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10-01 10:35
노자 다시보기(9): 삼감(愼)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26,335  


노자 다시보기 (9): 삼감(愼)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道)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로 신중함(愼)의 태도에 대해서 자주 거론하고 있다.

15-3: 豫焉若冬涉川。
주저하니 마치 겨울철 강을 건너는 듯하다.

‘豫(예)’는 본래 ‘덩치가 매우 큰 코끼리’를 가리킨다. 겨울철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너려는 코끼리는 과연 성큼성큼 강을 건널까, 아니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발걸음을 뗄까? 따라서 노자는 “주저하니, 이는 마치 덩치가 대단히 큰 코끼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겨울철 강을 건너는 듯 신중하고도 또 신중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울러서 이처럼 [도덕경]의 거의 모든 구절은 직설화법이 아니라, 수사법(修辭法)을 최대한 활용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5-4: 猶兮若畏四鄰。
망설이니 마치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하다.

‘猶(유)’에는 원숭이라는 의미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원숭이는 하루의 대부분을 나무 위에서 지내고, 거의 땅으로 내려오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가령 땅바닥에 바나나가 떨어져 있고, 원숭이 한 마리가 그것을 발견했다고 가정해보자. 그 원숭이는 태연자약하게 나무에서 내려와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자리에서 바나나를 까먹을까, 아니면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다가가 조심스레 바나나를 집고는 재빨리 다시 나무에 오를까? 따라서 노자는 말한다. 망설이니, 이는 마치 의심이 많고 조심스러운 원숭이가 주변을 살필 때마다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신중하고도 또 신중하다고. 

나아가 위의 ‘猶(유)’와 ‘豫(예)’를 합치면 오늘날의 “유예” 즉 “신중하여 함부로 결정하지 못하다.”라는 뜻이 되니, ‘집행유예’ 판결이 지니는 신중함의 취지를 다시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6-1: 重為輕根,靜為躁君,是以聖人終日行,不離輜重。
진중함은 경솔함의 뿌리이고, 고요함은 조급함의 군주이라서, 이 때문에 성인은 온종일 길을 가지만, 군수물자를 실은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군수물자를 실은 무거운 수레는 전쟁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밥을 짓는 도구들과 무기가 실려져 있기 때문이니, 군인이 굶주리며 싸울 수 있을까? 무기 없이 싸울 수 있을까? 따라서 노자는 여기서도 수사법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 진중함이라는 것은 경솔함보다 중요하므로 모든 일의 바탕이 되고, 고요함이라는 것은 조급함보다 중요하므로 모든 일을 지배한다. 따라서 참된 지도자들은 이처럼 일생동안 진중함을 떠나지 않고 삼가여 지내는 것이라고.

26-2: 雖有榮觀,燕處超然。
설령 영화로운 환경이 있더라도, 편안하게 처하여 초연하다. 

따라서 참된 지도자들은 지도자의 자리에 있지만, 그 지위나 부귀영화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이 부여한 천성에 따라 마음을 편하게 하여 초연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26-3: 奈何萬乘之主,而以身輕天下?
어찌 대국의 군주일진데, 그런 신분으로 세상을 경솔히 대하겠는가?  

참된 지도자들은 이처럼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나라를 다스렸으니, 사방을 다스리는 천자의 자리에 있는 지도자가, 어찌 세상을 경솔하게 다스릴 수 있겠는가? 

노자는 이 구절을 통해서 상고시대 지도자들의 치세 태도를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자가 처한 주나라의 혼란스러움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나아가 지도자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6-4: 輕則失本,躁則失君。
경솔하면 근본을 잃고, 경박하면 군주의 지위를 잃는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가 경솔하면 근본 즉 진중함을 잃게 되고, 경박하면 고요함을 잃게 되어서, 결국 그 지도자의 지위마저도 잃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역사적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지도자가 항상 노력하고 삼가지 않으면 군주의 자리를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라를 잃을 수 있음을 깨닫고, 이와 같이 경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8-4: 是以聖人方而不割,廉而不劌,直而不肆,光而不耀。
이 때문에 성인은 바르지만 남을 상하게 하지 않고, 청렴하지만 남을 다치게 하지 않으며, 솔직하지만 제멋대로 하지 않고, 빛나지만 과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태평성대를 이끈 옛 지도자들은 반듯했지만 그로 인해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고, 삼가 검소하게 생활했지만 그로 인해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굳세고도 당당하게 몸을 폈지만 방자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를 조화롭게 했지만 그러한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지도자가 반듯하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사진 한 장을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jpg

두 여인이 우아한 카페에서 차 한 잔을 마시며, 밖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과연 이 두 여인의 행위는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일까? 언뜻 보기엔, 이들의 행위는 그 누구에게 어떠한 피해도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밖에 드러누워 잠을 청하는 한 남성의 상황과 대조시켜 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즉 이는 상대적 박탈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니, 상고의 참된 지도자들은 행여나 자신의 의도치 않는 태도로 인해 백성들이 피해를 입을까봐 더욱 신중을 기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60-1: 治大國若烹小鮮,以道莅天下,其鬼不神。
대국을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굽는 것과 같으니, 도를 가지고 세상에 임하면 흉계가 오묘해지지 못한다. 

