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관저>편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먼저 [모시전(毛詩傳)]에서는 이 작품의 주제를 “천자의 배필이 후덕하구나.”로 보았다. 하지만 그 설명이 너무나 간단하여 파악하기가 어려우니,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자.
이 때문에 <관저>는, 기꺼이 아리따운 여인을 찾아 군자에게 짝지어줌으로써, 현명한 인재를 천거함을 걱정하지, 여색을 탐하지는 않는 것이다. 얌전하고도 정숙함을 사랑하고, 현명한 인재를 그리워하지만, 선량한 마음을 해치지 않음, 이것이 <관저>편의 뜻이다. [詩大序(시대서)]
주지하다시피, <관저>는 [시경] 305수의 첫 편이다. 일반적으로 한 작품의 첫 구절이나 작품총집에서의 첫 작품은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다름 아닌 저자의 집필의도가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위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바로 예(禮) 즉 “조화로움을 위한 절제와 통제”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군자(참된 지도자)가 요조숙녀(현명한 인재)에게 반하여 즐거워하는 한편 잊지 못해서 뒤척이기도 하지만, 예(禮)를 가지고 절제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어지럽히거나 지나치게 애태우지는 않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제 이 작품 전체를 감상해보면, 공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장은 군자(참된 지도자)가 요조숙녀(현명한 인재)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장면이다. 따라서 2장에서 군자(참된 지도자)는 요조숙녀(현명한 인재)를 원하게 되는데, 어찌 된 일인지 3장에서는 뜻대로 되지 않자, 군자(참된 지도자)는 전전반측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4장에서 군자(참된 지도자)와 요조숙녀(현명한 인재)는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5장에서 결국 조화로움을 이루게 된다.
특히 4장과 5장의 금슬(琴瑟)과 종고(鍾鼓)는 [論語(논어)] <陽貨(양화)>편의 “음악이로다 음악이로다라고 하는데, 종과 북을 말하는 것이겠느냐?”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음악을 뜻한다. 따라서 이는 위에서 언급한 예(禮)와 악(樂)의 조화로움 즉 예악제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자.
仁(인)은 樂(악)에 가깝고, 義(의)는 禮(예)에 가깝다. [禮記(예기)] <樂記(악기)>
예의 나아감과, 악의 물러남은 그 뜻이 하나이다. [禮記(예기)] <樂記(악기)>
다시 말해서, 인(仁)과 의(義)가 떨어질 수 없듯이, 예(禮)와 악(樂) 역시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니, 진정한 조화로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별개로, 오늘날에는 중국 학술계를 위시로 하여 <관저>편의 주제를 “젊은 남녀의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작품에 나오는 “군자”가 “도를 배우고 부단히 노력하여 실천하는 올바른 지도자”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더구나 [시경]의 창작연대가 주나라 초기부터 춘추시대 중기 즉 공자가 태어나기 이전임을 고려한다면, 이런 후대의 순수문학관점으로 “군자”를 해석하는 것은 올바른 분석 및 접근법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상술한 내용들을 통해서 간단하게나마 예(禮)와 악(樂)의 관계에 대해서 정리해보자. 악(樂)은 예(禮)의 근본이 되지만 홀로 존재하면 폐단이 생긴다. 또 악(樂)은 뒤로 물러나는 것이므로 인(仁)과 마찬가지로 약(弱: 부드러움)이 되고, 반면에 예(禮)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의(義)와 마찬가지로 강(强: 강함)이 되는 것이다. 즉 예(禮)와 악(樂)는 모두 형식의 범주에 속하지만, 이 형식은 다시 부드러움의 악(樂)과 엄격함의 예(禮)로 나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악(樂: 음악)은 바로 엄격한 예(禮: 조화로움을 위한 절제와 통제)의 형식을 보완하는 또 하나의 부드러운 형식 즉 “조화로움을 위한 온유함”이 되는 것이다.
