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최시형의 천지 관념은 천지를 부모에 유비하는 전통유학의 그것을 계승한 것이되 보다 직접적으로 그것은 최제우의 천주 관념이 자연의 영역에서 지니는 의미가 심화·발전된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런데 이러한 계승관계는 하늘님 공경에 관한 생각의 발전과정에서도 똑같이 맺어진다. 즉 그것은 동양의 오래된 상제에 대한 공경 혹은 경천(敬天)에서 출발해 최제우에 의해 하늘님에 대한 공경으로 전환되고 다시 최시형에 의해 하늘님, 사람, 자연에 대한 공경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전통유학에서 하늘에 대한 공경(敬天)은 상제에 대한 공경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의 아주 오래된 고전인 <상서>에는 “공께서는 하늘이 내려준 복을 신중히 생각해 낙읍에 와 궁실의 터를 살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洛誥」)라는 말이 나온다. 하늘이 인간에게 복을 내리는 인격신으로 생각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동양에서 인격신으로서의 상제는 일찌감치 그 중심적 지위를 상실하고 인간이 지닌 덕이 상제의 위치를 대신하게 된다. <상서>의 다른 기록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저는 은나라가 천명을 받아 오랜 세월 존재했는지 알지 못하고, 그것이 오래 지속될 수 없었음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덕을 공경하지 않았기에 일찌감치 천명을 잃게 된 것입니다. …… 그러므로 오직 왕께서는 신속히 덕을 삼가 행해야 합니다. 왕께서 덕을 행해야만 하늘의 영구한 명을 바랄 수 있습니다.”(「召誥」) 국가권력의 획득과 유지는 초월적 인격신에 의해 부여되고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에 기반을 둔 정치를 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믿고 힘써야 할 것이 외재적 인격신에서 내재적 덕성으로 바뀌면서 공경해야 할 대상 또한 하늘에서 인간으로 그 중심이 이동된다. 하늘을 공경하는(敬天) 신앙에서 사람을 공경하는(敬人) 인본주의적 윤리로 점차 변한다.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는 것이 하늘의 뜻은 백성의 마음을 통해 드러나므로 군주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맹자의 논리이다. 동양 전통사회에서 하늘은 말씀으로 직접 계시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의 뜻은 자연의 운동이나 백성의 마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날 뿐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맹자는 순임금의 권력 획득이 제사나 대민(對民) 사업의 성공적 주관으로 그 정당성을 획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순임금에게 제사를 주관하게 했더니 자연재해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고 제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순에게 일을 주관하게 했더니 일이 잘되어 백성들이 편안해했다”(<孟子> 「萬章上」)는 것이다. 여기서 순임금이 쥔 권력의 합법성은 실질적으로는 백성의 인정으로부터 나왔으니, 군주가 주로 위해야 할 대상은 하늘이 아닌 백성이라 하겠다.
군주가 백성을 위하려면 내면의 덕성을 기르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 이 논리적 전제인 덕성함양이 유교경전 대학에서는 군주뿐만 아니라 백성 또한 행해야 할 실천적 과제로 제시된다. 수신(修身)이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송 대에 이르러 이 수신은 내적인 덕성수양과 외적인 공부에 관한 방법 제시로 체계적 과제 수행의 전기를 맞이하는데, 이때부터 경(敬)은 덕성 수양의 중요한 방법으로 그 의미가 다시 한 번 변모된다. 즉 그것은 정이(程頤)에 의해 의식을 “한 곳에만 집중하면서(主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無適)”(<二程遺書> 권15) 방법으로 그 의미가 변형되어 주자학의 내면 수양방법으로 계승된다.
2.
