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7-04-12 13:26
도란도란(圖蘭道欄) [21]: 사람을 물처럼 쓰는 돈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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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란도란(圖蘭道欄) [21]: 사람을 물처럼 쓰는 돈

  미디어의 힘은 대단하다. 아니 몸서리쳐질 정도로 두렵다. 피가 튀고 살점이 짓이겨지는 전장의 참혹함을 게임 해설하듯 안방에 전달해준다. 안 그래도 컴퓨터 게임의 잔혹성에 넘치게 익숙해진 우리들, 전쟁은 이제 하나의 이벤트가 되어버린 듯하다. 

열을 죽이면 살인마, 천을 죽이면 영웅 

  옛날 중국에는 ‘싸우는 나라들[戰國]’이라 불린 시대가 있었다. 힘센 나라가 온갖 명분을 내세워 약소국을 병합하는 일이 다반사였던 시기였다. 수많은 전투가 나름의 명분 아래 벌어졌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맹자는 ‘의로운 전쟁[義戰]’1)은 하나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당시 사상가 중 ‘평등한 사랑[兼愛]’을 주장했던 묵자(墨子)는 더욱 강경했다. 그는 전쟁이 무감각해진 사람들을 향해 일갈했다. 그대들은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라 칭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천 사람을 죽이면 장한 일이라 역사에 기록하며 그 죄를 물을 줄 모른단 말인가!”2) 그럼에도 전쟁에 내걸린 명분만을 보면 전쟁처럼 숭고한 것은 없는 듯했다. 목숨을 바쳐 타인의 자유와 이익을 지킨다는 장엄한 명분처럼. 이름이 미화됨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십자군전쟁’, 이 얼마나 숭고한 이름이며 ‘장미전쟁’, 이보다 낭만적 이름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물론 가치중립적 이름도 있다. ‘중일(中日)전쟁’처럼 교전국 이름의 첫 글자로 조합한다든지, ‘백년전쟁’처럼 전쟁이 지속된 기간이 이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역사책에는 전쟁의 경과와 결과에 대한 건조한 서술만이 남는다. 전쟁은 필요악이라는 승자의 궤변 아래 인문의 파괴와 인간의 타락은 소거된다. 승자의 기록답게 역사는, 전쟁이 고뇌어린 선택의 결과임을 강조하며 전쟁을 선악의 대결로 몰고 간다. 전쟁의 참혹함이나 탐욕 등은 그렇게 휘발되고 이긴 쪽의 명분과 주장된 대의만이 남는다. 

  근대 유럽이 제3세계를 침략할 때도 그러했다. 근대를 거부한 제3세계 인류를 ‘문명과 이성’의 양지로 끌어내기 위해선 전쟁이 불가피했다는 논리다. 중국 역시 그렇게 끌려 나갔다. 

아편 밀수로 재정적자를 메운 영국

  17세기 무렵 유럽에서는 중국산 차와 비단, 도자기 수요가 급증했다. 특히 영국에선 평민까지 그 비싼 차를 일용품처럼 애용했다. 반면에 중국인에게는 영국 면직물이나 근대적 공산품이 필요 없었다. 전통적 자급자족 경제로도 국가운영이 그런대로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역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영국에선 당시 국제결제수단인 백은(白銀)이 계속 흘러나갔고, 중국은 유입되는 백은 덕분에 적잖은 세월 동안 국가재정이 제법 넉넉했다. 유럽은 엎친 데 겹친 격으로 나폴레옹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됐고, 영국도 전쟁을 치르느라 재정적자가 더욱 악화됐다. 뭔가 특단의 대책이 절실해졌고, 영국은 중국과의 전쟁을 선택했다. 영국은 그 전부터 악화되는 국가재정을 보전하고자 무역 역조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그 일환으로 영국동인도회사는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하여 중국으로 밀수출하기 시작했다. 아편을 매개로 중국으로 유출된 백은을 회수하고자 했음이다.
  아편은 헤로인의 원료다. 중독성 강한 마약이란 뜻이다. 이를 중국인은 이질 등에 좋은 약재로만 알고 있었다. 아편을 금기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황족부터 빈민까지, 남녀노소 막론하고 중독자가 늘어갔고 아편 밀수량도 계속 증가됐다. 아편전쟁 발발 직전인 1838년엔 전년 대비 만여 상자가 더 늘어난 4만여 상자가 유입됐다. 이는 4백만 명 이상의 중독자에게 공급할 수 있는 양이었다. 그해 아편 밀수 대금으로 2천5백 만량 어치의 백은이 유출됐다. 당시 국가 총수입이 4천8백여 만량이었으니, 절반 정도가 아편 밀수로 인해 해외로 반출된 것이다. 그러자 영국과 중국의 처지가 뒤바뀌었다. 중국은 망하지 않으려면 아편을 단속해야만 했다.