2. 악(樂)과 문(文)의 관계
이제 악(樂)과 관련하여, 또 다음의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공자께서 노나라 태사에게 음악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음악을, 아마도 알 수 있을 듯합니다. 시작함에는 합하고(8음이 모두 연주되고), 나아가면서는 도타운 듯(온화한 듯), 또렷한 듯, 연달아놓은 듯하다가, 그럼으로써 완성되는(끝나는) 것입니다.” [論語(논어)] <八佾(팔일)>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음악은 순수한 음률 자체를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사가 포함된 종합적인 형태를 말하는 것일까? 더군다나 지금은 그 음률과 가사를 감상해볼 수조차 없으니, 선뜻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본문을 통해서, 음악이라는 것이 때로는 각각의 요소가 독립적으로 행해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로 조화를 이루는 것임은 알 수 있다. 이미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했듯이, 공자에게 있어서 음악은 음악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악제도를 뜻한다. 따라서 본문은 이처럼 도를 이루는 인(仁)과 의(義) 예(禮) 등 각각의 요소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여 활동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유기적으로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뤄야 도가 완성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소(순임금 때의 음악)를 평하시기를: “지극히 아름답고, 또 지극히 선하도다.” 무(주나라 무왕 때의 음악)를 평하시기를: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선하지는 않도다.” [論語(논어)] <八佾(팔일)>
위에서 공자가 말하는 음악이 순수한 음률 자체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가사가 포함된 종합적인 형태를 말하는 것인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한 바 있다. 이제 여기서 이 문제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하는데, 먼저 다음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그래서 기가 악기를 연주하자, 돌아가신 선조(귀신)께서 이르고, 여러 왕후들이 서로 양보하였으며, 조수가 날면서 춤추었는데, 소 아홉 곡 연주가 끝나자, 봉황이 와서 예절을 갖추고, 모든 짐승들이 모두 춤추었으며, 모든 관리들이 믿고 화합했다. (순)임금은 이에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하늘의 명을 공경하여 받들어, 때에 맞추기를 살피리니.” 이에 노래하여 불렀다: “팔 다리(중신)가 행복하니! 원수(임금)가 입신하고! 온갖 장인이 흥성하리니!” 고요가 손을 들어 맞잡고 절하며 머리를 조아려 소리 높여 말했다: “삼가소서! 대략 국가의 대사를 일으킴에, 삼가면 이에 흥성합니다. 공경하소서!” 이에 다시 노래를 불렀다: “원수(임금)가 명철하면, 팔 다리(중신)가 어질어져, 모든 일이 편안하네!” 또 노래를 불렀다: “원수(임금)가 통일성이 없으면, 팔 다리(중신)들이 불경해져, 만사가 무너지네!” 임금이 절하며 말했다: “그렇소, 가서 삼가시오!” [史記(사기)] <夏本紀(하본기)>
삼십 일 동안, 묘족이 명을 거역했다. 익이 우를 도와 말했다: “오직 덕만이 하늘을 움직이니, 먼 곳이라도 굴복합니다. 자만은 손해를 부르고, 겸손은 이익을 받으니, 늘 이와 같은 하늘의 도리입니다. (순)임금께서는 처음 역산에서, 밭에 나가셨을 때, 매일 하늘과 부모에게 울부짖으시며, 죄를 스스로 짊어지고 사특함을 이끌었습니다(모든 죄를 자기 탓으로 돌렸습니다). 고수를 공경하여 받들고, 조심하고 재계하여 삼가시니, 고수 역시 진실로 따르게 되었습니다. 지극한 정성은 귀신을 감동시키니, 하물며 이 묘족이야.” 우는 훌륭한 말에 절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군사를 돌려 제사를 바로잡았다. (순)임금은 이에 위엄과 덕망을 넓게 펴고, 두 섬돌에서 방패춤(武舞)과 깃털춤(文舞)을 추시니, 칠십 일이 지나, 묘족들이 감복했다. [尙書(상서)] <大禹謨(대우모)>
소(韶) 연주가 끝나자 사람과 동물들이 모두 화(和: 조화)를 이뤘으니, 이는 다름 아닌 대동(大同)을 뜻한다. 또한 신하가 임금이 바른 길을 걷도록 충언하고, 임금은 신하들에게 하늘의 뜻을 받들어 신중을 기하라고 근엄하게 명령하고 있으며, 나아가 무력으로 진압하지 않고 진심어린 덕을 펼쳐서 오랑캐들마저 감복시켰다. 바로 이것이 순임금의 통치이념인 화(和: 조화로움)와 무력이 아닌 자애(慈愛: 자애로움)의 덕치(德治)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논어] <述而(술이)>편에서도 “제나라에 있으면서 소(순임금 때의 음악)를 듣고는, 오랜 시간동안 고기 맛을 알지 못하셨으니, 이르시기를: ‘음악의 지극함이 이 경지에 이를 줄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표현한 것이다.
반면에 무왕(武王)은 무력으로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으니, 이른바 폭력으로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따라서 은나라의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國)의 왕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무왕이 인의(仁義)를 저버렸다고 말하며 수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먹고 지내다 굶어죽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백이와 숙제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논어] <公冶長(공야장)>편의 “백이와 숙제는, 지나간 악행을 생각하지 않아서, 백이와 숙제를 써서 나무람이 드물었다.”와 <述而(술이)>편의 “(백이와 숙제는) 어질음을 추구하여 어질음을 얻었으니, 또 어찌 원망했겠는가?” 그리고 <季氏(계씨)>편의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 죽었지만,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칭송하고 있다.”와 <微子(미자)>편의 “그 뜻을 낮추지 않고, 그 몸을 욕되이 하지 않은 이는, 백이와 숙제일 것이니?”라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공자는 백이와 숙제의 행위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상술한 내용들을 통해서 공자의 음악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바로 단순한 음률 그 자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가사(歌辭) 즉 인물의 업적을 기록한 문(文)을 고려한 종합적인 형태로 인식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8, 2014년 8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