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2-23 12:34
노자 다시보기(2): 솔선수범(率先垂範)의 미학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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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다시보기(2): 솔선수범(率先垂範)의 미학 

노자는 3장 첫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3-1: 不尚賢,使民不爭。不貴難得之貨,使民不為盜。不見可欲,使民心不亂。
재물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이 다투지 않게 할 수 있다. 희귀한 물품을 귀히 여기지 않으면, 백성이 도둑질하지 않게 할 수 있다. 욕망을 일으킬만한 일을 접하지 않으면, 민심이 동요하지 않는다.

지도자가 재물을 축적하는데 급급해하지 않으면, 백성 역시 서로 가지려고 다투지 않게 된다. 지도자가 진귀한 물건을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백성 역시 이를 본받아 도둑질하지 않게 된다. 지도자가 사리사욕에 집착하지 않고 욕망을 일으킬만한 일을 접하지 않으면, 지도자를 신뢰하고 따르게 됨으로써 민심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여기서 민초(民草)의 의미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민초란 “백성을 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季康子問政於孔子曰: "如殺無道,以就有道,何如?" 孔子對曰: "子爲政,焉用殺? 子欲善而民善矣。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草上之風必偃。"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묻기를: “만일 무도한 사람을 죽여, 도가 있도록 이루면 어떻겠소?” 공자가 대답하시기를: “그대는 정치를 함에, 어찌 죽임을 사용하십니까? 그대가 선을 행하고자 하면 백성이 선을 행할 것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입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쓰러지는 법입니다.” [論語(논어)] <안연(顔淵)>

노나라 임금인 애공(哀公)의 권력을 능가하여 당시 나라를 쥐락펴락하던 계씨가문의 경(傾)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만약 강력한 법으로 백성을 통제하고 이를 어기면 엄벌에 처함으로써, 백성들이 이에 겁을 먹고 바르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공포정치를 행하면 어떻소?” 그러자 공자가 대답했다. “그러한 엄격한 법치는 오래갈 수 없으니, 먼저 지도자가 올바른 길을 걸어야 백성 역시 지도자를 믿고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지도자가 바람이라면, 백성은 그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기울어지는 풀인 민초인 것입니다.”(이 구절은 필자의 저서 [논어 -안 될 줄 알고도 하려는 사람인가]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혀둔다.)

결국 민초(民草)란 지도자라는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꺾이는 풀과도 같은 존재가 백성이라는 말이니, 필자 개인적으로는 사전적인 의미보다 공자의 민초에 대한 설명이 더욱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그림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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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지도자가 있다. 그녀는 호화로운 삶을 누리면서 외출할 때마다 멋진 고급차를 타고 다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런 그녀의 삶을 매일 마주하게 되는 서민계층의 한 아낙이 있다. 그렇다면 이 아낙은 저 멋진 고급차를 바라보면서, “저건 내 삶이 아니니까, 나와는 상관없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아, 부럽다! 나도 저런 차를 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할까? 나아가 이 아낙의 경제적 구매능력이 없다면, 그냥 거기서 포기하고 말까? 아니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떡해서든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할까?

