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편에서 우리는 19세기 동학의 ‘하늘님 모심’의 교의가 20세기 초 천도교로의 개편에 즈음하여 ‘인내천’으로 전환되는 시대적 배경 및 그 사회사상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인내천 교의가 하늘님 모심과는 사뭇 다른 것일진대, 그것의 함의가 좀 더 체계적으로 설명될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에 인내천 교의의 철학적 함의가 초기에는 전통 성리학 및 불교의 개념들로 설명되는데, 그 대표작이 손병희의 <무체법경(無體法經)>이다.
전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하늘님 모심’에서 ‘인내천’으로 중심 교의의 전환이 갖는 주된 의미는 신의 초월성 및 자연 내재성이 크게 약화되고, 그 대신 신성(神性)의 인간 내재성이 크게 강화되었다는 데 있는데, 손병희는 위 저작에서 성리학의 이기(理氣)·심성(心性) 개념 및 마음(心)의 깨달음(覺)에 관한 불교의 사유를 활용하여 인내천 교의의 위와 같은 의미를 보다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어떤 면에서는 동학에서 전통사상으로의 퇴행이다. 후술할 터이지만, 19세기 동학이 그 본래적 의미로 풀어놓은 기(氣)를 다시 이기(理氣)의 범주 안에 가두어놓았다는 점, 최시형이 먹음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발견한 욕구·욕망의 신성성을 망각하고 그것을 다시 적절히 절제해야 할 소극적인 것으로만 간주한 점 등이 그렇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의 사상은 1920년대에 이돈화를 중심으로 서구 근·현대 철학적 개념을 원용하여 인내천 교의를 철학화하는 데 일종의 교량 역할을 한다. 손병희의 대아(大我)가 곧 한울이라는 관념, 한울 본체에 대한 직관과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함께 중시하는 수행방법론 등은 이돈화의 철학에서도 고스란히 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 때문에라도 손병희의 인내천 교의에 대한 철학적 설명은 주목되고 이해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
2.
손병희에게 인내천이란 주로 한울이 다른 곳이 아닌 인간 안에 내재함을 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우주·대자연이라는 측면에서 한울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자연존재의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한울을 생명-한울(性天)로 개념화했다. 그는 이 생명-한울의 운동은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천지가 소멸되는 순간까지 지속되는데, 이 생명-한울이 곧 ‘나(我)’이므로, 대자연의 생명운동은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에 이르러 끝을 맺는다고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性心辨」) 여기서 ‘나’란 타자와 구별되는 개별자로서의 ‘내’가 아니다. 최제우가 말했듯이 ‘나’는 태초부터 있었던 한울-생명이 끊임없이 이어져 탄생한 것이고, 비록 죽더라도 그것은 후손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렇게 모든 타자들과 하나로 이어진 ‘대아’는 곧 한울인 것이다. 이렇게 그는 성(性)을 한울(天)과 결합하여 생명-한울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토대로 ‘대아’가 곧 한울임을 논증할 수 있었다. 때로는 성(性) 개념 하나만으로 그것에 의해 몸과 마음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성이 있어야 몸(身)이 있으며 몸이 있어야 마음(心)이 있다”(「性心身三端」)는 말이 그것이다.
그렇지만 성리학에서 성(性)이 주로 개별자의 본성을 뜻했던 것처럼 그에게서도 성(性)은 주로 인간 내면의 한울 본체를 가리킨다. 일찍이 최제우는 하늘님이 몸에 내재한다는 점을 “안에 신령이 있다(內有神靈)”는 말로 표현한 바 있다. 손병희는 최제우가 말한 ‘신’과 ‘영’을 둘로 쪼개어 ‘영’을 ‘성’에, ‘신’을 ‘심’에 대입시켰다. 최제우의 신령이 성리학의 심성 개념으로 대체된 것이다. 그러고서는 ‘성’·‘심’을 다시 주자학의 ‘이(理)’·‘기(氣)’ 개념과 연결시켰다. 그는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 명제를 수용하여 한울 본체를 “텅 비어 있고(空空) 고요하며(寂寂) 끝이 없고(無邊) 움직임도 정지함도 없는(無動靜)”(「性心身三端」) ‘리’로 규정했다. 내면의 한울은 무욕의 평안한 상태이며 무궁하고 움직임과 정지함을 초월한 무한자라는 것이다. 그는 이 한울 본체인 성(性)이 표면적으로는 고요하지만 “자체 내에 (마음 기운)의 큰 활동을 일으킬 동력을 숨겨 두고 있다”(「神通考」)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이 한울 본체인 성(性)이 작용을 일으키면 마음(心)으로 전환된다고 했다. 또 마음은 현실세계에서 실제 작용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기(氣)로 규정되었다. 물론 이 마음은 의식 활동 일반의 총칭은 아니다. 한울 본체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이 마음은 한울-마음이라 할 만하다. 그런 의미에서 손병희는 이 마음을 “원만하고(圓圓) 충만하며(充充) 성대하고(浩浩) 활발하며(潑潑) 움직이고 정지해 변화함이 시의적절하지 않음이 없다”(「性心身三端」)고 묘사했다.