노자는 지도자의 신중한 태도를 생선을 굽는 것으로 빗대어 설명하기도 한다. 큰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구울 때처럼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생선을 급하게 익히려들면 태우기 십상이므로, 천천히 세심하게 구워야 골고루 제대로 익힐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규모가 큰 나라는 섣불리 달려들었다가는 마치 생선이 타버리는 것처럼 일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에, 신중에 또 신중을 기울어야 하니, 이러한 참된 지도자의 통치이념인 도(道)로 나라를 다스리면 간사한 계략이 통하지 않는다.

63-5: 夫輕諾必寡信, 多易必多難。
무릇 쉬이 승낙하면 반드시 신용이 적어지고, 지나치게 쉽게 보면 반드시 재난이 많아진다.

결국 지도자가 쉬이 승낙하게 되면 나중에 백성들이 그를 믿지 못하게 되고, 일을 하찮게 여기면 나중에 더 큰 재난이 계속해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노자는 또한 신중함을 지키는 자세로서 유비무환의 태도를 언급하고 있다.

64-1: 其安易持,其未兆易謀,其脆易泮,
그것이 안정적일 때 유지하기 쉽고, 그것이 징조를 보이지 않을 때 도모하기가 쉬우며, 그것이 무를 때 해소하기가 쉽고, 그것이 미약할 때 없어지기가 쉬우니, 있기 전에 그것을 처리하고, 혼란스럽기 전에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상황이 안정적일 때 유지하기 쉬운 법이고, 사건이 아직 어떠한 징조를 보이지 않을 때 일을 도모하여 준비하기가 쉬우며, 사물이 아직 굳지 않고 무를 때 녹이거나 풀기가 쉽고, 일이 아직 커지지 않고 미약할 때 사라지기가 쉬우니,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그것을 처리하고, 세상이 동요하기 전에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64-2: 合抱之木,生於毫末。九層之臺,起於累土。千里之行,始於足下。
아름드리의 큰 나무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 생겨난다. 구층의 누각은, 흙을 쌓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천리 길을 가는 것은 발아래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는 작은 묘목에서부터 크는 것이다. 높은 누각은 흙을 쌓아 기초를 다지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다. 천리 길을 가려면 먼저 첫 걸음을 떼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층의 九(구)는 여기서 구체적인 숫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예로부터 三(삼), 九(구), 十(십), 百(백), 千(천), 萬(만)으로 ‘多(다)’ 즉 많거나 ‘高(고)’로 높음 혹은 ‘大(대)’ 크다는 의미를 간접적으로 드러냈으니, 공자의 “三人行, 必有我師.(삼인행, 필유아사.)”는 사실상 “세 명이 걸어가면, 그 안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가 아니라, “많은 이들이 함께 있으면, 그 안에는 반드시 내가 스승으로 삼을 만한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라는 뜻으로 풀이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지 않는가? 많은 이들과 함께 있으면, 그 안에는 내가 닮고 싶어하는 ‘정면교사(正面敎師)’와 닮고 싶지 않은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반드시 공존한다는 사실을. 아울러서 우리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격언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역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자의 이러한 ‘삼감(愼)’의 도리는 노자가 스스로 깨우쳐 만들어낸 개념일까?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윤이 말했다: “백성의 일을 가벼이 여기지 말고 어려움을 생각하며, 그 지위를 편안하게 여기지 말고, 끝을 삼가려면 시작부터 삼가야 합니다.” [尙書(상서)] <太甲下(태갑하)>

군자의 도는, 비유컨대 멀리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데서 시작해야 하는 것과 같고, 비유컨대 높이 올라가려면 반드시 낮은데서 시작해야 하는 것과도 같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이윤(伊尹)은 상(商)나라 탕(湯) 임금을 보필하여 세상을 안정시킨 인물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우리는 노자가 피력하고자 한 도리는 기실 노자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노자 이전부터 널리 알려진 도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즉 노자의 [도덕경]을 통해서 드러나는 일련의 가치관들은 노자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단지 노자라는 인물을 통해서 재정리되어 후대로 전해진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노자 다시보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10, 2015년 10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

 
   
 

사상노트/고전다시보기
  • 사회과학
  • 인문학
  • 자연과학
  • 논픽션
  • 픽션

월간 베스트 게시물

  • 중국, 중국인 이야기(2): 키신저의 …
  •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2): 후쿠…
  • [정신영의 사람 이야기] 봄이 오면
  • 지제크의 <신을 불쾌하게 하는 …
공지사항
  • 1 아포리아 북리뷰(Aporia Review of Books)
  • 2 궁금하신 사항은 언제든지 문의하여 주시기 바…
이용약관| 개인정보 취급방침| 사이트맵

Copyright (c) 2013 APORIA All rights reserved - www.apor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