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매일 습관처럼 밥을 먹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살기 위해서이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으려 하는 것, 이것은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국시대의 고자(告子)는 성욕과 더불어 식욕을 사람이 지닌 본성(孟子 「告子上」)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식욕은 사람만이 지닌 것이 아니다. 생명을 지닌 것들은 모두 이 식욕을 지니고 있다. 소 역시 살기 위해 풀을 뜯고, 나무 역시 살기 위해 토양과 공기 중의 각종 영양분을 흡수한다. 나아가 토양과 공기 그 자체는 생명체가 아니지만, 그 속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것들도 넓은 의미에서 무엇인가를 먹는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최시형은 “어찌 사람만이 입고 사람만이 먹겠는가? 해도 또한 입고 입으며, 달도 또한 먹고 먹는다”(<海月神師法說> 「天地父母」)라고 했다.
이렇게 ‘먹음’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중차대한 사건임에도 전통철학에서 그것은 주로 윤리적 차원에서 적절히 절제되어야 하는 욕망 정도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예컨대 인간본성의 문제를 놓고 고자와 논쟁했던 맹자는 욕망이 도덕성과 대립되는 측면에 주목하여 도덕적인 “마음을 기르는 데 욕심을 줄이는 것 만한 것은 없다”(<孟子> 「盡心下」)고 했다. 또 이러한 사유를 계승한 성리학자들 중 대표주자인 주자 역시 “만일 굶주려 먹고자 하고 목말라 마시고자 한다면, 이러한 욕구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朱子語類 권94)라고 하여 생존을 위한 욕구는 긍정하면서도, “먹고 마시는 것은 천리요, 맛있는 것을 찾는 것은 인욕이다”(<朱子語類> 권13)라고 하여 즐기려는 욕망은 최대한 억제할 것을 주장했다. 이렇게 먹음을 욕구·욕망으로 간주해 과도한 욕망 추구는 경계해야 한다는 전통 철학자들의 생각은 먹음의 자기중심적·자기 확장적 성격을 간파해 생명의 무고한 살상과 참 자아의 상실을 엄정한 도덕의식으로 막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나’와 ‘밥’의 관계를 단지 욕망의 주체와 절제되어야 할 욕망의 대상이라는 소극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보아 ‘밥’이 ‘나’에게 갖는 신성성과 ‘내’가 ‘밥’에 대해 가져야 할 섬김의 윤리의식을 간과했다는 점에서는 한계를 갖는다. 최시형은 먹음에 대한 종교생태학적 사유를 통해 전통철학이 갖고 있던 이러한 한계를 새롭게 돌파해내었다.
2.
전통철학에서 먹음이 형이하학적인 문제로 치부되어 철학적으로 깊이 사유되지 못하고 기껏해야 절제되어야 할 욕망으로 취급되었던 데 반해, 최시형은 ‘먹음’에 크나큰 의미를 부여한다.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 먹는 데 있다.” (「天地父母」) 밥 한 그릇 먹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에서 어떻게 이 세상의 가장 근본적인 이치가 알려진다는 것일까? 밥 한 그릇이 밥상 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에 참여한 생명들을 생각해보면 이 말의 뜻을 쉽게 알 수 있다. 우선 수많은 사람의 생명력이 노동력으로 전환되어 한 톨의 밥알 안에 응축되어 있다. 1년 내내 농사를 지은 농부를 비롯해 정미소의 노동자·쌀을 운반한 운송업자·쌀을 판매한 상인·손수 밥을 지어준 어머니 등의 피땀이 서려 있다. 또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자연의 생명력 또한 담겨 있다. 1년 내내 농부와 협력하여 벼를 키우는 데에는 햇빛·물·공기·바람 등의 무기질뿐만 아니라 토양 속 미생물들도 참여했다. 정미소의 기계, 운송업자의 운송수단, 밥을 짓는 데 쓰인 도구 등은 어디에서 왔는가? 어느 것 하나 자연의 운동과 인간의 노동의 결합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추론해보면 한 톨의 밥알 안에는 무수히 많은 자연과 인간의 힘이 응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밥 한 그릇 안에는 무수히 많은 생명이 응축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밥을 먹는다는 것은 수많은 자연의 생명운동과 수많은 인간의 노동이 결합된 결과물을 먹는 것이다. 그런데 동학의 종교적 언어로 이는 모든 자연물이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는 것(以天食天)’이 된다. 이 명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최시형의 설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항상 자연물마다 하늘이요, 일마다 하늘이라고 했는데, 만약 이 이치를 시인한다면 모든 자연물이 다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는 것이 아님이 없을 것이다. 하늘로써 하늘을 먹인다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보는 말이다. (「以天食天」)
