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티븐 그린블랫(Stephen Greenblatt)은 자기의 책이 어떤 책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아마도,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세계가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일탈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변화를 일으킨 것은 혁명도, 성문 앞의 무자비한 침입군도, 미지의 대륙에의 상륙도 아니었다. 이런 장엄한 사건들의 경우, 역사학자와 예술가들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쉽게 기억할 수 있을 만한 이미지를 제공해왔다.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 로마 약탈, 그리소 배에서 내린 헐벗은 에스파냐 선원들이 신세계에 깃발을 꽂는 장면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계사적인 변화의 상징적인 장면들은 현혹적인 이미지에 불과할 수 있다. (중략)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에 문제의 변화가 일어났을 때, 결정적인 순간은 한 외딴 장소의 벽 뒤에 처박혀 가만히 숨죽인 채 거의 눈에 띄지도 않게 지나갔다. 어떤 영웅적인 행위도,, 이 위대한 변화의 현장을 후세에 증언해 줄 관찰도도 없었다. 천지개벽할 변화의 순간이면 으레 나타나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날, 상냥하지만 약삭빠르고 기민해 보이는 인상의 한 30대 후반의 덩치가 작은 사내가 한 도서관의 서가를 둘러보았다. 그는 그곳에서 아주 오래된 필사본 하나를 발견하고 꺼내 들었다. 책을 살펴보고 그는 매우 흥분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책을 필사하도록 지시했다. 이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했다."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19-20쪽, 이하 <1417년>)
사내는 포조 브라치올리니(Poggio Bracciolini, 1380-1459)였고, 책은 루크레티우스(Lucretius, 기원전 98/96-55/53년)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였다. <1417년>은 사내와 책이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혹은 세계를 어떻게 근대화시켰는가를 다룬다. 책의 원제목은 THE SWERVE: How the World became Modern이다. 따라서, <일탈: 세계는 어떻게 근대화되었는가?> 정도가 서명에 어울릴 것이다.
물론 사소한 투덜거림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사소한 차이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1417년, 근대의 탄생: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라고 책의 제목을 붙이게 되면, <1417년>을 문헌학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 텍스트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저자 그린블랫의 관심은 문헌학적 전통의 추적보다는 “일탈” 개념의 지성사의 탐구에 더 가깝게 놓여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일탈” 개념이 서양 근대화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책의 근본적인 저술 동기로 파악되기에. 물론 책이 포조라는 어느 문헌 사냥꾼의 삶을 중심으로 기술되었지만 말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책의 원래 제목의 취지를 살려서 “일탈” 개념을 강조하는 쪽으로 번역서의 제목을 붙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아쉬움이다.
2. “일탈!”, 책은 이 개념이 근대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문헌 전거를 통해서 설득력 있고 내용적으로도 새로운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책이 저자가 원했던 바의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판단한다. 특히, 딱딱한 학술서 방식이 아닌 잔잔한 전기(biography) 스타일은 전문적인 학자들뿐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 편안한 독서 여행을 제공하고 있다. 이 점에서 번역자 이혜원 선생의 공을 높이 사고 싶다. 하지만, 번역자가 “일탈”에 대한 해제 내지 역주를 보충해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것이 책에 대한 두 번째 아쉬움이다.
물론 역자도 채 말미의 역자 후기에서 “서양사나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나의 요구가 무리한 청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탈”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책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달라질 수 있기에 “일탈”개념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일탈 개념에 대해 “약간의(paulum)” 보충을 하고자 한다.
“일탈”, 이 개념은 원자 개념과 함께 에피쿠로스(Epikuros, 기원전 341-271년) 철학의 씨앗-생각 가운데에 하나이다. 하지만, 이 개념을 에피쿠로스 자신이 명시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확정할 수 없다. 남아 있는 전거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이 말을 에피쿠로스의 생각이라고 우리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루크레티우스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 제2권 216행-293행의 일탈에 대한 전거 덕분이다. 다음과 같다.
