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ph Johann Wittgenstein은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신비하면서도 난해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받는 것은 막대한 유산을 가족과 주변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고 톨스토이적인 검소함과 금욕의 삶을 택한 비트겐슈타인의 독특한 생애와 어느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명민한 철학적 사고가 매력적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철강부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Wien)은 세기말fin-de-siècle의 정점에 있었다. 1895년부터 1914년까지의 시기에 빈은 철학은 물론, 미술과 건축, 음악, 문학, 심리학 등 모든 분야에서 창조적인 활동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쇼펜하우어와 키에르케고르 사상에 대한 관심이 재조명되고, 12음계 음악, 현대적인 건축양식, 법실증주의와 논리적 실증주의, 비구상적 회화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출현 등과 같은 역사상 괄목할 만한 현상이 빈에 집중되어 있었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이러한 빈의 다양한 문화적 흐름을 하나의 문화적 구심점으로 형성하고 있던 가정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1889년은 “신은 죽었다”를 외쳤던 니체가 정신병과 뇌연화증에 시달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시기였다.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죽었다.) 만약 니체가 건강했다면, 야단법석과도 같았던 세기말 빈의 풍경은 새롭게 쓰였을 공산이 클 것이다. 세기말을 맞이하면서 삶과 고군분투했던 한 고독한 천재가 사라졌다면, 세기말 비트겐슈타인의 탄생은 (결과론적으로) 새로운 천재의 등장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유년기는 자신의 천재성이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 글은 유년기의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어떻게 그의 생각이 천재성과 관련된 싹을 티울 수 있었는지를 탐색하는 데 논의의 초점을 맞출 것이다.
2.
세기말의 빈은 지적 문화운동의 산실로서 다양한 문화, 예술, 사상 등이 고도의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 가운데 비엔나의 ‘알레가세’Allegasse에 있는 대부호 비트겐슈타인가의 저택은 당시 저명한 음악가, 미술가들이 모이는 중요한 장소였다. 이른바 그곳은 비엔나 문화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저녁 음악 모임에는 브람스나 청년 말러와 같은 작곡가는 물론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하임Joseph Joachim,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부르노 발터Bruno Walter 그리고 맹인 오르간 주자이자 작곡가인 요제프 라보 등이 정기적으로 초대되어 실내악을 연주했다. 이러한 음악 모임의 배후에는 비트겐슈타인의 어머니 레오폴디네(가족 간에는 ‘폴디’라고 불림)의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 칼 비트겐슈타인은 시각예술의 중요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큰누나인 헤르미네Hermine는 클림트, 모제르, 로댕의 작품들을 수집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쉴레, 코코슈카와 같은 미술가들 역시 비트겐슈타인 가문과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었다. 문제는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 칼은 성공한 사업가로서 당대의 쟁쟁한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음으로서 고급문화를 향수할 수 있는 브루주아적 특권을 누렸지만, 그의 자식들(5남 3녀) 대부분은 문화(음악과 미술)를 창조적으로 생산하고 기여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는 데 있다. 그 중 비트겐슈타인의 셋째 형 쿠르트(사업)를 제외하고는 둘째 형 한스는 음악에. 넷째 형 루돌프는 연기(배우)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지만, 기업가의 마인드를 가진 아버지와의 갈등을 이기지 못한 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막내 형이었던 파울 역시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파울은 1차 대전 중에 오른쪽 팔을 잃었지만, 각고의 노력으로 왼 손만으로 연주할 수 있는 연주가가 되었다. <볼레로>의 작곡가 라벨Ravel이 작곡한 <왼손을 위한 협주곡>은 바로 파울을 위한 곡이었다.