  당시 황제였던 도광제(道光帝)는 임칙서(林則徐)를 아편 밀수의 본거지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로 파견했다. 그는 내륙 지방에서 아편 단속에 빼어난 수완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상당히 깨인 인물이었다. 지식인 대부분이 서양인을 ‘서양 귀신[洋鬼]’이라 부르며 무시했을 때, 그는 영국 상인에게 신사적이고도 열린 자세로 접근하여 아편 밀무역 근절에 협조를 구했다. 그는 나라 간 무역 관련 국제법을 번역하여 참고하는가 하면,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편 밀무역 단속을 청원하는 서신을 두 차례나 보냈다. 그럼에도 영국과 서양 상인들은 그의 노력을 비웃으며 비협조적 태도로 일관했다.

  결국 임칙서는 1839년 3월 강경 대처에 나섰다. 그는 모든 외국 무역을 전면 중단시킨 후 광저우에 있던 350명의 외국인을 가택에 가두었다. 음식과 물, 생필품 반입은 허용됐지만 심리적 공포를 견디지 못한 서양 상인들은 6주 후 2만 상자 분량의 아편을 토해내고 풀려났다. 임칙서는 이렇게 압수한 아편을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3일에 걸쳐 파기했다.

돈만 되면 전쟁이든, 마약이든...

  ‘잠자는 사자’ 중국과 제국주의 영국 간 첫 무력충돌은 이렇게 빚어졌다. 당시 영국 무역 감독관 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은 영국 정부가 청조에 압력을 넣어 임칙서가 파기한 아편에 대해 금전적 보상을 받게 해달라고 강력하게 청원했다. 영국 외무상 파머스턴은 “중국 정부가 평화롭게 살고 있던 광저우의 영국 거주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곧 여왕에 대한 모욕”이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무력 개입을 천명했다. 

  미사여구로 치장된 최소한의 명분마저 동원되지 않았다. 1840년 2월, 540문의 대포와 무장 증기선 4척, 28척의 수송선, 4천 명의 병사, 이들을 위한 럼주 만 6천 갤런을 실은 16척의 함대가 광저우로 파견됐다. 찰스 엘리엇의 사촌 조지 엘리엇(George Elliot)이 이끄는 영국 함대는 그해 6월 광저우를 공략하였다가 임칙서의 방어가 녹록치 않자 다시 북상하여 주요 항구인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톈진(天津) 등지를 봉쇄했다. 다급해진 중국은 ‘서양 귀신’을 북상케 했다는 죄목을 씌워 임칙서를 파면하고 협상을 구걸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그러나 파머스턴은 협상 결과에 만족치 않았다. 그는 포틴저(H. Pottinger)를 새로운 전권 대사로 임명, 재차 북상하여 중국의 주요 강과 운하를 차단하고 문화적 고향인 난징(南京)을 포위했다. 무능하고 부패했던 중국은 서둘러 화의를 제안했고, 1842년 8월, 홍콩 할양 등 굴욕적 내용 일색의 난징조약이 양국 간에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됐다. 역사는 이때의 중국과 영국 간 무력충돌을 아편전쟁이라 명명했다.

