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2014년)에 김남우 선생의 {비극의 탄생}(열린책들, 2014) 번역이 나왔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 김대경(1982년), 이진우(2005년), 박찬국(2007년)에 이은, 네 번째 번역이다. 번역이 이미 있는 책보다 아직 번역이 한번도 이루어지 않은 책을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겠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번역은 많이 이루어질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것은,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한국어 발전을 위해서 그러하고, 현재 한국어의 상태를 고려할 때 필연적인 일이기도 하다. 이번에 소개하는 {비극의 탄생} 번역은, 독일어 원전 번역인 것은 물론이고, 2012년도에 독일에서 발간된 {비극의 탄생} 주석서를 참조한 번역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의 기본요건과 관련해서 말고도, 나는 이 번역서의 출간과 관련해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한국에서 {비극의 탄생} 저자인 니체(1844~1900)가 차지하는 위상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니체는,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 형이상학을 파괴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목사의 아들이기도 했던 그가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었던 힘은, 고대 희랍문학에 대한 그의 생생한 공감과, 거의 몸에 배다시피 한 지식에서 왔다. 잘 알려진 대로, 희랍문학의 세계관은 기독교와 상극이다.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는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거의 매일 위반한다. 희랍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일리아스> 역시, 보스의 여자를 빼앗은 이웃 부족에 대한 어느 부족의 복수담이다. 거기서 우리는 “용기와 명예”는 찾아볼 수 있지만, “죄의식과 양심”은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일리아스>가 전쟁과 약탈로 유지되던 청동기 시대의 사회 현실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물론 니체가 살고 있던 19세기의 독일 역시 전쟁과 약탈만으로 유지된 사회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니체는, 젊은 시절 너무나 열심히 희랍어와 희랍문헌을 공부했고, 그 속에 담긴 위험스러울 정도로 고대적인(거의 원시적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정신세계를 체득해 버렸다. 그리고 니체가 그것을 체득하기 위해 10대의 대부분을 보낸 결과, 20대 중반이라는 매우 어린 나이에, 그는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책 한 권을 잘못 써서, 보수주의자 후배인 빌라모비츠(1848~1931)에게 엄청난 비난과 반격을 받았고, 결국 교수직을 자진 사임하게 되었다. 그 책이, 내가 지금 다루려고 하는 {비극의 탄생}이다.

니체의 일생은, “젊은 천재의 빠른 성공→사회적 통념에 대한 무시와 자만→주류 세계로부터 외면당해 몰락”이라는, 흔하지는 않지만 매우 전형적인 경로를 밟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찌감치 성공하는 젊은 천재가, 무조건 주류세계로부터 외면받거나 몰락하는 건 아니다. 니체를 정신의 스승으로 삼았던, 한때 니체 못지않게 유명했던 프랑스 철학자 푸코(1926~1984)는, 프랑스 최고의 국립대학인 콜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직을 지켰다. 푸코가 AIDS로 죽었다는 말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그리고 그가 대표작 {말과 사물}에서, 변태성욕과 인간의 악에 대한 극단적으로 긍정적인(?) 묘사 탓에 불문학사에서 추방당한 사드(1740~1814)를, 18세기적 인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버젓이 내세웠는데도, {말과 사물}은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다는 걸 감안한다면, 사회적 통념을 무시하는 천재가 무조건 사회에서 매장당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니체의 매장을 보수적인 19세기 독일 문화 탓으로, 푸코의 승승장구를 리버럴한 20세기 프랑스 문화 탓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런 걸 따지는 것은 검열사회학 또는 지식사회학의 과제일 터이다. 오히려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사실, 니체와 푸코 사유의 근본은 거의 같으며,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개인의 내면, 주체의 권리와 의지를 사회의 지속 원리로 삼는, 근대 문명의 기초는 매우 취약한 것이다.” 즉 두 사람의 근본 취지는, 과문한 내가 보기엔, 거의 똑같다. 얼핏 독창적인 사상가처럼 보이는 푸코가, 니체라는 원본(原本) 앞에서는, “개별 지식 영역의 좀스러운 정리꾼”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런데도 왜 푸코는, 일생동안 속된 말로 훨훨 날았고, 반면 니체는, 일생동안 추위와 고독 속에서 떨며, 점점 날카로운 고슴도치처럼 변해 갔을까? 