이것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자네가 깨닫길 염원하네. 원자들이 아래로 똑바로 허공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무게 때문에 움직일 때, 규정을 받지 않은 시간과 규정을 받지 않는 장소의 공간에서 약간의 벗어남이 생긴다는 것을 말이네. 이를 자네가 단지 약간 이동된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벗어남이 말이네. 만약 원자들이 벗어나지 않는다면, 모든 것들은, 빗방울들이 그러하듯이, 깊은 심연의 빈 허공으로 수직으로 떨어져 버릴 것이고, 따라서 원자들에게는 어떤 충돌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어떤 부딪힘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결론적으로 자연은 어떤 것도 생성시키지 못했을 것이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2권, 216행-224행)
인용에서 읽을 수 있듯이,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일탈”은 자연의 생성 원리이다. “일탈”에 해당하는 라틴어 원문은 “declinare”(제2권 221행)이다. 이 단어는 “기울다”를 뜻한다. 해서, “일탈”이라는 번역어가 적당한지는 잘 모르겠다. 한국어 일탈(逸脫)은 한자어의 어원적 의미가 어떤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특정의 목적과 규정된 노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일컫는 다소 도덕적인 뉴앙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일탈 행위를 막아야” 식의 문장이 한 예이다. 반면에 루크레티우스의 declinare는 일체의 목적과 규정이 없는 상태에서 원자 자신의 무게 때문에 생겨나는 움직임, 따라서 어떤 외적인 제한과 조건이 가해지지 않은 진공의 공간에서 생겨나는, 즉 원자 자체의 물리적 힘 때문에 일어나는 물리적 힘 자체의 혹은 무-규정적 혹은 무-목적적 운동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보충하자면, 원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무엇이 아니라는 점, 그 움직임은 다른 외적 요인이나 힘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에 접근할 때에는 그 자체의 움직임에 주시하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것 자체로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nihil) 그냥 움직이는 것이고, 다만 자신의 무게 때문에 약간 빗겨나는 것이고 벗어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일탈 개념 자체는 어떤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는 무엇이 아니다. “일탈” 개념은 그 자체로는 아주 대단한 비밀 혹은 우주를 설명하는 엄청난 비결을 지닌 무엇이 결코 아니라는 얘기다. 그야말로 “아무런 의미 없는” 개념이다. 아니 어떤 특정의 의미 내지 가치를 부여해서는 안 되는 개념이 바로 일탈일 것이다. 물론, 근대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일탈이 그야말로 아무 의미 없는 움직임은 아니다. 왜냐하면, 원자는 자체의 무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무게의 힘이 운동의 방향을, 즉 일탈의 기울기를 결정하기에. 루크레티우스는 이 기울기에 “약간의"(paulum)라는 규정을 준다. 아마도 이 “약간의”에 무게의 힘이 반영되고, 이 힘에 비례해서 기울기를 잴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paulum”에 대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많은 학자들이 지금도 매달리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이준엽(2009)의 <에피쿠로스 학파에서의 빗겨남의 경로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논문 참조) 그리고 이 빗겨남의 경로들에 대한 연구가 근대 물리학의 주요 주제가 되었고, 이것이 나중에 운동을 설명하는 법칙의 해당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나 루크레티우스가 기울기의 경로를 계산하는 법칙의 규명에 관심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거리이고, 과연 이것이 고대 자연학자들의 화두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루크레티우스에게는 근대 과학자들이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기술할 수 있었던 표현 방식과 표현 기제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고대와 근대의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바로 이 대목일 것이다, 세계의 근대화의 해명과 관련해서 왜 루크레티우스의 “일탈” 개념이 중요한지가 드러나는 것이! 원자가 그 자체의 무게로 인해 움직이는 것이고 그 움직임이 일탈이기에, 그것을 접근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자연의 모든 움직임을 특정의 목적 규정 없이 특정의 의미 내지 가치 부여 없이, 즉 특정의 “색안경”을 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어진 그대로 보고 접근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학문이 근대의 자연과학이라면 말이다. 여기에서 의미란 특정 철학의 혹은 특정 종교의 이념 따위의 색안경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원자의 움직임을 바로 특정의 가치 내지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벗고서 배제하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자는 것이 루크레티우스의 “일탈” 개념에서 읽어내야 하는 비결일 것이다. 이에 따라서 사물들을 들여다보니,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보니 원자들이 그냥 일탈의 방식으로 움직이고, 이것이 사물의 본성이라는 소리다. 따라서, 일탈 개념은 뭔가 심오한 비결도 아니고, 마법의 주문도 아니다. 일탈은 그저 자연의 움직임에 대한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3. “일탈”!, 이런 단순한 개념이 세계를 근대화시켰다니! 그 비밀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답은 의외로 간명하다. 일탈 개념 자체 안에 숨어 있기에. 일탈 개념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 어떤 가치도 부여하지 말자는 데에서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인식, 이에 기반해 발견된 것이 소위 근대 과학이 규명하려는 객관의 세계이기에. 따라서 이런 객관 법칙의 세계에 입문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일체의 선입견과 편견, 아니 인간적인 감정과 논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이를 가장 방해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를, 이를 악용하고 조장하는 것으로 비판한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종교이기 때문이란다. 루크레티우스의 일갈이다.
