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테르탈에서의 학생체벌 사건은 자존심이 강했던 비트겐슈타인으로서는 도무지 견뎌낼 수 없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재판 과정을 통해 대중들에게 받은 비난은 (엄숙하리만큼 철두철미했던) 청교도적 도덕주의를 강조했던 비트겐슈타인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마을 주민들로부터 잔혹했다는 비난을 모면하고 자신이 한 체벌을 정당화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비트겐슈타인은 스스로 자괴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 1926년 4월 교사직을 완전히 포기한 상황에서 케인즈와 램지가 기다리는 영국으로 가기에는 이미 비트겐슈타인의 자존감은 완전히 나락에 떨어진 상태였다. 비트겐슈타인으로서는 무엇인가 자신을 정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비트겐슈타인의 내면에는 종교적 감정도 어느 정도 숙성되어 있었던 탓에) 수도원을 방문하여 수도원장에게 자신이 수도사가 될 수 있는지 여부를 묻는다. 절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비트겐슈타인의 속내를 간파한 수도원장은 대안으로 비엔나 외곽에 있는 휘텔도르프Hütteldorf에 있는 수도애호사들과 함께 정원사로 일할 것을 추천한다. 3개월 정도의 정원사 일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노동의 신성한 매력을 느끼게 되며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신감도 회복하게 된다. 이처럼 노동의 신성함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로 하여금 크나큰 구원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체화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신은 향후 그의 삶에서도 중요한 계기가 된다.
1926년 6월 3일, 정원사로 일하던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어머니가 알레가세의 저택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정원사 일을 그만두고 비엔나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비트겐슈타인으로서는 그동안 소원해진 가족 관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매년 크리스마스 가족 모임에서 선물을 주고 노래를 함께 부르고, 식사를 하는 식의 진실성 없는 형식상의 관계를 몹시 싫어했다.) 이 때 누나 그레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자신의 저택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일을 이미 맡고 있던 엥겔만과 함께 할 것을 부탁했다. 이는 그간 건축에 나름대로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비트겐슈타인으로서는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비트겐슈타인은 건축가로서의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고 건축 일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지만 직업으로서 건축에서 자신의 새로운 소명의식을 강하게 가졌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일례로 수년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비엔나 시 인명부에 전문건축가로 등록되어 있었다.) 논리적 엄격성과 치밀함이 몸에 배인 비트겐슈타인이 건축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검토하고 실제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광적일 정도의 정확성을 요구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야말로 그 집은 누나 그레틀의 개성을 액면그대로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당시 1928년에 완성된 그 집에 대해 그레틀은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그 집을 보고 아주 감탄을 하긴 했지만, 한시도 그곳에서 살고 싶지도 않고 또 살 수도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이지 그 집은 나 같은 보잘 것 없는 인간보다 신들을 위한 숙소처럼 보였습니다. 처음에 나는 내가 ‘논리학을 구현한 저택’으로 부른 이 집에 대해서, 이 완벽한 기념비적인 작품에 대해 어렴풋이 생겨난 내적인 적대감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Leitner, The Architecture of Ludwig Wittgenstein, p. 23, 레이 몽크, 『천재의 의무 1』, 326쪽, 재인용)
‘논리학을 구현한 저택’, 역시 천재적인 논리학자의 누나다운 멋진 건축 평이다. 쉽게 상상이 가지는 않겠지만,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볼 수 있는 안락함, 사치스런 장식물들, 우아한 카펫, 샹들리에, 커튼 등과 같은 장식물은 일체 배제되었고 논리학에서나 구현될 수 있는 명료성, 엄격함, 정밀함과 같은 특성들이 주택 전체의 분위기였으니 누나 그레틀의 주택에 대한 비평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당시 일화에 의하면, 그는 마치 『논고』의 논리적 엄밀성을 건축에 체현하기라도 하듯이 밀리미터의 오차에 신경을 써가며 문짝과 창문틀 그리고 문고리 등이 디자인에 맞게 정확하게 시공이 되는지 철저하게 감독했다고 전해진다. 건축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관점은 사실 ‘모든 장식은 악’이라는 건축가 로스의 모토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로스의 이러한 건축미학은 요즈음 현대 미술이나 조각에서 말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의 정신을 세기말의 비엔나에서 구현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그 의의는 충분히 평가받을 수 있다. (이후 이 주택에 대한 역사적 과정은 레이 몽크의 같은 책, 326~7쪽과 박병철, 『비트겐슈타인』, 44~45쪽을 참고할 것.) 이처럼 단순 명료한 건축 미학을 지향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이미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사유경제의 법칙이라 일컫는 오캄의 면도날과 같은 사고방식을 따른 물리학자 헤르츠의 정신을 그대로 반영할 것으러 평가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비트겐슈타인 하우스는 오늘날 쿤드만가세 19번지에 그대로 있으며, 지금은 몇 차례의 개보수로 인해 원래 비트겐슈타인이 설계했을 당시의 모습과는 약간 차이가 있으나 불가리아 문화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무튼 누나 그레틀을 위해 건축 일을 한 비트겐슈타인으로서는 다시금 비엔나 사회로 들어갈 수 있는 자신감은 물론 결과적으로는 철학에 되돌아갈 수 있는 정신적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2.