이러한 비범한 혈통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어린 비트겐슈타인은 누나들이나 형들과 달리 음악, 미술 또는 문학에서 남다른 재능을 가지지 못했으며, 그냥 평범한 아이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8살 혹은 9살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이로울 때도 사람은 왜 정직해야 하는가?”라는 최초의 윤리적 물음을 생각한다. 물론 이 물음은 우리가 보통 윤리학에서 말하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가?”라는 물음과는 맥락상 다르다. 비트겐슈타인의 정직과 관련된 물음에는 자신의 외면과 내면의 이중성이라는 묘한 심적 기제가 숨어있다. 즉 가족들에게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충동을 억누르고 외면적으로 즐거운 소년의 인상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아버지와의 갈등을 이기지 못한 채 자살을 한 첫째 형 한스의 죽음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은 기술 공학을 중시했던 권위적인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자신에게는 이로울 것이라는 생각과도 연결될 수 있다.
어린 시절 이러한 비트겐슈타인의 부정직함에 대한 체험은 후에 칼 크라우스를 통해서 180도 바뀌게 된다. 즉 칸트식 정언명법처럼, 사람은 언제나 진실해야만 한다. 여기에 ‘왜’라는 질문은 적절하지도 않으며 그것에 답할 수도 없다. 왜 진실은 언제나 인간에게 당위적으로 요구되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도 도덕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비트겐슈타인 1938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자기 자신을 기만하지 않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문화와 가치』, 76쪽) 비트겐슈타인은 평생 이 문제를 사고의 차원이 아닌 깨달음을 추구하는 구도자처럼 실천하고자 노력했다.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사고는 전투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사고를 표현하는 글은 수사학적 힘을 가진 비유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철학은 우리의 언어 수단에 의해 우리의 오성(悟性)에 마법을 걸려는 것에 대한 하나의 투쟁이다. (『철학적 탐구』, §109)
살아 있는 따뜻한 씨(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아침 죽은 돌 부스러기들을 새로이 헤처 나가야만 한다. (『문화와 가치』, 16쪽)
새로운 낱말은 논의의 대지에 뿌려진 신선한 씨앗과 같다. (『문화와 가치』, 17쪽)
삶의 문제들은 표면에서는 해결될 수 없고, 오직 심층에서만 해결될 수 있다. 표면적 차원에서는 그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 (『문화와 가치』, 147쪽)
14살이 될 때까지 비트겐슈타인은 그저 평범한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형들이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던 반항심이나 고집도 그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마도 형들의 비범한 재능에 눌린 나머지 자신은 가족들 중에서 조용한 방관자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의 후일담에 의하면 의미심장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새벽 3시에 둘째 형 한스가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곡을 혼신을 다해 광적으로 연주하는 장면을 목격한 일화이다.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은 그 당시 천재적인 재능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어쨌든 음악을 애호했던 집안의 부르주아적 문화적 분위기는 이후 비트겐슈타인이 본격적으로 철학에 몰입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나름대로의 철학적 생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해서는 사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편집 출간된 『문화와 가치』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음악은 그 얼마 안 되는 음과 리듬들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는 원시적 예술로 보인다. 그러나 단순한 건 단지 그 표면들뿐이다; 이 표출된 내용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그 몸체는 전적으로 무한한 복합성을 품고 있다. 이러한 복합성을 우리는 다른 예술들의 외면에서 암시적으로 발견하지만, 음악은 그것을 숨긴다. 음악은 어떤 의미에서든 모든 예술들 중에서 가장 세련된 것이다. (29~30쪽)
브람스의 음악에 들어 있는 사유의 힘참. (55쪽)
브루크너의 9번은 말하자면 베토벤의 9번에 대한 항변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견딜 만하게 된다; 그것이 만일 일종의 모방이라면, 그것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것과 베토벤 9번의 관계는 레나우의 파우스트와 괴테의 파우스트와의 관계, 곧 가톨릭적 파우스트와 계몽된 파우스트의 관계 등과 매우 비슷하다. (75쪽)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철학적 사고실험을 하는 데 있어서 음악을 비유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은 음악에 대한 나름의 취향이 단순히 아마추어 수준의 호사가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의 음악적 취향은 후기 케임브리지 동료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반동적인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브람스 이후의 어떤 음악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모차르트와 베토벤만이 ‘신의 진정한 자식들’이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천재적 철학자들에게 있어서 음악은 실과 바늘의 관계처럼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사족] 철학과 음악의 상관성과 관련해서 니체와 들뢰즈(J. Delluze)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가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고 삶에 긴장감을 주는 그 무엇으로 예술을 강조했던 니체 역시 음악을 최고의 예술로 간주했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은 참된 세계인 동시에 또한 괴물이며, 존재를 확인하게끔 해주는 강력한 예술이었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통해 ‘황홀함의 극치’die Verzückungsspitze를 체험했고, 이러한 황홀함의 체험을 통해서 문화의 의미가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니체의 바그너에 대한 음악적 환상은 이후 처참하게 깨진다.)
