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는 <강의>에서 이렇게 밝힌다. “나는 전인미답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내게 곤란함과 어려움을 가져다준다면, 이것이 또한 내게 나의 이러한 노고의 목적을 너그럽게 고려하는 사람들을 통해 보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말이다(Discorsi, 1.proemio (1)). 그리고 그는 이러한 시도가 매우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것은 “인간의 시기심이 미지의 해양과 땅을 찾는 것만큼 새로운 방식과 질서를 찾는 것을 위험하게”만들기 때문이라고 부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공공선’(comune benefizio)이다. 즉 이러한 시도가 모두에게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Discorsi, 1.proemio (1)). 그리고 “시류와 운명의 사악함(la malignità de’ tempi e della fortuna)으로 인해 당신이 할 수 없었던 좋은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좋은 사람의 의무(offizio di uomo buono)”라고까지 말한다(Discorsi, 2.proemio (25)).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기대는 최초부터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저작들이 동시대인들로부터 받을 홀대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실직하기 훨씬 전부터 그의 주장들은 동시대인들의 상상력을 훨씬 넘어선 것들이었다. 그의 친구 카싸베키아(Casavecchia)가 그를 ‘위대한 예언가(maggiore profeta)’라고 추켜세웠듯이, 그의 이야기를 이해할 동시대인들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17 Giugno 1509). 그의 생각을 이해했다고해도, 피렌체 귀족들이나 유력가문의 자제들에게 그는 ‘다른 생각’(contraria professione)을 하는 이방인일 뿐이었다(Guicciardini a Machiavelli, 17 Maggio 1521). 비록 자신의 예견된 실패를 ‘옛 방식들의 자취(ombra)’ 속에 감추었지만, 그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그러기에 너무나도 혁명적인 ‘시민적 삶’(la vita civile)에 대한 이야기를 받아들이기에 기독교와 인문주의의 벽은 그토록 공고했다.
2.
그래서인지 마키아벨리는 거듭 ‘우리 시대의 현인들’(savi de’ nostri tempi)의 안일함을 비난한다(Principe 3.(8)). 그리고 ‘헛된 상상’과 잘못된 정치와 도덕의 함수관계로부터 벗어나야한다고 역설한다(Principe 15(3)-(5)).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맥락만 강조하면서, 마키아벨리를 칼 슈미트보다 더 극단적인 형태의 ‘정치’와 ‘도덕’의 구분 또는 전자의 후자에 대한 우위를 주장한 사상가로 치부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평가가 낯설지도 않다. 정치는 ‘비도덕적이지는 않아도, 몰도덕적인 독립된 판단근거’를 갖는다거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로 그의 견해를 축약하는 경우를 자주 목도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술 어디에서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아울러 그는 정치와 도덕의 합일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현상유지가 가져올 이익을 지키려는 귀족의 정치적 선전으로 비춰졌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 즉 ‘미덕이 악덕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했다는 이유로 당시 지배적인 도덕적 훈계와 종교적 가르침을 ‘비(非)지배 자유’라는 새로운 ‘공공선’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폄하하는 것은 곤란하고,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정치의 도덕에 대한 우위나 정치적 자율성에 대한 주장으로 단순화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것이다(Principe 15(12)).
특히 ‘특별히 호소할 법정이 없는 통치자의 행동에 있어, 사람들은 결과를 본다(si guarda al fine).’는 말에 내재된 정치철학자의 고민을 ‘결과가 좋으면 모두 괜찮다.’는 식의 단순한 결과주의로 축소할 수만은 없다(Principe 18(17)). 정치적 행위의 평가에 당시 지배적인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새로운 잣대의 판단기준을 제시하려던 그의 노력을 정치와 도덕의 분리 또는 정치적 영역의 독립으로 쉽게 치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3.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부딪히게 되는 첫 번째 문제점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에서 무엇이 그리도 새롭냐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적 본성’과 ‘비(非)도덕’ 또는 ‘몰(沒)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댄다. 그러나 ‘이기적 본성’이나 ‘인간의 악한 본성’은 이미 중세 천년을 지배했던 ‘기독교’의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이고, ‘정치 공동체의 존속’이라는 이유에서 통치행위는 일반적 도덕률에 저촉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마키아벨리의 전유물이 아니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성으로 억제할 수 없는 인간의 ‘지배욕’(libido dominandi)이 있음을 경고했고(Augustine, De Civitate Dei 3.14), 키케로는 공화정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을 때 ‘공중의 안전’(salus populi)에 대한 호소만으로도 정당화될 수 있는 정치적 행위가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했다(Cicero, De Legibus 3.3).
물론 마키아벨리가 ‘반(反)기독교’이고 ‘반(反)인문주의자’였다고 확신하면 기독교적 인식론이든 인문주의적 정치관이든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 내재된 ‘반(反)기독교’적 특징을 그가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철학자들이 공유했던 인식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거나, 인문주의자들이 열정적으로 모방했던 키케로나 살루스티우스의 공화주의자로서의 ‘진정한 길’(vera via)을 버리고 ‘힘’과 ‘권력’만을 강조했던 현실주의자였다고 단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크지 않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는 비록 ‘반(反)기독교적 태도’를 견지했지만 ‘종교’의 정치사회적 기능을 완전히 부정한 적도 없고, 아울러 그리스와 로마의 정치철학자들과는 달리 이성으로 절제할 수 없는 ‘지배욕’의 실질적 힘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비록 그 누구보다 ‘힘’에 대한 통찰력을 강조한 정치 철학자였지만, ‘힘’의 우위에 좌우되지 않는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고, 동시에 고전적 공화주의가 주창했던 ‘정치적 삶’(vivere politico)의 복원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기독교와 인문주의라는 당시 지배담론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저항논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4.
구체적으로 최소한 두 가지 문제는 짚고 넘어가야한다. 첫째는 마키아벨리가 당시 정치와 도덕의 상관관계에 대한 지배적인 견해들을 어떻게 반박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둘째는 그에게서 정치와 도덕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일관된 판단근거, 그리고 이러한 판단근거에 기초해서 정치와 도덕의 긴장을 조정하는 원칙이 존재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여기에서는 첫 번째 문제를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이 당시 기독교의 가르침과 인문주의 지배담론에 대한 저항을 통해 살펴보고, 두 번째 문제는 ‘비(非)지배 자유’를 정치적·도덕적 판단근거이자 정치와 도덕의 갈등을 조정하는 원칙으로 제시하는 마키아벨리의 ‘약한 결과주의’로 대답해보려고 한다.
*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copyrights@aporia.co.kr([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6, 2014년 6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