쿤드만가세의 저택이 지어지는 동안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생애 처음으로 이성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비트겐슈타인이 사랑에 빠진 그녀는 누나 그레틀의 장남 토마스가 케임브리지에서 만난 스위스 출신의 여성 마르그리뜨 레스핑거Marguerite Respinger였다. 그러니까 비트겐슈타인은 무엇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카의 친구정도 되는 젊은 여성 마르그리뜨에게 연정을 품었고 이 둘의 관계는 1931년까지 지속되었다. 대략 나이로 말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의 나이가 서른 중반 이상이라면 마르그리뜨는 아직 20대를 넘기지 않은 꽃다운 청춘이었다.
마르그리뜨는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철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비엔나에서 예술학교에 다니던 젊은 여성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그들은 거의 매일 만났으며 서부극도 보고 카페에서 간단한 식사를 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 문제는 아직 스물을 넘기지 않은 젊은 여성 마르그리뜨는 유행에 민감한 반면, 비트겐슈타인은 유행과는 전혀 무관하게 자신의 남루한 의상 스타일을 고집했다. 한 사람은 철학, 논리학에 순수한 열정을 가진 철학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새로운 유행과 젊음의 기분을 만끽하고픈 젊은 청춘의 여성이니, 이 둘의 관계가 평탄하게 갈 수 없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역시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과 사귀어야 한다는 사회의 일반적 통념을 뛰어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 둘의 관계는 단순히 나이 차이의 문제라기보다는 두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가 너무도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이 마르그리트와 교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누이 그레틀의 동생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마르그리트는 지적인 깊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이러한 그녀의 태도가 그동안 여러 가지 악전고투했던 자신의 동생 비트겐슈타인의 마음을 달래고 정상적인 삶에 이르는 데 나른대로 영향을 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비트겐슈타인 역시 자신의 내면적인 사유세계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 둘의 관계는 어는 정도 지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의 친구들은 이 둘의 관계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친구 아비드 쇠렌만과 파울 엥겔만이 그러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절친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엥겔만은 마르그리트를 노골적으로 싫어했고 마르그리트 역시 엥겔만을 유태인이라는 이유에서 싫어했다. 이로 인해 비트겐슈타인과 엥겔만과의 우정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고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유태성에 대한 태도도 이전에 비해서는 상당히 변했다고 할 수 있다.
3.
그레틀은 자신의 동생 비트겐슈타인이 지은 건축물을 ‘논리학이 구현된 저택’이라는 다소 과장된 표현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작 비트겐슈타인은 그 건축물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했다.
같은 뜻에서: (나의 누이) 그레틀을 위해 내가 지은 저택은 분명히 예민한 귀와 훌륭한 매너의 산물이자 (문화 등에 대한) 위대한 이해Verständniss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를 맹렬히 분출하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삶ursprüngliche Leben, 야생적 삶wilde Leben은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에는 건강함Gesundheit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해질 수도 있다. (키에르케고르). (온실에서 재배된 식물Triebhauspflanze.)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83쪽.)
