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나 한가위 연휴에 공항이 해외 여행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풍경은 더는 낯설지 않다. 2, 3일이라도 틈을 내기 어려운 직장인들이 캠핑장에서 나들이 하는 모습도 꽤나 익숙하다. 사계절을 불문하고 신문 방송에서는 가볼 만한 곳을 꼬박꼬박 챙겨준다. 어느덧 이 모든 것이 일상이 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돌리는 인간
그런데 이렇게 가고 싶은 곳을 마음 편히 다닐 수 있게 된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다. 기차니 증기선이니 하는 근대적 교통수단이 널리 보급됐던 근대시기에도 길을 떠난다는 것은 여간 큰일이 아니었다.
이른바 안전도 문제이거니와 낯설고 잘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모험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전근대 시절에는 길 떠날 일이 있으면 아예 길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떠나기도 했다. 익히 알고 있는 상수보다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변수가 많기에 신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차라리 마음 편했던 것이다.
옛날 춘추전국시대 제(齊)나라에 임금보다 더한 세력을 지닌 전(田) 씨 집안이 있었다. 하루는 전 씨가 길 떠날 일이 생겼다. 늘 그랬듯이 길 떠나기에 앞서 길의 신[道神]에게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다. 세도가가 제사를 지낸다고 하니 그의 눈도장을 받고 싶은 이들이 꾸역꾸역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차례가 되자 하나씩 나와 제단에 준비한 제물을 바치면서 전 씨의 안전을 빌었다. 그때 누군가가 물고기와 거위를 바쳤다. 이들은 지금 보자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었지만 당시로서는 무척 진귀한 음식물이었다.
이를 본 전 씨는 크게 감탄하며, “하늘이 은혜가 참으로 후하구나! 우리더러 먹으라고 오곡을 번식케 하고, 물고기와 새를 자라게 하는구나”며 기꺼워했다. 식객들은 여기저기서 뒤질세라 맞장구를 쳐댔다. 그때 좌중에는 아버지 대신 나와 있던 12살 난 포(鮑) 씨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전 씨의 말에 딴죽을 걸며 나섰다. “나리의 말씀은 틀립니다. 모기는 사람의 피부를 물고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모기와 호랑이를 위해서 사람을 만들었겠습니까?” 사람 중심으로 동식물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이 오류이듯, 자기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역시 큰 잘못임을 통렬히 비판했던 것이다.
‘오랑캐’를 둘러싼 명명의 정치학
그럼에도 사람이 힘을 지니게 되면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인 듯하다. 이른바 ‘오랑캐’를 둘러싼 정치학만 봐도 그렇다. 이런 일이 있었다. 1840년대 후반, 중국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당시 천하의 중심을 자처했던 청 제국은 영국과 벌인 일전에서 참패하여 체면을 엄청 구기고 있었다. 그때 조정 대신이었던 서계여(徐繼畬)가 영환지략(瀛環志略)이란 책을 펴냈다. 서구를 공부해보자는 취지로 간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서계여는 이 책으로 인해 결국 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야만시하던 서구를 배우자고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그가 ‘England’를 ‘영길리(英吉利)’로 옮겼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서양인은 금수 축에도 끼지 못하는, ‘서양 귀신[洋鬼]’이라고 불렸다. 잘해야 ‘서양 오랑캐[洋夷]’ 정도로 불리던 처지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계여가 ‘서양 귀신’의 나라를 영(英)이나 길(吉), 리(利)와 같은 좋은 뜻의 글자로 표현했다. 그러니 당연히 수구파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인은 사방의 이민족을 칭할 때면, 반드시 안 좋은 뜻의 글자를 썼다. 동쪽의 오랑캐를 지시하던 이(夷)는 앉아 있는 사람의 몸을 뱀이 칭칭 감싼 형상 또는 나무에 묶인 포로 형상이었다. 어느 경우든 어엿한 인간으로 설정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북쪽 오랑캐를 가리키는 적(狄)이나 남방 오랑캐를 의미했던 만(蠻)에 들어 있는 犭(견)이나 虫(충)은 모두 짐승을 뜻한다. 서쪽 오랑캐를 뜻하는 융(戎) 또한 사납다, 흉포하다는 뜻으로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니다. 한 마디로 인간다운 인간들이 아니라는 소리다. “너희들은 인간 축에도 못 끼니까 우리의 말을 들어야 한다!” 힘 있는 중국인의 자기중심적 눈에 주변의 족속이 ‘비인간’이나 동물 무리로 비쳐졌던 셈이고, 현실적으로 저들을 이길 수 없었던 ‘오랑캐’들은 그런 비하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중국인들만 그러했음은 아니다. 자신들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주변의 이민족을 오랑캐라 부르며 금수와 동격으로 본 사례는 우리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고구려가 대표적 예이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에는 백제가 백잔(百殘)으로 표기되어 있다. 잔(殘)은 해치다 혹은 죽이다라는 뜻으로 그리 좋은 어감은 아니다. 또한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를 ‘동이(東夷)’로 지칭한 대목이 나온다.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고 신라나 백제, 왜(倭) 등은 주변의 오랑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듯 이름은 단순한 언어 행위가 아니라 작명되는 시점의 제반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지극히 정치적 행위였다.