인간의 삶이 무거운 종교에 눌려 모두의 눈앞에서 땅에 비천하게 누워있을 때, 그 종교는 하늘의 영역으로부터 머리를 보이며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인간들의 위에 서 있었는데, (중략) 그리하여 입장이 바뀌어 종교는 발 앞에 던져진 채 짓밟히고, 승리는 우리를 하늘과 대등하게 하도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1권 62- 79행)
인용에서 “승리는 우리를 하늘과 대등하게 하도다”라는 구문에 눈길이 간다. 오만(hybris)의 극치이다. 무엇보다도 “신(神)”을 맨 앞자리에 놓는 서양 고대인들에게는 특히나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언은 르네상스 이후의 자연을 자연 그대로 관찰하고 싶어했던, 하지만 교회의 힘에 눌려 있었던 자연과학자들에게는 구원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저 “승리” 선언은 참으로 대담하고 대단하다 하겠다. 어쩌면,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선언보다 더 위대할 것이다. 이런 대담함 덕분에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작품이 출판된 당대에도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키케로의 말이다.
"그것과 동시에 경외심과 종교 생활 역시 소멸될 수 밖에 없는데, 그것들이 없어지면 삶의 동요와 크나큰 혼란이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나(키케로)로서는, 신들을 향한 경건함이 사라지고 나면, 인간 종족에 대한 신뢰와 연대감, 그리고 가장 탁월한 덕인 정의 역시 사라지고 말 것이라 확신합니다."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 제1권 3장-4장)
그래도 키케로의 입장은 유보적이다. 일단, 종교를 무시하는 입장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대해서 둘 다 들어보자는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출판되었을 당시의 로마의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내전(bellum civile)”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기에 일반 시민들은 이 책의 출판 사실에 대해 별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한데, 정국이 안정되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는 사람이 생겨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에 대한 호감과 반감이 분명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호감을 표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오비디우스다. 그의 <변신 이야기> 시작 대목이다.
바다도 대지도 만물을 덮고 있는 하늘이 생겨나기 전 자연은 전체가 한 덩어리였고 한 모습이었다네. 이를 사람들은 카오스라 불렀지. 원래 그대로 투박하고 어떤 질서도 어떤 체계도 갖추지 못한 채 무거운 덩어리로, 마찬가지로 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만물의 씨앗(원자)들이 한데 뒤엉켜 있다네. (제1권 5-9행)
물론, 오비디우스(Ovidius, 기원전 43년-서기17년/18년)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어느 깊이로 참조했는지는 문헌학적으로 검증해야 할 물음이다. 하지만, 오비디우스가 루크레티우스가 표방하는 유물론을 지지하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단적으로 오비디우스의 “카오스(chaos)”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 “혼돈”을 뜻하고, 따라서 태초의 우주는 무질서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는 물질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은 미리 존재하는 무엇인가로부터 다른 형태의 무엇인가가 나온다는 생각, 다시 말해 “ex nihilo nihil” 곧 “아무것도 없는 것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에피쿠로스와 데모크리토스의 유물론적인 세계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요컨대, 이런 세계관은 무(無, nihil)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유일신을 찬양하는 기독교의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런 이유에서, 하지만 서양 세계가 기독교화 되면 될수록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에 대한 혐오는 커져갔다. 당연히 그 중심에는 기독교의 교부들이 서 있었다. 자연과학에 대해서 호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예수회조차도 루크레티우스에 대해서는 치를 떨 정도였기 때문이다. 다음은 17세기 이탈리아 피사 대학교의 예수회 소속의 젊은 성직자들의 기도문이다.