왜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말을 했을까? 이미 1930년대에 비트겐슈타인은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바가 있다. “오늘날 훌륭한 건축과 나쁜 건축 사이의 차이는, 후자는 모든 유혹에 굴복하는 데 반해서, 올바른 것은 그것에 저항한다는 점에 있다.” (『문화와 가치』, 19~20쪽.) [이러한 유혹에 저항하는 건축의 정신은 오늘날 자본의 논리에 경도된 우리 시대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예술(음악, 미술, 건축 등)에 대한 관점, 즉 “모든 위대한 예술에는 –길들여진- 야생의 동물이 있다”는 위에서 인용한 대목의 앞에 있는 구절을 보다 면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모든 위대한 예술에는 –길들여진gezähmt- 야생적 동물이 들어 있다. 예컨대 멘델스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모든 위대한 예술은 인간의 원초적 충동들을 그 기본 저음으로서 지니고 있다. 그 원초적 충동들은 (아마도 바그너의 경우에 그러듯이) 멜로디가 아니다; 그것들은 멜로디에다 그 깊이와 힘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는 멘델스존을 재생산적reproduktiven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82쪽)
다른 예술에 비해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비트겐슈타인으로서도 음악을 포함한 다른 예술에 대한 자신의 재능은 결과적으로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재창조 내지는 재생산하는 데 미칠 뿐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무엇보다도 드러내고자 했던 ‘스스로를 맹렬히 분출하고 싶어 했던 근원적 삶과 야생적 삶’에 대한 맹목적적 의지는 예술의 영역에서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이 멘델스존과 바그너를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비극은 나무가 굽히질 않고 부러지는 데에 있다. 비극은 비유태적인 어떤 것이다. 멘델스존은 아마 가장 비-비극적인 작곡가이다.
멘델스존은 산봉우리가 아니라 고원이다. 그의 영국적임.
멘델스존은 모든 것이 아무튼 즐겁다면 마냥 즐거운 사람, 또는 그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좋은 그런 사람과 같고, 자기 주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평소와 다름없이 확고히 서 있는 나무와 같은 사람은 원래 아니다. 나 자신도 매우 비슷하며, 그렇게 되는 경향이 있다. (『문화와 가치』, 16~17쪽)
바그너의 모티브들은 음악적 산문 문장들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압운 산문’gereimte Prosa이 존재하듯이, 이 모티브들은 물론 멜로디의 형식에로 짜 마쳐질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의 멜로디를 산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바그너의 극도 또한 극이 아니라, 하나의 실에 꿰인 듯 이어진 상황들의 병렬이다; 그 실 자체는 단지 솜씨 있게 꼬아졌을 뿐, 그 모티브들과 상황들과 마찬가지로 영감이 깃들어 있지는 않다. (『문화와 가치』, 88쪽)
베토벤의 음악에서 처음으로 아니러니의 표현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발견된다. 예컨대 9번의 첫 악장에서, 그리고 게다가 그에게서 그것은 무서운 아이러니, 가령 운명의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는 바그너에서 다시 나타나지만,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바뀌어서 나타난다.
우리는 아마 바그너와 브람스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베토벤을 모방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에서 우주적이었던 것이 그들에게서는 현세적인 것으로 된다. (『문화와 가치』, 160쪽)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그토록 염원했던 저항의 정신, 야생적 동물성을 철저하게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역시 엄밀한 철학적 사고를 토대로 한 논리학일 수밖에 없었다. 비트겐슈타인의 강건한 야생적 사고를 한 눈에 알아 본 사람은 이미 그의 스승이었던 러셀과 무어 그리고 캠브리지의 젊은 수학자 프랭크 램지가 감지한 바가 있다.
4.
