리 입이 근질근질해도 사람들이 진심으로 당신에게 마이크를 주기 전에는 말하지 말라. 마이크를 잡았다 싶어도 ‘잠깐’만 짧게 말하고 금방 마이크를 놓아라. 이래야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게 된다.
 
1.3. ‘친절(親切)의 한계’ : 팡세의 72번째 패러그래프, ‘인간의 불균형(不均衡)’. 『친절이란 인간이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 이상이면 감사가 증오로 바뀐다.』 파스칼이 인용한 타키투스의 이야기이다. 사랑과 친절은 많을수록 좋은 것인 줄 알았더니(多多益善), 그게 아닌가 보다. 사람이 사랑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사랑을 받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우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能力)에는 (사람마다 용량이 다르지만) 분명한 한계(限界)가 있다. 억지를 써서 이 한계를 넘어서면 꼭 뒤탈이 난다. 사랑을 받는 것이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도, 주는 사랑에 한계가 필요하다. 부모가 애를 너무 사랑해서 물고 빨고 업고 어르고 달래고 애한테 쩔쩔 매면, 애를 망친다. 분별없는 사랑은 사람을 망치고 사랑을 망친다.
 
파스칼과 타키투스가 말하는 ‘갚을 수 있는 친절’은 주고받는 사람 간에 인격적 대등성과 존엄성을 유지시킨다. 그러나 ‘갚을 수 없는 친절’은 주고받는 사람 간의 인격적 대등성과 존엄성을 훼손시킨다. 이 훼손은 선한 것을 악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다. 그러니까 사람 간의 사랑과 친절은 모든 것이 무조건적으로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에 대등하고 유기적인 인격적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지혜와 상호간의 존경심’이 함께 동반되어야 한다.
 
파스칼은 ‘빛’과 ‘화음(和音)’과 ‘은혜(恩惠)’와 ‘친절(親切)’과 모든 ‘좋은 것들의 지나침’을 경계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 너무 큰 소리는 우리를 귀머거리로 만든다. 너무 많은 빛은 우리를 눈부시게 한다. (…) 진리도 도가 지나치면 무기력하게 한다. (…) 음악에 너무 많은 화음은 우리를 화나게 한다. 너무 많은 은혜도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우리는 우리가 진 빚 이상으로 갚을 수 있기를 원한다.  "친절이란 인간이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 이상이면 감사가 증오로 바뀐다."(타키투스, Annals, iv. 18)』
 
‘친절에 대한 시니컬(Cynical)한 시각!’ 너무 냉정한가? 맞다. 너무 냉정하다. 슬프지 않은가? 맞다. 슬픈 일이다. 너무 이기적인가? 아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한계를 넘는 사랑과 친절과 이타심은, 결국 그 사람을 도로 ‘더 이기적인, 사랑과 친절에 대해서, 더 허무해 지고 더 차가와진 사람’으로 전락시킨다. 그러니 무리한 친절은 결코 이타적인 친절이 아니다. 지나친 선은 악을 낳는다. 그러니 시니컬한 친절이 오히려 진지한 친절이고, ‘정확하고, 지속가능한’ 친절이며, 이기적이지 않은 친절이 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랑할 때, 사랑하는 ‘나’도 믿지 말고, 사랑받는 ‘너’도 믿지 말고, 둘 사이의 ‘사랑’ 그 자체도 믿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헷갈리지 않고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있다.
 
1.4. ‘인간의 자기사랑(自愛)’ : 파스칼의 100번째 문단, ‘자애(自愛)’. 『(…)  인간은 위대(偉大)해 지기를 원하지만, 자기 자신이 비참(悲慘)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은 행복(幸福)해지기를 원하지만, 자기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  인간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기를 원하지만, 자기 자신의 결함으로 인해 오직 사람들의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이런 종류의 당혹(當惑)감은 인간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추악하고 불의한 정념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자신을 책망하고 자신이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는 모든 진리에 대해 강렬한 증오심(憎惡心)을 품게 된다. (…)』  그러나 『인간은 너무나도 허영심(虛榮心)이 강해서 주변의 대 여섯 명이라도 우리를 존경해야 기뻐하고 만족하며 (팡세 148문단), 교만(驕慢)은 우리의 재난과 오류의 한복판에서도 우리를 본래적으로 사로잡아서, 우리는 사람들이 말해주기만 한다면 기꺼이 우리의 생명(生命)도 바친다 (팡세 153문단).』
 
크게 성공하거나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음악가나 예술가들의 노력을 만든 대부분의 동인(動因)은 열등감과 콤플렉스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위대해 졌지만 그들의 인생은 비참함 속에서 배태되고 유지된다. 현대 정보사회에서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기를 원하고 실제로 많은 사랑과 인기를 얻는 사람들의 인생은, 타인들의 ‘눈’과 ‘손’과 ‘평가’에 그 운명이 넘겨져서, 한 순간 실수로 증오와 멸시의 대상으로 떨어진다. 사람은 모두 크고 작은 자기사랑으로 움직인다. 인생은 자기사랑의 성공과 좌절로 부침하며, 큰 성공은 큰 좌절로, 큰 박수는 큰 비난으로, 수시로 돌변한다. 인생은 100퍼센트 비극으로만 일관하는 것은 아니지만, 끊임없는 슬픔과 힘든 일과 비참함과 고달픔으로 연속되어 있다. 인간의 자기사랑은 10대에도 상처받고 20대에 벽에 부딪히고 30대에는 맹목적으로 되며, 40대, 50대를 넘어가면서는 점차 무상하고 무의미해져 간다.
 
그러나 우리의 허영심과 자존심은 너무도 강렬해서, 우리는 결코 인생의 무의미함과 무상함을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나의 자랑이 무너지는 상황 나의 자랑이 공격받고 위협받는 상황에 대해서는 강력한 증오심과 거부감을 아낌없이 발현하며 내가 가진 공격성과 폭력성을 모두 발휘하게 된다.    
 