이 문제에 확실히 대답할 순 없겠으나, 나는 최소한 제도를 이용하는 면에서는 푸코가 니체보다 훨씬 영리하고 노회(老獪)했다고 생각한다. 니체는 18세기 이후 형성된 독일 낭만주의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일종의 “상처받은 문학소년” 같은 분위기를, 죽을 때까지 떨쳐버리지 못했다. 반면 푸코는, 니체라는 선배 덕분에 근대의 작동 원리와 한계를 훤하게 알고 난 뒤, 근대라는 제도의 허약성뿐 아니라, 그 내적 보수성 내지 공고함 또한 철저하게(또한 처절하게) 인식했고, 그래서 낭만주의나 혁명 따위는 일찌감치 포기했으며, 오히려 그 제도가 지닌 겉보기 공고함의 이면에 놓인 허약함을, 극히 실증적인 차원에서 폭로하는, “시한폭탄 같은” 글쓰기를 했던 거라고 본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는 일종의 팜플렛(이 말에는 소논문이라는 뜻이 있음)을 썼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28세였다. 니체의 수많은 저술은 대체로 완성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사상사에 미친 영향력이나 사유의 밀도는 대체로 고른 편이다. 그는 일찌감치 자기 사유의 정상에 도달해 있었고, 그것이 적용되는 영역만을 점차 넓혀 갔을 뿐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그는 고전을 교양으로 소비하는 속물적 지식인들과, 대중에 영합하는 이탈리아의 통속 오페라와, 주석과 원본확정에 골몰하는 좀스러운 고전문헌학자들과, 소크라테스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적 인간의 자의식을 비판했다. 그리고 그 비판의 강도는, 그의 마지막 저술이라 할 {반 그리스도}에 뒤지지 않는다. 다만 {반 그리스도}에서는, 서구문명 전체를 떠받드는 기둥이라 할 유대-기독교의 전제 자체를 직접 공격함으로써,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으로 전선(戰線)을 확장시킨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올해(2014년) 12월 3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한 구석에서 조그만 행사가 열렸다. 다름아닌 서울대학교 서양고전 협동과정 창립 25주년 기념 학술대회였다. 협동과정(program)이란, 학부를 가진 공식적인 학과(department)는 아니되, 연구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학문 분야를 관련된 학과들의 교수들이 협력하여 운영하는 석사-박사과정을 가리킨다. 서양고전 협동과정은 구체적으로 고대 희랍어와 희랍문학, 라틴어와 라틴문학을 가르치는 곳이다. 거기에서 이 협동과정에 오래 관여하시고 실제 강의 및 논문지도를 오래 맡으셨던 전 서울대학교 철학과 이태수 교수님께서 <철학에서 고전학으로>라는 제목의 발표를 하셨다. 내가 이 발표를 거론하는 것은, 거기에서 니체의 글쓰기 전반에 대한 원로 학자의 비교적 공정하고 날카로운 평가를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태수 교수님께 배운 적은 없고, 그분의 제자들(그러나 이분들도 대부분 나보다 연배가 높다)로부터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우고 있는 사람이기에, 그분에 대한 평가를 내릴 위치에 전혀 있지 않음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그러나 니체에 대한 서술만을 놓고 말하자면, 이태수 교수님의 니체에 대한 설명은, 서양 고전문헌학과 한국의 현실 모두에 정통한 분이 아니고서는 쓸 수 없는, 간결하고 요령 있으면서도 깊이 있는, 그러면서도 알기 쉬운, 감동적인 명문(名文)이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매우 호기롭고 순진한, 젊은이 특유의 자신감을 가지고 썼다. 그러나, 그의 낭만적 정신과 천재 특유의 조급함은, 당시 농익을 대로 농익은 독일 고전문헌학 제도의 수준에서 볼 때,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니체는 후배 빌라모비츠의 맹비난을 받고, 결국 몇 년 후 학계에서 축출되고 말았다. 물론 니체 자신도 고전문헌학계에 아무 미련이 없었다. 

