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 사상노트/고전 다시보기 > [러시아 문학노트] 우연과 필연: 푸슈킨의 <눈보라>

작성일 : 15-04-05 18:00

[러시아 문학노트] 우연과 필연: 푸슈킨의 <눈보라>

글쓴이 : 아포리아

[러시아 문학노트] 우연과 필연: 푸슈킨의 ｢눈보라｣

1. 러시아의 幻影, 눈보라...

지난해 겨울이 시작될 무렵에는 유난히 눈이 자주, 많이 내렸습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겨울이 매섭고 차가운 건조한 바람만이 부는 계절이 되었는데, 지난 겨울에는 종강 무렵에 눈이 몇 차례나 소복이 와서 쌓이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창문 너머로 눈이 쌓인 풍경을 보면 저는 언제나 러시아에서 보낸 겨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러시아에서는 겨울 내내 눈이 내리고 눈이 거리에 쌓여 있으니까요.

제가 러시아에서 공부하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많은 분들이 제게 묻는 또 다른 질문은 춥지 않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질문에 웃음이 나는 이유는, 우선 당연한 것을 물으시는 것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사실은 러시아의 추위를 만만히 보고, 그것도 먼저 와 있던 후배의 충고를 귓등으로 듣고 있다가, 갑자기 영하 18도로 떨어진 날씨에 된통 혼이 난 기억이 있어서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겨울이 오면 우선 창문 틈새를 문풍지나 솜 등으로 꼭꼭 틀어막습니다. 문틈으로 새어들어오는 외풍을 러시아어로 “스크보즈냐크”(сквозняк)라고 하는데, 옮기자면 “틈새바람” 정도의 뜻입니다. 대개 하숙집 할머니 같은 분들은 겨울에 제일 무서운 것이 “스크보즈냐크”라고 하면서 유학생들에게 월동준비를 단단히 시키기도 합니다. 러시아의 겨울이 워낙 추워서, 대개 유학생들은 겨울방학에는 특히 한국에 돌아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추운 것보다도 어두운 것이 만만치 않게 괴롭습니다, 오전 10시나 되어야 희끄무레하게 날이 밝아졌다가 오후 3시 반 정도만 되면 이제 그만 집에 가라는 듯 금새 그 희뿌연 빛마저 사라지고 어두컴컴해집니다. 해는 꼴도 못 보는 날이 며칠이나 계속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마치고 돌아가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당시 공부하던 페테르부르크에서 겨울을 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러시아에 왔는데 이곳의 겨울을 한번 나 봐야 나중에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겠나 하는 낭만적인 생각도 없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이야기 거리가 많이 생기긴 했습니다만, 치른 댓가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다가오자 먼저 와 있던 후배 S는 하루빨리 문풍지를 사서 창문틀을 막으라고 명령 비슷한 조언을 했습니다. “스크보즈냐크”가 겨울에는 제일 무서운 것이라고 손가락이 찢어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온다나 어쩌나 하면서 꼭 러시아 할머니같이 요란스럽게 호들갑을 떨면서 말입니다. 후배 집에 놀러가 그 외에 여러 가지 잔소리를 듣던 저는 귀찮기도 하고 먼저 왔다고 아는 체 하는 모양이 좀 빈정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근처에 싸게 파는 철물점이 있으니 들러 사가기고 가라는 후배의 잔소리를 다른 귀로 흘려버리고 그냥 집에 돌아와 버렸습니다. 집에 돌아와 창틈에 손을 대보니 “스크보즈냐크”는 커녕 별 느낌도 없고, 난로를 켜 두니 창가에 있으나 안쪽에 있으나 뭐 그다지 큰 차이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얼마 전 후배가 또 자신이 러시아에서 처음 지낸 겨울 경험담을 이야기하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후배 이야기로는 어느 추운 날 핀란드만 근처에서 할머니 한분이 걸어가시다가 바닷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자 바람을 등지고 지팡이로 그냥 요리조리 방향만 잡고 얼음 위를 미끄러져 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얘가 이렇게 매사에 좀 과장이 심하다 싶은 생각이 나서 픽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밤 정말 정확히 영하 18도까지 기온이 떨어졌습니다. 보통 때도 보조난방으로 전기난로를 켜고 있는데, 그날은 난로가 고장이 났나 생각이 들 정도로 몹시 추웠습니다. 목이 말라 부엌 쪽으로 나가보니, 문을 열어둔 것도 아닌데, 밖에 나온 것처럼 몹시 춥고 식탁에 둔 그릇에 물이 얼어 있었습니다. 부엌에 걸려 있는 온도계를 보니 영하 5도였습니다. 부엌은 마치 베란다에 나온 것처럼 추웠습니다. 달달 떨며 물을 마시고 차를 끓여 방으로 얼른 들어왔습니다. 부엌만큼은 아니었지만 방도 도저히 책상에 앉아있을 수 없을 만큼 추웠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급한 공부를 못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약간 화가 나기도 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전긍긍하다가 일어나 창문가에 가서 문틈에 손을 대보니 거기서 그야말로 칼바람이 불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손가락이 찢어질 것 같다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뿔싸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라 무얼 사러 나갈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창틈으로 칼바람처럼 스며드는 “스크보즈나크”의 맛을 제대로 보고 나니 왠지 더 추운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한 30분을 떨다 도저히 안되겠길래, 갑자기 생각이 나서 스카치테이프를 꺼냈습니다. 저는 우선 창틀 아래 부분의 틈새에 스카치테이프를 죽 붙였습니다. 그 붙이는 사이에도 어찌나 추운지... 테이프가 모자라 창문 위쪽에는 결국 붙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막아놓고 나니 거짓말처럼 방이 훈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난로의 효과도 물론 느껴졌습니다. 갑자기 후배에게 굉장히 미안해졌습니다. 다음날 저는 물론 당장 달려나가 문풍지를 사다 방과 부엌의 틈이란 틈은 모조리 틀어막았습니다. 며칠 후 후배를 만났을 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조언대로 문풍지를 사서 월동준비를 잘 했노라고 시치미를 뚝 뗐습니다.

경험자의 충고를 무시한 댓가를 톡톡히 치루었지만, 그 이후 일단 집에서 춥지는 않게 겨울을 잘 났습니다. 심지어 진짜 러시아 사람처럼 창 아래 부분은 솜으로 틀어막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 들른 집주인 조야 아주머니는 제 방이 “꼭 아프리카에 온 것처럼” 덥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습니다. 조야 아주머니가 실제로 아프리카에 가보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만...

러시아는 일년의 반이 겨울인 셈인 추운 곳이지만 실내에서는 전반적으로는 워낙 난방이 잘 되어서 도서관이나 연구소 등 실내에서 추위를 느낀 적은 거의 없습니다. 밖에서 돌아다닐 때는 물론 엄청나게 추웠습니다만, 추위에 지레 겁을 먹고 팔다리가 어기적거릴 정도로 옷을 몽땅 껴입고 다녔던 통에 실내에 잠깐 들어갔을 때 땀을 어찌나 흘렸는지 밖으로 나와서는 땀이 식어 추웠습니다. 하지만 영하 10도~15도에서 더 내려가면 그때는 정말 거리에서 걸어다니는 것 자체가 겁이 날 정도입니다. 한번에 50미터를 걷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아무리 껴입어도 얼굴까지 다 가릴 수는 없으니, 유일하게 내놓는 것이 얼굴 부분인데, 이때는 무언가 야릇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들면서 뺨은 조여들어가고 눈꺼풀이 뻑뻑해지고 눈을 뜨기가 힘들어집니다. 한두 발짝 걸음을 내딛다 보면 다시 집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그런 때 제일 생각나는 것이 서울 거리 포장마차에서 파는 오뎅과 그 따끈한 국물이었습니다.

저는 러시아에서 겨울을 보내며, 그런 추운 날에도 해가 쨍하게 비치면 러시아 사람들이 유모차를 밀며 한가하게 산책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유모차 안의 아기는 에스키모처럼 꽁꽁 싸인 채로 볼이 새빨개져 있습니다. 러시아 엄마들은 겨울에 실내에만 있으면 건강에 좋지 않고 차갑고 신선한 바깥 공기를 꼭 마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진눈깨비만 내리지 않는다면 에스키모처럼 꽁꽁 싸매 입고 볼이 새빨개진 채로 엄마와 산책을 하거나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혹한의 날씨에 아기들을 데리고 나올까 싶어 의아스럽기도 했지만, 거의 6개월을 눈이 내리는 나라에서 눈과 추위가 삶의 일부가 아니라면 그곳에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겠지요...

밤에 혼자 앉아, 책을 들여다보거나 논문을 위한 노트를 정리하거나, 뭐 이런 류의 지루한 일들을 하고 있다 보면 어느덧 창문에 눈발이 날아와 소리 없이 부딪칩니다. 어두운 밤 창문에 하염없이 날아들어오는 희부연한 눈송이들은 러시아에서 지낸 겨울을 생각하면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겨울의 幻”입니다.

눈발이 날리면 한두 시간 후 어김없이 우웅~소리를 내며 거리에서 제설차가 눈을 치우곤 하지요. 눈이 밤새 오면 제설차도 밤새 거리를 밀고 다닙니다. 앞이 안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내리는 눈이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데도 멈출 줄 모르고 눈을 치우고 또 치우는 제설차는 감동을 주기까지 합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과 제설차를 수입해서 가지고 가면 좋겠다는 농담도 하곤 했습니다.