‘위험이 있는 곳에서 구원이 자란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핍진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삶은 누이 그레틀의 저택을 짓는 동안 어느덧 자신 본래의 명민한 철학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무엇보다도 누이 그레틀의 헌신적인 노력이 컸다. 그 일례로 그레틀은 비엔나 대학의 철학 교수이면서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로 잘 알려진 비엔나 서클Vienna Circle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던 모리츠 슐리크Moritz Schlick를 비트겐슈타인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슐리크는 이미 1922년 『논고』가 출간되자 그 책의 가치를 인정한 첫 번째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비엔나 서클의 주도적 인물로는 슐리크를 포함해서 프리드리히 바이스만Friedrich Waismann,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헤르바르트 파이글Herbart Feigl, 에이어A. J. Ayer 등이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논리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모든 철학은 언어비판”(『논고』, 4.0031)으로서 “철학의 목적은 사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논고』, 4.112) 그는 명제의 참, 거짓이 결정될 수 있으면 그 명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의미 있는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논리적 명제와 사실 명제에만 국한해야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을 해야 한다”(『논고』, 7)고 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는 언어의 의미를 인식적 의미cognitive meaning와 비인식적 의미noncognitive meaning로 구분한다. 여기서 인식적 의미는 분석적이거나 모순에 해당되는 논리적 의미와 경험적 증거empirical evidence에 의해 검증 가능한 경험적 의미를 말하고, 비인식적 의미는 (예술이나 심리학의 대상이 되는) 은유나 감정과 관련된 의미를 말한다. 때문에 논리실증주의는 예술이나 심리학의 대상이 되는 비인식적 의미는 논의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논리실증주의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인식적 의미에 관한 고찰을 한다. (1) 관찰문장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가? (2) 이론문장이 환원될 수 있는 관찰문장들은 어느 정도로 검증해야만 이론문장의 의미를 알 수 있는가? (3) 경험적 의미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하 자세한 논의는 박영태, “논리실증주의의 인식적 의미에 관한 고찰”,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0을 참조 할 것. 『논고』의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와 규약주의에 관해서는 Gordon Barker, Wittgenstein, Frege and the Vienna Circle, Basil Blackwell, 1988, 6장을 참고할 것.)
당시 『논고』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슐리크는 1924년 여름 그레틀의 저택에서 프랭크 램지를 만난 후 비트겐슈타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논고』의 숭배자로서 나는 오랫동안 당신과 연락을 하려고 했습니다. 비엔나로 초정된 지 거의 5학기가 지났지만 나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을 계속 연기하게 된 것은 나의 교수직과 여타 의무들 때문입니다. 매 겨울 학기마다 나는 논리학과 수학의 기초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동료들과 재능있는 학생들과 함께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는데, 이 그룹에서는 당신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었으며, 특히 수학과의 라이드마스터Reidmaster교수가 우리 모두 깊은 인상을 받았던 한 강의에서 당신의 연구를 보고한 후에는 더욱 더 그랬습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당신의 근본적 사상의 중요성과 정확성을 확신하면서 당신의 견해를 더 널리 알리기 위해 한 몫을 하려는 강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있습니다. (Ludwig Wittgenstein and the Vienna Circle, p. 13, 레이 몽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I, 천재의 의무』, 339쪽, 재인용.)
그러나 슐리크가 편지를 보낸 주소는 푸흐베르크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푸흐베르크를 떠나 오테르탈에 있는 초등학교로 전근을 한 상태였지만 어쨌든 그의 편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슐리크의 편지를 읽은 비트겐슈타인은 흔쾌히 그의 방문을 받아들였고 슐리크 역시 답장을 통해 방문 의사를 밝혔다. 그로부터 15개월 후 1926년 4월 슐리크는 자신이 선별한 제자들과 오테르탈로 향했지만, 그 때는 이미 비트겐슈타인이 오테르탈에서 학생 체벌 사건으로 학교를 그만 둔 상태였기 때문에 이들의 만남은 성사되지 못했다. 때문에 비트겐슈타인을 위대한 천재 철학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했던 슐리크로서는 실망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슐리크는 1927년 2월 크레틀로부터 비트겐슈타인과의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편지를 받는다. 