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살고 계신 동네의 이야기다. 2000년대 초반, 그 동네 어느 아파트의 가격이 가파르게 올랐다고 한다. 부모님이 계시는 아파트보다 교통조건도 훨씬 안 좋고, 지은 지도 오래된 아파트였기에 가격이 급상승할 만한 객관적인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순식간에 가격이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아파트의 이름을 ‘LG 아파트’에서 ‘자이’로 바꿨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를 위한 이름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면, 마녀 할머니가 ‘치히로’의 이름을 압수하고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 주인공은 치히로라는 이름을 상실하는 순간 인간이기를 멈추게 되고, 센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음으로써 귀신세계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거듭난다. 기존의 이름을 잃는 순간 인간이라는 내용이 소멸되고, 새로운 이름을 얻는 순간 귀신이라는 새로운 내용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름에는 뭔가가 담겨져 있다는 사유, 곧 이름이 그 실제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유가 깔려 있다.
공자도 그런 식으로 사유했던 듯하다. “선생님께서 재상이 되신다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공자는 마땅히 ‘이름값을 바로 잡는 일[正名]’부터 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언뜻 보면 관념적이고 이론적 작업으로 보이지만, 이름이 실제를 대신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름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곧 ‘실제 세계를 바로 잡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여기에 공자는 “이름은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말을 하면 반드시 행할 수 있어야 한다.[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는 조건을 추가한다. 자기가 한 말을 행함으로 옮길 줄 알아야 말에 지배되지 않고 반대로 말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여기 ‘지식인’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아이가 있다고 하자. 아이가 묻는다. “지식인이 뭐야?” 이때 말로 설명하지 못하면, 공자보기에 ‘지식인’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소리에 불과할 뿐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언어생활을 하지 못했다면 이름도 없었을 터인 만큼, 이름은 반드시 언어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공자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이름을 설명하는 데 동원한 말은 다 실천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실천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름다운’ 이름이 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껍데기는 가라는 것이다. 무늬만 이름일 뿐, 이름으로서 갖춰야 할 것을 갖추지 못한 녀석은 진정한 이름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 내부가 말과 행동으로 꽉 찬 이름, 이것이 공자가 구상한 이름이었다. 이름하여 ‘실제를 위한 이름’! 여기서 이름은 실제를 단순히 대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그 자체로 존재하고 작용하게 된다. 하여 옛 사람들은 설사 임금이라 할지라도 신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아무리 임금이라도 사람 그 자체를 소유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뿐이 아니다. 여호와는 기독교의 하나님 자체이니, 이름은 신이란 존재 자체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돈을 위한 이름으로
그런데 불행하게도, 실제를 위한 이름이 현실적 영향력을 발휘했던 시대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공자의 시대 역시도 결코 그렇지 못했던 듯하다. <논어>를 보면 당시 허명(虛名)을 쌓아 정관계 요로에 쉬이 진출하는 세태를 종종 엿볼 수 있다. 어쩌면 그 속은 진즉 파내어지고 ‘껍데기’만 남았던 시대였기에 공자가 그런 얘기를 힘주어 했을 지도 모른다.
만일 그런 것이라면, 지금 우리는 더욱 힘주어 실제를 위한 이름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자본주의 근대문명 자체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도 더 본격적이고 대대적으로 이름의 속을 파내고 그 ‘껍데기’만을 남겼기 때문이요, 그 껍데기를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이문을 착취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자. 기업은 “자연보다 더한 사치는 없습니다.”고 광고하며 자연을 판매한다. 자연이란 이름이 원래 갖고 있던 내용은 사라지고, 상품으로서의 자연이란 생뚱맞은 껍데기만 남는다. 또 “남들에겐 사치지만, 저에게는 생활입니다.”며 생활이란 이름을 호도한다. 이 과정에서 사치란 이름이 본래 갖고 있던 내용은 사라지고, 어느덧 사치는 누구나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하는 가치로 둔갑한다. 이름의 속을 파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속에 엉뚱한 것을 채우고는, 이를 빌미로 새로운 이득을 취한다. 이것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근대문명의 본질이다.
아무리 겉이 똑같다 하더라도 속이 바뀌면, 그것은 더 이상 동일한 것일 수 없다. 속이 바뀐 자연은 더 이상 자연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연이 아닌 자연을 누리고자 평소보다 더한 대가를 지불하며 이른바 ‘환경친화형’ 아파트를 구입한다. 진정한 자연을 누리는 것이 아니요, 껍데기만 남은 자연이라는 이름을 누릴 뿐인데도 기꺼이 비싼 돈을 지불한다. 어느덧 이름이 더 큰 이문을 창출하는 유력한 수단이 된 셈이다. 그래서 실제로 바뀐 것은 하나도 없는데 이름 하나 바뀌었다고 하여 가격이 큰 폭으로 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가격에 아파트를 사고판다. 실물이 가격에 비해 많이 처진다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아파트가 거래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아파트의 ‘이름’이 거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름’ 값이 더 오를 가능성이 있는 한 거래는 늘 성립된다. 이문은 그렇게 ‘실물’이 아닌 ‘이름’을 통해 창출되는 문명. 이게 안락하고 편리하다 여겨지는 우리네 현실이다.
이름에 근거하여 가격을 올리고, 가격이 올랐기에 더욱 값지게 되는 이름. 이렇게 실제가 뒷받침되지 않아도 가치가 창출되고 소비되는 돈과 이름의 어처구니없는 결합. 두렵지 않은가? 속 빈 껍데기들이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세상이.
【관련 원문과 해석】
❍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군주가 선생님께 의지하여 정사를 베풀고자 합니다. 선생님께선 장차 무엇을 먼저 하시고자 합니까?” 공자가 답했다. “반드시 이름값을 바로잡을 것이다.” 자로가 대꾸했다. “고작 그것입니까? 선생님께선 참으로 현실에 어두우십니다. 그것을 바로잡아 무엇 하시려고요?” 공자가 말했다. “기본조차 안됐구나, 자로 너는! 군자는 자신이 모르는 바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 없는 듯 가만히 있어야 한다. 이름값이 바로잡히지 못하면 말이 순통하지 못하게 된다. 말이 순통하지 못하면 일을 수행할 수가 없다. 일을 수행할 수 없으면 예악이 흥할 수 없다. 예악이 흥하지 않으면 형벌이 공평무사할 수 없다. 형벌이 공평무사하지 않으면 백성들은 행동할 수 있는 근거를 잃게 된다. 군자는 이름을 붙이면 반드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말을 하면 반드시 행할 수 있어야 한다. 군자는 자신의 말에 대해 구차함이 없어야 할 따름이다.(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錯手足. 故君子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已矣.” - <논어(論語)> 「자로(子路)」.
* 이 글은 <사과나무> 2005년 9월호에 게재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2, 2016년 2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