1.5. ‘완전한 휴식(休息)과 기분전환(氣分轉換), 사소한 일’이 주는 무거움과 큰 위로(慰勞): 파스칼의 131째 문단, 권태(倦怠). 『열정, 일, 기분전환 없이 완전히 휴식을 취하는 것만큼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것도 없다. 그 때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 버려짐, 부족함, 의존감, 권태, 공허함을 느낀다. 즉시 그의 심령 깊숙한 곳에서는 권태, 우울, 슬픔, 초조, 원한, 분노가 일어난다.』
 
부지런한 사람은 ‘의미 있는 일’들로 인생을 ‘꽉’ 채우려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보내는 휴식(休息)’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여 싫어하고 미워한다. 과연 ‘일’들이 인생의 본질적인 것이고, ‘휴식’은 인생의 비본질적인 낭비적인 것일까? 아니다. ‘일’은 오히려 인생의 비본질적인 수단(手段)적 시간이고, ‘일하지 않는, 그냥 앉아서 멍 때리는 시간’이야말로 인생의 더 본질적이고 실존적 시간이다. ‘열정으로 일에 파묻혀서, 나 자신을 잊어버리는 시간’은 우리가 인생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오히려 ‘가벼운 시간’이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놀지도 않으면서 혼자 있는 시간’은 우리가 인생의 실존적 고독과 불안, 막막함과 무의미함에 단독으로 맞서서 벅차게 싸워야 하는 더 본질적(本質的)이고 ‘무거운 시간’이다.
 
168번째 단락, 기분전환(氣分轉換). 『사람들은 죽음, 비참, 무지에 대해 싸울 수 없기 때문에, 행복해 지기 위해서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은 너무 진지하게,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힘들어진다. 답을 낼 수 없으니 불행해진다. 답을 찾은 것 같다가도 금방 또 흐릿해져서 답인지 아닌지 모르게 되니, 답답하고 괴롭고 숨이 턱턱 막히게 된다. 그러니까 사람은, 놀아야 한다! 감당할 만큼 ‘일하고’, 감당할 만큼만 ‘생각하고’, 나머지 시간은 그냥 놀아야 한다. TV와 드라마는 좋은 것이다. 너무 의미를 따지지 말고 노래도 듣고 즐기는 것이 좋다. ‘의미를 따지려면’ 일을 하거나 생각을 할 일이고, 놀 때는 ‘그냥’ 놀아야 한다. 아무리 진지하고 거룩한 사람도 놀지 않으면, 인생을 감당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계속 놀면, 너무 많이 놀면? 노는 게 ‘일’이 되고, 노는 것에도 집중할 수 없게 되어 다시 ‘인생의 고독과 고민’이 돌아온다. 그러니 노는 것이 인생을 채워주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너무 일하는 것은 고단하고, 너무 고독을 씹으면서 인생과 그 의미와 수많은 추상명사들을 생각하는 것도 힘겹고, 너무 노는 것도 지겨워지면, 우리는 무엇으로 우리의 인생을 감당할까? 파스칼은 136단락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사소(些少)한 일은 우리를 위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청년 때에는 ‘자기의 일’로 인생을 채우지만,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나면 부부간의 일, 아이 키우는 일 등 수많은 ‘남의 일’, ‘사소하고 번잡한 의무’로 우리의 인생이 가득 채워진다. 부부가 돈을 벌고, 애들 학교와 학원 보내고, 때때로 여기저기 애써 놀러 다니고, 서로 수발하고, 부모와 자녀가 수시로 서로 싸우고 지지고 볶고, 때로는 서로 낄낄거리며 웃고 하다보면, 인생이 너무 바쁘고 힘들게 휙휙 지나간다. 부부는 서로의 인생의 짐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려고 계속 애를 쓰고, 부모는 자기가 이미 끝내고 지나온 학업과 수험생활을, 자녀의 성장과정을 따라가면서 힘들게 재반복(replay)한다. 차라리 내가 공부를 하면 쉬울 텐데, 말 안 듣는 타자(他者)에게 공부를 시키는 것은 시지프스의 바위와도 같은 인내와 공덕을 요구한다. 이 일상(日常)의 삶과 고단한 수고(手苦)에는 고상함과 우아함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어 보인다. 무의미해 보인다. 의미가 있다고 해도 무상하고 허망한 반복으로 보인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생각해 보라(Behold)! 결혼생활과 자녀양육의 온갖 번잡함과 고단함으로 채워지는 일상(日常)의 시간이 없었을 경우, 그 시간만큼의 ‘고독’을 혼자 스스로의 힘으로 감당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일상’이 빠진 만큼의 자유 시간을, 인위적인 노력으로 풍요롭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에게는, 우리들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그렇게 할 만한 힘과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번잡하고 고단한 일상이 우리의 시간을 ‘단단하게’ ‘꽉’ 채워주니까, 우리는 ‘큰 고민(苦悶)’을 할 여유(餘裕)도 없이 ‘큰 고민을 ’할 필요(必要)도 없이‘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 인생의 실존을 감당하기는 어렵다.
 
‘돈 버는 일’을 착실하게 하고, 가족생활의 번잡하고 고단한 ‘사소한 일’들로 일상의 시간들이 꽉 채워지고, TV 앞에 붙어서 드라마와 오디션 프로그램을 아무 생각 없이 보면서 지친 심신을 휴식(休息)시켜야, ‘한 사람의 인생이 완성(完成)’된다. 그렇게 해서 ‘돈 버는 일’과 ‘노는 일’과 ‘사소한 일’들로 우리의 인생을 가득 채워야, 그 연후(然後)에 ‘그렇게 채워진 인생 자체’에 대한 진지한 사색과 깨달음과 ‘의미 있고 고상하고 거룩한 것’들에 대한 실질적인 사색과 추구가 가능해 진다. 그러니까 파스칼의 이야기처럼 ‘사소한 일들이 가져다주는 괴로움들’은 무의미한 고역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위로(慰勞)가 아닐 수 없다.
 