사실은 간단한 문제일 수도 있다. 니체는 제도권 밖에 있었고, 빌라모비츠는 제도권 안에 있었던 탓이다. 물론 니체가 책을 쓸 당시에는 바젤 대학의 정식 교수였으니, 그는 분명 제도권 안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이미 제도가 묶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다. 반면 빌라모비츠는, 니체가 폐인이 된 1889년 이후 40년 이상을 더 살면서, 희랍 고전문(헌)학을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았고, 특히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희랍비극의 정신을 타락시켰다고 맹비난한, 에우리피데스를 재평가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김남우 선생의 {비극의 탄생} 번역을 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빌라모비츠의 니체 비판은, 매우 지엽적이고 부분적인 사실 오류나 논리의 비약을 추궁하는 것일 뿐, 결코 니체의 논지 자체에 대한 비판은 되지 못하는 것 같다(이 점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번역자 김남우 선생의 공로이다.) 

{비극의 탄생}은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진 책이다. 청년 니체의 혈기를 맛볼 수 있는 글이기도 하고, 희랍문학의 역사에 대한 매우 개성 넘치는 정리 보고서이기도 하고, “사유하는 인간”이 낭만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전면적 발달을 얼마나 저해했는지 개탄하는 문명비판서이기도 하고, 동시에 르네상스의 부산물이었던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모멸과 바그너 오페라에 대한 맹렬하면서도 편파적인 찬가(讚歌)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니체 학문의 뿌리는 희랍어와 희랍문학이었다. 희랍세계에서 니체는 지식을 넘어선 인간의 전면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기뻐했으며, 당대 독일에 남아있던 낭만적인 분위기는 그의 정신에 불을 질렀다. 니체는 젊은 나이에 안정된 학자가 차지할 수 있는 지위인 교수 자리에 올랐으나, 그는 애당초 학자로 만족하고 살기엔 너무 뜨거운 가슴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이다.

반면 빌라모비츠는 니체에 비해 훨씬 고지식하고 격식적이며, 학문의 규범에 자기 자신을 강력하게 옭죄던, 제도의 인간이었다. 앞서 말한 발표문에서 이태수 교수님은, “빌라모비츠는 문헌학자로서 더없이 성실했지만 문헌학에 대한 철학적 성찰에서는 너무나 허술했고, 니체는 거꾸로 문헌학에 관한 철학적 성찰에서 더없이 성실했지만 문헌학자로서는 너무나 허술했다”는 한 독일인의 평가를 언급한 뒤, “한국의 서양고전학도들은 빌라모비츠와 니체를 합친 것 같은 인재가 되어야 한다”고 주문하셨다. 사실의 엄정함에 기반한 이야기를 하되, 결코 학문 자체를 위한 학문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일 것이다. 나는 평생을 엄정한 문헌학자로 사셨던 이태수 교수님께서 빌라모비츠의 한계를 추상같이 지적하시는 이러한 태도에 깊은 존경의 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태수 교수님의 다음과 같은 니체 평가를 보면, 그분 역시 문헌학자로서 니체에 대한 일종의 경계심을 갖고 계신 것으로 여겨진다.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원본은 (...) 생명력이 넘치는 금발 야수라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가 찬탄하고 배워야 할 인간의 모습이라고 역설합니다. (...) 학문으로서 고전문헌학에 종사할 기회를 갖지 못한 니체로서는 고전문헌학의 철학적 기반을 인간의 이상화된 모습을 그려 보여주는 예술로 갈음하는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대목에서까지 니체가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필연의 까닭은 없습니다. 누구나 다 니체와 꼭 같은 심미적 취향을 가지라는 법은 없습니다.” 외람된 반론 같으나, 의문이 드는 것을 참을 수가 없다. 이태수 교수님의 평가 속에는, 니체를 어떤 취향의 문제로 축소하려는 의도가 잠재돼 있는 게 아닐까? (이는, 이태수 교수님의 의도와 상관없는 문제일 수도 있다.) 세상 전체를 오직 내려다볼 줄만 알았던 그 오만한 푸코가, 니체 앞에서는 머리를 깊이 숙이는 이유를, 우리는 오직 푸코의 심미적 취향이 니체와 같다는 사실에서밖에 찾을 수 없는 걸까?