슐리크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자신의 저서 일부를 보내면서 여러 사람과 함께 논리적 문제에 대해 토론을 하자고 제안을 한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독특한 성격을 잘 알고 있던 누이 그레텔은 슐리크의 이런 제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아닌 단독으로 만날 것을 요청한다. 그렇게 해서 비트겐슈타인과 슐리크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이후 이 둘은 철학적 문제에 대한 토론을 위해 정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1927년 여름부터 비트겐슈타인은 월요일 저녁에 슐리크를 포함해서 일부 조심스럽게 선택된 비엔나 서클의 학회 회원들과 정기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들 중에는 프리드리히 바이스만, 루돌프 카르납, 헤르바르트 파이글이 있었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펼쳤던 생각은 슐리크가 주도하는 비엔나 서클의 주도적 이념, 즉 철학적 문제에 대한 실증주의적 접근과 과학적 세계관을 공유한 철학자와 수학자들의 생각과 융화되기가 어려웠다. 과학과 신비주의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과학에 의한 경험적 검증을 강조했던 비엔나 서클의 생각과는 너무도 판이할 수밖에 없었다. 철학과 과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논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철학은 자연 과학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철학“이란 낱말은 자연 과학들의 위 아니면 아래에 있는 것을 의미해야지, 자연 과학과 나란히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해서는 안 된다.) (『논고』, 4.111) 그 한 예로 비트겐슈타인은 그들과의 모임에서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니스 타고르Rabindranath Tagore의 신비주의에 가득 찬 시를 낭독하기도 했다. 객관적인 과학과 수학의 방법에 입각한 논리실증주의를 강조했던 그들 앞에서 신비주의적인 시를 낭독한다는 것은 이미 비트겐슈타인이 자신들이 기대했던 논리실증주의자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행위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과학철학자 카르납은 다음과 같은 회고를 한 바가 있다.
초기에 우리가 학회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책을 읽고 있을 때, 나는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태도가 우리의 것과 유사하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졌었다. 나는 그의 책에 있는 신비적인 것에 대한 진술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분야에서 그의 느낌과 생각은 나의 것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와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나서야 나는 이 점에 대한 그의 태도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
사람들과 문제들, 심지어 이론적인 문제에 대한 그의 관점과 태도는 과학자의 태도라기보다는 창조적인 예술가의 태도에 훨씬 더 유사했다. 그의 태도는 거의 종교적인 예언자나 선각자의 태도에 더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가 어떤 특정한 철학적 문제에 대한 견해를 형성하려고 시작했을 때, 우리는 바로 그 순간 그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투쟁을 느꼈다. 이 투쟁에 의해서 그는 극심하고 고통스러운 긴장 속에서 암흑을 뚫고 빛으로 나가려고 시도했는데, 그것은 심지어 그의 아주 풍부한 표정의 얼굴에서도 볼 수 있었다. 마침내 가끔은 오랫동안의 끈질긴 노력 후, 그의 답이 나왔을 때, 그의 진술은 우리 앞에 새로이 창조된 예술 작품 혹은 신의 계시처럼 나타났다. 그가 그의 견해를 독단적으로 주장했다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남긴 인상은 마치 그가 신적인 영감을 통해 통찰하는 것 같다는 것이어서, 우리는 그것에 대한 어떤 온당하고 합리적인 논평이나 분석은 신성 모독처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R. Carnap, Autobiography, 레이 몽크, 같은 책, 342쪽, 재인용.)
5.
이처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논리학)에 대한 관심과 그의 독특한 기질은 비엔나 서클의 회원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과 이들은 프랭크 램지가 21살에 쓴 최초의 논문 “수학의 기초”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이 논문은 1925년 11월 런던 수학학회에서 발표했다.)를 가지고 유익한 토론을 했다. 램지는 1930년 26세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수학자였다. 이미 앞에서도 논한 것처럼,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영어 번역에도 깊게 관여할 만큼 비트겐슈타인과는 상당한 학문적 친분 관계를 유지했으며, 비트겐슈타인의 명목상 지도교수로서 그가 다시 캠브리지에서 철학 공부를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결정적 역할을 많이 했다. (당시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쓴 것 외에는 어떤 학위도 갖고 있지 못했다.)
엄밀하게 말해서 비트겐슈타인과 램지의 동일성identity, 외연함수functions in extension, 무한공리the axiom of infinity와 같은 수학철학에 관한 쟁점들에 관한 논의는 굉장히 전문적이고 복잡하고 난해하다. (이하 상세한 논의는 Mathieu Marion, Wittgenstein, Finitism, and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Clarendon Press·Oxford, 1988, 3장 Arbitrary Functions, pp. 48~72를 참고할 것.)