‘오랑캐’를 둘러싼 명명의 정치학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 ｢구약성경․창세기 2장 19, 20절｣(개역개정판)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육안으로 볼 수 없었던 아담은 자신과 우연히 조우한 동물에게 이름을 붙여준다. 물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싶어 모든 동물을 아담 앞으로 끌고 가신 것이다. 그러나 사정이 원래 어떻든 간에 아담은 자신의 능력 안에서 자기 의지대로 이름을 붙였고, 그것이 각 동물의 이름으로 확정되었다. 동물은 이렇게 인간의 관점에서 그 존재 가치와 의의가 부여되며 아담(곧 인간)의 중심이 된 에덴동산(곧 인간세계)의 구성원으로서 거듭났다. 약자의 입장에서는 강자가 부여하는 이름을 받아들여야만 그 세계의 어엿한 일원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질서를 바꾸고자 할 때 이름을 바꾸는 데서 첫걸음을 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쓰던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이름이 깔고 앉아 있는 권력 관계를 부정하거나 그것으로부터 탈피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구한말의 선각자들이 중국 사신을 영접했던 ‘영은문(迎恩門)’을 ‘독립문’이라 개명한 것도, 또 근자의 진보적 운동가들이 아빠와 엄마의 성을 동시에 표기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영은문’이 단순히 “천자의 은혜로운 사절단을 맞이하다”는 뜻의 부호가 아니라 그 저변의 사대주의적 권력 관계를 환기하기 것이고, 또 성(姓)이 단순히 가문을 구별해주는 표지가 아니라 그 저변의 남성 중심적 권력 관계를 표상하는 것이기에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단지 문자의 조합을 바꾼다는 것 이상의 의미와 효과를 지니게 된다.
몇 해 전에 성황리에 방영됐던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TV 드라마가 있었다. 주인공인 김삼순은 연애 전선이 자꾸 꼬이자 그 궁극적 원인을 이름의 천박함에서 찾는다. 그러고는 ‘김희진’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자 하고, 개명과 동시에 더는 사랑에 연연해하지 않고 꿋꿋하게 제 갈 길을 가고자 한다. 그러나 주인공의 이러한 ‘희진’으로의 변화 시도는 결국 재력이 크고 멋지기까지 한 ‘삼식이’로 인해 번번이 좌절되었고, 결국 주인공은 다시 ‘삼순이’로 회귀하고 만다.
언뜻 보면 진정 원하는 이와의 사랑을 이루었으니 해피엔딩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름의 정치학’에서 보자면 이는 여성의 자기 독립을 향한 야무진 행보가 이렇게 ‘돈 있고 잘 생긴’, 그래서 ‘힘을 지닌’ 남성으로 인해 다시 남성의 지배 질서 밑으로 수렴되고 마는 비극에 다름없다. 사회적 약자가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이처럼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단순히 게임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사소한 몸짓에 그치지 않는다.
* 이글은 <삼순이와 삼식이―명명의 정치학>라는 제목으로 『사과나무』 2006년 9월호에 게재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12, 2016년 12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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