생성의 철학자로 알려진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 10장에서 음악이 갖는 강렬한 매력과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악이 [회화보다] 훨씬 더 커다란, 즉 훨씬 더 강렬하면서도 집단적인 탈영토화하는 힘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목소리도 [얼굴보다] 훨씬 더 커다란 탈영토화하는 역량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이 특질 때문에 음악은 집단적으로 매혹시키며, 더 나아가 우리가 늘 말해온 “파시즘적” 위험의 잠재성마저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음악은 드럼과 트럼펫을 울리면서 인민과 군대가 심연 속으로 가도록 이끈다. 분류나 결집의 수단에 불과한 그림에 불과한 군기와 국기보다 훨씬 더한 것이다. 음악가들은 개인적으로는 화가들보다 반동적이며 종교적이며 덜 “사회적”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화의 힘보다 무한히 우월한 집단적 힘을 휘두른다. “일치단결한 인민의 합창은 매우 강력한 끈이다.” (572쪽)
여기서 음악이 회화에 비해 탈영토성의 강도가 크다는 것은 추상성이라는 질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이후 비트겐슈타인은 1903년부터 1906년까지 3년 동안 린츠Linz에 있는 실업학교를 다닌다.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연배인 히틀러도 이 실업학교를 다녔으나, 학년은 2년 아래였다.) 당시 그의 성적은 종교 과목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과목의 성적은 신통치가 못했다. 이는 급우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도 작용했지만, 그보다는 삶과 죽음, 영혼의 문제 등과 같은 근본적인 물음에 더 집착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은 기독교 신앙에 회의적이었다. 그 당시 비트겐슈타인에게 지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두 번째 누나 마가레테(그레틀)이었다. 그녀는 기독교 신앙에 회의적이었던 비트겐슈타인에게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소개해주었다. 그레틀은 세기말의 빈에서 지배적이었던 예술과 과학의 최근 흐름을 간파할 수 있는 지적 교양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녀는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을 받기도 했으며 이후 프로이트와는 친구가 될 정도였다. 이 시기에 비트겐슈타인은 누나 그레틀의 도움을 받아 지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두 사람의 글과 텍스트를 접하게 된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칼 크라우스Karl Kraus, 오토 바이닝거Otto Weininger이다.
크라우스는 빈의 세기말적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창간한 잡지 『횃불Die Fackel』에서 논쟁과 풍자를 무기로 꿈의 도시 빈에 감추어진 위선을 폭로했다. 당시 빈의 강력한 언론은 <신 자유신문>이었다. 그렇지만 크라우스에게는 <신 자유신문>이 정권의 은밀한 대변자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기업주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부패한 언론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빈은 평온을 가장한 사이비 도덕이 판치는 ‘세계 파괴의 실험장’이었다. 사회민주 당원이었던 그의 공격 대상은 부패한 언론, 여성해방운동, 탐미주의, 부르주아의 도덕성, 정신분석학, 매춘과 동성애 문제와 같은 성(性) 자체에 대한 오해와 오용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의 밑바탕에는 고결성integrity이야말로 도덕적이고 예술적인 모든 것들의 전형적 특징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는 여성의 환상fantasy은 남성의 이성reason을 풍요롭게 만들고, 이성은 그러한 형태의 방향을 제공한다는 말과 통한다. 따라서 도덕적이고 미적인 진리의 원천(기원)은 감정과 이성의 통합에 있으며, 길잡이의 역할을 하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 그의 핵심적 생각이다. 일례로 12음렬 작곡 기법을 도입한 쇤베르크 역시 크라우스의 비판 정신에 공감하면서 부르주아적 탐미주의의 거짓된 세련성에 대해 음악을 통해 비판적으로 공격했다.