물론, 과문한 내가 보기에도 니체와 푸코의 취향이 비슷해 보이기는 한다. 기독교를 철저하게 조롱․무시하고, 인간의 범죄적 내면심리(야수성)를 깊이 성찰하며, 학문을 할 때는 근원을 집요하게 추궁해 들어가는 계보학적 태도 등등.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니체와 푸코의 제도에 대한 전략적 태도는, 꽤 달랐던 것 같다. 니체 사유의 핵심을 “고대 그리스에서 발견한 금발 야수의 생명력”으로 파악하신 이 교수님의 견해는, 과연 적실(的實)한 것이긴 하나, 그것이 니체의 전모일지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김남우 선생의 번역을 통해 빌라모비츠의 니체 비판을 읽고 있노라면, 구구절절 옳은 사실의 지적이긴 한데, “과연 이런 지엽말단적인 비판들을 끝없이 계속한다고 해서, 니체가 무너질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나는 니체가 취향의 문제로 취급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국의 니체 소비가 그러한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니체가 만약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라면, “금발 야수의 생명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 마음 착하고 정신 멀쩡한 많은 사람들이 니체에 매료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것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남우 선생의 {비극의 탄생} 번역을 이야기하기 위해 지나치게 먼 길을 돌아온 것 같다. 그러나 이 먼 길은, 이 번역본의 미덕을 설명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걸어야 할 경로였다. 이제야 커밍아웃을 하겠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김남우 선생을 라틴어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는 형편이다. 스승님의 책에 대해, 배우는 자가 서평을 쓴다면, 그것은 주례사 내지 찬미 서평이 되기 십상일 터이고, 그런 서평은 종이 낭비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매우 모순된 위치에서 이 글을 쓰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종이 낭비를 위한 서평을 쓰려는 생각이 추호도 없다. 김남우 선생이 나의 라틴어 스승이시긴 하나, 제도권 바깥에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청강생으로서) 만난 스승인 까닭에, 어느 정도의 객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고, 스승님의 따뜻한 용서를 구하며 최대한 객관적으로 말해 보려고 한다. 

이 번역본의 첫 번째 미덕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니체와 빌라모비츠의 논쟁”이라는, 아직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세기 서양 학술사에서 빛나는 위치를 차지하는 장면을,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텍스트라는 점이다. 나는 국문학 전공자로서, 번역의 가독성이나 각주의 상세함 등, 번역의 우수성을 가늠하는 몇 가지 기준을 갖고 있다. 그런 모든 기준을 고려해 본다면, 김남우 선생의 번역은, 분명히 김대경(1982년)과 이진우(2005년)의 번역보다는 훨씬 우수하지만, 박찬국(2007년)의 번역보다는 미흡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아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박찬국 번역과 김남우 번역이 일종의 보완재(補完財)로서, 함께 읽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반복하는 얘기가 되지만, 김남우 번역이 갖는 첫 번째 우수한 점은, 이 서평의 앞 두 챕터에서 논의했던 심각해 보이는 문제, 즉 “서양 고전문헌학의 역사에서, 아니, 서양사상사 전반의 관점에서 {비극의 탄생}이 차지하는 명확한 위치”를 가늠하고, 그러한 논란에 대해, 믿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현존 유일의 한국어 텍스트라는 점이다. 김남우 선생은 해설에서 니체가 {비극의 탄생}을 쓰고 난 뒤 빌라모비츠의 반격을 받은 역사적 정황을 소개하고, 그 점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양 고전문헌학, 구체적으로 말해 고대 희랍 문학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밝힌다. 실제로 김남우 선생의 번역은 지금까지 나온 어떤 번역본들도 해내지 못한, 니체의 희랍문학에 대한 지나가는 듯한 언급들을 찾아 모두 희랍어 텍스트 원전의 주석을 달고 해설하는 치밀함을 보여주고 있다.

김남우 번역의 두 번째 우수한 점은, 번역자의 신념과 관계된 것으로 보이는데, 번역어로서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사용하려는 뚝심이다. 사실 김남우 선생은 위에서 언급한 서울대학교 서양고전 협동과정 출신으로서, 이태수 교수님의 직계 제자이기도 하다. 엄밀한 희랍어, 라틴어에 대한 실력과 함께, 풍부한 한국어 번역 경험, 독자들이 이해할 만한 수준의 우리말에 대한 감각을 고루 갖춘, 한국에서 정말 얼마 안 되는 모범적 번역가의 한 분이다. 서울대 김상환 교수는 추천사에서 “구수하고 명료한 우리말로 새로 태어난 {비극의 탄생}”이라고 평가했는데, 나는 여기서 그 “구수하고 명료한 우리말”의 사례를 들어, 그 우수성을 예비 독자들에게 실증하려고 한다.