러시아에서 겨울을 나면서 참 여러 가지, 각종 눈을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보던 함박눈이나 진눈깨비에도 참 여러 단계와 종류가 있다는 것을 러시아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비와 섞여 내려 차가운 슬러시 같이 길바닥을 얼음으로 만들어 놓는 눈, 마치 비가 내리듯 거의 끊어지지 않고 내리는 눈, 바람 없는 날 소리없이 소복이 내리는 함박눈, 세찬 바람과 함께 자잘한 쌀가루 같이 흩뿌리는 눈, 마치 밀가루처럼 잘 뭉쳐지지도 않고 푸슬거리는 눈... 그중에 단연 러시아에서 눈 내리는 풍경의 백미를 꼽으라면, 마치 땅으로부터 솟아오르듯 아래에서 위로 휘감아 올라가며 거센 바람과 함께 휘몰아쳐서 사방천지를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눈, 바로 눈보라일 것 같습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끝없이 펼쳐진 평원은 러시아의 공간적 상징, 아니 러시아 그 자체의 상징입니다.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에는 어김없이 눈보라가 휘날리는 끝없는 평원이 등장합니다. 그렇게 눈보라는 많은 러시아 작가들의 내면 깊이에서 결코 간단치 않은 역사의 굴곡을 겪어 온 러시아의 운명의 메타포가 되고 있습니다.

2. 러시아의 영혼, 푸슈킨

이전에 제가 여러분께 도스토예프스키냐 톨스토이냐 하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지금 푸슈킨을 이야기하면서는 감히 그런 질문을 드리지 못할듯합니다. 왜냐하면 푸슈킨은 그 모든 논란을 넘어선 존재이며 모든 호불호의 판단을 넘어선 절대적인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사람들은 “어떻게 푸슈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나”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르지만 그 제각기 다른 이들이 모두 푸슈킨에게서 그를 사랑하는 제각기 다른 이유를 발견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낭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질풍노도의 낭만을 발견하고 냉철한 이성을 사랑하는 이는 가차 없는 사실주의적 시선을 푸슈킨에게서 발견합니다. 세상을 비판하고자 하는 이는 폐부를 찌르는 차가운 냉소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져 세상이 장밋빛으로 보이는 이는 넘치는 사랑과 갈망의 노래를 읽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이는 세속으로부터 벗어난 무한한 자유와 방랑을, 엄격한 절제와 금욕을 사랑하는 이는 냉정함과 결단을 발견하고, 비극을 사랑하는 이는 비극을, 희극을 사랑하는 희극을, 자연을 사랑하는 이는 자연을, 지적 유희를 사랑하는 이는 예기치 않은 반전을, 때로 나이브한 선함에 싫증이 난 이는 악마적이고 거만한 저항자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도덕을 믿는 이는 신의 섭리의 최종적인 승리를 보게 됩니다.

그렇게 푸슈킨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여실히 증명해 주는 사실 중의 하나는, 서로 싸우는 양편의 사람들이 각기 푸슈킨의 구절을 들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TV의 정치토론에서조차 푸슈킨을 인용하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이곤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우리 정치인들 중 어느 누구도 우리 고전이나 문학을 인용하며 정견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더욱이 요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대유행인데, (저는 인문학에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관심을 보이는 것이 유행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정견을 고전이나 문학을 통해 유추해 낼 만한 ‘깊이’ 있는 관심은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관심’ 흉내내기 정도로는 정치적 비전을 고전에서 찾아내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비서나 자문관이 찾아다 앞에 놓아주는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읽기만 해서는 자기 생각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아무튼 저도 역시 푸슈킨을 좋아합니다. 물론 러시아 작가 중에 푸슈킨을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겠지만, 저 역시 제가 보고 싶은 사람과 세상의 모습을 푸슈킨에게서 발견하게 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합니다.

푸슈킨은 러시아 문학의 거장인 것이 아니라 실로 러시아 문학의 근원이며 러시아 문화의 정수입니다. 러시아인들은 푸슈킨의 동화를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에서 푸슈킨의 시와 소설을 읽으며 성장하고 극장에서 푸슈킨의 작품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오페라와 발레를 보며 살아갑니다. 러시아인들은 푸슈킨의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푸슈킨의 생각에 비추어 세상만물을 이해합니다. 근대에도 신화가 있을 수 있다면, 푸슈킨은 러시아의 신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슈킨은 러시아의 대 귀족 집안 출신으로(물론 그의 시대에 와서는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고 합니다만...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귀족작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후대의 잡계급 출신 작가들처럼 ‘생계형 작가’인 부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형적인 러시아 귀족 청년으로서 황실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외가 역시 명문대가로서, 외증조부는 아브람 페트로비치 한니발이라고 하는 흑인으로 노예 출신이었지만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결과로 표트르 대제의 총애를 받아 귀족이 되었다고 합니다. 푸슈킨의 외모가 심한 곱슬머리에 거무스름한 피부, 그리고 슬라브 계통 같지는 않은 골격으로 약간 별나 보이는 이유도 외가의 혈통 때문입니다. 푸슈킨은 이러한 순수하지 않은 혼혈의 혈통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자유로운 예술가의 마음은 다른 것, 이질적인 것, 타인에게로, 내가 사는 세상 너머의 바깥 세상 등을 향해 열려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푸슈킨이 “그 모든 것”을 작품 속에 품어내고 있는 것도 그가 “그 모든 것”을 향해 자신을 열어두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사실 어디서나 순수 혈통을 자랑삼아 이야기하거나, ‘우리끼리’를 외치는 이들은 대부분 무언가 좀 수상쩍은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사람과 세계를 끌어안기보다는 십중팔구 누군가에 대한 배척과 미움을 폭발시키는 법이지 싶습니다. 심심치 않게 러시아에서 들려오는 스킨헤드족의 폭력, 그리고 극우주의의 호전적이고 배타적인 목소리는, 만약 푸슈킨이 살아있었다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전혀 러시아적이지 않은 무엇일 것입니다.

대귀족 가문에서 성장한 푸슈킨이지만 어린 푸슈킨을 품속에 안고 보살펴주었던 사람은 항상 사교계와 궁정 생활로 바쁜 어머니가 아니라 농노인 유모였습니다. 작가 푸슈킨을 이야기할 때 유모 아리나 로디오노브나는 결코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인물로 등장합니다. 어린 시인의 머리맡에서 유모는 러시아의 민담과 동화, 격언, 속담, 민간신앙에 얽힌 이야기 등을 들려주며 그야말로 러시아 민중의 깊숙한 정서를 시인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작가 푸슈킨의 정서는, 팔할까지는 아니라도 오할 쯤은 유모의 이야기를 통해 형성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푸슈킨은 유모를 통해, 프랑스어만을 구사하며 정작 자신들의 러시아어로는 말하지 못하는 성급하고 피상적으로 서구화된 19세기 초 러시아 귀족이 결코 알지 못하는 깊고 깊은 러시아 민중의 세계를 내면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모가 들려준 푸슈킨의 작품 곳곳에서 등장하는, 배우지 못했지만 귀족이나 지식인을 뛰어넘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민중 출신의 인물 형상들 속에는 러시아 민중에 대한 푸슈킨의 깊은 사랑과 존경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푸슈킨이 동시대 서구에서 유행하던 문학의 클리셰를 마치 모차르트처럼 가볍게 비틀고 변주할 수 있었던 것도 러시아 민담과 동화, 전설의 세계를 통해서였습니다. 당대의 사회적, 역사적 주제 또한 러시아 민중에게서 발견되는 진정으로 러시아적인 사고와 정서에 의해 푸슈킨에게서 서구의 클리셰를 뛰어넘어 새로이 재해석되고 재평가되었습니다.

여기서 아마도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지실 법도 합니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같은 러시아 사람인데 러시아 귀족에게 러시아 민중은 왜 그토록 먼 것이었을까요? 여기에는 러시아 고유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기인한 이유가 숨겨져 있습니다.

19세기 초 러시아는,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발트해로 나아가는 핀란드 만 늪지에 건설된 도시 페테르부르크를 제국의 수도로 선포하며 “유럽으로 열린 창”이라는 별칭을 가진 이 도시를 거점으로 적극적인 서구화 정책을 추진한지 백여 년이 지나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도시를 닮은 러시아의 모습은 여전히 어딘가 어색하기 그지 없었고 러시아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흉내 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습니다. 한 세기 전 표트르 대제가 강압적으로 시행한 서구화 정책은 표면적으로는 꽤 그럴듯한 유럽적 러시아를 만들어 놓았지만 러시아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서구적 삶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낯설고 부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프랑스어를 쓰는 귀족들이 모인 러시아 황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겉보기엔 유럽 어느 궁정과도 다를 것이 없었지만, 내실로 들어가 서구식의 복장도 매너도 벗어던진 순간 세련된 ‘무슈’에서 촌스럽고 거친 ‘무쥐크’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러시아어로 “무쥐크”(мужик)란 우리말로는 말하자면 “사내” 정도의 의미로 생각하시면 될 듯 합니다.