원자로부터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네. 세상을 이루는 모든 물체는 그 형태의 아름다움 속에서 빛나니, 이런 물체들 없이는 세상은 단지 거대한 혼란일 뿐이라. 태초에 신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고 만드신 것이 또 뭔가를 낳으니, 아무것으로부터도 나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유념하라. 오 데모크리토스여, 당신은 원자로부터 시작해서는 어떤 다른 것도 만들지 못하노라. 원자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고 따라서 원자는 아무것도 아니어라. (<1417년, 근대의 탄생>, 쪽수 313-314)
이 구절들을 아침마다 암송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에서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을 것이다.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가 수도원의 포도주 창고에서 발견되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내 생각에, 책이 담긴 불온한 내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양 고전 문헌들 가운데에는 이처럼 텍스트가 전하는 내용의 위험 때문에 소위 “책 자체가” 사라진 경우도 많고, 그 중 일부 부분이 삭제된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위-롱기누스(Ps. Longinus, 서기 1세기)의 <숭고론(De Sublimitate)>이 한 예다. 어찌되었든,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도 비슷한 운명에 처했지만, 운명은 문헌의 생존을 허락했다.
4. <1417년>의 주인공이자 근대 세계로의 문을 연 인물로 소개되는 포조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필사본을 독일의 풀다(Fulda) 수도원에서 발견한 해는 1417년이었다. 포조는 문헌 사냥꾼이자 서간문 작가이면서 단편이야기 묶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포조는 글씨를 아름답게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필체는 필사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서체(stilus)의 한 유형으로 자리 잡을 만큼 유려했다. 여기에서 서체란 이런 비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성립하지 않겠지만 예컨대 동양에서 ‘안진경체’, ‘구양순체’, ‘왕희지체’ 식의 서체 스타일과 유사하다. 문헌학적으로 그가 중요한 인물인 이유는, 그가 다른 선대 인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판독하기 쉬운 텍스트를 생산하려고 시도했다는 점, 필사 중에 생긴 오류들을 교정하려고 시도했다는 점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는 예를 들면, 포조가 흥미롭게도 이런 교정 과정을 ‘emendare(교정하다)’라 정의하는데, 이는 나중에 문헌학의 정식 전문어로 자리잡았다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대략 500년이 지나 파울 마아스(Paul Maas)는 이를 emendatio(교정)라 부른다.
그는 또한 타고난 문헌 사냥꾼이었다. 그는 책을 찾아서 자주 외국을 방문했다. 방문할 때마다 중요한 성과를 올렸다. 특히 1416년 상갈렌(Sant-Gallen) 수도원에서 그가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의 <수사학 교육> 전집을 발견한 것은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이어 1417년에 그는 독일의 풀다(Fulda) 수도원에서 문제의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필사본을 발견한다(Codex Laurentianus 35.30). 이 필사본은 서기 9세기에 필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발견 당시로서는 유일본(codex unicus)이었다. 만약 이 필사본이 발견되지 않고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면 루크레티우스의 작품은 이름만 전해졌을 것이다. 만약 문헌 자체가 사라졌다면, 아마도 그린블랫이 말하듯이, 세계 역사도 현재의 모습은 결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계몽주의 시대에 중요한 텍스트로 사용되었고, 아울러 예를 들면 뉴턴 같은 자연과학자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더욱이 포조가 발견한 필사본은 문헌 계보 구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문건이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를 전하는 다른 필사본들 모두가 포조가 발견한 필사본이 가지고 있었던 전승 오류를 유지하고 있었고, 이 오류들의 유전 관계를 이용해 약 400년 후에 독일의 문헌학자 라흐만(Lachmann)이 문헌계보도를 작성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발견은 소위 문헌계보학(stemma codicum)의 탄생(이와 대해서는 안재원(2012)의 “왜 정본인가”(<정신현상문화>)를 참조)을 예비한 사건이라 하겠다. 4백년 뒤에 위용을 자랑하며 서양 학문의 무대에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서양고전문헌학(이에 대해서는 안재원(2009)의 “서양고전문헌학의 기초방법론”(<규장각>)을 참조)도 실은 이렇게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발견하고서 포조가 필사본의 난외에 남긴 아주 작은 기록들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루돌프 파이퍼(1972)의 <인문 정신의 역사>(정기문 옮김, 2011, 도서출판 길)을 참조).