니체의 독일어는, 대부분의 독일어 저술가들이 그러하듯이, 매우 장문이고, 종속절이나 관계대명사절이 쉼표를 넣으면서 한없이 이어지는 패턴을 보이기 때문에, 이것의 문장구조를 정확하게 한국어로 직역하는 일은, 거짓말이 아니라, 아예 그냥 독일어 문장 자체를 써버리는 것보다 품이 더 많이 들지 모른다. {비극의 탄생}이 거의 절정을 향해 치닫는 13장에서, 니체는 용기, 명예, 도취 등 인간의 온갖 존재 가능성을 내팽개친 채, 오직 “내면적 지식”의 중요성만을 강조한 소크라테스에 대한 증오심을 감추지 않으면서, 소크라테스가 발견한 그 내면의 세계, 이른바 “이성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비아냥댄다. 첫 번째 인용은 원문, 두 번째 인용은 김남우 역, 세 번째 인용문은 참조를 위한 박찬국 역이다.

 

김남우와 박찬국의 번역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차이는 “황송하게”와 “외경심에서”에 있다. 이는 “mit Ehrfurcht”의 번역인데, Ehrfurcht의 기본의미가 “경외심, 두려워함”이므로, 박찬국 번역이 안전한 번역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서 김남우 번역이 니체의 본뜻을 잘 살린 탁월한 번역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이 부분이 니체의 소크라테스주의에 대한 태도의 비유라는 데 있다. 니체는 사유에 궁극적 권능을 부여하는 이성 숭배를 비판했고, 그 궁극적 원흉으로서 소크라테스를 지목했다. 이 부분에서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고대적 디오니소스 숭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화, 예술, 윤리의 세계로 진입하는 모습을 비아냥거리듯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평범한 근대인들은 소크라테스가 만들어놓은 길을 “대단한 것인 양 떠받들며(mit Ehrfurcht)" 걷고 있지만, 니체가 보기에, 이는 가치 없는 일에 목을 매는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따라서 이를 “외경심에서”라고 객관적으로 옮기는 것은, 니체의 의도를 살린 번역이라고 보기 어렵다. 김남우 선생은 이러한 니체의 아니꼬와하는 의도를 살리기 위해, “황송하게나마”라는 구수한 의역을 감행한 것이다.

사실, 초년의 일시적 군복무를 제외하곤, 평생을 책상 앞에 앉아서 살다 죽은 백면서생 니체의 학문에 대한 반감은, 아이러니를 유발하다 못해,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이태수 교수님은, 니체가 비판한 것이 “고전지식을 뽐내는 속물적 교양인”이라고 하셨지만, 니체가 비판한 것은 단순한 속물들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여기엔 니체 자신도 포함된다)을 중시하는 세상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니체의 세계사 이해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머리와 지식이, 인간의 다른 여러 가능성들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점, 그래서 인류는 용기도 잃고 도취를 통한 세계와 물아일체되는 황홀경도 잃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한 세계사의 흐름에 대한 니체의 반감을 서술한 부분을 보자. 

알렉산드리아는 세계 최초로 문헌학적 분류원칙에 입각해 도서들을 수집한 도서관이 건설된 곳이다. 니체는 원시․고대의 전쟁․무속숭배 문화를 동경하며, 소크라테스 이후 시대의 인간들이, 자신의 문제를 (육체적 힘이나 신적 역량이 아닌) 개인의 내면적 이성으로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크라테스 이후의 세계에서는, “교양인(der Gebildete)” 그러니까 독일어의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세계에 적응할 수 있도록 육성된 자”가, “무예나 용기, 영적 능력으로 단련된 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책 많이 읽은 자”로 축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귀족주의적 고대 희랍문화에 무젖어 있던 니체가 보기에, 이러한 변화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을 터이다.

이제 한국어 번역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변화는 과연 “황당한 것”일까, 아니면 “경악할 만한 것”일까? 이것은 적실한 어휘를 선택하기 위한 번역자의 결단일 터이므로, 국문학도인 나로서서 번역가들의 이러한 선택을 존중하고, 그 앞에서 존경을 표하는 수밖에 없다. 이는, 국어국문학이 학문으로 성립했다고 한들, 한국어의 제반 현상들은 국어국문학자들에게 독점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김남우, 박찬국 두 분의 번역이 모두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좋은 번역 나아가 완벽한 번역을 위해 몇 가지 첨언하고픈 것이 있다.