1.6. 시니컬의 미덕 – “진지하고 시니컬하게 (Serious & Cynical!)” : 말하지 말라! 사람들이 나를 싫어한다. 지나치게 사랑하고 과도하게 친절하지 말라! 일이 꼬이고 인생이 꼬인다. 자신의 실존과 직접 대면해야 하는 ‘완전한 휴식’ 자체는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 인생의 고민을 가져다준다. 그러니 생각 없는 기분전환으로의 도피(逃避)와 온갖 사소한 일들이 주는 괴로움의 위로(慰勞)가 있어야만 인생을 견디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니까 『너무 진지(眞摯)하고 또 진지한 인생(人生)』은 인생을 견디면서 살아내는 것이 힘겹고 불가능하거나, 좋은 결과를 만드는 것도 어렵다. 그러나 『‘진지하게 시니컬하고’ ‘시니컬하게 진지한’ 인생(人生)』은 인생을 견디어내기도 쉽고, 오히려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시니컬(cynical)’은 내 인생에서 5미터 떨어진 자리이다. 그러니까 내 ‘인생(人生)’이 잘 보인다. ‘시니컬’은 ‘내가 나를 욕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면 내 인생의 ‘짐’이 덜어지고, 내 인생이 가벼워진다. ‘진지함(serious)’은 내 인생의 좌표점 바로 그 위에 서 있다. 그러니까 내 ‘인생(人生)’을 책임 있게 움직여 갈 수 있다. 그러나 ‘진지함’은 ‘내가 나를 욕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싫어한다. 오던 길을 다시 갈 수도 없고, 가야 할 길을 앞에 두고 멈칫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시니컬하게 진지하면’ 내 인생을 똑바로 보면서 내 인생을 움직여 갈 수 있다. ‘시니컬하고 시니컬하기만 하면’ 계속 밖에서 내 인생을 구경하기만 하고 이러니저러니 말만 하는 말쟁이가 된다. ‘진지하고 또 진지하기만 하면’ 내 인생을 어떻게 잘 해 보려고 죽어라고 애를 쓰지만, 내 인생(人生)과 다른 사람의 인생을 정확히 보지 못하니, 자꾸 실수를 하고, 실수를 하고도 실수를 한 것조차 모르며, 무겁고 힘겨운 짐을 지고 인생을 살게 된다.
 
1.7. ‘시니컬’할 줄을 모르면 사람은 ‘바보’가 된다. 세상에는 시니컬하지 못해서 바보가 된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바보’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만 욕하는 바보’이다. 이제 파스칼의 이야기는 충분히 들었으니, 우리의 시니컬한 주제,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바보, 자기만 욕하는 바보’에 관한 분석과 적용으로 넘어가 보자.
 
2. ‘자기를 ‘욕(辱)’할 줄 모르는 바보‘, ’자기만 욕(辱)하는 바보‘
 
2.1. ‘자기를 욕하는 것’의 어려움 : 자기를 욕하는 것은 어렵다. 남을 욕하는 것은 쉽고, 한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은데, 자기를 욕하는 것은 진짜 어렵고, 하고 싶지도 않고, 하고 나면 무척 아프다. ‘남한테 욕먹는 것도 괴롭고 어려운데, 왜 나까지 나서서 나 자신을 욕해야 하는가?’ 사람들이 ‘자기를 욕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욕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모르게 되고,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된다.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바보는 자기 인생을 꼬이게 하고 남의 인생도 꼬이게 만든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될까? 이제 자기를 욕하지 않는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그 원인, 그리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살펴보자.
 
2.2.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사람은 ‘먹이(양식)’로 산다. 나와 내 가족이 들어가 살 ‘굴(窟)’과 ‘먹이’와 ‘덮을 옷’이 없으면, 나와 가족은 생명활동을 지속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고 돈을 번다. ‘먹이’를 얻고 섭취하는 인간의 구체적(具體的) 신진대사 활동은 사회적으로 확장되어, 「의식주(衣食住)를 만들고, 팔고, 사고, 의식주를 살 ‘돈’을 벌고, ‘돈’을 벌 능력을 갖추는」 인간의 모든 경제활동(經濟活動)으로 추상화(抽象化)된다. 이제 사람은 ‘최소한의 먹이’를 구하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먹이’, ‘더 좋은 먹이’, ‘더 오래 가는 먹이’를 구하여 평생 애쓰며 산다.
 
그러나 사람은 ‘먹이(양식)’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자랑과 만족’으로도 산다. 사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공히 ‘하루 세끼’ 이상은 먹지 못한다. 그러니 사실 ‘최소한의 먹이’를 넘어서는 ‘더 많은 먹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고 인생에 불필요한 거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은 ‘더 많은 먹이’ 대신에 ‘자랑과 만족’만으로도 살 수도 있다. ‘최소한의 먹이 + 자랑과 만족’은 ‘최소한의 먹이 + 더 많은 먹이’와 거의 같은 값의 등식(等式)을 이룬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잉여의 먹이’를 구하는 인간의 노력까지도, ‘먹이’ 그 자체를 구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많은 먹이를 가지고 있다는 ‘자랑과 만족’을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자랑과 만족’의 꼭대기에는 ‘권력(힘)’과 ‘훌륭함(의로움)’이라는 두 갈래 가지가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힘’으로 살고, 어떤 사람은 ‘의로움’으로 산다. ‘권력’은 나의 인생과 다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고 힘으로 지배하는 짜릿한 희열감을 주고, ‘의로움’은 내 인생이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번쩍번쩍’ 거리며 빛나는 것 같은 황홀감을 준다. ‘권력’은 다소 성악설적이고, ‘의로움’은 다소 성선설적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히 인간에게 가장 크고 강렬한(intensified) 삶의 욕망과 동력을 제공한다.
 