램지가 1923년 오스트리아에서 비트겐슈타인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미 《마인드》 잡지에『논고』에 대한 서평을 썼으며(Ramsey, “Critical Notice: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by Ludwig Wittgenstein”, Mind 32, pp. 465~478.) 이것은 아직도 난해한 『논고』의 아주 훌륭한 주석서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램지는 비트겐슈타인에게 『논고』에서 몇 가지 어려운 구절들에 대한 명료한 설명을 원했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에게 철저한 설명을 듣는 것이 램지가 비트겐슈타인을 방문한 유일한 목적은 아니었다. 램지는 자기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그 책이 완성되었을 때 저는 비트겐슈타인을 자극해 제가 시도하고자 하는 그 이상의 발전을 위한 생각들을 알아내고자 합니다.” (LO, 74쪽) 러셀 또한 그 당시 『수학 원리』의 2판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램지는 같은 편지에서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러셀에게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ia(PM)가 잘못된 점이 있는 탓에 개정판이 아무런 쓸모가 없으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러셀이『수학 원리』의 개정판을 작업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이 내심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고 썼다. 그것은 전적으로 모두 새롭게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썼다 (LO, 74쪽). 신선한 출발은 분명히 램지가 「수학의 기초」에 대한 논문을 쓰는 동안, 그 다음 해 동안 그가 작업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Ramsey, Foundations, 1978, pp. 152~212.) 램지의 의도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 의존해서 ‘대다수의 권위 있는 독일 학자들의 거부로 야기된 심각한 반론으로부터 『수학 원리』를 구하는’ 것이었다. (같은 책, 152쪽). 어쨌든,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의 비판을 설명하려는 과정을 통해서, 램지는 분명히 『수학 원리』의 2판과 더불어 러셀을 도운 것은 틀림이 없으나, 궁극적인 결과는 램지를 실망하게 만들었다. 이미 1924년 2월에, 램지는 『수학 원리』의 2판 원고를 보았고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수학 원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당신의 생각은 정말 옳습니다. 실제로 그 책이 추구한 것은 결국 환원가능성 공리를 사용하지 않고도 수학적 귀납의 정교한 증명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근본적 변화는 전혀 없으며, 동일성은 예전 그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LO, 84쪽)
램지는 「수학의 기초」에서 『수학 원리』의 세 가지 ‘중대한 결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첫 번째는 수학이 ‘본질적으로 외연적’이라는 램지의 주장과 관련이 있다 (Ramsey 1978, p. 166). ‘수학이 외연적이라고’ 함으로써, 램지는 ‘수학이 다루는 것은 술어가 아니라 클래스들이며, 일상적 의미에서 관계들이 아니라 가능한 상관관계들, 혹은 러셀의 말대로 “외연의 관계들”이다’ (같은 책, 165쪽)는 것을 뜻했다. 그는 정의할 수 없는 무한한 클래스들 (무한 집합의 임의적 부분 집합들)이 현대 수학에서 본질적이라고 믿었으며 그런 점에서 『수학 원리』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정리하면 램지가 “수학의 기초”라는 논문을 통해 목표하고자 한 바는 러셀의 『수학원리』(PM)에 있는 이론적 결함을 보완해서 프레게, 러셀이 추구하고자 했던 논리주의(logicism)의 우월함을 입증하고, 당시 네덜란드의 수학자인 브라우워L. E. J. Brouwer가 이끄는 직관주의자들의 영향력을 미연에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 논리주의는 모든 수학이 논리학에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따라서 수학자들이 받아들이는 모든 공리들에 대한 엄격하고 논리적인 기초를 제공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에 반해 브라우어가 주도적으로 이끈 직관주의의 기본 강령은 “수학을 수학적 언어와 완전하게 분리하는 것이고, …직관주의 수학은 본질적으로 언어가 없는 심적 활동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van Dalen, Brouwer’s Cambridge Lectures on Intuition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p.4)이었다. 브라우어에게 있어서, 직관은 수학적 지식의 성립과 그것의 본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축의 역할을 한다. 그는 수학의 대상들을 우리들의 사고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추상적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내적인 사고 과정을 통해서 구성되는 일종의 ‘정신적 구성물’로 파악한다. 그는 직관주의 수학을 “내성적인 구성에 의해 수학의 정리들을 이끌어내는 수학”(Brouwer, “Consciousness, Philosophy, and Mathematics,1948 in Benacerraf and Putnam, Philosophy of Mathematics, Prentice Hall, 1964, p.78)이라고 한다. (이하 직관주의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박만엽, 『비트겐슈타인 수학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8, 93~107쪽 참고할 것.)
