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의 『군주』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쟁점들은 크게 세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첫째가 인식론적 측면이다. 이때 ‘인식론’이란 스스로의 판단과 이해가 옳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말한다. 따라서 ‘인식론적 측면’이라고 하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 내재된 ‘인간과 사회,’ ‘정치와 철학,’ 그리고 ‘정치와 종교’의 긴장이 송두리째 드러나는 부분을 말한다. 즉 철학적 절제를 통해 이기적 욕망을 순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거부한 최초의 근대인이라든지, ‘잘 사는 것’ 또는 ‘좋은 삶’에 대한 도덕적 성찰보다 ‘사는 것 자체’ 또는 ‘생존’을 정치적 목적으로 우선시했던 현실주의자였다든지, 종교가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고 보았지만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테두리 안에 있었다든지, 이 모든 주장들이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서 드러난 인식론적 측면과 관련된다.
사실 마키아벨리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지나친 과장들은 대부분 인식론적 측면에서 시작된다. 예를 들면, 혹자는 마키아벨리의 악마와 같은 얼굴을 그가 가진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 전망으로부터 찾아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악하다’ 또는 ‘인간이 악하기가 쉽다’라고 말한 첫 번째 정치철학자도 유일한 정치철학자도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소크라테스 전통에서도 인간의 이기심이 가져올 폐해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있었고, 기독교 세계는 예나 지금이나 신의 도움이 없는 인간의 본성은 원래가 악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따라서 인간 본성에 대한 비관적 태도로부터 마키아벨리만의 독특한 면모를 찾으려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잘못된 행동’ 또는 ‘악덕’에 대해 고대 정치철학과 기독교 윤리가 가르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해석을 내렸다는 점에서 『군주』를 읽는 것이 보다 적절한 독서일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해석’이란 바로 ‘좋은 삶’이 ‘잘못된 행동’ 또는 ‘악덕’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비록 ‘몰(沒)도덕’이니 ‘비(非)도덕’이라는 말이 정치와 도덕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실제로 그는 ‘선’과 ‘악’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거나 불필요하다고 보지 않았다. 마키아벨리에게도 ‘좋음’과 ‘나쁨’을 나누는 기준이 분명히 존재하고, 『군주』에서도 ‘도덕적 판단근거’와 ‘공공선’에 대한 자기만의 분명한 입장이 피력된다. 다만 소크라테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철학적 전통이 전하는 ‘잘못된 것’을 억제하는 방식, 또는 당시 기독교가 가르쳤던 ‘악덕’을 바로잡아야하는 이유에 마키아벨리가 회의적이었음은 분명하다. 『군주』 15장에서부터 19장까지 전개되듯, 마키아벨리는 ‘애정’이 아니라 ‘공포’가, ‘조화’가 아니라 ‘갈등’이, ‘정직’만큼이나 ‘기만’이 시민적 자유와 공공선의 실현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종교관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최근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마키아벨리가 탐독했던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사물의 본질』(De rerum natura)이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이해하는 기독교 사회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자’는 주장은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의 인식론적 혁명이었다. 따라서 인간이 신의 영역에 다다를 수 있다는 말, 그리고 종교란 ‘죽음’의 공포를 이용해서 인간을 미혹시키는 허구일 뿐이라는 말에 박수를 친 사람들은 ‘반(反)종교’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반(反)기독교’적이라는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모든 것을 ‘객관성’ 또는 ‘과학’이라는 굴레에 가두려고 의도한 적 없지만, 마키아벨리도 루크레티우스의 ‘벗어남’(declinare)을 통해 기독교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마키아벨리는 루크레티우스가 말하는 ‘최소한의 움직임’(nec plus quam minimum)으로 모든 것이 뒤틀려버리는 세계, 즉 모든 것이 신의 의지나 예정된 틀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존재의 ‘자유 의지’에 달린 세계를 염원했다. 그러기에 『군주』 25장에서 그는 ‘운명의 여신’까지 제압해버리는 무모함을 칭찬하고, 『강의』의 2권 2장에서 그는 시민적 연대의 토대를 ‘신들을 향한 경건함’에서 찾던 키케로와 결별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시민 종교의 정치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나, 신앙심에 충만해서 고해 성사를 하는 부분에서도, 마키아벨리의 인식론적 자유로움을 지나치게 축소해서는 곤란하다. 이런 측면에서 마키아벨리가 당시 로마교회를 통해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려했다는 주장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아울러 레오 10세의 로마교회를 통해 이탈리아를 해방시키려했다는 역설은 인정할 수는 있어도,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판단의 저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반(反)기독교’적 단초를 간과할 수는 없다.