2.3. ‘자기를 욕하기를 두려워하는 바보’ - ‘자랑과 만족으로 사는 사람’ : ‘먹이(양식)로 사는 사람’은 내추럴(natural)하다. 먹이를 찾아 내추럴하게 일하고 먹이를 찾아 내추럴하게 싸운다. 나의 먹이를 빼앗는 자를 자연스럽게 ‘욕’하고, 먹이를 뺏기면 자연스럽게 ‘나를 욕하면’ 된다. 아주 심플하다.
 
그러나 ‘자랑과 만족으로 사는 사람’은 조금 복잡해진다. ‘동일한 자랑과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 간에 ‘경쟁’이 생기고, ‘다른 자랑과 만족’들 간에도 ‘경쟁’이 있다. ‘자랑’과 ‘욕’은 상극의 길항관계에 있다. 자랑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자랑을 놓고 서로 경쟁하면서, 내가 자랑을 차지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자랑’을 ‘욕’으로 무너뜨린다. ‘먹이(양식)’는 ‘욕’한다고 구해지거나 내게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므로, ‘욕’은 ‘먹이(양식)’의 대체재가 아니다. 그러나 ‘자랑’은 ‘욕’으로 즉시 무력화시킬 수 있으니, ‘욕’은 ‘자랑과 만족’의 대립적 대체재(반물질)이다. 그래서 ‘자랑과 만족으로 사는 사람’은 ‘먹이로 사는 사람’보다 더 많이 다른 사람을 욕하고, 더 많이 다른 사람의 욕을 먹는다.
 
사람들은 ‘자랑과 만족으로 사는 사람들 간의 욕(辱) 게임’을 마치 땅따먹기를 하는 미식축구처럼 생각한다. ‘당신이 한번 자랑하면 나는 한번 욕한다.’ 이것이 욕게임의 기본 룰이다. 자랑이 1점, 욕이 마이너스 1점, 1 : 1 동점, 두 개를 더하면 0점이 되어, 세상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된다. ‘내가 자랑하면 딴 사람이 나를 욕한다.’ 마찬가지로 더하기 빼기 제로(zero)가 되어 내 자리는 그대로 보존된다. 그러나 ‘내가 나를 욕하면?’ 나는 상대방의 욕으로 마이너스 1점, 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한 자살골 욕으로 또 마이너스 1점, 합계 마이너스 2점이 되고, 상대방은 나에 대해서 던진 욕으로 플러스 1점, 내가 한 자살골 욕으로 또 플러스 1점, 합계 플러스 2점이 된다. 더하기 빼기 무려 4점이나 득점에 차이가 나게 된다.
 
그러니까 ‘남들이 모두 나를 욕하는 세상’에서 ‘자기가 자기를 욕하면’ 손해(損害)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손해를 보기가 싫어서, 상대방에게 밀리고 손해 보는 것이 두려워서 절대로 ‘자기를 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기를 쓰고 상대방의 잘못을 찾고, 득점을 하고 전진을 하기 위하여 상대방에 대한 욕을 계속 던진다. 누구나 이것이 영리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것이 영리한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자기를 욕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바보’들은 자기가 실제로는 ‘바보’ 짓을 하고 있는 것도 모르는 바보들이다.
 
두 사람이 싸우면, 대부분 두 사람 모두에게 잘못이 있다. 다만 잘못의 양이 다를 뿐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다는 것을 조금 더 잘 안다! 그래서 상대방을 욕하고 제압하기 위해서, 나의 자랑과 만족과 의로움을 지켜내기 위해서, 알면서도 모른 체 하면서, ‘나의 잘못’을 ‘내가 먹을 욕’을 마치 ‘상대방의 잘못’ ‘상대방이 먹을 욕’인 것처럼 상대방에게 마구 던져버린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리고(mess-up), 상황이 과잉(過剩) 악화된다. 학교에서 친구끼리 싸울 때, 회사에서 상하 간 동료 간 갈등이 생길 때, 부부싸움을 할 때, 부모와 자녀가 다툴 때, 모든 상황에 이 원리가 작동한다.
 