러시아는 1789년 시민혁명을 겪은 프랑스를 따라잡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습니다. 수도를 이전하면서까지 서구화를 추진하고자 했던 표트르 대제와 계몽군주를 자처하던 예카테리나 여제의 근대화 정책은 우랄 너머 깊숙한 러시아에까지는 결코 이를 수 없었습니다. 법령과 제도에 의한 강압적인 급격한 계몽정책은 러시아인의 뜨거운 혼 속으로 스며들기에는 너무나 차갑고 이성적인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러시아는 유럽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자의식이 서구의 복장을 하고 서구의 매너를 구사하는 러시아 귀족들의 의식 깊숙이에 불편하게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서구식의 세련된 계획도시 페테르부르크의 뒷골목에는 여전히 빈곤과 무지, 비합리적인 폭력과 비행이 난무했습니다. 귀족들과 지식인들은 유럽적인, 특히 프랑스적인 문화에 몰두했지만, 러시아적 뿌리, 즉 민중과 결합되지 못한 서구화와 근대화는 그들에게도 여전히 마치 연극의 “배역”을 연기하는 듯한 분열과 괴리의 감각을 만들어낼 뿐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서구화의 문제는 러시아 귀족에게는 두 가지 면에서 불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한편 극심한 심리적 괴리를 겪으며 러시아의 후진성을 괴로워했습니다. 지난번 도스토예프스키에 관한 이야기에서 말씀드렸듯이 민중의 문제는 러시아 지식인, 즉 러시아 인텔리겐차의 최대 화두였다고 말씀드렸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고 서구식으로 살며 그들은 점점 더 러시아 민중으로부터는 멀어져 갔습니다. 교육과 근대화를 통해 서구로 다가갈수록 그들은 어쩌면 그들은 그들의 진정한 모습으로부터 멀어져 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푸슈킨 역시 민중으로부터 동떨어진 귀족으로서 황실학교의 귀족 엘리트 교육을 받고 정부 관리로서 일하게 되었지만, 그는 서구적 삶을 ‘연기’해야 하는 귀족들과는 사뭇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푸슈킨은 유년 시절 온갖 옛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는 유모의 영향으로 정서적으로 러시아 민중의 삶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일찍이 썼던 정치적 자유를 주제로 쓴 작품들 때문에 1820년 러시아 남부로 추방당하여 지방의 한직을 떠돌며 드넓은 러시아 땅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러시아를 이루는 다양한 민족들의 풍습과 민속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푸슈킨이 민중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서 그가 서구적인 것을 버리고 민중과 의 동화만을 지향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서구적 교육을 받았으며 서구의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 하에서 사유한 지식인이었던 것입니다. 18세기, 아니 실상 러시아가 몽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통일국가를 이루어 발돋움하던 15세기로부터 시작된 근대화, 즉 서구화는 이미 수 세기 동안 진행되어 왔고 그것이 러시아인의 뼛속까지 스며들지는 못했다고 해도, 그들의 외양과 삶의 방식 속으로 상당 부분 침투해 있는 러시아의 반쪽 모습임에 틀림없습니다. 여전히 존재하는 서구와의 괴리감, 서구에 대한 열등감에도 불구하고, 푸슈킨의 시대 러시아는 특히 1812년 조국전쟁의 승리로 인해 당당히 유럽무대에서 큰소리를 낼 수 있는 대제국으로 발돋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나폴레옹에 대해 승리한 탓으로 “유럽대륙에서 러시아 황제의 허락 없이 대포 한발도 발사될 수 없”을 만큼 러시아의 위상은 감히 도전할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뒤늦게 유럽 역사에 등장한 러시아는 기실 상당히 급속도로 근대화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저 깊은 평원에 자리한 러시아 민중의 삶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귀족과 지식인의 문제 역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역시 자신들의 내면에 자리한 러시아적 감수성과 서구적 사고를 화해시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받은 “러시아적 주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것이 푸슈킨의 문학이었습니다. 푸슈킨은 그의 문학을 통해 서구적 근대화와 풍부한 러시아적 감수성을 가장 이상적으로 결합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는 민중의 삶과 만날 때마다 풍요한 그들의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서구의 진보적인 사상과 자유주의적인 사고를 교육받은 그는 그것을 러시아의 언어와 감수성으로 형상화해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당대 지식인이 고뇌했던 “반만 러시아 사람”이 아니라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것과 러시아적인 것을 다 가진 종합적, 융합적 러시아인의 모델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최고의 서구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으로서 러시아 민중의 언어를 체화한 푸슈킨의 문학은 러시아어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지위의 고하와 교육의 정도를 막론하고 누구나 사용하는 통합된 국민언어로서의 현재 러시아어의 출발은 푸슈킨으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푸슈킨이 보여준 서구적인 것과 러시아적인 것의 종합과 융합은 그야말로 러시아 19세기를 관통하는 가장 거대한 민족적, 국가적 주제였습니다. 이후 러시아 지식인들의 사유는 끊임없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공전하며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논형’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지식인으로서 서구적인 것과 러시아적인 것의 ‘합’ 혹은 양자의 관계라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이는 단언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러시아의 역사를 생각하신다면, 현재 언제나 서구와 행보를 같이 하지 않는 러시아의 입장을 심정적으로나마 이해해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물론 러시아의 정치적 행동에 대한 정오(正誤)의 판단은 별론으로 하고 말입니다.

제가 푸슈킨을 이야기하면 또 많은 분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십니다. 푸슈킨의 작품은 물론 그가 러시아 시인인지도 몰랐지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싯구를 알고 있노라고 말입니다. 저도 물론 어린 시절 갱지로 된 연습장 표지나 푸슈킨과는 전혀 상관없는 만화그림이 그려진 수첩의 속표지에서 이 싯구를 보았습니다. 물론 이발소나 미장원에서 또다시 이 싯구는 아무 상관없는 삽화와 함께 액자 속에 시화전 작품처럼 걸려 있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는 푸슈킨의 작품 중에서 특히 러시아인들의 사랑을 받는 애송시들 중의 하나로 꼽히지도 않고 푸슈킨 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도 아닙니다. 일단, 푸슈킨은 ‘삶이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 시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삶의 불편부당함, 사회적 불의를 그저 시간과 함께 지나가는 덧없는 것이라 생각하며 초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니 미래의 행복을 기다리라는 투의 일견 값싼 위로는 전혀 푸슈킨답지 않습니다. 오히려 삶의 기만에 대해 슬픔과 분노를 깊이 간직하고 그 자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쪽이 제가 알고 있는(꼭 저만의 주관적인 이해는 아닙니다) 푸슈킨에 가깝습니다.

물론 푸슈킨의 작품에서 범속한 세상사에 대한 초연과 달관의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실로 푸슈킨에게는 “모든 것”이 발견되는 법이니까요. 또한 이 시의 해석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데, 크게 보면 두 가지로,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시가 푸슈킨에게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가벼운 ‘위로시’이기 때문에 푸슈킨의 진지한 작품 세계에서는 제외하고 보는 시각이고(사실 이 시는 소위 “앨범시”로 당시 사교계에서는 서로의 앨범에 가벼운 인사말이나 안부, 혹은 하고 싶은 이야기 등등을 써주는 일이 친교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아마 지금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앨범은 지인이나 호감을 가진 이들이 와서 하고 싶은 말을 남기는 개인 블로그 같은 것에 비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상당히 최근에 이 시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등장한 시각으로 이 시 역시 가히 푸슈킨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세계관, 즉 복잡성을 통과해 나간 후의 단순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이처럼 가사 이 시에서 삶의 배반에도 낙심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달관과 초연함이 발견된다고 해도, 그것은 분노와 슬픔을 별로 알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의 가벼운 위로 같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의 변전을 온몸으로 겪으며 살아내는 러시아적인 태도, 즉 감수(甘受)와 인내를 거친 이후의, 즉 모든 인생의 모의미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푸슈킨을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에서 짙게 느껴지는 정서는 오히려 깊은 슬픔과 노여움입니다...

푸슈킨의 인생은 길지 않았지만 그가 인간으로서의 겪은 희노애락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았습니다. 황실학교를 마친 그는 관리로서의 젊은 시절을 변방으로의 유배로 시작했습니다. 사실 황제는 정부를 비판하는 푸슈킨을 시베리아나 북극해 남단의 백해 솔로베츠키 수도원으로 유배시키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시재(詩才)를 귀히 여긴 카람진과 주코프스키 등의 노력으로 남방으로 유배되는 정도에 그쳤다고 합니다. 푸슈킨은 평생을 떠돌며 정치적 억압과 내면의 고독과 싸워야 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마치 1825년 겨울 일어난 푸슈킨의 일생을 좌우한 사건을 예언하는 듯 들립니다. 1825년 겨울 일단의 귀족 청년장교들이 전제정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일으킨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고 대부분 푸슈킨의 리체이 시절 친구이거나 지인이었던 이 젊은 장교들은 다음 해 모두 처형당하거나 유배됩니다. 푸슈킨은 이 사건 이후 학창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을 잃은 슬픔과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한 회한으로 평생을 고통받게 됩니다. “즐거운 나날이 오리라”는 믿음, “현재는 슬픈” 것이고 모든 것이 순간일 뿐 지나간 것은 소중한 것이 되리라는 말은 곧바로 그에게 닥쳐올 고통과 슬픔에 대한 예언으로 들립니다. 그 전 해인 1824년 무신론적인 내용을 편지에 썼다는 이유로 외무성에서 면직당하고 고향의 영지로 유배당한 푸슈킨은 한층 짙은 고립감과 좌절감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 시는 그러한 푸슈킨의 정신적 상황을 잘 보여주는 동시에 곧 다가올 더한 슬픔과 분노를 예감하는 듯 합니다. 마치 친구들의 처형, 그리고 그로 인한 자신의 정신적인 죽음에 바치는 진혼곡 같이 말입니다.

