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화이트 헤드(A. N. Whitehead, 1861~1947년)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유럽 철학 전통의 특징을 가장 안전한 방식으로 일반화시킨다면, 그것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1) 서양 철학사에 끼친 플라톤의 영향을 이것보다 더 강력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서양 철학사를 하나의 본문으로 볼 때, 그것은 플라톤이 이미 다 써놓은 것이고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그저 각주나 달았던 것에 불과하다니 말이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플라톤은 그 이후 철학사의 흐름을 결정해 놓은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플라톤’을 수용하든, 철저하게 반박하고 새로운 입장에 서든 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은 모두 플라톤의 개념과 문제의식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를 들자면, 플라톤은 바둑판과 바둑돌, 그리고 바둑의 게임규칙을 만들어 준 다음, 그 규칙에 따라 한 판의 멋진 바둑을 선보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후에 철학의 ‘바둑계’에 나타난 사람들은 플라톤의 기풍을 받아들이든, 신랄하게 비판하고 새로운 포석과 전략전술을 구사하든 모두 그가 만든 틀 안에서 놀고 있는 셈입니다. ‘바둑판’ 거둬치우고 장기를 두자고 ‘장기판’ 들이미는 순간, 철학 게임은 끝난다. 그는 기원전 4세기 ‘철학’(philosophia)이라는 개념을 두고 벌어진 치열한 ‘개념 싸움’에서 승리하였고, 그가 내린 정의대로 철학은 진행되어 왔다.(2)
삶을 통해 추구하는 바는 사람마다 다르다.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과 삶은 고유한 모습을 띠게 마련이다. 옛 그리스 사람들은 ‘philo-’(=사랑하다)라는 말이 붙은 낱말을 만들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표현하였다. ‘부(富)를 추구하는 사람’ (philokhrēmatos)이 있는가 하면, ‘권력을 갈망하는 사람’(philarkhos)도 있다. ‘명예를 좇는 사람’(philotimos)도 있고, ‘공동체를 으뜸으로 생각 하는 애국자’(philopolis)도 있으며, ‘음악과 문학에 정열을 쏟는 사람’(philomousos)도 있다. ‘술(酒)사랑’(philoposia)에 빠진 사람도 있지만, 진지하게 ‘진리와 지혜를 사랑하며 찾는 사람’(philosophos)과 평생을 탐구에 바치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philomatēs)도 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인간이 삶을 허투루 살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던져보았을 질문이다.
플라톤(Platōn)도 이런 물음에 진지하게 매달렸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 끊임없이 탐구하였다. 모색의 흔적은 30여 편의 작품들 속에 새겨져 있다. 그의 작품에서 전개된 모든 탐구는 ‘인간에게 가장 값진 삶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물음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해답을 제시하려고 하였고, 그의 모색은 대체로 ‘이데아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된다. 물론 그것이 그의 유일한 해답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특히 그를 체계적인 ‘도그마의 철학자’(philosophe dogmatique)로 그려내지 않고 ‘문제제기의 철학자’(philosophe problématique)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던지는 물음과 그 물음을 구성하고 그 물음에 답하는 데에 그가 사용하는 개념과 논리적인 틀이지, 그것에 의해 구성된 답변의 완제품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의 ‘이데아론’이라는 것이 대중적인 출판을 위해 저술된 대화편들(exoterika)에 제시된 것이 불과하며, 플라톤이 아카데미아에서 제자들과 함께 진지하게 숙고하고 모색했던 내용은 다른 것이었을 수도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 바 있다.(3)
2.소크라테스의 가면 뒤에 숨은 플라톤
플라톤의 작품은 한 편의 연극 대본, 영화 시나리오 같다. 그 주인공은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였다. 여기에서 잠깐 플라톤의 저술 방식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플라톤의 대표적인 작품을 꼽는다면 『국가』일 텐데 이를 예로 들면, 이 작품은 일반적인 철학 논문과는 아주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가 피레우스 항구에서 열린 축제의 구경을 끝내고 아테네로 돌아가려는데, 방패 장사로 부자가 된 케팔로스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를 만난다.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 일행을 집으로 초대하여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주제는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작품은 연극 대본이나 영화 시나리오와 같은 방식으로 작성되어 있다. 일종의 ‘철학적 드라마(philosophical drama)’다. 일설에 의하면 플라톤은 어렸을 때부터 비극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꿈을 디오뉘소스 극장에서 펼치는 대신, ‘아카데미아’라는 학교를 세우고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며 철학적 담론을 담아 ‘대화편’을 발표하는 데에서 실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이상적인 국가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paideia) 프로그램에 관하여 열띤 토론을 펼친다. 마치 연극을 하듯,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대사’를 토해낸다. 그중에서도 ‘주연’인 소크라테스는 ‘무대’를 장악하고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간다.