원문 “erschrecken”의 기본 의미가 “깜짝 놀라다, 경악하다”는 뜻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얼핏 보기에 박찬국의 번역이 원문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용문의 (ㄴ)은 두 개의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앞 문장은 “근대의 이론적 인간에 대한 과도한 숭배”를, 뒷 문장은 그에 대한 니체의 개탄이다. 따라서 문장의 개수를 둘로 살린 것은 오히려, “erschrecken”을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라고 의역한 김남우 번역 쪽이다. 단순히 문장의 개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김남우 번역은 문장의 흐름을 살렸다. 실제 박찬국 번역은 “erschrecken”이 포함된 부사구를 “이는 실로 경악할 만한 일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풀어서 뒤로 돌렸는데, 이는 내용 이해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근대 세계에 대해 황당해하는(또는 경악하는)” 니체의 문장 호흡을 살려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나는, 김남우 번역이 니체의 원문 흐름을 더 잘 살렸다고 이해한다. 많은 사람들이 번역을, 외국어 한 낱말을 우리말 한 낱말로 옮기는, 일종의 “낱말 대 낱말(word for word)”의 대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모든 낱말은 그 생성의 내력이 있으며, 문화권이 다른 두 지역의 언어에서 생성의 내력이 같은 말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애틋하다”라는 말의 대응어로 되는 독일어 어휘가 있는가? “herzzerreißend(심장을 찢는); schmerzlich(아픈); qualvoll(고통에 찬); unertraglich(견뎌내기 힘든)” 등이 후보로 거론될 수 있지만, 어느것도 한국어 낱말의 정서를 충분히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erschrecken”에 해당하는 한국어 어휘가 하나로 고정될 수 있다는 믿음 역시 잘못된 것이다. “in einem fast erschreckenden Sinne”를 직역하면, “거의 경악할 만한 의미에서”가 된다. 즉 근대 사회는 교양인을 학자와 동일시하는 정도가 너무 심해서, 고대 희랍인들이나 니체가 보기엔 그런 태도가 경악할 만하다는 뜻이다. 안전하게 “실로 경악할 만한 일이다”로 처리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 경우 ‘거의’를 뜻하는 fast를 살렸는지, 오늘날 한국어 화자들이 ‘경악’을 이런 상황에서 사용하겠는지, 앞서 말한 대로 니체의 ‘경악하는’ 문장 호흡을 살렸는지를 고려한다면, “실로 경악할 만한 일이다”는 번역은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라는 김남우 번역은, fast를 “-ㄹ 정도로”라는 우리말로 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근대인의 편협한 세계관에 대한 니체의 어이없어하는 어조를 잘 살려낸, 창조적 의역(意譯)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지나치게 편협한 태도를 고수하는 인간 집단에게 경악을 느낄 수도 있지만, 황당함을 느낀다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우처럼, 이미 관습화되고 내면화되어 주류가 된 근대인의 태도 일반에 대해서 ‘경악할 만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경박한 느낌을 준다. 물론 “황당하다”는 말 역시 경박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니체가 “in einem fast erschreckenden Sinne”라는 구절을 쓴 의도는 근대 사회에 대한 어이없음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니체는 이 글을 쓸 당시, 서른도 안 된 나이였다. 그는 사회의 주류를 공격하겠다는 열의로 가득차 있었고, 공격의 무기를 소크라테스 이전 희랍의 야수적 세계관에서 발견했다. 짐작컨대 그가 한국어를 알았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인간은 말이야, 책만 읽어서는 편협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어. 호메로스, 핀다로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시절의 희랍을 보라구. 그들은 인격 안에 광기(狂氣)를 포용할 정도로 용맹한 이들이었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인간의 한계 속에서도 신적인 것을 추구했어. 그런데 소크라테스란 자가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인간의 시선을 내면으로 돌리게 했고, 그 이후로 인간들은, 생각하고, 글쓰고, 책읽는 것이 자기의 본성인 양 생각하게 되었어. 그래서 오늘날, 원숙한 인간(교양인)은 곧 지식이 많은 인간이라는, 말도 안 되는 등식이 성립하게 된 거야.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말야!”라고.

