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6-08 12:07
공자 다시보기(1): 공자에 앞서서-미언대의(微言大義), 그리고 대동(大同)과 소강(小康)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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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자에 앞서서 - 미언대의(微言大義), 그리고 대동(大同)과 소강(小康)

안성재(인천대 교육대학원 교수)

1-1. 미언대의(微言大義)에 관하여.

중국 역사상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라는 전대미문의 혼란기를 매듭짓고, 최초로 통일왕조를 구축한 인물은 다름 아닌 진(秦)나라의 시황제(始皇帝)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진나라를 기점으로 그 이전의 역사를 선진시대(先秦時代)라고 일컫는다.

선진시대는 중국 철학사상의 근간이 되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한 시기인데, 특히 정치적 혼란기인 춘추전국시대에 집약적으로 표출되어 서로의 사상이 더 옳다고 주장하던 시기였으므로, 이 시기를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라고도 일컫는다.

이러한 선진시대 전적(典籍)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문장들이 짧은 말 속에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는 미언대의(微言大義)의 운문(韻文)으로 씌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미언대의의 운문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분석하는 이의 주관적인 관점을 최대한 배제하는 태도 즉, 다른 관련 있는 전적들과 상호 비교하며 분석하는 객관적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길게 풀어쓰는 산문(散文)은 작가의 의도가 작품 곳곳에서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나는 반면, 의미를 응축시켜서 표현하는 운문은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자칫 오역(誤譯)의 가능성이 대단히 농후하다. 따라서 작품의 본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3요소를 먼저 조사해야 하니, 우선 작가가 누구인지 파악해야 하고, 다음으로는 작가가 활동한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작가가 집필 당시 염두에 둔 상황(사건)을 이해해야 한다. 가령 예를 들어서, 필자가 가수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를 단순히 “그 사람 나만 볼 수 있어요. 내 눈에만 보여요.”라는 가사 일부로만 임의로 해석하여, 이를 자기 눈에만 귀신이 보인다고 고충을 토로하는 섬뜩한 노래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또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작품을 단순히 문맥상의 의미로만 임의로 해석하여, 이를 은퇴한 직장인이 귀농하려고 퇴직금을 모두 들여 땅을 샀다가, 사기를 당해서 빼앗긴 아픔을 노래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 3요소는 필자가 [논어]를 위시로 하는 공자의 사상을 분석할 때 제일 중시한 점이기도 하다. 다행히 공자의 사상은 [논어] 외에도 다양한 전적들을 통해서 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기회가 될 때마다 [시경(詩經)] [상서(尙書)] [예기(禮記)] [춘추좌전(春秋左傳)] [국어(國語)] [사기(史記)] [십팔사략(十八史略)] 등에 나타난 공자의 사상과 관련된 문구들을 제시해 가면서 서술하고자 한다.

공자는 [논어]에서 “서술하지만 창작하지 않고, 믿어서 옛 것을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객관적인 사실만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확실하지 않은 것은 임의로 지어내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필자 역시 감히 그러한 자세를 배워서 개인의 주관적인 생각은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하며, 객관적인 사실(史實)을 위주로 하여서 공자 사상의 궁극이 무엇인지를 풀어보고자 한다.

1-2. 대동(大同)과 소강(小康)에 대하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한 길을 걸어왔겠지만, 특히 중국의 고대역사는 크게 대동(大同)과 소강(小康) 그리고 혼란기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동(大同)과 소강(小康)의 개념을 명확하게 파악해야만이 공자의 궁극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동(大同)과 소강(小康)은 과연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대동제(大同祭)”나 “대동단결(大同團結)” 혹은 “소강상태(小康狀態)”나 “소강국면(小康局面)”에 접어들었다는 표현을 쓰고는 한다. 중국에서는 덩샤오핑(鄧小平) 전 주석이 3단계 발전론을 제시한 이래, “대동”과 “소강”은 중국 사회의 발전 과정을 대변하는 상징어로 자리를 잡았는데, 1단계는 국민들이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 “원바오(溫飽) 단계”, 2단계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기반으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소강”을 말하며, 3단계는 만인이 평등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 건설의 완성 즉 “대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러한 “대동”과 “소강”은 본디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이는 [예기]의 <예운(禮運)>편에 기록된 공자와 그의 제자 자유(子游)의 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자의 제자 자유 (표지그림 참조)
출처: http://blog.daum.net/sixgardn/15770370