램지는 수학이 항진명제tautology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논고』의 명제들을 이용해서 수학의 명제들은 단순히 논리적 명제들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램지의 이러한 생각은 비트겐슈타인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논리적 명제와 수학적 명제를 구분한다. “논리학의 명제는 항진명제(동어반복)이고, 수학은 ‘등식들’equations속에서 보여준다.”(6.22)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생각과 달리 램지는 동일성의 정의를 통해 수학의 등식이 항진명제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램지는 궁극적으로 “수학을 브라우어와 바일Weyl의 볼셰비키적 위협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Ramsey, 1978, pp. 152~212)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은 램지의 생각이 오히려 부르주아적이라고 하면서 논리주의에 입각해서 수학의 기초를 재건하려는 램지의 생각이 철학적으로 오도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다. 반면에 램지는 끝까지 자신의 논리함수가 정말로 목적하는 바를 이룰 것인지에 대한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문제에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 논쟁은 램지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좀 더 세련된 논쟁으로 갈 가능성도 없지 않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램지를 비판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여기서 ‘이 국가’는 논리주의를 빗대어 말한 정치적 비유법이라는 점은 쉽게 간파할 수 있다.)
램지는 부르주아 철학자였다. 즉 그의 사상은 주어진 공동체 내의 것을 정도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그는 국가의 본질에 관해서는 반성하지 않았고, -또는 어쨌든 그런 일을 내켜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국가를 우리가 어떻게 이성적으로 정리하느냐에 관해서 반성하였다. 이 국가 유일하게 가능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부분적으로는 그를 불안케 하였고, 또 부분적으로는 그를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 이 국가의- 기초에 관해 반성하는 데로 이르고자 하였다. 여기에 그의 능력과 그의 본래 관심이 놓여 있었다. 반면 정말 철학적 사유는 그가 사의의 결과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를 별 내용이 없는 것으로 제쳐 놓기 까지는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천지, 1992, 44쪽.)
앞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바그너를 운명의 아이러니를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바뀌어서 나타난다고 평했던 것처럼, 램지 역시 부르주아 철학자로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비
트겐슈타인이 브라우어와 같은 직관주의 수학자를 볼셰비즘과 동일시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말 그대로 성급한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직관주의 수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평가와 비판에 대해서는 이후 관련된 논의의 장에서 다룰 것이다.
[참고문헌]
1. 레이 몽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 천재의 의무』, 문화과학사, 1998.
2. 박병철, 『비트겐슈타인』, 이룸, 2003.
3. 박만엽, 『수학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8.
4. 박영태, “논리실증주의의 인식적 의미에 관한 고찰”, 서울대 석사학위논문, 1980.
5. 비트겐슈타인, 『논고』, 이영철 옮김. 천지, 2000.
6. 비트겐슈타인, 『문화와 가치』, 이영철 옮김, 천지, 1990.
7. Barker, Wittgenstein, Frege and the Vienna Circle, Basil Blackwell, 1988.
7. Brouwer, “Consciousness, Philosophy, and Mathematics,1948 in Benacerraf and Putnam, Philosophy of Mathematics, Prentice Hall, 1964.
8. Mathieu Marion, Wittgenstein, Finitism, and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Clarendon Press·Oxford, 1988.
9. Ramsey, “Critical Notice: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by Ludwig Wittgenstein”, Mind 32, 1923.
10. Ramsey, The Foundations of Mathematics, ed. D. H. Mellor, London: Loutledge & Kegan Paul, 1978.
11. van Dalen, Brouwer’s Cambridge Lectures on Intuition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비트겐슈타인]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10, 2016년 10월, 박만엽, 서울시립대 교양교육부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