그렇게 제가 푸슈킨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실 그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 푸슈킨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삶의 행복을 누리고 기뻐하며 삶의 불의에 분노하고 항거하며 삶의 불행에 아파하고 고통 받았던 시인이었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황실의 전제정치와 정치적 탄압에 대해 너무나 자주 “슬퍼하고 노여워한”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선과 정의가 현실에서 패배할 수 있음을 눈앞에서 목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코 모든 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유에 대한 억압과 농노제의 폭력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의를 “말함”으로서 행동하는 지식인이 되었습니다. 삶의 배반에 대해 끊임없이 “슬퍼하거나 노여워”함으로써 말입니다.

3. “데카브리스트” 혁명과 푸슈킨

모차르트의 음악처럼 밝고 유려하고 경쾌하며 가히 천의무봉이라 할 천재 푸슈킨의 작품 세계에는 깊은 참회와 슬픔, 그리고 인간과 삶에 대한 도덕적 성찰의 그늘이 깃들어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이 그러하듯이, 푸슈킨 작품의 단순성과 명징성 속에서 깊은 고뇌 속에서 방황한 인간의 달관과 통찰의 경지가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만큼의 그늘을 거느린 빛, 그만큼의 고통을 껴안은 웃음, 그만큼의 인내를 거친 담담함이 많은 비평가들이 푸슈킨에 관해 말하는 바, 엄청난 복잡한 사유를 거쳐 얻어진 “보다 높은 차원의 단순성”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역시 극도의 슬픔과 분노가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여 단단해진 담담함을 숨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모차르트와 같이 천상의 밝음을 타고난 푸슈킨의 삶과 문학에 가장 직접적으로 그늘과 고통을 드리운 사건은 러시아 역사에서 유명한 “데카브리스트”(12월당) 혁명입니다.

푸슈킨의 밝고 재기발랄한 천재성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성찰의 방향성을 부과한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잠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1825년 12월 14일 일단의 귀족 청년장교들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황제의 겨울 궁전 앞에 집결합니다. 이들은 황제 알렉산드르 I세가 서거하고 후계자인 니콜라이 I세가 아직 즉위식을 치르지 못한 공백기를 전제정을 개혁하고 공화정을 실현할 쿠데타를 일으킬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이날 대귀족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 공을 지도자로 내세운 귀족 장교들은 헌법제정을 요구하며 농노제 폐지 및 의회정치를 주장하며 각각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페테르부르크의 황제의 겨울궁전 앞에 집결하였습니다. 이들은 “헌법”을 외치며 병사들에게 황제의 궁전으로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드러납니다. 혁명을 실패로 가져갈 수밖에 없었던 혈기왕성한 귀족 엘리트 장교들의 착오와 모순이 그것입니다. 대부분 평민(민중)이었던 일반 병사들은 황제를 공격하라는 지휘관의 갑작스러운 명령에 어쩔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이들에게 차르는 절대적 권위와 위엄의 상징이었습니다. 신정일치의 관념을 토대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구축하였던 러시아는 사회 전반적으로 합리적인 계약의 체계가 아닌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체계가 뿌리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제(차르)를 아버지라 부르던 이들은 차르에게 총칼을 겨누라는 명령을 받자 대경실색하고 말았습니다. 이들의 소요를 보고 달려나온 차르의 근위대에서 휘날리는 차르의 깃발을 보자 무기를 내던지고 땅에 이마를 대고 조아리며 절을 하는 병사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역사서에는 이들이 지휘관이 외치는 “콘스티투치야”(конституция, 헌법)라는 단어를 왕자 콘스탄틴(Констатин)의 이름에 여성형 어미를 붙여서 외치는 것이라 생각하고 지휘관의 외침을 왕자 콘스탄틴의 배우자를 구해주자는 의미로 알아들었다는 웃지 못할 우스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이야기가 사실이건 아니건 평민 병사들이 “콘스티투치야”(헌법)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아예 알지도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근본적인 문제점이었습니다. 병사들이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가장 큰 명분이었던 헌법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했으며 더구나 자신들이 혁명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지휘관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근대적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젊은 귀족 장교들이 외치는 입헌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라는 명분은 이들에게는 이해조차 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러시아 민중의 무지몽매를 보여준다기보다는 젊은 지휘관들의 미숙함과 심각한 오류를 보여줍니다. 귀족 엘리트 장교들은 그토록 중대한 거사를 치르면서 그들의 뜻을 실행해줄 병사들과는 아무런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차르의 군대는 이들을 쉽사리 진압하고 맙니다. 물론 이들의 미숙함과 오류만이 혁명의 실패 원인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밀고로 정부에서는 이미 거사 계획을 알고 있었고 이들이 집결하자 니콜라이 I세는 이들을 향해 대포를 발사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비밀 거사 계획의 보안을 지키지 못한 것 역시 이들 계획의 허술함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트루베츠코이, 페스텔, 무라비요프 등을 비롯하여 참여했던 귀족 청년들은 그 자리에서 모조리 체포당했습니다. 더구나 이들 중 상당수가 황실 리체이에서 새로 등극한 차르 니콜라이 I세와 동문수학하던 벗들이었으니 이들을 앞으로 통치를 도와줄 친구로 믿었던 새 차르의 분노와 배신감은 가히 짐작할 만합니다.

рисунок-пушкина-казненные-декабристы.jpg

여기서 잠시 이 혁명이 왜 데카브리스트 혁명이라고 불리는지를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혁명은 12월에 일어났습니다. 12월은 러시아어로 “데카브리” (декабрь)라고 하는데, 이들이 12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해서 이들을 “데카브리스트”(декабристы)라고 부릅니다. 우리말로 번역해보자면, “12월 사람들”, 즉 “12월당”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 개화당의 삼일천하를 연상하게 하는 12월당, 데카브리스트의 혁명은 한편으로 억압과 전제에 항거하는 러시아의 혁명사를 잇는 한 고리로 평가되지만, 그보다는 다른 한편 러시아 지식인과 민중 사이에 놓인 극복할 수 없는 괴리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야기됩니다. 지식인들의 이상은 한없이 높아 하늘에 닿았고 민중의 현실은 여전히 진흙탕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들 중 하나였던 농노제가 1861년에 폐지된 점을 생각해보면 입헌군주제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한 데카브리스트의 사상은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유주의와 입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프랑스 대혁명 사상을 받아들인 당시 러시아 귀족 지식인들의 사회적 인식의 수준은 이처럼 상당히 높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지식인들에게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들의 사상과 민중의 무지의 격차는 가장 큰 고뇌의 대상이었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프랑스에 직접 가 보게 되면서 더욱 이러한 괴리를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일찍이 조국전쟁에서 나폴레옹에게 승리한 알렉산드르 I세는 승전국의 황제로서 나폴레옹에게 항복을 받기 위해 백마를 타고 파리로 입성하게 됩니다. 이때 청년장교들은 황제를 수행하여 파리에 가서 프랑스 대혁명을 가져온 자유주의와 입헌주의에 기반한 발전된 제도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나폴레옹에게 승리했지만 러시아는 1789년 대혁명을 가능하게 한 프랑스 사회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되어 있음을 절감하였습니다. 젊은 장교들은 아직도 절대 전제군주의 아래 농노제에 시달리는 러시아의 비참한 상태를 생각하고 조국의 현실을 변화시키려는 낭만주의적인 열망과 의지를 안고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자연히 귀족 장교들은 다양한 비밀결사들을 조직하여 입헌주의나 공화주의로의 정치체제 개편과 농노 해방, 농민의 토지 소유와 경작권 인정 등 사회체제 개혁 방안을 광범위하게 논의하고 미래의 실현방안을 모색했습니다.

낙후된 러시아 정치체제와 사회제도를 개혁하려는 이들의 움직임은 상당한 구체적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모임은 파벨 이바노비치 페스텔 대령이 이끄는 우크라니아의 남부협회와 니키타 미하일로비치 무라비요프 백작이 이끄는 북부협회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페스텔의 남부협회가 무라비요프의 북부협회보다 급진적 성향을 보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두 협회는 서로 긴밀한 연락 하에서 12월의 쿠데타를 계획하였습니다.

귀족 청년들로 이루어진 혁명세력은 지배 엘리트 계층의 각성과 개혁을 강조하는 “위로부터의 예방 혁명론”을 자신들의 쿠데타의 이론적 근거로 삼았습니다. 구체제를 지배층 스스로가 개혁하지 않으면 무지한 민중이 봉기하여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에 엘리트이자 지배계급인 그들이 과감히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이들은 무지한 민중이 사회적 개혁에 참여 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당연히 프랑스 혁명에 불가피하게 부수되었던 파괴와 폭력이라는 불행한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에서 귀족 장교와 평민 병사의 소통이 없었던 이유도 어느 정도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민중에 대한 연민과 민중에 대한 불신, 아이러니하지만 사실 이것이 또한 러시아 지식인에게 깊이 스며들어 있는 이중적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푸슈킨 역시 사상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데카브리스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일찍부터 유배로 떠돌게 된 것도 정치적 자유주의를 표방하거나 농노제를 비판하는 시 작품들을 썼기 때문이었던 것이니까요. 대표적 시 ｢자유｣(вольность)(1819)는 진보적 성향의 귀족들 사이에 사상적 프로그램과 같은 것이 되었을 정도였습니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에 가담한 귀족 청년들은 대부분 푸슈킨과 죽마고우이거나 절친한 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푸슈킨은 1925년 그날 차르의 궁전 앞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것은 당연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는 유배 중이었으므로 어머니 가문의 영지 프스코프의 미하일로프스코예 마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푸슈킨이 쿠데타 계획을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그는 거사에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배 중이었고 당연히 감시 대상이었던 푸슈킨이 적극적으로 비밀결사 모임에 가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친구들은 그가 당연히 뜻을 같이한다고 생각했고 거사 계획에 대한 밀지를 보내왔습니다. 밀지를 받은 푸슈킨은 당장 마차를 달려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떠납니다. 그런데, 진위는 알 수 없습니다만, 가는 도중 푸슈킨은 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토끼를 보게 됩니다(러시아에서는 길을 가던 중에 토끼가 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것을 보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고 하는 미신이 있습니다. 동물은 여러 가지 것이 될 수 있지만 아마 이러한 미신은 유럽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는 불길한 예감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마리가 다시 길을 건너 뛰어갔다고 합니다. 고민하던 그는 마차를 돌려 유배지로 되돌아갑니다. 바로 이 순간이 푸슈킨의 운명을 결정지었습니다.

