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학자를 자처하는 필자로서는 종종 고전의 효용 가치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한다. 자고 일어나면 세상이 바뀌는 시대에 곰팡내 어린 고전을 들쳐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참으로 공감이 되는 말이다. 고백하건대 고전 연구를 통해 먹고 살면서도 그런 회의에 젖었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고전을 파고 있는 까닭은 그것과의 만남을 통해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 이름을 꼭 하나만 가져야 하는 것일까? 고전과 만나면서 당연하게까지 여겨졌던 현상이 새삼 낯설어졌던 것의 하나는 한 사람이 하나의 이름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우리는 익숙하다 싶으면 너무 쉽게 그것의 역사가 무척 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옛 선인들을 보면 웬만한 경우 이름에다 자(字), 호(號) 정도는 기본으로 갖고 있었다. 그것도 하나씩이 아닌 경우가 다반사였다. 호만 해도 ‘평소의 호’란 뜻의 ‘아호(雅號)’부터 ‘스스로 붙인 호’라는 뜻의 ‘자호(自號)’, 서재에 붙이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쓴 ‘당호(堂號)’ 그리고 ‘별호(別號)’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두세 개의 호를 지니는 것은 기본이었고, 세상을 떠난 후에는 ‘시호(諡號)’라는 ‘죽은 자로서의 이름’을 별도로 부여받기도 했다. 

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름을 그 사람의 인격 자체로 여겼던 탓에 선인들은 남의 이름을 될 수 있으면 입에 올리지 않고자 하였다. 자칫하면 그 사람에 대한 결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으로 상대에게 자기 이름으로 스스로를 칭하면 상대를 높이는 예를 갖춘 것으로 여겨졌다. 이름을 귀히 여기던 관념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서로의 이름을 안 부르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자였다. 자는 한 사람의 명예와 인격이 담긴 호칭인 이름에 비해 문자의 단순한 조합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여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되면 그 사람의 이름 대신에 보다 임의롭게 부를 수 있는 자를 지어 사용했다. 성인이 된 만큼 성인으로서의 인격을 존중하여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자는 성인이란 정체성을 새로 얻었기에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이름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보니 자가 꼭 하나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거나 세계관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경험을 했을 때면 자를 바꾸곤 했다. 가령 전통시기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 시댁 어른으로부터 자를 새로이 받았다. 시댁의 일원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았으니 이름도 새로이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름 역시 그랬다. 19세기 말, 중국에서는 이름에 ‘적(適)’자가 들어간 이의 수가 갑자기 증가했다. 다윈의 진화론을 읽고 충격을 받은 끝에 본명을 버리고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적’자를 넣어 개명한 이가 많았던 탓이었다. 그렇다고 옛사람들이 이름을 가벼이 여겼던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에게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되면 그에 걸맞은 이름을 지녀야 한다는 관념에 충실했을 따름이었다. 그래야 명실상부한, 공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름값을 온전히 구현하는 ‘정명(正名)’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유명무실했지만 호는 그런 관념의 대표적 산물이었다. 아무나 호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과거시험의 1차 관문인 향시(鄕試)에 합격하면 스승이나 집안 어른으로부터 호를 부여받았다. 향시에 급제했다는 것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소리이고, 이는 사적인 한 개인이 공적인 존재로서 거듭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인이란 정체성을 새로이 부여받았으면 그에 합당한 이름을 지녀야 하는 법. 호는 그때 주어진 또 하나의 이름이었다. 따라서 ‘나’는 호로 불릴 때마다 그에 합당한 ‘공인’으로서의 역할과 임무를 늘 떠올려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애초부터 사람이 꼭 하나의 이름을 평생 고수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 개인이 복수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면, 응당 그 각각에 해당하는 이름을 별도로 지녀야 했다. 그랬을 때만이 예컨대 가장으로서의 정체성과 관리로서의 정체성을 혼동 없이 반듯하게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다만 이름이 여러 개 있다거나 이름을 쉬이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지금-여기’를 사는 우리 근대인에게는 무척 낯선 일일 수 있다. 