30편이 넘는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플라톤은 한 번도 제대로 된 등장인물로 나오지 않는다. 『국가』에서도 플라톤의 형제인 아데이만토스와 글라우콘은 나오는데, 정작 플라톤은 등장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옥에 갇힌 후, 사약을 마시고 숨을 거두는 장면을 담은 『파이돈』에서는 플라톤의 이름만이 언급될 뿐, 역시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화 내용을 회상하며 전해주는 파이돈은 이렇게 말한다. “제 생각에 플라톤은 병이 났었던 것 같습니다.”(59b) 하필 그때 병이 나서 스승의 최후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플라톤이 등장하는 유일한 장면은 소크라테스가 법정에서 자신을 변론하는 재판정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가 기리는 신들을 믿지 않으며,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불온한 인물이라고 지목되어 재판을 받고 있을 때, 플라톤은 그곳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변론 과정에서 자신은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만약 자신이 자신과 함께 하던 사람들을 타락시켰다면, 자신에게 조언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타락하게 된 것에 분노하며 보복을 위해 자신을 고발할 텐데, 그들은 잠잠하지 않느냐고 항변한다. 청중을 둘러보던 소크라테스는 자신과 함께 하던 사람들이 눈에 띄자 그들의 이름을 열거하기까지 한다. 그에 눈에는 플라톤과 그의 형제 아데이만토스가 보였다. “여기 이 아데이만토스는 아리스톤의 아들로서, 여기 있는 이 플라톤과 형제입니다.”(34a)
플라톤은 스승의 석방을 위한 현실적인 조언을 했고 자신의 조언이 실효를 거두는지를 보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다. “여기 있는 플라톤과 크리톤, 그리고 크리토볼로스와 아폴로도로스가 저더러 3므나를 벌금으로 제의하고서, 자신들이 보증하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만큼을 벌금으로 제의합니다만, 이 금액에 대하여서는 이들이 믿을 만한 보증인들로 되어 드릴 것입니다.”(38b) 하지만 이 장면에서도 플라톤은 엑스트라다. 작품에서 펼쳐지는 철학적 담론에 조금도 기여하지 않는 잉여적인 존재다.
그래서 초기의 플라톤 연구자들 중에는 플라톤이 독창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그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서 스승의 대화를 모아 기록한 ‘종군기자’ 같은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대다수의 학자들이 초기의 작품에는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방법론이 많이 담겨 있고, 중기에서 후기 작품으로 갈수록 플라톤의 고유한 생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플라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는 실존했던 역사적인 소크라테스 모습 그대로라기보다는 플라톤에 의해 각색된 ‘가면’(persona) 같은 존재고, 강하게 말하자면, 그 가면 뒤에는 플라톤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주>
(1) A. N. Whitehead, Process and Reality, 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29, p. 63. “the safest general characterization of the European philosophical tradition is that it consists of a series of footnotes to Plato.” (2) 기원전 4세기 플라톤과 ‘철학’ 개념 싸움을 벌인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수사학자로 알려져 있는 이소크라테스(기원전 436-338년)다. 플라톤은 인식을 ‘의견’(doxa)과 ‘지식’(epistêmê)로 나누고, 이 가운데 지식이야말로 참된 ‘지혜’(sophia)며 이런 지혜를 추구하는 것이 ‘철학’(philosophia)이라고 주장하였던 반면, 이소크라테스는 인간은 결코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불변한 ‘진리’를 알 수 없으며, 따라서 그것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지식은 변화무쌍하고 급변하는 인간의 삶, 특히 정치적인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비난했다. 그는 오히려 플라톤이 폄하했던 ‘의견’(doxa)의 개념을 참된 지혜의 반열로 올려놓았는데, 급변하는 정치적인 현실 속에서 시의적절한 의견을 구성하여 같은 시민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참된 지혜며, 그런 지혜를 추구하고 가르치는 행위가 바로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플라톤이 ‘에피스테메’ 중심의 철학이라면, 이소크라테스는 ‘독사’ 중심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개념 싸움에서 이소크라테스는 완패하였고, 플라톤이 제시한 정의가 서양 철학사의 주류를 형성함으로써 이소크라테스는 서양철학사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다. “정의(definition)를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패배자는 그 여파 속에서 벌어지는 지성적 논의에서 종종 심각한 불이익을 당한다. 더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시간이 지나갈수록 패배한 정의와 전투 자체가 지성사의 기록에서 거의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승리자가 전부 다 가져간 경우도 있다! 기원전 4세기에 철학의 정의를 두고 이소크라테스가 플라톤과 벌인 싸움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소크라테스가 철학의 한 개념(a conception of philosophy)을 밀고 나가는 데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았다 해도, 그의 개념은 플라톤이 이 개념 싸움에서 승자였다는 이유로 플라톤의 개념의 그늘 속에서 시들어버린 상태다.” Timmerman, David M. (1998) “Isocrates' Competing Conceptualization of Philosophy”, Philosophy and Rhetoric, Vol. 31, No. 2, p. 145. (3) 튀빙겐 학파의 주장이 대표적인데, 이런 해석의 핵심을 잘 보여주는 주요 저술 세 편은 다음과 같다. Krämer H.J. (1959) Arete bei Platon und Aristoteles. Zum Wesen und zur Geschichte der platonischen Ontologie, Heidelberg. Gaiser K. (1959) Protreptik und Paränese bei Platon. Untersuchungen zur Form des platonischen Dialogs, Stuttgart. Gaiser K. (1963) Platons ungeschriebene Lehre. Studien zur systematischen und geschichtlichen Begründung der Wissenschaft in der Platonischen Schule, Stuttgart. Richard M.-D. (1986) L’enseignement oral de Plato, Paris도 참조할 만함. (4)박종현의 번역(서광사, 2010)과 강성훈의 번역(이제이북스, 2010)을 참조하였고, 최현의 중역본(범우사, 2002, 초판은 1989)도 부분적으로 참조하였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4, 2014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