물론 푸슈킨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물론 차르가 푸슈킨의 가담을 의심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만, 그의 알리바이는 명백했고 유배로 고립되어 있었다는 점이 그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가장 큰 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푸슈킨은 그 순간 마차를 돌려 되돌아와 자신이 목숨을 건진 사실이 뜻을 같이 했던 친구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몸은 살았으나 양심은 죽음을 경험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푸슈킨의 내면과 작품 세계에 깊은 음영을 드리웁니다. 푸슈킨의 작품 속에 언제나 도덕적 성찰이 배음으로 깔리게 된 것도 아마 이 사건으로 인한 시인 자신의 양심의 가책과 회한이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데카브리스트 혁명 이듬해 9월 푸슈킨은 차르 니콜라이 I세의 소환을 받습니다. 니콜라이와는 어린 시절 리체이에서 같이 동문수학한 처지였지만 이제 두 사람은 차르와 그의 엄중한 심문을 받는 말단 관리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푸슈킨의 작품이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지식인들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 공인되어 있음을 차르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체포된 데카브리스트들은 금지된 푸슈킨의 작품의 필사본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단독으로 대면한 자리에서 차르는 푸슈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작년 겨울 그가 페테르부르크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이냐고 말입니다. 푸슈킨은 이번에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 역시 데카브리스트들과 함께 겨울 궁전 앞의 원로원 광장에 있었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차르는 웬일인지 관대하게 그를 용서해주며 앞으로 충성할 것을 맹세하게 합니다. 이 자리에서 푸슈킨은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차르에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니콜라이 I세는 시인의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미 주모자들은 교수형에 처하고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시베리아 오지로 유형을 보냈습니다. 차꼬에 묶여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는 많은 죄수들이 죽기 십상이었으므로 유형 역시 교수형이나 진배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차르가 왜 푸슈킨의 대답에 화를 내지 않고 관대하게 대해주었다고(혹은 관대한 척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했더라면 ~했을 것이다”라는 가정법의 말에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어린 시절부터 잘 알았던 푸슈킨이 절대 정치적 행동을 할 만큼 담력이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서일까요? 말하자면 시인이 말만 시끄럽지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할 부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차르의 진의는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분명히 시인의 행동 가능성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용서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차르가 푸슈킨의 불온한 시에 정말 책임을 묻거나 그를 배후의 교사자로 다룰 의향이었다면, 주동자들을 모두 처리한 이후에 그를 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치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차르는 시인을 얕잡아 보았을 것 같습니다. 사람으로서의 푸슈킨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결국 행동하지 못하는 자, 사변가에 불과한 문약한 지식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차르는 그러한 ‘번지르르한’ 말의 위험성 또한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도 계몽사상과 자유주의 사상들을 논하던 리체이에서 공부한 지식인이었던 것입니다. 차르는 푸슈킨을 행동하지 못할 자로 얕잡아 보았던 것 같지만 다른 한편 그의 작품에 대한 검열은 한층 강화되었던 것을 보면 시와 문학의 정치적 위험성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푸슈킨 이전부터도 문학이 정치적인 비판과 저항의 수단이 되어왔었으니까요.

하지만 차르의 관대함에 푸슈킨은 더한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것은 불길한 미신을 핑계로 마차를 돌려 돌아가 버렸던 자신의 행위로 인한 양심의 상처를 찌르는 화살과 같았을 것입니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기치가 된 자신의 말, 스스로 “민중의 메아리”라 자부한 의연한 시인의 목소리, 그러나 자신의 행위는 그것과 너무나 동떨어진 비겁한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높은 사상과 그것을 현실 삶에서 실현하는 행위 사이의 괴리에 대한 의식은 푸슈킨으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 속에서도 평생 시인은 무엇으로 ‘행위’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시인의 말/문학과 시인의 사회적 행위의 관계라는 문제는 근대 이후 러시아 지식인 모두가 그러했듯이 푸슈킨 역시 이러한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러시아적 주제”에 대한 푸슈킨의 고민은 다만 머리 속에서 사변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데카브리스트 혁명으로 인한 개인적인 쓰라린 체험으로부터 왔습니다. 말/사상과 행위의 문제는 바로 푸슈킨 자신의 삶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1825년을 거쳐 그의 작품 속에서는 궁극적인 주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윤리적 판단과 선택에 관한 생각입니다.

푸슈킨은 자신이 읽던 책이나 쓰던 원고의 여백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주변 인물이나 자신의 주인공을 스케치했습니다. 푸슈킨의 스케치들은 그의 작품들만큼이나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과 다름없이 자연스럽고 거침없이 쓱쓱 그려진 듯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개성이 잘 드러나 있는 아름다운 스케치들입니다. 푸슈킨이 그린 자신의 옆모습 프로파일을 그린 자화상 스케치는 매우 유명해서 이후 출판된 푸슈킨의 책에는 초상화 대신 그의 옆모습 자화상 스케치가 들어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스케치들 중에는 두 손을 포승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과 단두대에 매달린 사람들 그림이 자주 발견됩니다. 친구들의 죽음은 평생 그의 뇌리를 떠날 수 없었다는 증거인 것 같습니다. 푸슈킨의 양심의 가책과 내면적 고통을 짐작케 하는 이 스케치는 섬뜩하다기보다는 그의 깊은 회한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는 책을 읽으며, 작품을 쓰며, 끊임없이 그 순간을 자책하며 죽은 친구들을 그리워했을 것입니다. 단두대에 매달린 사람들의 스케치는 푸슈킨 평생의 회한이자 분노의 흔적이 아닐까요...

4. 우연과 필연, ｢눈보라｣

푸슈킨은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쓰라린 추억으로부터 인간의 행위에 관한 도덕적 성찰의 주제를 발전시킵니다. 단편소설 ｢눈보라｣(Метель)는 이러한 주제의 콘텍스트에 있고 푸슈킨은 이 작품에서 특히 우연과 필연이라는 주제를 통해 인간의 운명에 관련된 인간의 윤리적 선택과 책임에 관한 성찰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눈보라｣는 1830년에 쓰여졌습니다. 1830년대 초반은 푸슈킨이 인간으로서 그리고 작가로서 가장 성숙하고 풍요로운 작품을 써낸 시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때 푸슈킨은 특히 자신의 영지였던 볼디노라는 마을에서 작품 집필에 몰두했습니다. 성숙한 푸슈킨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이 시기를 문학사에서는 “볼디노의 가을”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 시기에 푸슈킨은 사교계의 절세미녀로 이름이 높았던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하게 됩니다. 1829년 나탈리야와 약혼한 푸슈킨은 1830년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모스크바에 콜레라가 창궐하는 바람에 다시 일년을 미루어 1931년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젊은 시절의 방황과 고통이 세월을 따라 옅어지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되어서일까요? “볼디노의 가을”은 푸슈킨에게 엄청난 창작적 결실을 가져다 주게 됩니다. 푸슈킨은 이 시기에 1823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역작인 운문소설 ｢예브게니 오네긴｣(Евгений Онегин)을 드디어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후대에 차이코프스키에 의해 오페라로 만들어져 명실공히 러시아의 국민 오페라로 사랑받게 되었습니다. 국민적 사랑 이야기로 우리나라에 ｢춘향전｣이 있다면 러시아의 것은 ｢예브게니 오네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차이가 있다면 ｢춘향전｣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두 주인공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소비극”(Маленькие трагедии)이라는 표제하에 엮어낸 네 편의 짧은 희곡들, 다섯 편의 단편소설들을 포함하고 있는 ｢벨킨 이야기｣(Повесть покойного Ивана Петровича Белкина), ｢청동기마상｣(Медный всадник), ｢스페이드의 여왕｣(Пиковая дама)등 뛰어난 성숙한 작품들을 비롯하여 무려 50여 편이 넘는 작품들을 써냈다고 합니다.

