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란도란(圖蘭道欄) [20]: ‘일상’이라는 매트릭스

현실에 정녕 발을 디딜 수 있을까? 흔히 “이상은 높게, 두 발은 현실에!”라고들 하지만, 디뎌야 한다는 현실에 우리는 정말로 발을 댈 수 있는 것일까? 영화 <매트릭스(The Matrix, 1999)>를 보면 영화 속 사람들이 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세계는 ‘기계’가 만들어낸 가상공간이고, 그들의 육신은 기계가 지표면에 건설해놓은 매트릭스에 갇혀 기계에 의해 평생 관리된다.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일상

처참하게 파괴된 지구, 신체가 그 속에서 열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열기처럼 작동되는 동안, 정신은 가상공간에서 세상만사 온갖 일을 겪으며 참으로 ‘리얼’한 나날을 살아간다. 심지어 가상공간에서 살아가는 ‘신체 없는 정신’이 죽으면 진짜 현실(real world)에선 ‘자각적 의식 없는 신체’도 따라 죽는다. ‘신체 없는 정신’의 가짜 현실이 ‘자각적 의식 없는 신체’의 진짜 현실을 남김없이 지배하고 있음이다.

왠지 우리네 일상과 많이 닮은 듯싶어 씁쓸하다. 태어날 때 이미 기본사양(default)으로 주어진 일상, 우리는 국가와 사회가 짜놓은 틀 속에서 내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과 ‘수동적’으로 첫 대면한다. 그리고 자라면서 하나 둘 새로운 능력을 갖춰감에 따라 주어진 일상을 ‘능동적’으로 변주해간다. 그렇게 사람들은 주어진 일상과 만들어가는 일상 속에서 살아가고, 만들어가는 일상을 늘려감으로써 ‘자기 삶’의 면적을 넓혀가기도 한다. 어른, 곧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성인이 되어간다는 얘기다.

문제는 주어진 일상이 강화되고 획일화되어 자기 일상 창출의 여지가 급격히 줄고 있다는 점이다. 주어진 일상을 쫓아가기에 바쁜 아이들을 보라. ‘자기 일상’을 꿈꾸기는커녕 빽빽하게 주어진 일상을 쫓아가느라 허덕인다. 그러니 자기만의 일상을 설계하라는 요구는 또 하나의 부담일 뿐이다. 하여 사람들은 갈수록 자기 일상에서 소외된다. 분명 ‘나’의 일상임에도 ‘나’가 일상의 주인이란 각성의 계기는 잘 주어지지도 않고 굳이 주목하려 들지도 않는다. 영화 속 ‘신체 없는 정신’이 그랬듯이 사람들은 주어진 일상이 ‘나’의 일상이라 철석같이 믿으며 그 안에서 사는 데에 길들어간다. 주어진 일상이 시나브로 진짜 현실을 대체하고 은폐했음이다.

말은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다. 누군가가 길들여지고 있다면 어딘가에 길들이는 존재가 있는 법, 주어진 일상은 그들에 의해 설정되고 통제되며 변주된다. 그리고 그렇게 제조된 일상은 말을 통해 사람들에게 주입되고 현실로 구현된다. 언제부턴가 세계화가 운위되자 우리의 일상은 지구 차원으로 그 폭이 확대되었고,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또 소규모 사업장에서 대기업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그 등쌀에 개인이나 대학, 기업 할 것 없이 국제화해야 한다는 강박에 심신이 멍드는 것쯤은 영광의 상처쯤으로 치부됐다.

또한 함량 미달임에도 힘을 지닌 이들이 양식과 법치를 표방하며 공정한 사회를 도모하는 이들을 겨냥해 ‘종북’, ‘좌빨’이라고 규정하면, 양심이나 정의, 평화 같은 윤리들이 초라해지고 무력해진다. 적어도 수천 년 간 검증되어 온, 사람을 인간답게 만들어주고 만물의 영장으로 거듭날 수 있게 해준 인류의 값진 자산은 그렇게 힘을 잃는다. 그 틈을 타 말을 지배하는 자들은 타인의 일상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해간다. 

내 일상의 주인 되기-다르게 말하기

그래서 주어진 일상에 균열을 가해 ‘나’의 일상을 빚고자 하는 이들의 화법은 남다르다. 그들은 주류의 언어와 지배의 수사를 문제 삼으며 자각적으로 ‘자기 말’을 구사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내 글은, 우언(寓言)이 열에 아홉이고 중언(重言)이 열에 일곱이다. 치언(巵言)도 날마다 하는데, 이는 말이 자연의 실상과 부합되게끔 한 것이다. 열에 아홉인 우언은 다른 사물이나 사태에 기탁해 논한 것이다. … 열에 일곱인 중언은 사람들의 논쟁을 그치게 하려 함이다. … 치언을 날마다 함으로써 말이 자연의 실상과 부합되면, 자연을 따라 무궁해짐으로써 영원할 수 있게 된다.(『장자(莊子)』)1)