이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법원의 심리를 받아야 하듯, 우리네 삶에서 이름은 호적에 오르는 순간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국가는 개개인의 이름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것일까? 게다가 국가는 이름만으로도 부족하여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부호를 부여하기도 한다. 심지어 생활하다보면 내 이름보다는 주민등록번호가 나를 보다 분명하게 대신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모르고 있었을 따름이지 사실은 ‘숫자 이름’을 또 하나 갖고 있었음이다. 하나의 이름이 있다면 그에 해당하는 정체성이 부여됐다는 소리이다. 곧 ‘숫자 이름’이 우리의 이름이라면 곧 우리는 숫자의 조합체라는 뜻이 된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어느덧 우리는 0과 1로만 구성된 존재가 된 셈이다. 우리가 못 느꼈을 뿐, 이름이 숫자로 치환되는 순간 존재 자체도 숫자로 치환되어 어느덧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컴퓨터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컴퓨터에는 자의식이 없다. 그저 입력된 프로그램 그대로 실행될 따름이다. 따라서 컴퓨터는 “나는 왜 이렇게 작동되지?” 같은 물음을 던질 줄 모른다. 그런 질문을 던진다면 그건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렇지 않다. “왜 사는가?”라는 물음은 철학자나 사상가, 교육자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후에나 던질 수 있는 그런 사치스런 질문도 아니다. 오히려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먹고살 만하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어떤 상태여야 먹고살 만하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선 왜 사는가에 대해 답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삶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목적이 있어야 살아도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삶이 아니라 목적이 있기에 그렇게 사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꼭 거창해야만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름값을 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이름값을 하며 살면 된다. 이름은 부여되는 순간 그 주인이 살아내는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이름이 목적이 되는 삶, 그리하여 이름대로 결과를 만들어 가는 삶. 내게 목적이 되어 날 이끌어 줄 수 있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부여해보자.

❍ (남자는) 관례를 올린 후 자를 지어줌으로써 그의 이름을 존중한다. 임금과 아버지 앞에서는 자기 이름을 부르고, 다른 사람들은 자로 부른다.(冠而字之, 敬其名也. 君父之前稱名, 他人則稱字也.)-<의례(儀禮)> ｢사관례(士冠禮)｣.

❍ (여자는) 결혼을 하면 비녀를 꼽으며 그를 예우하여 자로 부른다.(女子許嫁, 笄而禮之稱字.)-<의례> ｢사혼례(士昏禮)｣.

❍ 자로가 여쭈었다. “위나라 제후가 선생님께 정사를 맡기고자 하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반드시 이름값을 바로잡을 것이다.” 자로가 대꾸했다. “고작 그것입니까? 선생님께서는 세상 물정에 어두우시군요. 어찌하여 그것을 바로잡으신다고 하십니까?” 공자가 답했다. “거칠기 짝이 없구나, 자로야! 군자는 자신이 모르는 바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 없는 듯이 있어야 한다. 이름값이 바로잡히지 못하면 말이 순통치 못하게 된다. 말이 순통치 못하게 되면 일이 성취될 수 없다. 일이 성취될 수 없으면 예악이 흥성치 못하게 된다. 예악이 흥성치 못하게 되면 형벌이 마땅함을 잃게 된다. 형벌이 마땅함을 잃게 되면 백성들은 어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그래서 군자는 이름을 붙였으면 반드시 말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하며, 말로 규정하면 반드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군자는 자신의 말에 대해 구차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子路曰, “衛君待子而爲政, 子將奚先.” 子曰, “必也正名乎.”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子曰, “野哉, 由也. 君子於其所不知, 蓋闕如也. 名不正, 則言不順. 言不順, 則事不成. 事不成, 則禮樂不興. 禮樂不興, 則刑罰不中. 刑罰不中, 則民無所錯手足. 故君子名之必可言也, 言之必可行也. 君子於其言, 無所苟已矣.”) - <논어(論語)> ｢자로(子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