183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푸슈킨의 작품 경향은 대체적으로 낭만주의로부터 사실주의(혹은 낭만주의에 대한 반성)로 이동한다고 이야기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작가의 삶을 생각해 보아도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 하겠습니다. 리체이에서의 십대 시절 이미 문재(文才)를 인정받았던 시인이 가졌던, 시와 문학에 대한 치기어린 자신감과 열정, 문학과 예술에 대한 낭만주의적 믿음이 1825년의 사건을 거쳐 성찰과 반성, 그리고 심사숙고와 사려, 냉철하고 엄정한 판단으로 옮겨갑니다. 푸슈킨은 삶의 배반에 대해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슬픔과 분노를 내면에 끌어안고 보다 성숙한 사실주의의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1810년~1820년대의 시와 운문으로부터 1830년대의 산문으로의 이동이라는 문학적 변화는 이와 같은 그의 정신적 변화와 성장으로부터 비롯합니다. 1830년대에 이르러 푸슈킨은 보다 성숙하고 균형된 세계관을 획득하면서 러시아인들이 익히 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즉 깊이와 가벼움, 비극적 통찰과 위트, 열정과 냉철함을 결합한 푸슈킨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눈보라｣는 ｢벨킨 이야기｣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소설들 중 하나입니다. 우선 ｢벨킨 이야기｣에 대해서 약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정확히 번역하면 “고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의 이야기”인데 우리 번역에서 제목은 좀 간략하게 ｢벨킨 이야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간략히 하더라도 좀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벨킨의 이야기” 정도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몇 개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원래 벨킨이라는 인물로부터 들은 여러 이야기들을 화자가 단편소설로 구성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총 다섯 편의 작품들이 스토리상 연결되는 것은 아니고 다 독립된 다른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작이 될 수 있습니다. ｢벨킨 이야기｣에 수록된 나머지 작품들로는 ｢그 일발｣, ｢장의사｣, ｢역참지기｣, ｢귀족아가씨-농민처녀｣(내용을 좀 풀어 말씀드리면, “농민처녀로 변장한 귀족아가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가 있습니다. ｢눈보라｣를 비롯하여 여기 수록된 총 5편의 단편소설들은 모두 성숙기에 들어선 푸슈킨의 간결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 통찰과 기지가 빛나는 작품들입니다. 여기서 푸슈킨은 시대의 낡은 관념과 충돌하는 다가오는 새 시대의 가치들에 관하여, 그리고, 아마 그 자신이 바랬듯이, 시대의 클리셰를 극복하고 자신의 운명을 찾아가는 젊은이들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벨킨 이야기｣는 앞서 말씀드린 푸슈킨의 문학적 발전과 당연히 깊은 관련을 가집니다. 주관성과 낭만, 열정을 담아내는 시로부터 푸슈킨은 객관성과 성찰, 가치판단의 범주를 포섭하는 산문으로 옮아갑니다.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 즉 낭만적 주관에 의해 변형되거나 왜곡되지 않은 객관적 현실의 문제였습니다. 푸슈킨이 실제 삶에서 나이 들어가며 세상사에 대한 시선이 달라지듯이 그의 문학 역시 과장된 열정과 치기의 낭만주의로부터 사실주의로 이동하게 됩니다. 다가오는 새로운 세계관인 사실주의를 통해 푸슈킨은 조국전쟁과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시대를 풍미하던 낭만주의적 가치들을 성찰하고 검증합니다.

푸슈킨은 러시아 낭만주의의 시대를 살았고 러시아 낭만주의의 대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국전쟁과 함께 드높여진 러시아의 국가적 위상과 승리의 분위기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이상을 추구하는 낭만주의적 가치를 더욱 고양시켰고 이들은 명예와 우정, 사랑, 신의 등의 정신적, 형이상학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귀족 혹은 인텔리겐차 층의 젊은이들에게서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유형’이 유행이었습니다.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지만 데카브리스트 혁명 역시 이상을 실현하려는 젊은이들의 ‘낭만주의적’ 삶의 태도로부터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전형적인 러시아 낭만주의자들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재는 언제나 그의 시대보다 크다고 하였듯이, 푸슈킨의 작품 세계는 낭만주의와 동시에 낭만주의를 넘어서는 사실주의적 가치들이 나타납니다. 말씀드렸듯이 이처럼 낭만주의적 가치와 사실주의 세계관의 충돌은 주로 1830년대 푸슈킨의 보다 성숙한 작품들에서 발견됩니다. 푸슈킨은 낭만주의 시대의 추억을 뒤돌아보며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하려는 낭만주의적 삶을 담담하고 진솔하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서사에서 객관성과 사실성(이때의 사실성은 사실과 같이 그럴듯하다는 의미에서의 사실성입니다)을 확보하려는 푸슈킨의 노력 역시 이처럼 사실주의 세계관으로의 이행이라는 맥락에 있는 것이고, 푸슈킨이 창작 후기에 ｢보리스 고두노프｣, ｢대위의 딸｣ 등의 작품을 쓰면서 역사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습니다. 푸슈킨의 이러한 노력은 ｢벨킨 이야기｣에서는 새로운 서술 장치의 고안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단편의 이야기들을 제3자인 이반 페트로비치 벨킨이라는 인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화자가 다시 전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보고 들은 것을 담담하게 이야기해주는 벨킨이라는 화자를 통해 전달되는 사건은 ‘사실’이고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지각될 가능성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벨킨이라는 인물은 푸슈킨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입니다. 즉 벨킨은 산문적 객관성과 사실성을 담보해주는 문학적 장치인 셈입니다.

너무 서두가 길었나요? 이제 본격적으로 ｢눈보라｣에 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눈보라｣의 배경은 러시아가 나폴레옹을 상대로 싸워서 승리한 1812년의 조국전쟁을 전후한 시점입니다. 이야기는 조국전쟁 전에 시작해서 조국전쟁이 지나서 끝나게 됩니다. 푸슈킨이 택한 이 조국전쟁을 전후한 시기라는 시간적 배경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작가는 우연히 조국전쟁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작가가 작품 안에서 계속해서 시대적 배경을 짚어주고 있는 것에서 보이듯이 그가 이 시기를 선택한 것은 매우 의도적인 설정입니다. 작가는 이야기 속에 담긴 등장인물들의 운명을 통해 시대적 징후에 관한 성찰을 시도하려 하였습니다.

일단 ｢눈보라｣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예브게니 오네긴｣은 푸슈킨의 대표작으로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읽어보신 분이 많으실 것이지만, 아마도 ｢눈보라｣는 읽어보지 못하신 분이 더 많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벨킨은 화자에게 자기 마을에서 일어났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조국전쟁이 일어나기 일년 전, 그러니까 1811년의 일입니다. 벨킨의 마을에 마샤라는 어여쁘고 발랄한 아가씨가 살고 있었습니다. 마샤는 옆집에 머물고 있는 블라디미르라는 장교와 사랑에 빠집니다. 블라디미르 역시 마샤에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두 연인은 부모의 반대를 ‘예상하고’(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마샤의 부모님이 마을에 우연히 머물게 된 장교인 블라디미르를 사위로 허락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은 블라디미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그가 그다지 크게 내세울 것도 없는 하급 장교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작품에서는 사실 그 어디서도 부모가 실제로 반대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둘이서 비밀리에 결혼하고 같이 달아나기로 결심합니다. 어느 날 밤 이들은 몰래 집을 빠져나와 옆 마을 교회에 가서 결혼식을 올릴 계획을 세웁니다.

블라디미르는 그 전날 모든 것을 준비합니다. 결혼식을 올릴 교회를 알아보고, 결혼을 시켜줄 사제를 구하고 서약을 지켜봐줄 증인을 구하고 몰래 마샤를 데리고 나올 마차와 마부도 구하고... 온종일 결혼식을 철저히 준비합니다. 이윽고 밤이 되자, 전전긍긍하던 마샤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부모님께 일찍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하고 자러 가는 척 했고 이후 부모님이 잠든 사이 집을 빠져나옵니다. 이날따라 밖에는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집 앞에서 대기하던 썰매는 마샤를 태우고 눈보라를 뚫고 교회로 출발합니다. 블라디미르 역시 말을 타고 교회로 출발했지만 그는 눈보라 속에서 길을 찾느라 악전고투합니다. 이미 낮에 이리저리 분주하게 다니느라 완전히 녹초가 된 그는 천지사방을 분간키 어려운 눈보라 속에서 헤메다 거의 새벽녘이 되어서야 교회에 도착합니다. (이런 눈보라 속에서 동서남북이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을 화이트 아웃이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미 교회의 문은 잠겨있고 그곳엔 아무도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마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부모님에게 아침문안을 드렸지만 그날 바로 열병으로 앓아눕습니다. 마샤는 높은 열 때문에 헛소리를 하게 되고, 마샤의 부모님은 딸의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헛소리 속에서 겨우 딸이 옆집에 사는 블라디미르에게 반해버렸고 그래서 병이 났다는 점만 확신하게 됩니다. 고이 기른 딸이 옆집에 머무르는 온데간데 없는 총각 블라디미르에게 마음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된 부모님은 그리 반갑기야만 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제일 중요한 것은 딸의 행복이다 싶어 둘을 맺어주기로 결심을 합니다. 마샤의 부모님은 결혼 이야기를 꺼내려고 옆집의 블라디미르를 초대하지만,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블라디미르는 갑자기 종잡을 수 없고 이해하기도 힘든 핑계를 대며 초대를 거절하고 자신을 잊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고 며칠 후 블라디미르는 부대로 떠나버립니다. 이것은 1812년이 막 시작된 즈음의 일이었습니다.

이후 블라디미르의 이름은 보로디노 전투에서 전공을 세운 전사자 명단에서 발견되고 이를 본 마샤는 슬픔에 잠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샤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마샤는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부유한 상속녀가 됩니다. 당연히 그녀의 주위에는 청혼자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녀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블라디미르를 잊지 못하는 탓이라 생각합니다.