나는 이로써 우리가 앞에서 제기한 의문, 즉 니체와 달리 금발의 야수를 찬양하지도 않고, 전쟁을 찬미하지도 않으며, 기독교를 경멸하지 않는 착하고 마음 여린, 니체가 경멸할 만한 성향의 수많은 사람들이, 니체의 말에 매혹을 느끼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한다. 한국은 아직도, 영문학이나 불문학 등의 근대문학에 비해, 희랍문학의 독자 배경이 두텁지 않은 편이다. 당연히 희랍문학에 대한 한국어로 된 읽을거리도 풍부하지 않은 편이니, 거기에 기초하고 있는 니체의 생각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다. {비극의 탄생}의 김남우 번역은, 이러한 절대적 한계 속에서, 니체 사유의 기원과 본질을 “구수한 한국어”로 읽을 수 있게 해 준, 매우 고마운 책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서양고전학, 즉 희랍어학, 라틴어학이 아직 걸음마 단계이고, 이들의 원전 번역은 출간되는 것 자체가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실제로 가시밭길을 뚫고서, 적지 않은 수의 희랍어와 라틴어 전공 학자들이 배출되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국문학자인 나는, 이러한 원전 번역 앞에서 감사의 념과 함께,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과연 우리들이 현재 읽고 쓰는 이 한국어가, 이들의 희랍어․라틴어 어휘 실력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분화되어 있을까?”라는 의문이 가시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애틋하다”에 해당하는 서양말이 없을 가능성을 언급했지만, 정반대의 경우, 즉 어떤 독일어나 희랍어, 라틴어에 해당하는 한국말 어휘가 없을 가능성은, 더 높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어를 적는 한글은, 창제된 시점부터 19세기 말까지, 오로지 여성과 하층민의 전유물이었던 탓이다. 여성과 하층민의 문자는 고차원적 추상의 세계에서 배제되어 있고, 대신 정서와 감각의 세계에서만 풍부하게, 과도할 정도로 발달하게 된다. 20세기 초반부터 한글을 이용해 추상적 개념을 표시하려는 노력이 부랴부랴 시도되었으나, 그것은 사실상 외국인들이 고안해낸 한자음을 전사(傳寫)하는 것이었을 뿐이다. 앞에서 우리는 “황당”이니 “경악”이니 하는 말을 썼지만, 부끄럽게도 그 낱말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지, 그 용례를 역사적으로 철저히 조사, 수록한 어원사전(語源辭典) 하나조차,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이제 번역비평도 어느 정도 활발해졌고, 번역가의 자질로서 외국어 능력뿐 아니라 한국어 실력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번역이 두려운 일이라는 인식도 어느 정도 생겼다. 국문학자로서 고맙고 반가운 변화다. 그러나 마음 편히 반가워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어 실력”의 정체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어 어휘력을 떠올릴 테고, 그건 개인이 노력하기만 하면 확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정은 그렇게 단순치 않다.