2. ‘다수’(多數)의 정치
두 번째로 살펴봐야할 부분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이 갖는 정치적 측면이다. 이때 ‘정치적’이란 말은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우선 마키아벨리의 생각이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갖는 위치다. 어느 누구도 스스로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지배적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기에 마키아벨리의 저술은 당시를 풍미하던 이념적 대립각으로부터 동떨어져서 다뤄질 수 없다.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벌인 논쟁,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던 베네치아의 신화, 이런 모든 것들이 마키아벨리의 저술이 갖는 정치적 위치를 발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또한 ‘정치적’이라는 말은 마키아벨리가 당시 이탈리아 또는 피렌체의 정세에서 어떤 구상을 하고 있었느냐는 질문과도 관련된다. 사실 『군주』 26장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도, 『강의』에서 다루어진 시민적 자유가 『군주』에서 묘사된 잔인한 폭력과 함께 다루어질 수 있는 것도, ‘로마 공화정’의 영광을 통해 자신의 미래적 전망을 공유하고자 했던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구상이 갖는 설득력 덕분이다.
15세기에 들어서자 14세기에 공화정과 관련된 논의에서 빠지지 않았던 ‘제국의 건설’이라는 화두가 꼬리를 감춘다. 대신 독일 소도시에 대한 찬사와 베네치아의 찬란함에 대한 동경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안정을 강조하는 정치적 입장은 시민의 자유를 훼손시키거나 시민을 정치로부터 배제하는 제도적 합의로 귀결될 가능성이 컸다. 아니 실제로 ‘작은 정부’(governo stretto)가 지배적 의견이 되었고, ‘시민적 자유’나 ‘정치적 참여’는 고전 속에 담겨진 보물처럼 실현하기 힘든 이야기처럼 들렸다. 특히 사보나롤라가 축출된 이후, ‘시민적 자유’와 ‘제국의 건설’을 연관시키는 입장은 논의의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사보나롤라를 몰아내는데 성공한 귀족들과 유력 가문들이 자신들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소수’ 또는 귀족들은 베네치아와 독일 소도시를 모델로 삼은 ‘작은 정부’를 관철시키려고 노력했고, 지식인들도 사보나롤라의 민중적 정부가 가져온 정치적 실패를 비난하는데 열중했다. 소데리니 정부가 들어서서 잠시 위축되었지만, 16세기 초의 피렌체는 시민의 정치적 참여가 배제된 ‘작은 정부’가 지배적 담론이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마키아벨리의 역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에게 있어 ‘작은 정부’가 지배적 담론이 된 현실은 ‘소수’의 정치적 야심이 ‘다수’의 생각을 왜곡시킨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우선 안정적이지만 답답한 베네치아가 아니라, 소란하지만 강력했던 로마로 돌아가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정치에 참여해서 자기의 꿈을 실현시키려는 ‘소수’가 아니라,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기질’을 가진 ‘다수’에 주목한다. 사실 정치사상사에서 ‘다수’ 또는 ‘다수의 힘’에 주목한 사람은 마키아벨리가 처음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시민적 자유와 다양성이 보장된다면, 소수의 ‘탁월한’ 사람들보다 상식의 ‘다수’가 보다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보았다 (Aristotle, Politics, 3.1281a42-b10). 그러나 마키아벨리 이전에 ‘다수’의 집단적 의사를 ‘공공선’이라고 보거나, ‘다수’를 다스려야할 대상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핵심으로 간주한 정치 철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신민을 소유물로 여기고, 정치권력을 군주와의 개인적 관계를 통해 나누어가지는 것 정도로 여기던 당시 지배집단들에게는 무척 생소한 견해였다. ‘다수’가 갖는 소극적인 속성, 즉 ‘지배받지 않으려는 열망’으로부터 ‘공공선’의 근거를 찾아내고, 이러한 열망의 충족이 곧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낸다는 사고는 당시로서는 역설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런 역설의 근저에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 또는 ‘정체’가 필요하다는 마키아벨리의 문제의식이 깔려있었다. 그러기에 마키아벨리는 고전적 공화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둔다. ‘공동체적 인간’이 아니라 ‘이기적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연대의 기초를 찾았던 것이다. ‘시민적 덕성’만을 놓고 본다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도 키케로의 것과도 다를 바 없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기적 인간’에 주목한다면,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구상은 ‘타인의 자의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를 강조하는 이른바 근대적 의미의 ‘자유주의’ 또는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만약 고전적 공화주의가 아니라 후자와의 관련성을 더 주목한다면, 오늘날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구상이 이기적 욕망과 공동선의 실현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 지에 대한 새로운 혜안처럼 해석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인식론적 측면을 함께 고려한다면, 마키아벨리가 고전적 공화주의를 수정했다는 해석이 훨씬 일관되고 자연스럽기까지 할 것이다.