1812년의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나고 부대는 전선으로부터 후방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마샤의 영지에 어느 날 대령 부르민이 나타납니다. 그는 마샤의 영지 가까운 곳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분명히 서로 호감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웬일인지 두 사람 다 결정적인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부르민은 산책을 나왔다가 마샤의 영지 가까이 오게 되고 그녀가 정원에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부르민은 드디어 그동안 참아왔던 말을 꺼냅니다. 그녀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될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결혼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누군지 어디에 사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요? 부르민은 자신의 결혼에 대해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1812년이 막 시작되던 어느 날 부르민은 휴가를 나왔다 연대로 돌아가는 길에 엄청난 눈보라를 만나서 길을 잃고 맙니다. 그는 멀리서 불빛을 보고 그쪽으로 가까이 갔다가 교회를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 문은 열려있고 앞에 썰매가 대어져 있고 사람들이 조급하게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사람들은 그가 오는 것을 발견하고 다급히 그를 안으로 맞아들입니다. 그는 저도 모르게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마치 자신인 것처럼 행동하고 맙니다. 교회 안에는 젊은 귀족 아가씨가 앉아 있었고 부르민은 그 옆에 서게 됩니다. 그때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장난을 치고 맙니다. 결혼식이 끝나자 사제는 두 젊은이에게 입맞춤을 허락하고 그때야 아가씨는 부르민의 얼굴을 보게 되고 겁에 질려 “이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소리치며 기절하고 맙니다. 부르민은 그때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립니다. 당황한 사람들을 뒤로 하고 그는 정신없이 교회를 빠져나와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결혼했던 곳이 어디였는지도 모르게 된 것입니다...

부르민의 이야기를 들은 마샤는 깜짝 놀라며 그의 손을 붙들고 말합니다, “그게 당신이었군요! 저를 알아보시겠어요?”라고. 부르민은 창백해진 얼굴로 마샤의 발 밑에 무릎을 꿇습니다...

아마 두 젊은이의 미래가 행복한 것이 되리라고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말은 예기치 못한 반전이지만 저절로 미소를 짓게 하는 진심으로 행복한 결말입니다. 나탈리야와의 결혼을 앞둔 행복한 푸슈킨의 마음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지요. 이 짧고 위트 넘치는 이야기가 어떻게, 마음에 드시는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짦은 작품이 “모든 것이 다 있는” 푸슈킨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짤막한 사랑 이야기 속에는 당시의 시대정신에 대한 푸슈킨의 예리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1812년을 배경으로 눈보라 때문에 운명이 얽히게 된 세 젊은이의 운명은 푸슈킨 당대를 풍미하던 낭만주의 세계관의 문제의식을 조명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낭만주의에서 인간의 운명과 관련하여 주제화되었던 우연과 필연,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 등에 관해서 말입니다.

푸슈킨의 시대는 프랑스 혁명과 함께 바야흐로 자유주의와 낭만주의의 바람이 전 유럽 대륙에 불어오던 시기였습니다. 18세기의 계몽주의와 결정론적 세계관은 나폴레옹의 신화와 함께 인간의 운명이 신분이나 계급 혹은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낭만주의적 영웅의 개념에 의해 대체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의 운명과 세계의 발전은 이미 결정되어진 신의 섭리에 의한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한 사건들이 좌우하는 비결정적이고 예측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는 조국전쟁으로 나폴레옹에게 승리했지만 조국전쟁의 승리는 서구와 러시아의 교류를 확대시켰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나폴레옹이 전 유럽대륙에 ‘역병처럼’ 퍼뜨린 자유주의와 비결정론적 세계관을 러시아에도 전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운명과 우연,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낭만주의적 주제는 푸슈킨 역시 큰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인간의 윤리적 선택과 결정에 관해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푸슈킨의 개인적 삶에서도 엄청난 의미를 가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의 체험에서 보았듯이 말입니다. ｢눈보라｣는 바로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눈보라｣에서 제가 처음 시작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러면 푸슈킨은 그 많고 많은 ‘우연’한 사건 중 눈보라라는 우연을 택하였는지에 대해서입니다. 저는 여기에도 푸슈킨의 각별한 고려가 숨어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여러분의 삶에서 우연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혹은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만약 인간의 운명이 ‘우연’에 의해 결정된다면 혹은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우연은 어떤 것일까요?

우연은 무언가 대단하고 거대한 사건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우연히 만난 크고 거대한 사건이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놓는다면, 분명히 우연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 것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연히’ 만난 어떤 크고 굉장한 사건은 과연 단순히 우연히 벌어진 일일까요? 크고 거대한 사건은 결코 하루아침에 우연히 만들어진 일이 아니라여러 사건의 인과관계로 일어난 ‘필연적인’ 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변화를, 즉 낭만주의의 용어로는 운명을 만들어낸 것은 우연일까요, 아니면 필연일까요?

만약 그 우연이 아주 작은 일상적 사건이라면 어떻습니까? 여기서는 두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는, 삶에서 항상 일어날 수 있는, 혹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삶에서 반드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삶이 변화할 수도 있고 다른 이에게는 변화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일상적 우연에 의한 삶의 변화는 우연에 의한 것인가요, 필연에 의한 것인가요? 그렇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연이 우연으로 남는 것은 그 우연에 의해 삶이 변화하지 않은 사람에게서만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드는 생각은, 만약 내가 맞닥뜨린 우연이 일상적으로 흔히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그것을 과연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상적 사건에 의해 삶이 변화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필연이 아닐까요? 우리 삶이 언제나 변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것은 우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지가 싹트게 한 잠재력에 의해 변화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되면, 우연과 필연, 필연과 우연이 어느 것이 먼저인지 순서도 뒤섞이고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구별하기도 어렵게 됩니다. 우리 삶을 결정하는 것은 우연일까요, 필연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무엇이 우연이고 무엇이 필연입니까?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우연이냐 필연이냐의 문제가 푸슈킨에게 왜 중요했을까요? 그것은 우연과 필연의 문제는 곧바로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자유의지의 문제, 그리고 선택과 결단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푸슈킨이 이 작품에서 선택한 우연은 ‘눈보라’였습니다. 눈보라는 러시아의 겨울에 흔히 일어나는 일상적 사건입니다. 한겨울의 눈보라는 러시아인에게 그다지 놀라운 일도 흔치 않은 사건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한겨울 일상이나 다름없는 눈보라에 의해 삶이 얽힌 세 젊은이들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우연입니까 아니면 필연입니까?

일단, 먼저 블라디미르의 경우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마샤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전선으로 떠나 러시아가 나폴레옹과의 결전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보로디노 전투에서 전사한 블라디미르의 운명에 있어서는 눈보라라는 우연한 사건이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혹은 한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그가 초대를 거절하기 전 그의 운명은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원한 대로 마샤와의 결합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눈보라 때문에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물론 당연히 블라디미르는 마샤와 결혼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눈보라 때문에 길을 잃고 교회에 가지 못했어도 마샤의 부모님은 둘을 맺어 주기로 결심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처럼 이미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운명(마샤와의 결혼)이 필연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필연을 버리고 눈보라라는 ‘우연’이 정한 길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낭만주의적인 선택으로 보입니다. 즉 눈보라 때문에 결혼을 못했으니 나는 그녀와는 인연이 없는 운명인 것 같다, 그러니 억지로 인연을 엮을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했던 것인가요? 그는 한겨울 일상적인 우연일 뿐인 눈보라 때문에 자신의 운명을 바꿉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우연이 있습니다. 마샤의 부모님이 갑자기 결혼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신 것입니다. 이 또한 우연일 수도 있는데, 블라디미르는 왜 이 우연은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까?

이렇게 보면 블라디미르의 운명을 바꾼 것은 그 자신이기도 합니다. 마치 그는 우연이 만든 자신의 운명을 따라가는 듯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 반대로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운명을 선택한 것입니다. 겨울밤 흔히 일어나는 눈보라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늦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일은 드넓은 러시아의 평원에서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그러한 흔한 일상적 우연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였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오히려 우연이 우연으로 그치고 운명이 자신이 의도했던 방향으로 복귀하자 그는 오히려 뒤로 물러서 버립니다. 사실 그는 마샤와의 이별을 선택하고 결정한 것입니다.

저는 사실 블라디미르의 사랑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을 해 보게 됩니다. 블라디미르는 마샤와의 사랑에 의지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는 연인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난관과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과연 가지고 있었을까요? 블라디미르의 최후의 선택을 보면,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남자가 그깟 눈보라 때문에 비밀결혼 시도에 실패한 것을 ‘불길한 징조’로 보고 사랑하는 연인을 하루아침에 포기한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눈보라 때문에 교회에 가지 못한 것은 마샤를 떠나기 위한 오히려 좋은 핑계거리가 된 것이 아닐까요? 눈보라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마샤와 결혼했을까요?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행복했을까요? 어쩌면 그는 언젠가는 마샤를 떠날 운명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저의 억측이 아니라,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블라디미르의 사랑에서는 무언가 ‘사이비’의 냄새가 난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블라디미르와 마샤의 이야기는 흔히 읽는 낭만주의 연애소설의 줄거리에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여기서 무엇인가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바로 사랑을 방해하는 난관, 즉 여기서는 부모의 반대입니다. 하지만 마샤의 부모님은 이들의 사랑을 반대한 적도 없고 딸이 병이 나자 도리어 서둘러 결혼을 허락합니다. 왜 이들은 있지도 않은 ‘난관과 장애’를 미리 예상한 것일까요? 여기서 푸슈킨은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낭만주의자의 오류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마샤와 블라디미르는 마치 자신들의 연애를 낭만주의적 사랑의 클리셰로 ‘구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낭만주의 연애소설의 주인공들이라 생각합니다. 소설에서 사랑은 당연히 난관에 부딪치고 그러면 연인들은 그것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들도 사랑의 난관을 극복하려는 구상을 가지지만, 블라디미르는 실제로 난관에 부딪치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합니다. 이들이 낭만주의 연애소설의 클리셰로부터 예측한 난관은 눈보라 따위가 아니라 부모의 반대나 연적의 출현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들에게 다가온 난관은 참으로 어이없는 난관, '눈보라'였던 것입니다.