다음은 당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공격하는 크라우스의 글이다. 비판적 저널리즘으로 무장한 그의 글은 이후 비트겐슈타인의 기존의 철학에 대한 비판적 사고는 물론 글쓰기 스타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천재성을 병적인 것이라고 부르면서 우리 앞에서 그것을 파괴하는 정신과 의사들은, 천재의 작품집으로 스스로 머리통을 후려갈겨야 한다. … 재치와 환상이 넘치는 작품들을 감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정상적인 인간성”을 가진 모든 이성주의의 조수들의 면상은 그저 발뒤꿈치로 짓이겨 버려야 한다. (크라우스, 『전집』 3권, 82쪽.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122쪽, 재인용)
크라우스의 이러한 비판적 풍자의 정신은 처음에는 정치적인 경향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도덕적인 경향으로 바뀐다. 즉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의 소중함을 위해서라면 구질서나 좌파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려는 강건한 의지를 택했다. 빈 사회에 대한 크라우스의 비판은 부분적으로는 언어 신비주의에서, 다른 한 편으로는 창조적 고결성이라는 자신의 최고의 원리를 주장하면서 단호히 견지했던 다음과 같은 불변의 신념에서 유래한 것이다. “만일 내가 두 가지 악 중에서 덜 악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느 한 쪽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F. Field, The Last Days of Mankind: Karl Kraus, p.51,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145쪽, 재인용) 크라우스의 이러한 생각은 ‘외적’ 세계의 일(정치)보다는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에게 있어서 양심의 문제’와 같은 인간의 ‘내적’ 영역에 속하는 실존적인 내면적 탐구를 더 중시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문제는 칸트의 형이상학적 사고를 변형시킨 쇼펜하우어의 윤리적 ‘의지’의 세계와 연결된다. 이에 대한 논의는 이후의 글에서 논의될 것이다.) 크라우스 자신은 철학자는 물론 과학자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굳이 크라우스의 견해에서 철학적인 기원을 찾는다면 그것은 단연코 쇼펜하우어의 철학임이 분명하다. 이후의 글에서도 계속 논의되겠지만,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에 우선권을 갖고 있다는 견해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내 밖에 어떤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유아론(solipsism)이 된다. 유아론에 대한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이후 『논고』로 약함)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등장하며, 후기 철학에서는 이러한 유아론에 대한 유령을 없애기 위해 다양한 사고실험을 시도하게끔 하는 결정적 동인이 된다. 언어, 사실과 가치에 대한 크라우스의 생각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저술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4.
1903년 10월 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충격적인 문화적 사건이 터졌다. 그것은 약관 23살의 나이로 『성과 성격』Sex and Character이라는 책을 쓴 바이닝거가 베토벤이 죽었던 집에서 권총 자살을 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바이닝거는 당대 낭만주의적 영웅으로 칭송되기도 했다. 바이닝거 역시 크라우스와 마찬가지로 근대의 몰락하는 원인을 과학과 자본주의 기업의 융성, 예술과 음악의 쇠퇴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을 바이닝거는 『성과 성격』 (이 책은 여성 혐오증과 반유태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가득 차 있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대는) 예술이 서투른 그림에 만족하고 동물들의 경기에서 그 영감을 찾는 시대, 정의와 국가에 대한 감정이 전혀 없는 피상적인 무정부주의 시대, 공산주의 윤리와 역사관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역사의 유물론적 해석의 시대,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시대, 역사, 인생, 과학이 단지 정치경제학과 기술 교육에 불과한 시대, 천재는 광기의 한 형태라고 가정되는 시대, 위대한 예술가와 철학자가 없는 시대, 독창성은 없지만 그럼에도 독창성을 바보스러울 정도로 갈망하던 시대이다. (Weininger, Sex and Character, pp. 329~330. 『천재의 의무』, 44쪽, 재인용)