예전에 공자가 납빈 즉 신들의 가호에 보답하기 위해 올리던 제사에 참여했다. 일이 끝나고 누각에 올라 둘러보고는 길게 탄식을 하였는데, 공자가 탄식한 것은 아마도 노나라를 한탄한 것이리라. 자유가 곁에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말했다. “스승께서는 어찌하여 탄식하십니까?” 이에 공자가 말했다. “큰 도가 실행될 때와 하(夏) 상(商) 주(周) 삼대의 훌륭한 인물들이 정치를 하던 때는, 내가 그 시절에 미칠 수는 없으나 기록이 남아있어 알 수 있다. 큰 도(大道)가 실행되던 때는, 세상이 공천하(公天下)였으니, 어질고 재능 있는 이들을 선발하고, 신용을 중시하며 화목함을 갖췄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버이만이 어버이가 아니었고, 자신의 자식만이 자식이 아니었다. 또한 노인들로 하여금 귀속되는 바가 있게 하였고, 장년은 쓰임이 있었으며, 어린이들은 키워짐이 있었고, 늙어 부인이 없는 이, 늙어 남편이 없는 아낙, 부모 없는 아이, 자식이 없는 노인, 장애인들이 모두 부양받는 바가 있었다. 사내에게는 그에 적합한 직분이 있었고, 아낙은 시부모님이 계시는 시가가 있었다. 재물은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하였으니 지니고 싶어 하였지만 반드시 자기가 소유하지는 않았고, 힘은 자기 몸에서 나오지 않음을 싫어하여 자신이 직접 힘을 쓰려고 하였지만, 꼭 자신을 위해서만 힘쓰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계략과 술수가 막혀 일어나지 못하고, 도적이나 반란이 발생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밖의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이를 대동이라고 일컫는다.

오늘날에는 큰 도가 사라졌으니, 세상이 가천하(家天下)가 되었다. 각각 자신의 어버이만이 어버이가 되고, 자신의 자식만이 자식이 되었으며, 재물과 힘은 자신을 위해 썼다. 천자와 제후들은 세습하는 것을 예의로 여겼고, 성곽을 쌓고 그 주변에 못을 파서 공고히 함으로써 적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예의로 기강을 삼았으니, 그럼으로써 군신관계를 바로 하고, 부자관계를 돈독히 하였으며, 형제간에 화목하게 하고, 부부 사이를 조화롭게 하였다. 또한 제도를 설치하고, 밭을 구획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용감하고 지혜로운 자를 존중하고, 자기가 세운 업적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권모술수가 이때부터 흥기하고, 전쟁이 이때부터 발생하였다. 하(夏)나라 우(禹)임금과 상(商)나라 탕(湯)임금,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성왕(成王) 그리고 주공(周公)은 이러한 예의로 시비를 구별하였다. 이 여섯 군자들은 예의에 삼가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그럼으로써 그 의로움을 분명히 하고, 그 신의를 깊이 헤아렸으며, 허물을 드러내고, 형벌과 어질음을 꾀하고 꾸짖어, 백성들에게 항상 그러함을 보여주었다. 만약 이를 따르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권세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물리쳐 대중들이 재앙으로 삼았다. 이를 일컬어 소강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대동사회라 함은 중국역사의 시작인 삼황오제(三皇五帝) 즉 복희씨(伏羲氏)와 여와씨(女媧氏) 그리고 신농씨(神農氏)의 삼황과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제요(帝堯), 제순(帝舜)의 오제가 통치하던 시기를 일컫는데, 이때는 인재를 선발하여 넘겨주는 선양제(禪讓制)를 통해 왕위를 계승했다.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司馬遷)은 이 중에서 “삼황”의 존재를 전설로 보아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에 대해서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오제”로부터 역사를 기술하게 되는데, 일설에 따르면 복희씨는 팔괘(八卦)라는 문자를 만든 인물로 중화민족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고, 여와씨는 복희씨의 여동생으로 새끼줄에 진흙을 묻혀 땅에 뿌리자 그 진흙 방울들이 사람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 복희씨와 여와씨는 암수 한 몸으로 용 혹은 뱀의 하반신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따라서 중국인들은 복희씨와 여와씨를 함께 중화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복희씨와 여와씨


이 그림을 통해서 복희씨와 여와씨는 아마도 용 혹은 뱀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족장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막연하게나마 상고(上古)시대에 이미 생명이란 반드시 남녀 한 쌍을 통해서 잉태된다는 과학적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신농씨


또한 신농씨는 농업을 최초로 보급한 인물로 알려졌는데, 그는 온갖 식물을 직접 먹어보아서 먹어도 되는 것과 먹어서는 안 될 것을 구별했기 때문에, 그 독성으로 인해 외모가 일그러진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으니, 위의 그림처럼 꼭 도깨비처럼 생긴 신농씨가 어떻게 백성들을 이끄는 임금으로 추대될 수 있었냐는 것이다.

신농씨는 그가 먹어왔던 식물들의 독성으로 인해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고 또 그로 인해서 외모가 일그러졌지만, 사람들은 그의 희생 덕분에 어떤 식물을 먹을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곡물을 심어서 재배해야 할지를 알 수 있었다. 즉 백성들의 윤택한 삶을 위해서 자기 한 몸을 희생한 신농씨에게, 어느 누가 그를 못생겼다고 아니 도깨비처럼 생겼다고 무서워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오히려 그를 보면 진심으로 자기의 지도자로 섬기고 따르려고 하는 마음이 우러나지 않겠는가?