5. 각설하고, 만약 이 필사본이 포조에 의해서 발견되지 않고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면, 세계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가 세계를 근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로의 길을 여는 데에 불을 밝힌 책이 <사물에 본성에 관하여>였기 때문이다. 이런 말로 말이다.
정신에 자리잡은 종교에 두려움과 어둠을 태양의 빛과 낮의 빛나는 햇살이 아니라, 자연의 관찰과 추론으로 몰아내야 한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1권 146행-148행)
가히, 기독교계가 싫어할 만하다. 하지만, 그들이 싫어한 이유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내용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은 루크레티우스에 감동한 볼테르나 홉스와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벌인 반(反)종교 운동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성과 합리성을 모든 행위의 원리이자 기준으로 삼는 서양의 근대는 이렇게 시작했다. 물론, 요즘이야 이 근대성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지만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출판 당시에 당대의 지성과 대중에게 충격을 가한 책이 아니다. 또한 재발견되었을 당시에 당장 세계를 흔든 책도 아니었다. 이런 이유에서 책은 오히려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만든 무엇인 셈이다. 그렇다면, 루크레티우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이런 문제작을 지었을까?
물론, 책의 내용에 대한 지적 소유권은 원천적으로 에피쿠로스에게 있다. 라틴어로 옮긴 이가 루크레티우스다. 해서, 루크레티우스의 주요 생각들을 간추려 보고자 한다. 단적으로, 그는 번잡하고 심지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정치 활동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고, “숨어 사는(lathe biosas)” 은둔의 삶을 즐기면서 학문에 몰두했다. 아마도 이런 생활 덕분일 것이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하지만, 이 때문에 욕도 들어 먹어야 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이에 대한 그의 반박은 이렇게 재구성될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운동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 새로운 운동이 고정된 순서에 따라 이전 운동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대개 소위 기계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이것이 소위 운명-결정론이다. 이에 반해 인과의 사슬로 짜인 운명의 고리를 깰 수 있으며 무한한 이전의 원인으로부터 일탈이 가능하다는 게 루크레티우스의 생각이다. 그는 이 일탈을 이끄는 원리가 쾌락의 힘이라 주장한다. 물론, 사물에 있어서 원자의 무게들도 인간 의식에서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일탈하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 사물의 본성이며, 이를 임의적으로 제한하고 구속하는 것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인데, 이는 쾌락이라는 최고 목적에 반하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이 따라서 쾌락을 추구한다는 것! 쾌락이라는 최고 목적 때문에 인간은 정해진 노선으로부터 일탈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자유의지가 생겨난다고! 쾌락을 최고 목적으로 보았을 때에 이를 방해하는 일체의 인위적인 제도는, 예컨대 종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약하는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
그런데,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런 자유의지를 가지는 존재가 개인이다. 반전은 여기서부터다. 그에 따르면, 원자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무엇”이다. 그리스어로는 atomos, 라틴어로는 individuum이다. 그리스어 atomos는 근대에 와서는 자연과학의, 특히 화학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원자가 그것이다. 반면에 라틴어 individuum은 법철학과 소위 사회과학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는다. 개인이 그것이다. 따라서 눈길을 끄는 것은 라틴어 번역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무엇”의 정의(definition)를 인간에게 적용하고, 그 근사치를 구해보자. 한 사회 속에서 더 이상 쪼개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다른 것으로 대체되지 않는 것을 추적하면, 결국 그것은 곧 개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존재인 개인이 탄생한다. 인권 개념도 이를 바탕으로 성립한다. 이 인권 개념은 나중에 국권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는 개념으로까지 상승한다. 여기까지가 국가 개념과 대립적 지평에서 동등성과 대등성을 갖는 개인 개념의 성립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한데, 역사는 참으로 역설적이다. 가장 비정치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기에! 정치로부터 가장 멀리 거리를 취하려 한 철학자의 생각이 실은 정치의 가장 중요한 중심을 차지하기에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근대의 모든 정치 운동이 개인의 자유와 인권의 확립을 위한 투쟁이었다는 사실 정도만 언급하겠다. 따라서 적어도 세계의 근대화가 한편으로 개인주의를 기본 특징으로 내세운다고 한다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린블랫은 원자와 개인의 상관성에 대한 해명을 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명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 세 번째로 아쉬운 대목이다. 물론, 일탈 개념이 “근대의 탄생”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저술 동기라는 점은 인정한다. 서양의 자연과학자들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읽고서, 특히 “일탈” 개념의 영향을 받아서 자연 세계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게 했다는 그의 지적 역시 타당해 보인다.