생각해 보라! 싸움이 났다. 여기에 30퍼센트 잘못이 있는 사람(덜 잘못한 사람)과 70퍼센트 잘못이 있는 사람(더 잘못한 사람)이 있다. 덜 잘못한 사람은 자기의 덜 잘못함을 ‘자기의 의로움(righteousness, justice)’으로 여기고, 상대방의 더 잘못함을 ‘상대방의 불의(uprighteousness, injustice)’로 여기면서, 나의 정의로움과 상대방의 불의함을 확정하고 응징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서 결정적인 문제는, ‘덜 잘못한 사람의 잘못 30퍼센트가 어떻게 처리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분명한 것은 「‘덜 잘못한 사람’에게도 잘못 30퍼센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덜 잘못한 사람도 알고, 더 잘못한 사람도 안다는 것이다. 덜 잘못한 사람은 자기의 의(義), 자기의 ‘자랑과 만족’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의 잘못 30퍼센트를 덮어두기로 작정한다, 싸움이 났는데 ‘나도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면 흑백과 선악의 구분이 옅어지고, 내가 먼저 나를 30퍼센트만큼 욕하면, 전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상대방이 ‘의(義)’의 타이틀을 훔쳐가고 나는 나쁜 놈으로 전락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덜 잘못한 자는 자기의 30퍼센트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알면서도 덮어두고(은폐하고), 100퍼센트 정당한 자로 자신을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100 퍼센트 불의한 자로 규탄하고 욕하게 된다. 정확하게 이 지점(地點)에서 ‘30퍼센트 만큼의 진실을 은폐하고 잘못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30퍼센트의 새로운 불의(不義)’가 창조(創造)된다. 그 결과 덜 잘못한 사람의 잘못의 양(量)은 (i) ‘당초의 잘못 30퍼센트’에다가, (ii) 자기 잘못 30퍼센트를 은폐하고 상대방에게 덮어씌운 ‘새로운 잘못 30퍼센트’를 더한 ‘총 60퍼센트’로 대폭(大幅) 증가한다. 동시에 그가 가진 의(righteousness)의 양(量)도 ‘당초의 70퍼센트’에서 ‘새로 범한 그의 불의 30퍼센트’를 뺀 ‘40퍼센트’로 대폭 줄어든다. ‘더 의롭던 자’가 자신의 의를 확장하려는 시도를 통해서, 오히려 그의 의가 줄어들고 ‘더 불의한 자’로 전락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자, 이제 본래 ‘더 잘못한 사람’이었던 상대방의 입장으로 가 보자. 더 잘못한 사람은 자기의 잘못이 70퍼센트인 것을 안다. 그리고 덜 잘못한 상대방의 잘못도 30퍼센트인 것을 안다. ‘70 : 30.’ 자기가 옳고 상대방이 틀리다고 주장하고 싸우기에는 조금 벅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일 상대방이 자신의 30퍼센트 잘못을 cool하게 인정하고 나오면, 나도 나의 잘못 70퍼센트를 깨끗이 인정하고 사과하고 분쟁을 끝낼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덜 잘못한 자가 갑자기 자기가 100퍼센트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나를 100퍼센트 불의한 자라고 욕하고 나온다. 이건 아니지! 내가 가만히 있으면 나는 나의 정의 30퍼센트를 그냥 억울하게 뺏기고 ‘조금 나쁜 놈’에서 ‘정말 나쁜 놈’으로 전락한다. ‘자랑과 만족으로 사는 인간’인 내가 어찌 이런 수모와 억울함을 참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저쪽이 나의 정의 30퍼센트를 훔쳐가려고 했기 때문에, 이제 이 분쟁에서는 ‘내가 나쁜 놈’이 아니고, ‘나를 부당하게 공격한 저 쪽이 나쁜 놈’이 되어버렸다. 자 이제는 겁내거나 마음이 찔릴 필요가 없다. 사정없이 상대방을 몰아세우고 욕해 버리자!
 
‘자기가 자기를 욕해야만 했던’ 이 ‘30퍼센트의 불의(不義)’는 마치 계속 반복해서 터지는 산탄(散彈) 폭탄(爆彈)과도 같다. 분쟁 속의 한 당사자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기를 욕하지 않으면’ 이 30퍼센트 불의의 폭탄은 그 자신의 머리 위에서 폭발하여 그의 의로움을 30퍼센트만큼 터뜨려 버린다. 이 폭탄을 넘겨받은 상대방이 다시 이를 반대쪽으로 던져버리려고 하면, 이 폭탄은 다시 터져서 그 상대방도 30퍼센트 더 나쁜 놈으로 만든다. 이렇게 ‘자기를 욕하지 않는 폭탄’이 오고가면서 계속 반복하여 폭발하면, 나중에는 두 당사자 모두, 정의는 모두 없어지고 불의로만 가득 찬 사람이 된다. 그리고 미움과 악의와 싸움은 두 사람 모두의 생명이 끝날 때까지 증폭되어 계속된다.  
 
반면 30퍼센트의 불의를 가진 사람이 처음부터 깨끗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싸움을 할까 말까 잔뜩 긴장하고 있던 상대방은, 주먹을 뻗을 곳을 잃어버려 헛 주먹을 날리고는, 김이 빠진다. 서로 자기의 잘못만큼 자기를 욕하고, 사이좋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30퍼센트의 잘못을 가지고 70퍼센트의 정당성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잘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심플하게 ‘I am sorry’라고 하면서, 상대방과 정당성 비율 싸움을 전혀 하지 않고 깨끗하게 물러서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대부분의 상대방은 엄청 당황하게 된다. 표정은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자기가 더 잘못한 사람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를 나에게 양보한 상대방에게 놀라움과 감사함을 느낀 상대방은, ‘진짜 잘못한 사람은 나’라고 ‘미안하다’고 하면서, 이 건의 분쟁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된다. 실제로 실험을 해 보라. 싸울 때에 내가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면, 상대방도 한 발짝 앞으로 밀고 들어오지만, 내가 뒤로 몇발짝 확 빠지면, 상대방도 대부분 똑같이 여러 발짝 뒤로 빠진다. ‘내가 먼저 뒤로 빠지는’ 불의의 타격을 주면, 상대방은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를 좋아하기 시작한다. 신기한 것은, 내가 좋아하고 많은 애를 썼던 사람보다도, 이렇게 싸울 뻔 하다가 한번 참아준 사람들이 나중에 내게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싸움에 이기려 하는 자는 질 것이요, 지는 자는 이길 것이다!’ 
 