여기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당시의 대동사회에서는 바로 “선양제”라는 것을 통해서 지도자를 선출했다는 점인데, 이와 관련하여서는 먼저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의 태평성대를 이룬 요순(堯舜) 임금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임금이 말했다. “아, 사악(四嶽)이여! 짐이 재위한 지 이미 70년인데, 그대는 천명을 변치 않게 할 수 있으니 짐의 자리에 오르시오.” 이에 사악이 대답했다. “덕이 낮아 임금 자리를 욕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자 요임금이 말했다. “귀족이거나 관계가 먼 사람 숨어 사는 사람 모두를 천거해 주시오.” 이에 모두가 요임금에게 말했다. “민간에 홀아비가 있는데, 순이라 합니다.” 요임금이 말했다: “그러한가, 짐은 그에 대해 들었소. 그는 어떠하오?” 사악이 말했다: “장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완고하고 어머니는 간사하며 동생은 교만하지만, 능히 온화하게 부모님을 섬기고 나아가 수양하니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요가 말했다. “내가 그를 시험해보겠소.” 이에 요는 두 딸을 그에게 시집보내어, 두 딸에게서 그의 덕을 살폈다. 순이 역산(曆山)에서 농사를 짓자 사람들이 모두 밭을 양보했고, 뇌택(雷澤)에서 낚시를 하자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양보하였으며, 황하 가에서 그릇을 구우니 그릇이 모두 이지러지지 않았다. 1년이 되자 머무르는 곳이 무리를 이루었고, 2년이 되자 고을을 이루었으며, 3년이 되자 도시를 이뤘다.

요임금은 성스럽다고 여겨서, 순을 불러 말했다. “그대는 일을 도모하여 완성했고, 자신이 공언한대로 이룬지 3년이 되었다. 그대가 제위에 오르라.” 이에 순은 덕을 쌓지 못했다며 사양했다. 하지만 요임금은 아들 단주가 못나고 어리석어 세상을 넘겨주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정권을 순에게 주었다. 순에게 주면 곧 세상이 이로움을 얻고 아들 단주가 원망을 하지만, 단주에게 주면 곧 세상이 원망하고 단주 혼자만이 이로움을 얻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에 요임금이 말했다. “결국에는 세상이 원망함으로써 한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없다”, 그러고는 마침내 세상을 순에게 주었다. 요임금이 죽고 3년상이 끝나자, 순은 단주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남하(南河)의 남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제후 중에 조정에 알현하는 이들이 단주에게 가지 않고 순에게 갔고, 소송을 하는 이들이 단주에게 가지 않고 순에게 갔으며, 칭송하는 이들이 단주를 칭송하지 않고 순을 칭송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순이 “운명이로다!”라고 말하고, 중원으로 돌아가 천자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가 순임금이다.

소위 대동사회의 “선양제”란 이처럼 무조건적으로 왕위를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인재를 추천받아 그의 자질과 능력을 충분히 검증해 본 후에 물려주는 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바라보면, 오늘날의 중국 주석제(主席制)는 “선양제”와 닮은 구석이 있다. 행정적 자질을 끊임이 없이 검증하고, 그러한 다년간의 경험과 업적을 근거로 국가를 이끄는 주석으로 선출하는 중국 체제의 현주소는, 분명 “선양제”를 막연하게나마 배워나가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이와 별개로,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인 진나라의 시황제가 자신의 업적을 이와 같은 삼황오제와 견줄 만하다고 여겨, 스스로에게 “삼황”의 “황”과 “오제”의 “제”를 합친 “황제(皇帝)”의 호칭을 최초로 사용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에 제순(帝舜) 즉 순(舜)임금에게서 왕위를 선양받은 우(禹)임금 이후로는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세습제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소강사회의 시작이다.

아들 계가 어질어, 능히 우임금의 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우임금이 일찍이 익을 하늘에 천거했는데, 노래를 하는 사람과 조정에 알현하러 오는 이들이 익에게 가지 않고 계에게로 가서 말했다. “우리 임금의 아들이다.” 이에 계가 마침내 임금이 되었다. [십팔사략] <하왕조편(夏王朝篇)>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세습제”의 시작은 우임금의 의도가 아니었으니, 이 역시 당시의 분위기상 피할 수 없었던 숙명이나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위에서 소개한 바 있는 대동과 소강의 개념에서, 다음의 밑줄 친 부분을 다시 한 번 살펴 보기로 하자.

하(夏)나라 우(禹)임금과 상(商)나라 탕(湯)임금, 주(周)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성왕(成王) 그리고 주공(周公)은 이러한 예의로 시비를 구별하였다. 이 여섯 군자들은 예의에 삼가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그럼으로써 그 의로움을 분명히 하고, 그 신의를 깊이 헤아렸으며, 허물을 드러내고, 형벌과 어질음을 꾀하고 꾸짖어, 백성들에게 항상 그러함을 보여주었다.

즉 소강이란 지도자가 예(禮)와 의(義) 그리고 신(信)으로 솔선수범을 보이고, 그렇지 못하면 형벌(刑)과 어질음(仁)으로 통제한 사회를 뜻하니, 다음 장부터는 이를 바탕으로 공자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하나하나 설명하고자 한다.

* 이 저술을 인터넷과 카카오페이지에 게재할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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