손병희가 위와 같이 내면의 한울을 한울 본체인 성(性)과 그 작용인 한울 마음(心)으로 구분한 까닭은 개인적으로 내면의 초월자인 한울 본체를 체험하는 일과 사회적으로 외부의 현실세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실천하는 일, 이 두 가지가 신앙인에게 모두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손병희의 말에 따르면 당시 동학을 믿는 이들 중에서 일부는 “성(性)의 권능”, 즉 내면의 한울 본체가 지닌 힘에 기대어 그것을 부단히 체험함으로써 자신이 “텅 비고 고요한” 무욕의 평안한 상태에 도달하려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일부는 “몸의 권능”, 즉 한울 본체의 작용의 흔적인 한울-몸·한울-마음이 지닌 힘에 기대어 현실의 문제에 적극 개입하되, 현실의 상(相)에 집착하는 걸림이 없이 만백성을 교화하려 했다고 한다. 손병희는 신앙인에게 이 둘이 모두 필요하다고 보았다. 전자는 한울 본체를 체험하는 일이고, 후자는 한울의 작용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몸이 세상에 발을 딛고 있는 동안에는 한울의 작용에 힘입어 살아가기 때문에 후자의 일에 힘쓰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성(性, 한울본체)이 몸으로 드러날 때 무형(無形)으로서 성과 몸 둘 사이에서 모든 이치와 모든 일을 매개하는 중추이다. 마음이 자취를 드러내는 것은 유정(有情) 공기에 의해 변화의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힘을 얻은 자는 유정천(有情天)에 의해 능력과 변화를 행할 수 있다. 자신에게서 성을 보는 자 또한 한울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데, 성을 보는 마음 또한 유정천으로 인하여 생기는 것이다. (「性心身三端」)
손병희는 마음이란 한울 본체가 몸의 생명세계로 자신을 드러낼 때, 본체와 몸 사이에서 몸이 행하는 모든 일이 한울의 뜻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중추적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울-마음으로 현실세계의 문제를 해결해나가려는 것이 신앙인의 중요한 사명이라 여겼다. 또 그는 이렇게 현실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 인식·실천이 ‘유정천’에 대한 보은이라는 의미를 띠기도 한다고 했다. ‘유정천’이란 중생-한울, 즉 생명-한울을 뜻한다. 사회 현실의 문제에 적극 개입하며 사는 신앙인이든, 개인적으로 내면의 초월자를 체험하려 노력하는 신앙인이든, 모든 사람은 생명-한울의 ‘먹여줌’에 힘입어 살아가고 있으므로, 현실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은 생명-한울에 대한 보은이라는 것이다. 최시형의 식(食) 사상에 근거해 신앙인들의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손병희가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 현실은 주로 사회현실이었지,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연은 아니었다. 20세기 초부터 천도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주어진 생명-한울의 힘에 기초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있었지, 최시형이 역설한 경물(敬物)에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기(氣)를 하늘님의 기운 혹은 대자연의 기운이 아니라, 주로 마음의 기(心氣)로 규정하고, 주자학적인 이기(理氣) 범주 틀에 기를 가둔 점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3.
기(氣)를 마음 안에 가두었다는 말은 그것의 본체인 한울이 몸 안에 갇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로 인해 동학의 하늘님이 지니고 있던 세 가지 존재방식의 의미 또한 변하게 된다. 손병희는 사람의 몸 안에 “텅 비고 고요한 무형천(無形天), 원만하고 충만한 유정천(有情天), 티끌이 자욱한 습관천(習慣天)”(「神通考」)이 있다고 했다. 얼핏 보면 이 세 가지 한울의 존재방식은 각각 19세기 동학의 초월적 하늘님, 기화(氣化)하는 하늘님, 그리고 몸 안에 모신 하늘님과 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손병희가 말하는 무형-한울(無形天)은 외재적 인격신이 아니라 내재적 초월자로서의 영(靈) 혹은 성(性)이다. 생명-한울(有情天)의 경우에는 생명운동을 하는 자연존재를 가리키기는 하지만 그것을 성의 작용인 심기(心氣)에 의해 포착되는 존재로 여긴다는 점에서 양자는 다르다. 욕망 추구가 습관화된 몸 안의 한울(習慣天)이라는 개념 역시 단순히 모든 사람이 자기 몸 안에 하늘님을 모셨다는 관념과는 다르다.