2.4. ‘힘(권력)으로 사는 사람’ – 자기를 욕하지 않는 악(惡)한 바보 : ‘권력(힘)으로 사는 사람’, ‘훌륭함(의로움)으로 사는 사람’ 쪽으로 오면 일이 훨씬 더 복잡해진다. 이들은 초자연적(supernatural)이지는 않지만 아주 부자연스럽다(unnatural). 권력으로 사는 사람은 힘으로 ‘먹이’와 ‘자랑과 만족’을 모두 취하려고 하고, 훌륭함으로 사는 사람은 의로움으로 ‘먹이’와 ‘자랑과 만족’을 초월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 많거나 너무 적다. ‘힘으로 사는 사람’, ‘의로움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욕(辱)’도 자연스럽지 않고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람을 욕해도 ‘너무 심하게, 극단적으로 욕하는 사람’은 대부분 이들 부류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부류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자기의 권력이 무너질까 두려워, 자기의 의로움이 무너질까 무서워, ‘자기를 욕하지 못하는 바보’들이다.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본래는 객관적이고 성악설적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고 다른 사람의 욕구와 자신의 욕구가 모두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현실이라는 것을 안다. 이들은 자신의 욕구와 힘과 권력을 추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욕’을 활발하게 이용한다. ‘거짓 증거하는 것’, ‘거짓말로 욕하는 것’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고 죄책감도 없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고 세상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 사람들은 ‘바보’라기보다는 ‘너무 지나치게 영리한’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힘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막상 힘과 권력을 현실적으로 가지면,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은 ‘힘과 권력’을 방어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자기에 대한 욕’을 금지하려고 한다. 국가적 차원의 권력이나 사회적 차원의 권력이나, 기업의 권력이나, 단체의 권력이나, 가족 단위의 권력이나, 권력이 있고, 힘이 있는 모든 곳에서는 이 현상이 발생한다. 권력을 얻기 전에는, 권력을 얻으려고 그렇게 많은 ‘욕’을 능수능란하고 정교하고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활용했던, 이 사람들이 권력을 얻은 후에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자기를 욕하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하고, 제거하고 싶어 한다.
 
이들은 본래는 자기의 벌거벗은 이해관계와 권력욕(naked interest and desire to power)를 분명히 알고 그 흠까지 인정하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권력이 흔들리고 금이 가고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의 흠’에 대한 공격을 싫어하던 심리는 점점 ‘자기의 흠 자체에 대한 부정(否定)’으로 넘어간다. ‘자기 자신을 속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권력이 있는 자’가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속이기 시작하면, 권력 자체의 번쩍거리는 ‘힘’이 또 ‘권력 가진 자를 더 속여서’, 무결점의 권력과 무결점의 권력자하는 환상을 창조해 낸다. ‘자기를 욕하기 싫어하던 바보’가 ‘자기를 욕하지 않는 바보’로 변하더니, 급기야는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바보’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들의 눈은 권력의 ‘비늘’로 가려져서, 자기의 ‘욕먹을 흠’을 못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의 ‘욕하는 진실’을 못 보게 한다. 다른 사람이 다 보는 자신의 문제점을 혼자만 잘 난 척 하면서 알지 못하니 바보가 아니고 무엇인가? ‘욕 먹는 것이 싫어서, 욕먹는 것이 화가 나서’ 자기를 욕하지 않는 바보,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바보는 이렇게 나타난다. 그러나 국가적 차원에서, 회사의 차원에서, 가정의 차원에서,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권력 있는 바보, 힘 있는 바보’는, 다행히도, 독재사회에서는 혁명에 의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거나 표결을 통해서 그 힘과 권력을 잃는다.
 
2.5. ‘훌륭함, 의로움으로 사는 사람’ –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오만(傲慢)한 바보 :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사람”의 가장 빈번한 출현, 그리고 가장 위험한 양상은, 역설적이게도 ‘훌륭함으로 사는 사람, 의로움으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아주 오래전의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든 사람’은 지식이 있는 사람, ‘난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지만 너희들은 ‘된 사람’, 즉 덕(德)이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취지이다. (요즈음은 꼭 그렇다고 할 수도 없지만)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커서 ‘휼륭한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교과서와 서점에는 위인, 즉 훌륭한 사람들의 전기들이 쌓여있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욕먹을’ 일을 해서는 안 되니까, ‘착하게’ 살아야 하고 ‘열심히’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욕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아주 가끔 상대적(相對的)으로 ‘상당(相當)히 훌륭한 사람’, ‘비교적(比較的) 의로운 사람’이 생겨난다. 고래(古來)로, 칭찬은 칭찬을 먹고 더 자라고, 명예는 명예를 먹고 자라며, 존경은 존경을 먹고 더 자라난다. 여기에 대중화되고 정보화, 산업화된 현대 사회는 영웅(Hero)과 의인이 나타나면, 신속하게 이를 상업(商業)화하고 흥행화하며 절대화(絶對化)한다. 훌륭하게 살려는 사람, 의로움으로 살려는 사람은 물론 좋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훌륭함과 의로움이 한 사람을 통해서 대중화, 절대화할 때, 이 것은 또 하나의 권력이 되고 ‘세상의 모든 의(義)를 잡아먹는 불가사리’ 같은 이상한 ‘괴물’처럼 변해간다.
 
과거(過去)에 이들은 ‘훌륭하게 살려고 노력했으니 ☞ 훌륭했다.’ 그러나 현재(現在)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인정을 받았으니) ☞ 훌륭한 사람이다.’라는 동어반복적 순환논법이 된다. 과거(過去)에는 ‘욕먹을 일을 안 하려고 노력했으니 ☞ 욕을 덜 먹거나 안 먹었다.’ 그러나 현재(現在)는 ‘훌륭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인정을 받았으니) ☞ 욕을 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겸손(謙遜)한, 상대적 훌륭함과 상대적 의로움이 있었다. 그런데 그 상대적 훌륭함과 의로움이 인정되어 훈장(勳章)을 받고 나자, 교만(驕慢)한, 절대적 훌륭함과 절대적 의로움이 생겨난다. 이제는 선악을 판단한 공인된 권위를 획득했다. 과거에는 그들도 욕을 먹으면 반성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남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므로』, 『나는 옳고(right), 다른 사람은 틀리므로(wrong)』, 나는 남에게 욕을 먹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도 나를 욕해서는 안 된다. 이리하여 ‘다른 사람만 욕하고,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의로운 바보’가 탄생한다.
 
