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황적 사고’에 대해(역자 주)

지난번에 소개했듯 국가 간의 관계가 야만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면 국가가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며 개인의 권리와 같은 것은 공허한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결국 후쿠자와가 도달한 결론이었던 걸까? 후쿠자와가 개인적 자유의 확립을 강하게 원했다는 사실과 세계가 ‘짐승’들의 다툼 상태에 있으므로 이에 대처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한 주장은 상호 모순이 아닐까?

연구자들은 오랜 기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였다. 한 가지 영향력 있는 해석이 ‘상황적 사고(situational thinking)’라는 개념을 통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해석(1)인데, 여기에는 두 가지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 하나는 후쿠자와의 사고방식이 이념적 가치를 실체에 투영하여 그것을 무조건으로 찬미하는 태도(예를 들어 구미국가를 이상화하는 등)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었으며, 여기에는 자기 관점을 ‘상대화’하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가 깔려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당시 국제관계가 위기상황에 놓여 있던 탓에 후쿠자와가 국가이상(raison d’etat)을 우선하는 마키아벨리즘을, 윤리적으로 승인할 수 없으면서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이 합쳐져 ‘상황적 사고’를 이루고 있다는 해석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후쿠자와의 이러한 사고방식이 단지 상황을 무원칙적으로 추종하는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며 그보다는 강력한 주체성 의식의 산물이라며 긍정적인 측면에서 해석한다.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의 사고방식을 특징지으며 사용한 ‘상대화’라는 용어를 적절히 설명해주는 부분으로 만하임의 다음과 같은 언술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후쿠자와 이해를 전제할 경우, 후쿠자와의 구체적인 정책론은 달라졌어도 지식인 역할에 대한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의 사상 자체에 커다란 전환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가령 ‘자연법사상과 결별하여 레종데타(raison d'État)의 입장으로 나아가는 지점에 『문명론 개략』이 위치하고 있다.’라고 마루야마는 주장한다. 나아가 마루야마는 후쿠자와에게서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유명론적인(nominalistic) 사회관(사회를 이루는 실체는 개인이며, 사회 전체의 이익이나 가치란 일종의 약속일 따름이라는 생각)’이 점차 사라지고 국가 전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국가이성(raison d'État)사상이 급속히 자라나게 되었는데, 이는 국내외 양측의 계기로 인한 변화였으며 말 그대로의 마키아벨리즘을 수반하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대략 1870년대 말이나 1880년대 초(세이난 전쟁이나 국회개설운동 등이 한창이던 무렵)에 있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런데 마루야마가 이렇게 말한 의도는 무엇일까?(4) 

확실히 후쿠자와는 『문명론 개략』에서 ‘애국심’과 ‘국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 바 있다.

이러한 발언을 읽으면 막부시대 말기와 메이지시대 초기 사이에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던 후쿠자와의 입장이 국가의 독립과 ‘일본 민심’의 일치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바뀌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마루야마 마사오의 이해에 따르면 이런 입장 변화는 시대 상황(‘국내외의 두 가지 계기’)에 의해 불가피하게 벌어진 소여의 변화에서 기인했다기보다, 후쿠자와 스스로 의식적으로 취한 결과이다. 즉 상황변화에 영향 받은 사고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후쿠자와가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 자각적인 인식을 획득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 확신이 섰음을 보여주는 문헌이 『문명론 개략』(1875)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후쿠자와는 개인을 권리 주체로 보는 입장(‘유명론적 계기’)과 국가를 국가이성을 지닌 주체로 보는 관점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는 주장이다. 

후쿠자와 사상에 대한 마루야마에 의한 이러한 평가에는 당연히 반발이 예상된다. 즉 이러한 ‘사고방식’은 마루야마가 후쿠자와의 외교론에 나타난 민족주의nationalism를 옹호하기 위해 펼친 궤변이 아닐까 하는 판단이 가능하다. 나아가 후쿠자와는 일본의 국익이 문제시될 때 개인의 자유나 평등과 같은 것은 잊어버리고 감정적으로 국가 이기주의에 빠져들 뿐인 것은 아닐까 의심하며 단죄하는 연구자도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제시한 평가, 혹은 그것이 연상시키는 후쿠자와 옹호론에 대한 비판은 토오야마 시게키, 히로타 마사키, 야스카와 주노스케 등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강한 세대에서 짙게 나타난다. 근래에는 『지지신보』에 실린 무기명 논설의 분석 연구가 진행되어 단순히 후쿠자와를 침략주의자로 보는 견해에 대해 실증적인 작업에 기초를 둔 비판이 다시 나오고 있다.(5) 