한국어 어휘력도 부족하고, 한국어로 문장도 써 본 경험이 별로 없는 이들이, 4년제 대학에서 영문과나 독문과를 나와, 번역에 뛰어들던 시대가 있었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20~30년 전이다. 세월이 흘러, 단순한 외국어 실력만이 아니라, 책이 다루고 있는 내용을 장악한 전문가의 번역이 나오기 시작했다. {비극의 탄생}도 마찬가지다. 1982년의 김대경 번역은, 독문과를 갓 나온, 니체보다 더 젊은 사람의 번역이었고, 그는 니체가 구사하는 현란한 용어들의 해설 역주를 전혀 달 수가 없었다. 2014년의 김남우 번역은, 비록 완벽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최소한 문헌학적 배경에 대해서만큼은 니체와 대등한 수준에 오른 한국인 번역자의, 어느 정도 충실한 역주를 포함한 번역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물론 김남우 번역에도 역주의 아쉬움은 적지 않은데, 이 점은 박찬국의 번역으로 어느 정도 보완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폈듯이, 김남우 번역도 니체의 본뜻을 살리기 위한 상당한 의역을 포함해야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추상적 상황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한국어 어휘가 (서양어에 비해서) 아직도 발달 단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한국어 실력”을 단순히 개인의 어휘력으로 이해해선 안 되고, 서양어를 번역하기 위해 한국어 연구집단이 계획적으로 향상시켜야 할 한국어 자체의 문화적 역량으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아직도, 19세기 말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식인들이 급조한 서양어의 한역(漢譯) 어휘들의 상당수를, 그대로 한국어인 양 사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어 화자들은 이에 대한 인식조차 뚜렷하지 않다. 불행하게도 국어국문학계에서는, 이러한 방향의 어휘 정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거의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비유컨대, 초창기의 4년제 대학 외국어학과 출신 번역가들은, 몸도 허약하고 무기도 빈약한 채로 전쟁터에 나선 후진국의 병사로 볼 수 있다. {비극의 탄생}의 김대경 번역이 그랬다. 대체로 주지를 파악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나, 세부적인 내용을 파고들거나 엄밀한 인용을 하려고 하면, 거의 참조할 수 없는 번역본이었던 것이다. 30년이 훨씬 지나, {비극의 탄생}에 나오는 희랍문학에 대해, 니체와 대등한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는 한국인이 재번역을 했건만, 번역어로서 한국어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비유컨대 번역자로서 김남우 선생의 처지는, 몸은 튼튼히 단련했으나(외국어 실력 및 내용지식), 무기(한국어)는 여전히 빈약한 병사의 상황과 같다. 그리고 김남우 선생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다른 번역본에서 상황을 이렇게 진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용어 등 전문 용어에 있어 우리말의 빈곤을 절감하였으며, 어색하나마 알맞은 번역어로 옮겨 놓았다. 미흡한 점은 차차 보완해가고자 한다.”(1)

‘Ehrfurcht’를 “경외감, 황송함” 중 어느 것으로 옮길 것인가? ‘erschrecken’을 “경악, 황당함” 중 어느 것으로 옮길 것인가? 국어국문학은 이 지점에서,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이 번역의 문제는 현재, 서양문헌의 원문과 씨름하고 있는, 국어국문학이라는 학문에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철저하게 고독한 한국인 서양고전학자의 한국어 어휘력과 문장 창작력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너무 냉혹한 평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성경 원전읽기 운동을 하시는 한 목사님께서는, 내가 국문학자라는 사실에 늘 반가워하시며, “희랍어와 라틴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문학 창작에 가까운 과업”이라고 늘 강조하신다.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가, 희랍어와 라틴어만이 아니라, 서양언어로 된 모든 문헌의 번역은, 한국어의 불안정한 상태로 인하여, 필연적으로 “문학 창작”이 될 수밖에 없다고 감히 주장한다. 

앞서 살짝 언급했듯이, 김남우 번역의 추천사를 쓴 서울대 김상환 교수는, 김남우 선생의 번역을 “구수한 우리말”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비극의 탄생}을 정독해 본 이들은 누구나 알겠지만, 이 책의 내용은 전혀 구수하지 않다. 오히려 냉혹하고, 날카롭고, 현란하고, 속도감 있다. 그러나 최소한, {비극의 탄생}이 아니라, {비극의 탄생}의 한국어 번역본의 언어는, 구수해질 수도 있고, 구수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김남우 선생은 탁월한 서양고전학자인 동시에, 번역의 한국어를 고민하는 분이므로, 한국어 번역을 구수하게 만들 자격이 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준 고마운 독자는 충분히 눈치챘겠지만, 현재 한국의 국어국문학계와 서양고전학계는 거의 아무런 교류가 없다. 지금까지 그래 온 것이 누구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 이후 조선시대의 선조들은, 수백년 간 언해(諺解)의 전통을 가져 왔고, 그것이 한국어 텍스트를 풍성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번역에 종사하는 서양고전학자들은, 한국어를 서양문화와 충돌시키며, 한국어 텍스트를 생산하는 최전선의 전사들이다. 그분들에게 한국의 국어국문학계가 무엇을 해 드려야 할지, 무엇을 받고 협력해야 하는지, 우리는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한 의미의 한국어 연구는, 한국어의 언어 현상에 대한 개별 연구를 축적함으로써만이 아니라, 현행 한국어 어휘의 실상을 역사적․체계적으로 정리한 어원사전 성립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한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3, No.1, 2015년 1월, 배수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