‘베블런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기능적으로는 동일한 상품에 대해 소비자가 높은 가격을 기꺼이 지불하려는 행태로서, 이는 통상 차별화 과시의 욕망에서 나온다. 또한 ‘밴드웨건 효과’라는 용어도 있는데, 유행에 따라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현상과 형태로서, 한 소비자가 어떤 재화를 소비 할 때 다른 소비자들이 그 재화를 많이 소비하는 데서 영향을 받아 소비하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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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서민경제를 이해하기 위한 차원에서 한 재래시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런데 다음날 언론의 이슈가 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가 아닌, 함께 동행 한 손녀딸이 입은 옷의 브랜드였다. 이 옷은 한 벌 가격이 100만원을 훌쩍 넘는데도 불구하고, 언론에 노출된 지 3일 만에 재고상품까지 동이 났다. 그리고 이제 위해서 소개했던 두 경제용어를 이 현상에 대입해보면, 자연스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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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현 대통령 역시 대선 직후, 서민경제 이해의 차원에서 한 마트를 찾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 언론의 이슈가 된 것은 역시 박근혜 당선자의 행보가 아닌, 그녀가 계산하기 위해 꺼낸 지갑의 브랜드였다. 이 지갑은 국내의 한 업체에서 제작했고 가격이 4천원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마찬가지로 언론에 노출된 지 3일 만에 재고상품까지 동이 났다. 그런데 이제 위해서 소개했던 두 경제용어를 이 현상에 대입해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점을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애당초 유명하지 않았지만 언론에 노출된 후 많은 사람들의 영향으로 구매하려는 ‘벤드웨건 효과’는 적용이 되지만, ‘베블런 효과’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일까? 결국 이러한 경향은 지도자를 따르는 백성의 성향을 나타내는 ‘민초’개념으로 밖에는 풀이할 수 없다. 따라서 노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2: 是以聖人之治,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強其骨。
이 때문에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을 비우게 하고, 그 배를 배불리 채워주며, 그 의지를 약화시키고, 그 뼈대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동사회의 지도자[聖人]들은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백성의 재물에 대한 욕구와 사리사욕을 버리게 하였고, 그들의 배를 배불리 채워주었으며, 그들이 불만을 가지거나 얕은꾀를 부리지 않도록 하고, 그들이 농사 등 자신들이 해야 할 바에 전념하도록 해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백성의 천성에 따라 다스리는 도리인 것이다. 즉 지도자가 백성의 천성에 따른다는 것은, 지도자가 백성이 가장 기본적으로 원하는 바인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지 않고, 편안하게 자신의 일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3-3: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為也,為無為,則無不治。
늘 백성들로 하여금 무지하고 욕망도 없게 하여, 무릇 슬기로운 이가 감히 작위하는 바가 없도록 하는 것이니, 무위로서 행하면 곧 다스리지 못할 것이 없다.

대동의 통치이념[道]이란 현명한 지도자가 솔선수범함으로써, 백성이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도자가 통제할 필요가 없게 되니, 이렇듯 억지로 법률과 제도를 만들어 백성들을 강압하지 않고 그 천성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면, 세상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여 순조롭게 통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동사회의 지도자[聖人]가 통치이념으로 삼은 도(道)는 법도(法道)의 줄임말인데, 법도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라는 의미를 지니는 형이상학적 추상명사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1: 道沖, 而用之或不盈。
미언: 도는 비어있으나, 그것을 씀에는 다함이 없다.     

대동사회의 통치이념[道]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아서 겉으로는 마치 없는 듯하지만, 사랑이라는 개념과 마찬가지로 남을 위해 베풀기에 실제로는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듯 인위적으로 제도를 만들어 통제하지 않고 천성에 따라 다스리는 대동의 통치이념[道]은 언뜻 보기에는 허술하고도 부족한 점이 많은 듯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통치이념[道]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그 통치는 엄격한 제도로 통제하는 것보다 오히려 백성들의 끊임없는 지지와 신망을 얻게 되어서 부족함이 없게 된다. 
 
그런데 노자는 이어서 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4-2: 淵兮,似萬物之宗。
심오하니, 마치 만물의 종주인 듯하다.     

만물의 종주라는 것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 언뜻 피상적으로만 살펴봐도, 이 세상의 온갖 것들인 만물을 창조한 그 어떠한 존재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 다시보기(1)에서도 설명한 바 있듯이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인류의 시작은 곧 세상의 시작이고, 인류라는 피조물을 만든 존재는 다름 아닌 삼황오제(三皇五帝) 그 중에서도 특히 복희씨(伏羲氏)와 여와씨(女媧氏)로 인지되어왔으며, 이러한 삼황오제가 이끌었던 대동사회는 세상의 시작과 더불어서 함께 존재해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만물의 종주는 세상의 시작과 상통하는 인류 창조주와 같은 개념이 되는 것이고, 그러한 세상의 시작은 다름 아닌 대동사회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이 구절을 통해서, 이러한 대동사회의 통치이념[道]은 대단히 오묘한 것이니, 엄격하고도 세분화된 제도로 나라를 통제하기 시작한 소강사회보다 훨씬 더 앞서서,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존재했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4-3: 挫其銳, 解其紛,和其光,同其塵。
그 날카로움을 억누르게 하고, 그 분규를 해결하며, 그 광채를 조화롭게 하고, 그 속세와 함께 한다.