  말이 전쟁이지 실상은 학살과 다름없었다. 영국은 월등한 화력을 앞세워 조정이 포기한 광저우 일대에서 살육의 향연을 펼쳤다. 그 살육의 역사가 전쟁이란 이름으로 합리화됐음이다. 어느 나라든 자국의 치부를 가능한 감추려 애쓴다. 중국은 1894년의 일청전쟁을 ‘갑오(甲午)전쟁’이라고 부른다. 승전국 이름을 먼저 붙이는 국제관례를 자존심상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아편전쟁이란 명칭은 확대 적용하고 있다. 1856년 애로우호 사건으로 촉발된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침략도 ‘제2차 아편전쟁’이라고 부른다. 아편전쟁이란 명칭이 영국을 위시한 서양 열강의 부도덕함을 환기하기에 적합해서 그렇다.

  그런데 영국도 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마약을 이용한 점을 반성하는 것일까. 어디까지나 순진한 추론에 불과하리라. 사실 아편은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을 뿐 직접적 원인은 백은을 둘러싼 양국 간 이해관계의 충돌이었다. 백은 확보가 전쟁의 궁극적 목표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백은전쟁’이라 명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파렴치하더라도 돈 때문에 국가의 이름으로 양민을 학살했다는 얘기만큼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하리라.

  아편전쟁이 있은 후 16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전쟁을 둘러싼 욕망은 여전하다. 전쟁의 이면에는 반드시 돈이 개입되어 있으며, 어김없이 수많은 인명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다. 죽음을 준비할, 아니 느낄 기회조차 없이 흩어지는 육신과 혼백들. 그들은 분명 총과 포탄에 목숨을 잃었지만 진짜 살인자는 전쟁이란 외피를 쓴 돈이었다. 

  우리는 “돈을 쓴다”는 표현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동서고금의 수많았던 전쟁은 “아니다”라고 말해준다. 실상은 돈이 우리네 사람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한 번 쓰고 버려도 되는 일회용품처럼 말이다.

【관련 원문과 해석】

1) 맹자가 말했다. “춘추시대 이래로 의로운 전쟁은 없었다. 다만 저쪽이 이쪽보다 나은 경우는 있었다.”(孟子曰, “春秋無義戰, 彼善於此則有之矣.”)- 󰡔맹자󰡕 「진심장구하(盡心章句下)」

2) 사람 한 명을 죽이면 불의라고 하면서 반드시 한 명을 살인한 죗값을 치르게 한다. 그들의 말처럼 따져 가면, 열 명을 죽이면 열 배 불의하므로 열 명을 죽인 죗값을 치르게 하며, 백 명을 죽이면 백 배 불의하므로 백 명을 죽인 죗값을 치르게 한다. 이런 일을 접하면 온 천하의 군자들이 다 비난할 줄 알아 불의하다고들 한다. 그런데 지금 큰 불의를 저질러 다른 나라를 공격해도 비난할 줄 모르고 오히려 이를 좇으며 명예로 여긴다. 속으로도 불의한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 말을 책에 적어 후세에까지 전한다. 그것이 불의인지를 안다면 어찌 기꺼워하며 그 불의함을 책에 적어 후세에 전하려 하겠는가?(殺一人, 謂之不義, 必有一死罪矣. 若以此說往殺十人, 十重不義, 必有十死罪矣. 殺百人百重不義, 必有百死罪矣. 當此天下之君子皆知而非之. 謂之不義 今至大爲不義. 攻國則弗知非, 從而譽之, 謂之義. 情不知其不義也, 故書其言, 以遺后世. 若知其不義也, 夫奚說書其不義, 以遺后世哉.)-󰡔묵자(墨子)󰡕 「비공상(非攻上)」.

 

* 이글은 “아편, 전쟁 그리고 돈”이란 제목으로 󰡔사과나무󰡕 2003년 5월호에 게재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5, No.4, 2017년 4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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