손병희가 말하는 한울의 세 가지 존재방식은 성(性)의 세 가지 모습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보다 명확히 이해된다. 그에게 ‘성’은 한울 본체를 가리키므로, ‘성’의 세 가지 모습은 한울의 세 가지 존재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는 성, 즉 한울 본체의 세 가지 모습을 각각 원각성(圓覺性)·비각성(比覺性)·혈각성(血覺性)이라 칭했다. 이 개념들은 유식(唯識)불교의 삼성설(三性說)에서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각각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원각성의 원(圓)은 무형-한울, 즉 한울 본체가 원만구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한울 본체는 일체의 마음과 형상으로 화할 힘을 자신 안에 간직하고 있다. 그 한울 본체가 작용을 일으켜 일체의 마음과 형상으로 현현된다. 한울 본체는 주관적인 마음이든 객관적인 현상이든 모든 것의 원인이자 결과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손병희는 “원각성은 만법(萬法)으로 인과(因果)를 삼아 (만물은) 함이 없이 (일체가) 이루어진다(無爲而爲)”(「三性科」)고 했다. 둘째로 비각성의 비(比)는 마음으로 생명-한울(有情天)의 의미를 추리 혹은 추론하는 것을 뜻한다. 주체와 객체의 분립을 전제로 만상은 무한히 인과관계를 맺는다. 그런 의미에서 손병희는 “비각성은 만상(萬相)으로 인과를 삼아 드러남에 정해진 양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마음이든 만상이든 일체는 궁극적으로 모두 한울-본체의 자기 현현일 뿐이므로, 그는 사람들은 바른 사고 훈련을 통해 마음과 만상 속에서 한울-본체를 직관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셋째로 혈각성의 혈(血)은 한울을 모신 ‘내’가 육신을 지닌 존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습관천(習慣天) 개념과 상응한다. 손병희는 육신을 지닌 존재는 다 자기중심성을 지녀 복을 구하고 화를 피하고자 하며, 이로 인해 선업도 짓고 악업도 짓는다고 했으며, 이 때문에 “선을 위해 세상에서 성과를 얻으려는 사람은 좋고 좋은 화두를 가려야 할 것”(「三性科」)이라고 했다.
이상에서 살펴본 한울의 세 가지 존재방식 혹은 성의 세 가지 모습에서 특별히 문제시되는 것은 세 번째의 습관천 혹은 혈각성이다. 간단히 말해 습관천이나 혈각성은 생명의 자기중심성을 뜻한다. 육신을 지닌 인간은 자기중심적이어서 물질적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고 이것이 습관화되어 오염된 존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그는 이 점을 아래와 같이 상세히 설명했다.
나에게 두 마음이 있으니 하나는 사랑하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미워하는 마음이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두 마음이 마음을 가림이 마치 티끌과 같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만물이 마음에 들어오면 자연히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사랑하고 미워함은 외물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예컨대 젖먹이가 눈으로 물건을 보고 좋아하는 마음이 발하여 기뻐하고 웃다가 물건을 빼앗으면 노하고 싫어하니 이것을 물정심(物情心)이라 부른다. 물정심은 제2의 천심(天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한다. (「眞心不染」)
위 인용문에서 손병희는 사랑과 미움의 감정은 외물에 감정이 이끌리는 데서 생겨난다고 말했다. 마치 불교의 가르침처럼 그것을 외물에 대한 애착 혹은 집착으로 간주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 마음을 물정심(物情心)으로 개념화했으며, 그것을 제2의 천심이라 했다.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제2의 천심이라면, 그것과 구분되는 제1의 천심은 사랑과 미움의 두 마음이 티끌처럼 가리는 ‘마음’, 즉 한울 본체일 것이다. 이렇게 그는 한울 본체와 물정심을 근본적인 제1의 천심과 부차적인 제2의 천심으로 구분함으로써 한울 본체를 부단히 체험하고 물욕을 절제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동양인에게는 매우 익숙한 사유이다. 즉 맹자가 타자를 위하는 본성과 자기중심성을 둘 다 본성으로 인정하면서도 양자를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으로 구분함으로써 절욕을 주장했던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이 그 자체로 문제될 것은 없다. 그렇지만 이는 동학의 사유 전통을 망각한 것이기도 하다. 동학에서는 모든 생명체의 ‘몸’에 하늘님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몸’을 욕망덩어리라기보다는 그것 자체로 신성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았다. 더욱이 생명체들이 먹고 먹히는 것조차도 단순히 자기중심적 욕망을 충족하는 것으로 보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국부적 차원의 운동이 거시적 차원에서 보면 하늘님 혹은 대자연의 자기희생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음을 발견했다. 아쉽게도 손병희는 동학의 이런 사유 전통을 망각하고, 한울 본체와 생명의 자기중심성을 분절적으로만 이해했던 것이다.
다음 편부터는 인내천 교의를 철학화한 이돈화의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7, 2015년 7월, 황종원, 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