6. 이런 저런 아쉬움 때문에 나는 세계의 근대화와 관련해서 더 정확하게는 서양 근대의 탄생과 관련해서 일탈 개념이 세계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에 대한 그린블랫에 해명은 절반의 성공 밖에 거두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절반의”라는 한정적 수식어를 단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단적으로 서양의 근대화가 단지 루크레티우스의 “일탈” 개념의 영향을 받아서 촉발된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뭔가 부족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종교 그러니까 기독교라는 색안경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을 자연 그대로 관찰하게 유도하고 동시에 동기와 용기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그 자체의 규칙과 원리에 따라서 그러니까 자연을 인간의 역사적 자연 언어가 아닌 자연을 자연 그대로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표현 기제와 표현 방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의 근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의 방식에 따라서 표현할 수 있는 표현 방식과 표현 기제의 개발 과정에 대한 해명도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명을 <1417년>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물론, 이 문제는 저자에게 해명을 직접 요구할 수 있는 물음은 아닐 것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근대의 탄생에 대한 물음을 해명하고자 할 때에, 이 양자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었다. 다시 말해 루크레티우스의 한계, 즉 서양의 고대 과학과 세계의 근대 과학의 차이가 어디에서 발견되는지는 한 번쯤은 검토해 보아야 할 물음이라는 얘기다. 이에 대한 해명이 없다는 것이 마지막 아쉬움일 것이다.
7. 차이는 이렇다. 최소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는 자연을 자연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표현 방식과 표현 기제가 없었다는 것이고, 근대 과학은 표현 방식과 표현 기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데에서 말이다. 이와 관련해서 나도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같은 서양 고전들이 세계의 근대화 아니 서양 근대의 시작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점을 당연히 인정한다. 하지만, 세계의 근대화를 촉발하고 발전시킨 데에는 동양 고전들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란 점이 이 서평에서 내가 새로이 제안하고자 하는 주장이다. 보다 체계적으로 전거를 추적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자연 과학을 위한 표현 방식과 표현 기제를 개발해야 한다는 논의를 촉발시킨 부싯돌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한자였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증인이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이었다. 그는 자연의 탐구를 위해서 보편 언어 혹은 근원 언어 혹은 “진정한 문자(real character)” 체계를 개발하자고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진정한 문자를 사용하여 글을 쓴 것은 극동의 왕국, 중국에서였다. 진정한 문자는 대체로 글자나 단어가 아니라, 사물이나 개념을 표현한다. 언어가 미칠 수 있는 지역보다 문자들이 더욱 일반적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라나 지역에서 서로의 글을 읽을 수 있었다." (<학문의 진보(Advancement of Learning)>, London 1605)
인용은 베이컨의 보편 언어에 대한 기획이 한자 체계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시켜준다. 물론, 베이컨의 보편 언어 기획의 기저(基底)에는 스페인 마요르카 출신 신비주의 신학자였던 라이몬두스 룰루스 (Raymondus Lullus, 1232-1315)의 “조합주의(ars combinatoria)”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한자 체계가 자연학의 부호와 기호 체계 개발과 기획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보편 언어를 개발하자는 베이컨의 제안은, 그가 주장하듯이, 새로운 학문들이 사용하게 될 기호 체계(Novum Organonon) 혹은 부호 체계의 표준화와 통일화에 대한 연구를 촉진하고 논쟁을 촉발하였다. 