크라우스와 바이닝거 역시 근대 세기말의 빈이 천재를 열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양자 모두 공통점이 있다. 그렇지만 크라우스가 여성성을 강조했다면 바이닝거는 남성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당시 20대가 채 되지 못했던 비트겐슈타인은 바이닝거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은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먼저 바이닝거의 사상을 잘 요약한 다음과 같은 글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바이닝거에 의하면, 여성과 달리 남성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 의지와 충동, 사랑과 성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해야만 한다. 이 쌍들 중 첫 번째를 선택하는 것이 모든 남자들의 윤리적 의무이며,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바로 가장 고귀한 형의 남자, 즉 천재에 근접할 수 있는 정도이다. 천재의 의식은 (여성들의 사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헤니드henid(관념이 되기 전의 심적인 자료의 조각)의 단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것은 가장 위대하며, 가장 뚜렷한 분명함과 명료함을 가지고 있다.’ 천재는 가장 개발이 잘 된 기억을 가지고 있고, 분명한 판단들을 내릴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능력을 가지고 있고, 그러므로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 사이의 구분에 대한 가장 세련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논리학과 윤리학은 근본적으로 같다. ‘그것들은 자신에 대한 의무 이상 아무 것도 아니다.’ 천재성은 ‘가장 고귀한 도덕성이고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의 의무이다.’ (『천재의 의무』, 48쪽)
이러한 바이닝거의 생각은 궁극적으로 사람이 살 가치가 있는 삶은 ‘영적인 삶’으로 귀결되며, 천재는 당연히 이러한 영적 삶을 추구해야만 한다. 이처럼 성적인 것은 천재에게 요구되는 정직과는 양립가능하지 않다는 바이닝거의 생각은 당시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물론 전 생애에 걸쳐 보여준 그의 경건한 삶의 태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언제나 자신의 내면에 자라잡고 있던 ‘정직과 천재성, 그리고 종교’에 대해 갈등의 국면에 접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 비트겐슈타인에게 바이닝거의 파격적(?)인 생각은 나름대로 이후 성숙기에 접어들면서 ‘사고 속의 평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전환점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5.
마지막으로, 비트겐슈타인을 처음 논의하는 이 글의 제목에서 천재에 물음표를 단 것에 대한 해명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 시대의 천재는 어느 한 개인의 비범한 재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이 처한 시대정신과 문화적 상황을 치열하게 의식하고 그에 대한 문제설정을 명료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오스트리아 빈이 처했던 세기말의 상황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진정한 천재는 섬광처럼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의 산물이다. 당대의 시대정신과 문화적 상황에서 나타난 천재라 불리는 다양한 인물들의 영향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비트겐슈타인은 없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1931년에 쓴 글에서 자신의 철학적 사고가 당대의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유태적 “천재”는 단지 성자일 뿐이다. 가장 위대한 유태적 사상가는 단지 재능일 뿐이다. (예컨대 나.) 나의 사고는 실제로는 재생산일 뿐이라고 내가 생각할 때, 거기에는 진실이 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내가 하나의 사유 노선을창안해내었다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나에게 주어졌다. 나는 다만 그것을 즉시 열정적으로 받아들여 명료화하는 작업을 하였을 뿐이다. 그렇게 해서 볼츠만, 헤르츠, 쇼펜하우어, 프레게, 러셀, 크라우스, 루우스, 바이닝거, 슈펭글러, 스라파는 나에게 영향을 미쳤다. … 내가 창안하는 것은 새로운 비유들이다.… 내가 믿기로는, 본질적인 것은 명료화 활동이 용기를 가지고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없다면 그 활동은 단순히 지적 유희가 될 뿐이다. (『문화와 가치』, 47쪽)
위에서 언급된 여러 사람들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이후의 글을 통해 계속해서 논의될 것이다. 그러한 논의 과정을 통해서 비트겐슈타인이 보여준 진정한 천재성은 언제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투철한 신념을 기반으로 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끊임없는 사고실험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앨런 재닉· 스티븐 툴민, 『빈, 비트겐슈타인, 그 세기말의 풍경』, 석기용 옮김, 이제이북스,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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