블라디미르가 깨닫지 못한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바로 현실의 삶입니다. 물론 모든 시대의 클리셰는 그 시대의 징후를 가집니다. 하지만 클리셰는 다만 비유이자 암시일 뿐, 실제 삶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한 것입니다. 블라디미르는 낭만주의 소설에 그려진 문학적 삶만을 알았을 뿐 현실의 삶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입니다. 저는 그가 현실에서 난관을 경험하자 그만 도망쳐 버린 것이라 생각합니다. 블라디미르는 어쩌면 마샤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소설에 그려진 낭만주의적 사랑을 사랑한 것이 아닐까요? 그는 낭만주의적 영웅, 나폴레옹의 신화에 의해 우상화된 자유롭고 스스로의 운명을 만드는 영웅을 ‘연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이 생깁니다. 블라디미르가 어떤 생각을 가졌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튼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결정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또 하나의 선택, 즉 마샤와의 사랑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부르민은 어떠할까요? 부르민의 운명을 만든 것은 우연입니까 아니면 필연입니까? 마샤를 처음 만날 때 부르민은 무심코 무책임한 장난을 치고 맙니다. 부르민 역시 우연이 운명을 지배한다는 당대에 유행하던 낭만주의적 행위 코드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는 눈보라 속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상황에서 자신의 배역을 연기합니다. 부르민이야말로 역시 우연에 온전히 몸을 맡긴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부르민의 낭만주의와 블라디미르의 낭만주의의 차이는 무엇에 있을까요? 작가가 여기서 냉정하게도 두 남자 주인공에게 너무나 다른 미래를, 즉 블라디미르에게는 전장에서의 전사를, 부르민에게는 행복한 재회를 선사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블라디미르는 낭만주의적 주인공이 되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운명을 결정하는 ‘우연’ 앞에서 달아나 버립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진정한 낭만주의적 영웅이었습니까? 푸슈킨이 비판하고자 했던 것은 낭만주의적 가치 자체가 아니라 낭만주의를 흉내내는 것, 낭만주의의 외관만을 취해 포즈를 취하는 것, 낭만주의를 연기하는 것, 즉 가짜(혹은 유사) 낭만주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블라디미르는 낭만주의의 가치를 내면화하지 못한 채 그야말로 낭만주의 ‘소설책에 따라 살기’를 했던 것입니다. 서구로부터 받아들인 사고와 삶의 방식을 내면화하지 못한 채 서구의 것을 배워서 얼른 흉내내야만 했던 급속한 서구화의 시대에 살았던 푸슈킨은 평생 이러한 ‘가짜’, ‘흉내내기’의 삶의 태도를 가장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작가로서 그는 이러한 부정적인 등장인물에 대해 상당히 가차 없는 냉정한 종말을 부여했습니다. 푸슈킨은 꼭 악인이 아니더라도 어리석거나 나이브하거나 또는 성숙치 못한 인물들을 결코 동정하지 않았고 상당히 현실적인 결과를 결부시켰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푸슈킨이 낭만주의를 넘어서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블라디미르는 전장에서 죽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블라디미르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전투 중의 하나인 보로디노 전투에서 죽었으니, 푸슈킨이 그나마 배려를 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예브게니 오네긴｣에서는 이러한 낭만주의 흉내를 내는 주인공 렌스키는 그만 결투에서 허망하게 죽고 마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그러나, 운명과 우연 앞에서 도망쳐버린 블라디미르와 달리, 부르민은 우연이 만들어낸 그러한 운명에 끝까지 충실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그에게 낭만주의적 기질은 있으나 낭만주의적 클리셰를 의식적으로 의도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는 스스로 낭만주의 영웅이 되고자 하지 않습니다. 부르민은 문학적 클리셰가 아니라 우연에 운명을 맡기고 운명을 따라가는 자신의 낭만주의적 기질, 즉 자신의 정체성 자체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푸슈킨은 그를 진짜 낭만주의적 주인공으로 그린 것입니다. 그는 ‘우연’한 결혼을 끝까지 자신의 운명으로 짊어졌고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도 그 운명을 책임지고자 합니다. 또한 그는 새로이 만난 연인 앞에서 이미 결혼한 몸이라고 체념하거나 달아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사랑을 인정합니다.

푸슈킨은 부르민의 이름을 통해 이러한 그의 정체성을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이름 “부르민”(Бурмин)에는 “부르-”(бур)라는 어근이 들어 있습니다. 이 어근은 러시아어 명사 “부랴”(буря)를 형성하는 것으로, “부랴”는 “거센 바람”, 혹은 “폭풍”을 의미합니다. 눈이 내릴 때 “부랴”가 같이 하면 눈보라가 되는 것입니다. 거센 바람 혹은 폭풍은 낭만주의 문학의 모토 “슈투름 운트 드랑”(Strum und Drang, 질풍노도)을 직접적으로 지시함으로써 부르민에게서는 ‘연기되는’ 낭만주의가 아니라 기질적인 낭만주의가 발견됨을 암시합니다. 부르민은 바로 “슈트룸 운트 드랑”이 주장했던 마성(魔性)과 본능에 의해 행동하는 힘을 내면에 간직한 진정한 낭만주의의 영웅인 것입니다. 블라디미르가 전사한 보로디노 전투에서 부르민은 살아 돌아왔다는 사실 또한 그의 영웅성을 뒷받침해줍니다.

이처럼 눈보라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르민의 이름은 이 작품에서 또 다른 암시를 가집니다. 부르민은 이름에 의하여 눈보라 그 자체와 동일시되면서 마샤의 운명 그 자체가 됩니다. 그야말로 눈보라가 마샤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인 동시에 그녀의 운명이 된 것입니다. 열렬히 사랑했던 연인이 운명으로부터 도망쳐버렸지만 절망하거나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또 다른 운명을 기다린 마샤에게 푸슈킨은 폭풍처럼 낭만주의적 열정에 가득한 연인 부르민을 선사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샤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부르민은 그녀에게는 필연적 반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삶의 눈보라, ‘우연’에 온 몸을 맡긴 부르민과 마샤, 우연이 결정지은 운명에 끝까지 충실하며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려 한 두 젊은이에게 작가 푸슈킨은 행복한 재회를 선사합니다. 이들의 ‘우연’에 대한 책임과 결단으로 인해 우연은 운명적인 ‘필연’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블라디미르의 경우 그 반대의 의미로 역시 우연이 운명적인 ‘필연’이 된 것이겠지요. 그는 낭만주의 영웅을 흉내내려 하다가 우연으로부터 달아났지만 정말 낭만주의 영웅인 바이런처럼 전쟁에서 전사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연과 필연은 그야말로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질풍노도의 낭만주의를 지나 성찰의 사실주의 시대에 접어든 푸슈킨이 깨달은 것은 삶이란 바로 이런 모순적인 것이라는 사실, 어떤 이념이나 원리에 가공될 수 없는 변화무쌍한 것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삶의 우연은 어떤 놀랍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나는 작은 사건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연이건 필연이건 인간이 삶에서 만나는 매 순간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에 대한 윤리적 결단이며 그것에 대한 책임이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저는 다시 푸슈킨에게 돌아가 보려 합니다. 우연과 운명의 주제는 푸슈킨 자신의 평생의 화두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데카브리스트 혁명에 참가하지 못한 것은 푸슈킨의 운명일까요? 친구들과 같이 하지 못한 푸슈킨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은 우연일까요 아니면 필연일까요?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길에 토끼가 나타난 우연한 사건이 푸슈킨의 운명을 결정지은 것일까요? 아니면 그는 토끼를 핑계로 자신의 운명을 바꾼 것일까요? 토끼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과연 페테르부르크로 갔을까요? 푸슈킨은 ｢눈보라｣에서 과연 누구를 통해 자신을 비추어보고 있을까요... 답변하기 간단치 않은 질문이지만, 사실 푸슈킨에게는 블라디미르와 부르민, 두 사람의 모습이 다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푸슈킨이 토끼를 보고 뒤돌아간 자신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원고와 책에 수없이 그려진 처형대의 그림이 그 증거일 것입니다.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행위로 나아가려는 윤리적 결단과 행위에 대한 책임,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운명의 본질일 것입니다.

푸슈킨은 두 번째로 만난 삶의 순간에는 우연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비록 결투의 패배로 죽음을 맞았지만 말입니다. 토끼를 보고 뒤돌아선 순간 이러한 죽음은 그의 운명에서 필연적인 것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죽음으로써 그는 비로소 진정한 러시아 낭만주의의 魂이 되었습니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러시아 문학노트]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4, 2015년 4월, 차지원,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사상노트/고전다시보기

월간 베스트 게시물

공지사항

이용약관| 개인정보 취급방침| 사이트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