일찍이 최제우는 모든 사람이 다 하늘님을 모신 존귀한 존재라고 선언했다. 최시형은 최제우의 이 가르침을 자연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해 모든 생명이 다 하늘님을 모신 존재임을 강조했다. 최제우가 하늘님은 자연의 영역에 기화(氣化)의 형태로도 존재한다고 했던 것이 그렇게 확장할 수 있었던 논리적 근거이다. 하늘님은 자연의 영역 안에서 생명양육의 운동을 한다. 그 운동을 통해 하늘님 자신의 기운이 자연물 속에 투여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자연물은 곧 하늘이고,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늘의 일이다. 문제는 이 동학의 가르침을 인정한다면, 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먹고 먹힘의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먹는 자도 먹히는 자도 하늘님의 생명이 깃든 ‘임’일진대, 존귀한 ‘임’을 먹는 행위는 어떻게 또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근대인은 자연을 약육강식의 질서로 이해한다. 사람은 쇠고기를 먹고, 소는 풀을 뜯으며, 풀은 토양 속의 생명을 먹는다. 이런 약육강식적인 질서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강자가 욕구‧욕망의 주체로서 욕구‧욕망의 대상인 약자를 먹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최시형은 이런 근대인의 상식을 오히려 편견이라 하면서 ‘내’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밥’이 ‘임’으로써 또 다른 ‘임’인 ‘나’를 먹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근대인의 상식에 대한 이런 전복된 해석은 이어지는 아래 설명에서 구체화된다.
만일 하늘 전체로 본다고 하면 하늘이 하늘 전체를 키우기 위하여 동질이 된 자는 상호 부조로써 서로 기화를 이루게 하고, 이질이 된 자는 하늘로써 하늘을 먹임으로써 서로 기화를 통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한편으로는 동질적 기화로 종속을 기르게 하고 한편으로는 이질적 기화로 종속과 종속의 연대적 성장발전을 도모하는 것이다. (「以天食天」)
장자에는 “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에는 귀천이 없지만, 사물의 관점에 보면 자신은 귀하고 상대방은 천하다”(「秋收」)고 하여 주체-객체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도(道), 즉 생명의 관점에서 만물을 평등하게 바라볼 것이 제안되어 있는데, 최시형이 말하는 ‘하늘 전체’로 보는 시각이란 ‘도의 관점’으로 보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사람이 쇠고기를 먹고 소가 풀을 뜯는다는 인식은 먹는 주체와 먹히는 객체의 구분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으로는 자연 전체에서 일어나는 생명운동의 총체적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다. 반드시 하늘 전체의 시각, 생명운동의 총체적인 관점에서 먹고 먹히는 현상의 의미가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최시형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최시형은 모든 자연운동이 ‘하늘 전체를 키우기 위한’ 하나의 목적에 귀속된다고 한다. 현대어로는 모든 자연운동이 자연 전체의 진화라는 하나의 목적을 지향한다고 풀어 설명할 수도 있겠다. 이런 자연운동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하나가 동종 간에 이루어지는 협동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이종 간에 진행되는 먹고 먹히는 운동이다. 동종 간, 예컨대 소끼리 먹고 먹히는 일이 일어난다면 생태계는 교란되며, 인간사회 역시 그런 이유에서 살인을 중대한 범죄로 규정한다. 동종 간에는 상호 부조가 그 관계의 본질이어야 한다. 반면 이종 간에는 먹고 먹히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소는 풀을 뜯고 풀은 토양 속 생명을 흡수한다. 현상적으로만 보면 분명히 약육강식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거꾸로 설명될 수도 있다. 풀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소는 풀을 뜯을 수 없다. 풀이라는 ‘임’이 자신의 생명으로 소라는 다른 ‘임’을 먹이기 때문에 소는 살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사람을 먹이고, 흙 속의 미생물도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풀을 먹인다. 이렇게 국부적으로 관찰되는 약육강식의 질서 또한 자연 전체의 시각에서 보면 이종 간의 ‘연대적 성장발전’, 즉 자연 전체의 공생과 공영의 목적에 귀속되는 것이 된다.