정치의 세계에는 항상 ‘제3세력’이 자리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자리를 거쳐가는데, 이 자리가 바로 어설프게 ‘다른 사람을 욕하고,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의로운 바보’가 나타나기 가장 좋은 자리이다. 이 자리에서는 ‘기존의 것’들을 모두 욕하고, ‘새로운 것’을 주장하기만 하면 되는데, 이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는 본인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똑똑하고 착한 사람들이 이 자리에만 들어오면 모두 바보가 된다.
 
2.6. 교조주의와 dogmatism – 다른 사람만 욕하고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게으른 바보 : 이것은 좌우(左右)를 막론하고, 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위험하고 해악이 많은, ‘다른 사람만 욕하고,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바보’의 세계이다. 진리(眞理)는 그것을 찾아가는 절차와 과정에 생명력이 있다. 교조주의는 그 과정을 통해서 도출된 ‘답(答)’에만 집착해서 진리의 생명력을 버리고도 자신을 ‘확고한, 확정된 진리’라고 주장한다. 도그마티즘은, ‘질문과 답과 문제풀이가 모두 들어있는 생명체’와 같은 진리의 유기체(有機體)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절차와 사람의 고민과 진심을 모두 파내고, 그 자리에 ‘글자’와 ‘문자’들의 꾸러미를 집어넣어서는, 진리를 생명력 없는 박제(미이라), 화석으로 만들어 버린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문제를 풀지만’,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은 그냥 ‘답을 외운다.’
 
박제화된 진리를 붙잡고 있는 교조주의는, 외부로부터의 욕과 비판을 감당할 능력이 없고, 감당할 의사(意思)도 없다. 이미 박제를 만들기 위해서, ‘답’을 찾기까지의 질문과 과정과 절차의 재료를 모두 버렸으니, 외부로부터의 질문과 문제제기와 비판을 받아낼 능력이 없다. 그리고 교조주의에는 이미 공인된 ‘정답’을 반복하는 것 이외에, 그 문제풀이 과정을 찬찬히 되풀이하고 싶지도 않은 게으름이 만성화되어 있다. 그 결과 박제된 ‘답’을 우상처럼 받들어 모시는 교조주의는, 생명력 있는 모든 ‘질문’을 욕하고 배척하면서 자신에 대한 일체의 비판과 욕을 용납지 않는다. 평등과 사회정의를 외치던 맑시즘이 자신에 대한 ‘욕’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교조화되자, 지나친 증오와 굳어버린 사회를 만들고는 결국 무너져버렸다. 자유시장과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가 자신에 대한 ‘욕’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교조화되면, ‘돈’과 ‘성공’과 ‘효율’만을 숭상하고 ‘돈 없고 성공하지 못하고 효율적이지 못한’ ‘사람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맘몬의 사회’를 만들어 버릴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신의 초월적 은혜를 통한 진리와 자유를 추구하는 기독교가 일부 교리에 대한 비판과 교회의 잘못에 대한 ‘욕’ 듣는 일을 배척하고 교조화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진리의 통로라는 본래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맛을 잃은 소금처럼 길거리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혀지게 될 것이다.
 
‘먹이로 사는 사람’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형태이므로, 누군가가 ‘먹이(양식)’를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완전히 독점하는 것은 어렵다. ‘자랑과 만족으로 사는 사람’은 서로 열심히 욕하고 욕먹으면서 ‘자랑과 만족’을 함께 나누어 먹고 살아간다. ‘힘과 권력으로 사는 사람’은 일정기간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양심을 억누르면서 자신에 대한 욕을 못하게 하거나 억누르면서 살 수 있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거제도를 통해서 영원한 권력과 욕의 독점을 못하게 해 놓았다.
 
그러나 자천(自薦) 타천(他薦)으로 ‘의로움으로 사는 사람’으로 인정된 자, 그래서 자신이 절대적인 의로움을 가졌다고 착각하고 화석화된 진리로 다른 사람들의 선악과 불의를 판단하는 자들은 가장 ‘고약’하다. 이들은 ‘의(義)’의 블랙홀이 되어 모든 사람의 의와 자랑을 자기에게로 빨아들이려고, 다른 사람의 의와 자랑을 탈취해 버린다. ‘다른 사람들을 욕할 권리를 독점’하고 ‘자기를 욕할 줄을 모르는 바보’는 ‘자기만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의 권위(權威)로 ‘다른 모든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가장 위험하고 비극적인 바보가 아닐 수 없다.
 
2.7. ‘자기만 욕(辱)하는 바보’ - 남을 욕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 : 사람들의 성향은 대체로 두 가지 부류 중의 하나로 나뉜다. 하나는 ‘성격이 강하고 일도 열심히 하는데, 다른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상처를 주기가 쉬운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성격이 순하고 원만해서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는 않는데, 뭐를 해도 주저하고 망설이면서 화끈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의 두 가지 종류이다. 전자(前者)의 강(强)한 성격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자기를 욕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든다. 그러나 후자(後者)의 약(弱)한 성격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을 욕하지 못하고, 자기만 욕하는 사람’들을 만든다.
 