참고로 화학, 의학, 수학, 음악은, 자연 언어의 표기 체계가 아닌 그 학문만이 공유하고 있는 표기 혹은 기호 체계를 사용하자는 제안들, 즉 화학의 개별 원소들을 표시하는 표기 체계나 수학의 부호 체계들 혹은 음악의 기보와 음가를 표시하는 기호들을 만들어 사용하자는 제안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시기가 17세기부터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제안들은 다름 아닌 16세기말부터 유럽의 지성계를 후끈하게 달구었던 “보편언어(universal language)” 혹은 “보편 문자(universal character)” 논쟁의 소산들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중국학의 대가인 먼젤로는 “중국 문자와 보편 언어”에 대한 연구에서 17세기에 서양의 과학자들이 근대 과학의 기호와 부호를 사용하자는 제안을 하게 된 데에는 사물을 그대로 반영하는 상형문자인 한자가 상당 정도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나름 설득력이 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문헌 조사와 엄밀한 논구가 요청된다. 아무튼, 베이컨의 제안이 존 윌킨스나 조디 달가르노와 같은 그의 후계자들, 화학자 로버트 보일이나 건축가인 크리스토퍼 렌과 같은 학자들과 독일의 라이프니츠(Leibniz, 1646-1716)와 같은 철학자에게로 이어진 것은 사실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 영국에서는 1662년에 왕립 아카데미가, 파리에서는 1666년 학술 아카데미가, 베를린에서는 1700년에 학술 아카데미가 창설되었다는 점도 역사적 중요한 사실이다. 요컨대 17세기는 베이컨이나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와 같은 근대 과학자들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서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모색하였던 시기였고, 이들의 연구를 통해서 근대 학문의 세계가 열리는 시대였기에. 사정이 이와 같다면, 자연의 현상들을 탐구하기 위해서, 인간의 역사적 자연어들의 표기 체계가 아닌 새로운 기호 체계를 마련하려는 기획과 관련해서 동양의 사유 체계와 언어 체계가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인데, 이 사실 자체에 눈길이 간다.
어쨌든, 이와 같이 새로운 기호와 부호를 사용하는 학문 운동과 학술 아카데미의 창설은 서양의 학문 체계를 이전까지의 기독교 교리 중심의 교육 방식과 그리스-로마의 고전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연구 전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내었다. 이런 학문 운동과 새로운 변화의 중심에 한자(漢字)와 동양의 사유 체계가 자리잡고 있다면, 이는 동서 교류에 대한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고 세계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건일 것이다. 참고로, 한자를 최초로 상형 문자로 이해한 서양인은 가스파르 다 크루스(Gaspar da Cruz, 1520-1570)이었다. 그는 <Tratado das cousas da China(중국 문물에 대한 보고)>라는 저술을 남기는데, 안드레 데 부르고스(André de Burgos)가 이 저술을 크루스의 고향인 포루투갈의 에보라(Évora)에서 1569년에 출판한다. 이 책은 마르코 폴로(Marco Polo)의 <동방견문록> 이후에 서양에서 중국에 대해 출판된 최초의 저술 가운데에 하나로 인정받는 문헌이다. 크루스는 한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중국 사람들은 고정된 철자(letter)를 사용하여 쓰지 않는다. 그들은 문자(character)를 사용하며 그것으로 단어를 만든다. 따라서 매우 많은 수의 부호(character)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의 부호로 하나의 사물을 상징한다. 예를 들어 오직 하나의 부호로 하늘을 뜻하고 또 다른 부호로 땅을 의미하며 또 다른 부호로 사람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중국 문자를 사물을 상징하는 하나의 부호로 인식했던 크루스의 생각은 후안 곤잘레스 데 멘도사(Juan Gonzalez de Mendoza, 1545-1618)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중국의 문물과 의례와 견습에 관한 역사, (Histroria de las cosas, ritos y constumbres, del gran Reyno de la China, Rome 1585, 1586년 개정)>를 저술한다. 이 저술은 서양의 자연과학의 발전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텍스트이다. 비록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한자에 대한 이해와 그 내용이 조야한 것이 분명하다 할지라도, 결론적으로 이 책은 근대의 탄생의 해명과 관련해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못지 않게 주목을 받아야 책일는지도 모르겠다.