우언은 이를테면 이솝우화를 떠올리면 된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른 사물이나 사태를 들어 대신 얘기하는 방식이다. 그럼으로써 ‘나’가 한 말이지만 ‘나’로부터 거리가 생기게 한다. 그럼으로써 ‘나’ 곧 말한 이의 이해관계로 인한 간섭을 줄일 수 있게 된다. 중언은 글자 그대로는 ‘무게가 있는 말’이란 뜻이다. 현자나 유명인사의 격언이나 금언처럼 사회적으로 그 말의 가치가 공인된 말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성권위를 부정한 장자가 그런 말을 가져와 그 권위에 기대는 방식으로 썼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가 말하는 중언은 그러한 ‘사회적 무게가 상당한 말’을 다른 맥락에 놓거나 비틀어 씀으로써, 말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욕망이나 기성 가치 따위를 부정하거나 뒤집어 볼 수 있도록 활용한 말을 가리킨다. 가령 성인으로 추숭되는 공자의 말이나 일화를 가져다가 공자가 모자라거나 틀렸음을 입증하는 방식이다. 치언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라는 뜻이다. 사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으면 말이 못된다. 갓난아이가 “어버버버” 하며 소리를 내면 옹알이한다고 하지 말한다고 하지 않는다. 사람이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뜻을 파악할 수 없기에 그렇다. 곧 의사가 소통되어야 비로소 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뒤가 안 맞는 것은 말이 아니라 그냥 소리일 따름이다. 

흔히 격식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을 일러 ‘파격(破格)’이라고 한다. 파격을 있는 그대로 풀이하면 “격식을 깨뜨리다”이다. 격식을 깨뜨리면 그 결과는 당연히 격식이 아니어야 맞다. 그럼에도 격식의 한 양태로 여김은 파격이 실은 “격식을 깨뜨린 격식(破格之格)”이었기 때문이다. 치언도 그렇다. 말을 앞뒤 안 맞게 하고 만 것이 아니라 “앞뒤 안 맞게 말한 말[巵言之言]”이라는 것이다. 앞뒤 안 맞게 말을 했지만 여전히 의사소통이 가능한 온전한 말이라는 뜻이다. 이는, 예컨대 원근법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원근법의 속성을 명확하게 드러냈던 피카소의 화법(畵法) 같은 화법(話法)이다.

마찬가지로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접함으로써 앞뒤가 맞는 말이 지닌 속성을 꿰뚫어볼 수 있게 된다. 그럼으로써 앞뒤가 맞는 말에 배어 있는 화자의 이해관계와 욕망 등을 통찰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우언이나 중언, 치언은 모두 말의 투명성을 구현하려는 의식적 노력의 소산이다. 사람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의사소통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말을 안 할 수는 없음이다. 그렇다고 ‘나’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주어진 말을 그저 사용하기만 하면, 그 말을 만들어온 이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남과 대화하는 것이 되며 심지어 그 입장에서 ‘나’를 이해하게 된다. 겉으론 ‘나’가 말을 주동적으로 사용하는 모양새이지만 실질은 남이 쥐어준 말에 의해 ‘나’가 살아지는 것이 되고 만다. 노자(老子)가 자기 책 첫 대목부터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불변하는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2)고 단언한 연유도 이것이었다. 주어진 말이 절대불변의 것이 아님을 자각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아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자연, 곧 스스로 그러한 바의 참된 현실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노자와 장자는 이처럼 의식적으로 기성의 언어를 뒤틀고 희롱함으로써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주어져 있는 일상을 근본으로부터 해체하였다. 이에 사람들은 그들이 설파한 도가(道家)적 일상도 진짜 현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만 그러했음이 아니다. 실은 자기만의 학문이나 사상, 작품세계 등을 구축했던 이들은 모두 남에 의해 주어진 일상을 거부한 이들이었다. 예컨대 ‘평민을 위한, 평민의’ 사상을 펼쳐냈던 묵자(墨子)는 치자(治者)를 위한 지배의 수사학을 거부함으로써 피치자들의 일상을 제시하였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평민들에게도 그들의 일상이 있음을 알렸다. ‘다르게 한 말’이 주어진 일상이란 울타리를 깨고 진짜 ‘리얼’한 세계의 다양한 현실을 접할 수 있게 해주었음이다.

하여 말에 대해 예민해야 하고 그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남의 말이 아닌 ‘나’의 말을 할 수 있게 되어 ‘나’ 안팎의 세계 모두와 ‘나’의 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랬을 때 주어진 일상, 곧 남에 의해 주어진 말로 짜인 매트릭스를 깨고 나와 참된 현실에 발을 디딜 수 있게 된다. ‘나’가 주조해가는 참된 ‘나만의 일상’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관련 원문과 해석】

1)  내 글은, 우언(寓言)이 열에 아홉이고 중언(重言)이 열에 일곱이다. 치언(巵言)도 날마다 하는데, 이는 말이 자연의 실상과 부합되게끔 한 것이다. 열에 아홉인 우언은 다른 사물이나 사태에 기탁해 논한 것이다. … 열에 일곱인 중언은 사람들의 논쟁을 그치게 하려 함이다. … 치언을 날마다 함으로써 말이 자연의 실상과 부합되면, 자연을 따라 무궁해짐으로써 영원할 수 있게 된다.(寓言十九, 重言十七, 巵言日出, 和以天倪. 寓言十九, 藉外論之. … 重言十七, 所以已言也. … 巵言日出, 和以天倪, 因以曼衍, 所以窮年.) - 󰡔장자(莊子)󰡕 ｢잡편(雜篇)･우언(寓言)｣

2)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불변하는 도가 아니다.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음은 우주가 생성되는 최초의 순간이고, 이름이 있음은 만물을 낳아주고 길러주는 어머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 󰡔도덕경(道德經)󰡕 1장. 

* 이글은 같은 제목으로 󰡔한국교직원신문󰡕 2009년 10월 12일 자에 게재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5, No.3, 2017년 3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