3.
모든 자연물이 ‘하늘로써 하늘을 먹인다’는 최시형의 명제는 근대인의 약육강식적인 자연 이해를 국부적 질서에 대한 인식으로 위치 지우고 자연 전체의 질서는 연대와 협력을 기반으로 한 커다란 조화를 지향함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최시형의 생각이 동양 전통 자연관으로의 단순한 회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전통 자연관에는 극히 박약한 희생하는 자연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고, 이로부터 하늘님의 자기희생이라는 의미까지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로써 하늘을 먹임’에 대해 논하는 단락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이런 의미를 분석해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는 것은 곧 하늘의 기화작용으로 볼 수 있다. 최제우 선생님께서 모실 시(侍) 자의 뜻을 해석하실 때 ‘안에 신령이 있다’고 함은 하늘을 이름이고, ‘밖에 기화가 있다’고 함은 하늘로써 하늘을 먹임을 말한 것이니, 지극히 오묘한 천지의 묘법이 모두 기화에 있다. (「以天食天」)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질서 속에서 약자들은 희생당하며, 그런 희생 덕분에 강자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는 ‘임’이 또 다른 ‘임’을 먹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결코 아무 제한 없이 마구 먹어도 됨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하늘 전체’의 시각에서 보면 약자의 희생은 인간에 대한 자연 전체의 희생이고, 궁극적으로는 신의 자기희생이기 때문이다. ‘하늘로써 하늘을 먹이는 것’은 국부적인 현상으로 보면 어떤 개별적인 약자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강자를 살리는 것이지만, 자연 전체로 보면 그것은 자연 전체가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있는 인간에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어 인간을 살리는 것이다. 인간은 그러한 자연의 희생 덕분에 문명을 형성하고 부단히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동학에서 그러한 자연의 희생은 궁극적으로는 하늘님 자신의 희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늘님은 자연 안에 기화(氣化)의 형태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의 하늘님은 자연 안에서 생명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 모든 생명을 먹여 살린다. 전 편에서 자세히 설명한 어머니-자연의 모습으로 말이다.
기독교나 불교처럼 동학 역시 식사를 하기 전에 신도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했는데, 최시형은 이를 식고(食告)라 했다. 식고란 ‘나’를 살리기 위해 자연 안에서 부단히 자기 생명을 내어주는 하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의례이다. 그런데 이는 초월적 하늘님에 대한 감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동시에 희생하는 자연에 대한 감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은 자연의 희생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의미에서 생명에 대한 보호와 경외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자연 안에 천주의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알면 자연을 함부로 훼손할 수 없음 또한 알게 된다는 다음 발언이 그렇다. “만물이 천주를 모시지 않음이 없으니, 이 이치를 알 수 있다면 살생은 금하지 않아도 자연히 금해질 것이다. 제비의 알이 깨지지 않은 후에야 봉황이 와서 거동하고, 초목의 싹이 꺾이지 않은 후에야 산림이 무성해질 것이다. 손수 꽃가지를 꺾으면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고, 폐물을 버리면 부자가 될 수 없다. 날짐승 3천도 각기 그 종류가 있고, 털벌레 3천도 각기 그 목숨이 있으니, 자연물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치리라.”(「待人接物」) 하늘님에 대한 ‘마음의 기도’가 몸으로 지내는 ‘산 제사’로 이어지는 대목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1, 2015년 1월, 황종원, 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