나는 후쿠자와가 민족주의라는 덫에 빠져 이성을 잃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서 어떤 전환점이 엿보인다는 것만큼은 인정한다. 세이난 전쟁이라고 불리는 사쓰마번 무사들의 내란이 일어났던 1877년경, 국가에 ‘민심수습’ 장치가 필요하며 국민의 감정적 통합 수단을 마련해 두지 않으면 국가로서 기능(예를 들면 국민의 생명 재산 보호, 자유롭고 활력있는 개인이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의 정비)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후쿠자와는 아마도 생각했을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의 6장을 참조) 즉 후쿠자와는 개개인을 단련시켜 각자 자신의 독립을 위해 합리적 수단을 선택하고 스스로 도야하는 인간으로 만들고자 하며, 국가의 대외적 독립이란 그러한 개인들의 노력이 쌓여 얻어지는 결과라고 보는 계몽 프로젝트로부터 이탈했다 할 수 있다. 후쿠자와는 국민들의 집합적 독립심이 형성되게 하려면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응고 작용을 할 인자를 투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쿠자와가 ‘민심수습’을 위해서는 황실이 정쟁에 이용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국민의 존경을 유지하게 해야 한다고 논했다는 사실은 이미 5장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그렇다면 이즈음(즉 1880년대)의 후쿠자와는 오로지 ‘민심’의 통합에만 관심을 가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가령 1885년에 정치권력에 대항하는 국민들의 자세가 갖는 의의를 설파한 논문에서는 ‘법률상에서 인권이 존재하는 장소는 인민의 영역으로서 어떠한 사정이 있는 정부에게도 털끝만한 방자함을[임의적인 간섭] 허용할 수 없다. …이를 정치의 커다란 주의로 해야 할 것이다.’(『사인처세론(士人處世論)』 (1885). 본서 제4장에서 이미 인용하였음.)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민의 ‘정치사상’을 정치권력에 쉽게 말려들지 않는 기개와 분명한 의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유사한 맥락에서 1887년의 「사권론(私權論)」이라는 논문에서는 ‘관존민비(官尊民卑)’이라는 ‘봉건문벌’의 악습이 잔존하는 한, 국회의 개설은 인민을 내려다보는 정치가들을 양산할 뿐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 (『지지신보』 1887년 10월 6일∽12일) 그러니 후쿠자와가 말하는, 양도불가한 개인의 권리에 기초를 둔 ‘민심’의 ‘수습’이 결코 정치권력에 포섭됨을 의미했던 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후쿠자와의 논의 구성 방식은 주도면밀했다. 1880년대 말 이후로 후쿠자와는 헌법과 의회가 전통적으로 바람직하다고 간주되어 온 원리와도 합치하며 따라서 일본의 국가제도에 적합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즉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온 제도적 지혜와 입헌국가제도가 서로 잘 어울리므로 일본국민의 암묵적 동의를 얻을 수 있다고 논한 것이다.

따라서 6장에서 소개했듯 후쿠자와는 도쿠가와 체제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하며,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전제’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권력주체가 다원화하고 상호간에 경쟁, 억제하는 체제였다고 강조한다. 도쿠가와 체제를 통합하는 권력은 사실 다양한 권력 주체의 ‘평균’에 있다. 국가는 중심 권력의 전제적인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동기계’와 같이 움직인다. 이것이 메이지 국가에서도 입헌국가가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한 참조 역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서양의 제도가 도입되기 전의 역사적 경험이 가져 온 정치적 효능 덕택에 권력을 둘러싼 경쟁과 상호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또한 이미 국민의 ‘자치’ 효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에도 착안해야 한다고 논하였다. 일본 역사의 상당 기간을 점하였던 ‘봉건’이 역설적으로 국민의 ‘자치’의 습관을 낳아 그것이 입헌국가제도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입헌국가는 단지 수입품이었던 것이 아니라 역사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였다는 이야기를 후쿠자와는 도입한 셈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민족주의 감정과의 관련성 속에서 나온 것이다. 자치 정신과 다원적 주체에 의한 경쟁을 유지해 왔다는 점에서 ‘일본 문명’은 ‘동양 전제’와 판이하게 다르며, 이러한 ‘권력의 평균’과 ‘자치제도 습관’을 가능하게 하는 전통이 중국이나 조선에는 결여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이쯤에 이르면 경쟁이나 자치라고 하는 ‘요소’는 일본 사회에 원래부터 잠재되어 있던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서양식 제도의 도입이 중요한 전기가 되기 했으나 이러한 새로운 제도의 도입되는 데는 원래부터 있었던 ‘요소’가 도움을 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후쿠자와는 『시사소언時事小言』(1881)에서 보여준 무사의 ‘유전’적 자질론을 이른바 ‘일본국민’ 판본으로 확대하였다. 이런 주장을 호의적으로 해석하면 일본이 ‘유전’적으로 동양적 전제의 전통과 다르니 마음 놓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쟁과 자치에 의해 운영되어 온 전통이 일본 사회에 있으니 이를 의제(fiction)로 받아들여 그것이 함의하는 바를 가지고 민족주의를 갱신해 자유로운 정치체제로 나아가며 또 그러한 정치체제에 대하여 책임있는 자세를 갖도록 노력하자는 호소로 읽을 수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후쿠자와의 ‘관점의 상대화’가 의제(fiction)에 대한 몰두(commitment)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마루야마가 말하는 ‘픽션’은 옹호할 가치를 현전시키기 위한 의제이라기보다는 눈앞의 상황에 휘둘리지 않는 냉정한 판단력을 유지하기 위해 거리를 취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러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치사상을 이해하는 데 ‘픽션’이라는 단서를 사용해도 된다면, 후쿠자와는 민족주의나 역사를 ‘픽션’으로 간주해 논의함으로써 개인의 권리나 존엄을 권력투쟁이나 권위주의, 또는 무의미한 자국중심주의로 환원해 버리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정치체제를 뒷받침하는 견고한 의지의 기초에 그것들을 두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를 시험하기 위해서 의도적이고 방법적인 계획을 실천한 독보적 사상가였다.(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