이렇게 동양 전통사회에서 수 천 년 동안 인본주의적 입장에서 혹은 내면 수양의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온 경(敬)은 근대 한국사회에서 최제우에 의해 다시 한 번 일대 의미전환을 이루게 되는데, 이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물론 그와 인격신인 하늘님과의 조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제우가 만난 하늘님은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말씀을 통해 직접적으로 자신의 뜻을 전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이런 계시적 성격을 띤 하늘님에 대한 공경은 일반적으로는 원시종교적인 상제 숭배로의 복귀나 천주학의 초월적 천주 공경으로 나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최제우의 하늘님 공경은 그런 초월적 신에 대한 경배와 찬미의 성격을 강하게 띠지 않았다. 그가 공경의 대상으로 강조한 것은 신령(神靈)의 형태로 내면화된 하늘님과 기화(氣化)의 형태로 자연화된 하늘님이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를 믿지 말고 하늘님을 믿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취한단 말인가?”(<용담유사> 「교훈가」) 동학을 하는 이들이 믿고 공경해야 할 대상은 자신 안에 내재된 영으로서의 하늘님이라는 것이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날마다 먹는 음식에 대해 정성(誠)과 공경(敬)이라는 두 글자의 원칙을 지켜 하늘님을 공경하면 어렸을 때부터 있던 몸의 병도 약 없이 저절로 효과를 나타낼 것이다.”(<용담유사> 「권학가」) 날마다 먹는 음식에 하늘님의 기운이 깃들어 있으니 정성을 다해 밥을 짓고 경건한 마음으로 밥을 먹는 것이 곧 하늘님을 공경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최제우는 공경의 주된 대상을 내면의 영과 자연 안의 생명으로 삼았기 때문에 전통유학의 경천(敬天) 관념과 서구의 천주 공경 방식을 아래와 같이 비판할 수 있었다.
우리 동방의 현명한 사람과 총명한 선비들을 도덕군자라고 부르지만, 무지한 세상사람, 아는 것이 천지지만 경외하는 마음 없었으니, 아는 것이 무엇인가. 천상의 상제님이 옥경대에 계신다고 본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의 이치는 고사하고 허무한 말 아닌가. (<용담유사> 「도덕가」)
인용문의 앞부분에서 최제우는 전통적으로 유학자들이 천명(天命)·천도(天道)·천리(天理) 등의 개념으로 천지에 대해 사유하고 토론하고 이해해왔지만 대자연에 대한 경외를 논의의 중심에 놓고 그것을 윤리적 요구의 핵심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고 비판한다. 뒷부분은 표면적으로는 도교의 상제 관념에 대한 비판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천주가 천국을 주재한다고 말하는 천주학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상제가 천상에 계신다는 것은 감각적으로 지각되지 않을뿐더러 상제를 음양의 이치·기운으로 운동하는 자연과는 아무 관계없이 어느 먼 곳에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천주학은 허무한 학설이라는 것이다.
3.
위와 같이 최제우에 의해 새롭게 정립된 하늘님 공경의 교리는 최시형에 이르러 한층 더 상세하게 설명됨으로써 그 의미가 더욱 구체화된다. 그 설명은 아래 세 가지 내용을 포함한다.
첫째,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이 천상의 어느 곳에 있다고 간주되는 상제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영을 공경하는 것을 뜻한다는 최제우의 생각을 최시형은 그대로 수용한다. 그는 최제우보다 더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하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결단코 허공을 향해 상제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을 공경하는 것이 곧 하늘님을 공경하는 길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해월신사법설> 「삼경」) 덧붙여 그는 하늘님 공경이 진리에 대한 추구와 깨달음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내 마음속 하늘님을 공경하면 ‘나’ 자신과 하늘님이 하나로 연결되어 자신이 이 세상에 잠시 왔다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존재임을 알고, 타인과 자연 안의 모든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하늘님을 자신 안에 모신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며, 이로부터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실천에 나설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최시형은 모든 사람이 내면에 영으로서의 하늘님을 모신 존귀한 존재이므로 타인을 하늘님처럼 공경해야 한다는 최제우의 사상을 계승하여 하늘님 공경(敬天)은 반드시 타인에 대한 공경(敬人)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특히 민중·어린이·여성 등 근대 이전에 핍박받던 약한 존재를 공경할 것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최시형에게 하늘님 공경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중차대한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아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앎일 뿐이다. 앎은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하늘님 공경과 타인 공경을 농사의 이치를 아는 것과 실제로 농사를 짓는 것에 비유한다. 농사짓는 법을 아는 것만으로 실제 농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타인을 공경하는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하늘님 공경은 인간 삶에 아무런 실제적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관념일 뿐이다. 반면 타인을 공경하는 직접적 행동은 사회적 관계를 조금씩, 그러나 파격적으로 변화시킨다. 최시형에게서 그런 관계의 파격적 변화는 전통사회에서 천대받고 무시되었던 존재들을 하늘님으로 공경함으로써 일어났다. 적서의 차별과 반상의 구별을 집안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는 근본이라 비판하며(<해월신사법설>「포덕」) 동학도 사이에서는 모든 신분적 차별을 일소한 점, 어린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하늘님을 때리는 것이라 하며 어린아이를 소중히 여길 것(<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을 주장하여 훗날 1920년대 어린이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점, 동학도 서택순의 며느리가 베 짜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는 며느리 베 짜는 소리가 아니라 하늘님이 베 짜는 소리라 하여 여성 또한 하늘님처럼 존귀함을 선언한 점(<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등이 그것이다.