‘자기를 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먼저 다른 사람을 해치고 그 다음에 자신을 해치지만, ‘자기만 욕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해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을 해친다. 갈등상황에 있을 때 ‘자기를 욕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잘못’을 금방 포착하지만 ‘자기만 욕하는 사람’은 ‘자기의 잘못’만 금방 포착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을 너무 배려하고,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는 주장하지도 지켜내지도 못한다. 그러고 나서는 또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욕한다.’ ‘착한 사람’ 중 일부(一部)의 소수는 ‘의롭고 훌륭한 사람의 길’을 걷다가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의 함정에 빠지지만, ‘착한 사람’의 대부분은 ‘자기만 욕하고 다른 사람을 욕하지 못하는’ 함정에서 아예 벗어나지를 못한다. ‘이렇게 착한 것’은 ‘착한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항상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이 나뉘어져 있다. 정의가 70 대 30으로 나뉘어 있을 때, 70을 가진 사람이 100을 주장하거나 30을 가진 사람이 100을 주장하는 것 모두가 악(惡)하고 도둑질을 하는 일이다. 반대로 30을 가진 사람이 싸우지 않고 ‘0’에 만족하거나 70을 가진 사람이 비굴하게 상대방의 밀어붙임(intrusion)에게 양보해서 불의한 자리로 밀려나는 것, 이것이 착하고 선한 것일까?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고 사(赦)하여 주라’는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좋은 행동일까? 결코! 아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도둑질하는 자, 도둑질하는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집안에 도둑놈이 들어왔을 때에는 겁이 나더라도 도둑을 물리치고 쫓아내고 다시는 도둑질을 못하도록 경찰에 넘겨야 하지,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한다고 ‘어서 오세요! 뭐든지 다 가져가세요. 내가 다 용서할께요. 다음에 또 오세요.’라고 반갑게 맞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분쟁과 갈등의 상황에서 ‘상대방의 불의’를 무조건 덮어주고 불의가 prevail하게 방치하는 것은, 악을 조장(助長)하고 상대방이 계속 의(義)의 강도질을 계속 하도록 하는 악덕(惡德)이다. 내 몫을 ‘붙잡고’ 주체적으로 양보하는 것과, 내 몫을 ‘붙잡지도 못하고’ 피동적으로 밀려나는 것은, 겉모습을 비슷해도 그 실질적인 내용은 극과 극이다.
 
부모가 나의 인생에 대하여 옳지 않거나 무의미한 요구와 제약을 가할 때, 자식은 자기의 주관에 따라 ‘내 인생(人生)은 나의 것’이라는 소유권 관념을 가지고 부모의 희망에서 벗어나 자기의 희망에 따른 독립된 인생의 선택을 하여야 한다. ‘효도’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원하지 않는 길로 비주체적으로 끌려 다니는 것은, 자신에게도 나쁘고 결국에는 부모에게도 좋지 않다. 성장한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부모는 꺾이고 힘을 잃는다. 그러나 부모들에게는 미안한 말씀이지만, 성장한 자식이 계속 부모 말을 듣고 부모가 계속 힘이 팔팔해서 자식의 인생에 개입하는 것은 자녀에게도 좋지 않고, 부모에게도 좋지 않으며, 결국에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파탄케 하는 첩경이다. 부모가 한번 섭섭하고 슬퍼해도, 내가 할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게 얘기하고 분명하게 처리하는 것은 올바른 효도의 길이다. 부모는 나를 키워주고 무조건적으로 도와준 평생의 은인이지만, ‘자녀가 온전하고 당당하고 주관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모의 이익이지, ‘자녀가 나이가 다 먹고도 어린애같이, 부모가 시키는 대로 이리저리 힘없이 끌려 다니는 것’이 부모의 이익은 아니기 때문이다. 온정주의(溫情主義)는 많은 경우에 냉정주의(冷情主義)만 못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만 욕하고, 다른 사람을 욕할 줄 모르는 바보’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망가뜨린다. 사람은 ‘자기도 욕하고’ ‘다른 사람도 욕하며’ 살아야 한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독립해서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하고,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할 ‘잘못’이 무엇인지 우선 그 정체가 밝혀져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선욕후사(先辱後赦)’, 먼저 욕하고 그 뒤에 용서해야 한다.
 
3. 처방 – Let’s get into Cynical again ! : ‘자기를 욕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바보’들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했을 때’ 자기의 자랑과 만족이 무너지게 되는 것을 겁내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잘못’을 쉬지 않고 던진다. 그러나 자기의 잘못은 남에게 던진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내 머리 위에서 터져서, 나의 잘못을 더 키우고 명백하게 만든다. 마치 도망치는 꿩이 머리만 풀숲에 박고 엉덩이는 밖에 훤히 내어놓는 격이다. 사람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에 그의 자랑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cool하게 자기의 잘못을 모두 인정하고 자기의 정당성을 화끈하게 양보할 때 오히려 그의 ‘자랑과 만족’이 커진다.
 
‘자기를 욕하지 않는 악한 바보’들은 권력에 취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를 욕하는 것을 멈추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욕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방해한다. 그러나 모든 권력은 유한하고, 욕을 못하게 하는 바보는 결국 욕으로 무너질 것이다.
 
‘자기를 욕할 줄 모르는 오만한 바보’들은 자기의 상대적 의를 절대적 의로 착각하여, 다른 사람들의 의를 모두 자기 품안에 빼앗으려는 ‘의로움’의 절대적인 도둑놈이 된다.
 
‘자기만 욕하는 바보’들은, 자기의 몫을 찾지 않아서 자기 인생을 망치고, 다른 사람들의 악을 방치해서 남을 망치는, ‘착한 짓으로 나쁜 짓을 하는’ 바보들이다.  
 
이들은 모두, 자기의 좌표 위에서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에만 집착하는 ‘답답한 주관적 진지함’의 발현이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내가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낳은 바보요, 괴물들이다.
 
내 자리에서 5미터만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면 이 모든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쉽게 보일 텐데, 자기에 대한 집착에 빠진 사람들은 결코 자기를 밖에서 보고 자기의 잘못과 자기에 대한 욕을 객관화하면서, 자기 자신을 비웃어주는 일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자기의 인생이 감당할 수 없이 무거워지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도 덩달아 피해를 준다. 모두들 어깨에 힘을 빼고, ‘나’와 ‘너’와 ‘세상’에 대해서 시니컬해지자! 진지하게 그러나 시니컬하게, 나를 객관화하고, 남을 객관화하고, 열심히 살면서, 그러나 놀기도 하면서..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4, 2013년 12월, 이병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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