이 문장의 핵심은 화(和)와 동(同)이다. 화(和)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모두 드러내 표출시키는 것이니, 기쁨과 분노 그리고 슬픔과 즐거움이 각각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는 뜻이다. 즉 화(和)는 서로의 수준이 다름을 인식하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사이가 좋은 상태를 말하니, ‘조화로움’ 또는 ‘어울림’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반면에 동(同)이란 같은 수준으로 합쳐져서 서로의 구별이 없이 똑같아지는 상태를 말하니, ‘같이 함’ 또는 ‘아우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처럼 노자는 이처럼 화(和)의 ‘어울림’과 동(同)의 ‘아우름’을 모두 중시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공자는 과연 어떨까? 

子曰: "君子和而不同,小人同而不和。" 
공자가 이르시기를: “군자는 조화롭게 지내지만 같이 하지는 않고, 소인은 같이 하지만 조화롭게 지내지는 못한다.” [論語(논어)] <子路(자로)>

공자는 군자(도를 배우고 부단히 노력하여 실천하는 올바른 지도자)란 서로 수준이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이가 좋지만,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합쳐져서 구별이 없이 똑같아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반면에 소인(도를 따르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만을 탐하는 올바르지 못한 인격의 소인배)은 다른 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합쳐져서 구별이 없이 똑같아질 뿐, 서로의 수준이 다름을 인식하면서도 함께 어우러질 수는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근한 예 하나를 들자면, 대동사회에서는 농업을 통치의 가장 중요한 내용 중 하나로 인지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솔선수범하여 백성들과 함께 농사에 참여했다. 따라서 농가사상(農家思想) 역시 농사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경작해야 한다는 취지가 담겨있으니, 단순히 농업기술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농업을 통한 통치사상을 설파하려한 것으로, 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을 유지함으로써 대동사회 지도자의 치세방법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반면에 공자는 [논어]의 여러 지면을 통해서, 지도자가 덕을 배품에 힘씀으로써 도를 행하게 되면 나라가 안녕하니 결국 힘을 쓰는 것은 아랫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노자와 공자의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된다는 점은 참고할 수 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4-3의 의미를 되새겨보자면, 대동사회의 통치이념[道]은 날카로운 사회의 모순을 억눌러 둥글게 하고, 그 혼란과 어지러움을 원만하게 해결하며, 모든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들의 기세를 조화롭게 하고, 속세와 한데 어우러져서 어느 누구하나 버리지 않고 함께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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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대한민국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군지에 대해서 조사해보면, 대부분 어김없이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 그리고 김구선생이 1~3위를 번갈아 차지하고 있다. 혹시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많은 이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이기에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김구선생의 말씀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나라가 자주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해보고 죽게 하소서!”

만약 필자가 김구 선생이었다면, 독립이 되었을 때 조심스럽게나마 정부의 수장이 되는 꿈을 꿀지언정, 이런 발언을 할 생각은 추호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나아가 국민이 바라는 지도자의 모습. 굳이 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노자는 다음과 같이 4장을 마무리하고 있다. 

4-4: 湛兮似或存,吾不知誰之子,象帝之先。
맑고 투명하지만 마치 존재하는 듯하니, 나는 누구의 후대인지는 몰라도, 상제의 앞이다.    

대동사회의 통치이념[道]은 형이상학적 추상명사이기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데, 나는 이러한 대동사회의 통치이념[道]이 어떤 존재보다 늦게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분명 세분화되고도 명분화가 된 제도들로 통제하기 시작한 소강사회보다는 앞서서부터 존재했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노자 다시보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3, 2015년 3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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