8. “시작이 반이다. 용기를 내어 지혜를 가져라. 시작하라!”(<서간> 제1권 2편, 40-41절)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기원전 65-8)가 한 말이다.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친구에게 “철학(philosophia)”을 권하기 위해서다. “지혜(sapere)”에 눈길이 간다. 한 마디로, 시인에게 지혜는 세상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내면을 통찰하고 자기 완성(perfectio)으로 나아가는 수련(praemeditatio)이었다. 시인은 헬레니즘 시대의 지식인 세계에서 유행했던 은둔 자적의 현자(sapiens)인 자족(satis)의 존재가 되길 바랬고, 이는 그의 노래에서 잘 드러난다. 이 자족의 존재는 세속의 잡사(雜事)에 매심(賣心)하지 않고 자연과의 은밀한 감응을 통해 우주와의 소통에서 오는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인간이다. 자족에 대한 시인의 생각은 대략 여기까지다. 하지만, 자족은 아무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현자가 되어야 하기에. 어쩌면, 현자가 되기로 마음 먹는 것 자체가 더 큰 도전일 것이다. 세속(mundus)을 버려야 하기에. 이게, 시인이 “용기”(aude)를 강조하는 이유다.
한데, 문제는 기독교가 세속의 권력까지 장악하고 나서부터다. 자연과 우주와의 소통은 이제 특정 훈련(initio)과 교육(theologia)을 받은 사제 집단의 고유 권한으로 축소되어 버렸기에. 단적으로, 계시의 은총(gratia)이 아닌 자연과 사물의 본성(natura)에 의한 통찰과 깨달음은 종종 이단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해서, 시인이 권했던 철학으로의 길은 원래도 통행이 뜸한 곳이었지만, 더 황량한 곳이 되고 말았다. 현자가 되려는 시도는 심지어 마녀 재판에 회부되는 일이 되어 버렸기에.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물론, 1700여 년의 시간이 흘러야 했지만, 시인이 호소했던 철학으로 가는 길의 통행에 대한 자유를 허(許)하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다시 제기된다. 대표적인 이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다. 흥미롭게도, 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의 첫 문단에서 시인의 sapere aude를 인용한다. 어떤 맥락에서 던진 말일까? 각설하고, 이 말은 칸트 자신에게 한 말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대는, 오랜 세월 세속의 권력을 향유했던 성직자들과 계몽사상가들이 세속의 교육 문제를 둘러싸고 주도권 다툼을 치열하게 벌였던 시기였다. 신의 은총이 아닌 자연 본성에서 새로운 길을 찾은 이가 칸트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힘은, 어쩌면 지혜가 아닌 용기였을 것이기에. 지혜의 경우야, 요컨대, 자연과 사물의 본성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 했던 이가 칸트가 처음은 아니었고, 이는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과 라이프니츠, 볼프와 같은 독일의 선배들이 이미 닦아 놓은 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대 상황을 감안한다면, 칸트는 용기 있는 철학자였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많은 선배와 동료 학자의 지지를 받았고, 서양 고대 사상가들, 예컨대, 비록 무신론자이었지만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기에. 서양 역사에서 17세기에서부터 19세기까지 지속된 교회의 성직자들과 세속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계몽주의 전쟁을 촉발한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 것들 가운데에 하나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피터 게이의 <계몽주의의 기원> (주명철 옮김, 1998, 민음사)를 참조).
결론적으로 교회에 의지하지 않고, 더 정확하게는 교회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서 스스로 지혜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시민들에게 부여한 책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 증거로 당장 <1417년>을 제시할 수 있기에.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