셋째, 최시형은 하늘님이 자연의 영역에서 자신의 기운으로 만물을 생육하는 생명운동을 한다는 최제우의 ‘하늘님-기화(氣化)’ 관념에 근거하되 이로부터 생명에 대한 경외(敬物)의 윤리를 도출해낸다. 최시형은 인간만이 하늘님을 모신 존귀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생명이 다 그렇다는 의미에서 새 소리도 하늘님을 모시는 소리라고 말했다.(<해월신사법설> 「영부주문」) 또 이렇게 모든 생명이 다 하늘님처럼 존귀하기 때문에 생명을 함부로 해쳐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모든 생명이 다 하늘님을 모신 존재라는 이치를 안다면 살생은 억지로 금하지 않아도 저절로 금지될 것이라고 했다.(<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심지어 최시형은 생명에 대한 경외, 즉 경물(敬物)이 도덕의 극치라고까지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사람을 공경하는 것만 가지고는 도덕의 극치가 되지 못한다. 거기서 나아가 생명(物)을 공경함에까지 이르러야 천지 기화(氣化)의 덕에 합일될 수 있다.” (<해월신사법설> 「삼경」) 타인을 공경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생명을 공경해야 비로소 최고의 도덕을 성취한 것이라 말하는가? 하늘님 혹은 천지-부모의 생명운동에는 인간을 포함해 모든 생명체가 갖는 자기중심성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님 혹은 천지-부모는 어떤 구별·차별도 없이 모든 생명을 생육한다. 인간의 타자 공경도 어떤 구별도 차별도 없어야 최고의 공경이라 할 수 있다. 최시형이 생명에 대한 경외를 최고의 도덕이라 한 까닭이다.
그밖에도 최시형은 전 편에서 살펴본 대로 전통적인 천지-부모 관념을 계승하면서도 어머니-자연의 의미를 훨씬 더 강조했는데, 이러한 경향이 경(敬)에 대한 논의에서는 땅에 대한 경외(敬地)로 이어진다. 땅을 어머니에 비유하며,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니 살결을 대하듯이 하라는 최시형의 아래 발언을 보라.
우주에 가득 찬 것은 모두 혼일한 기운이니, 한걸음도 가벼이 내디딜 수 없다. 내가 한가하게 있을 때 어느 한 아이가 나막신을 신고 내 앞을 지나갔는데, 그 소리가 땅을 울렸다. 나는 놀라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 아이의 나막신 소리에 내 가슴이 아프다. 땅을 아끼기를 어머니 살결 대하듯 해야 한다. 어머니의 살결이 중한가? 아니면 버선 하나가 중한가? (<해월신사법설>, 「대인접물」)
땅에 대한 공경이 어머니 살결을 대하듯 하는 수준에 이른 위 발언에서 우리는 최시형의 남다른 예민한 감수성을 읽어낼 수 있다. 요컨대 동학의 하늘님 공경은 내면의 영적 하늘님에 대한 공경으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것과 그렇게 얻은 깨달음이 타인과 다른 생명에 대한 실제 공경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점을 포함하고 있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10, 2014년 10월, 황종원, 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