3. 잠재적 참주
마지막으로 살펴볼 부분은 『군주』의 수사적 측면이다. 여기서 ‘수사적’ 측면은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저술을 통해 ‘누구’를 ‘어떻게’ 설득하려 했느냐는 구체적인 질문과 관련된다. 종종 수사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은 혼동된다. 마키아벨리가 당시 지배적 담론을 어떻게 비판하고 수정하는가를 보려고 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당시 이념적 논쟁의 한 중간에 마키아벨리를 위치시키고, 시대적 맥락에서 그의 정치적 구상을 찾아내는 작업은 수사적 측면의 일부분을 훑어보는 것에 불과하다. 즉 『군주』를 바친 사람이 누구이며, 마키아벨리는 누가 읽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대상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요구했는지를 살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울러 『군주』를 당시 인문주의 전통에서 발견되는 ‘군주의 교본’(speculum principis)의 하나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만으로는 『군주』의 수사적 측면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만으로는 마키아벨리가 직면했던 구체적인 설득의 환경이 텍스트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가 살아생전에 『군주』를 출판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아직까지 없다. 그렇다고 『군주』가 실제로 헌정되었는지가 확실하게 밝혀진 것도 아니다. 따라서 1513년 탈고된 이후 마키아벨리에 의해 수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군주』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기술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반면 『군주』 15장에서 마키아벨리가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쓸모가 있는 것’을 쓰려했다고 밝히듯이, 설득의 대상으로서 ‘불특정 다수’를 『군주』의 수사적 측면에서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다. 엄밀하게 보면, 마키아벨리 스스로도 여러 차원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 때로는 수사학적 훈련을 받았거나 주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듯 속내를 숨기거나 학문적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실제 군주에게 조언을 하듯 동정을 사는 말을 하거나 자기가 아는 바를 과장하기도하며, 때로는 일반 대중들을 가르치듯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수사적 기법을 드러내기도 한다. 어쩌면 『군주』의 수사적 측면에 대한 이해는 이런 세 가지 차원 모두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군주』의 가장 중요한 설득 대상은 ‘잠재적 참주’다. 이때 ‘잠재적 참주’란 막스 베버(Max Weber)의 표현을 빌리면 ‘정치를 통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즉 권력이 가져다주는 특권을 누리려는 사람일 수도 있고, 권력을 통해 스스로가 원하는 목적을 관철시키려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동시에 ‘권력’과 ‘권위’의 구분이나 ‘지배’와 ‘통치’의 차이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말도 된다. 아직 책임질 지위를 갖지 않았기에 자기의 힘을 정당화할 제도적 근거가 불필요하고,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위해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해야한다는 의무감도 강요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잠재적 참주’는 권력을 통해 이기적이든 이상적이든 자기가 목적한 바를 이루려는 열정을 갖고 있는 존재이고, 이들이 목적한 바는 일차적으로 상대의 복종 또는 순응을 얻어내는 비대칭적이고 불평등한 힘의 우위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마키아벨리의 ‘잠재적 참주’를 대상으로 하는 설득은 권력의 쟁취부터 권력의 목적까지 모두 포괄할 수밖에 없다.
종종 참주라는 말은 ‘전제군주’ 또는 ‘폭군’이라는 단어와 혼용되기도 하는데, 그 기원을 면밀히 살펴보면 다른 말이다. 한 사람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참주’(tyrannos)는 ‘폭군’(despotes)과 다른 한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후자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인민의 지지’다. 그래서 고대 정치철학에서는 ‘참주’를 시민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잡은 후에 시민을 탄압한 ‘인민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 사용했다. 물론 마키아벨리도 이런 의미에서 ‘참주’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군주』에서 마키아벨리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잠재적 참주’를 대상으로 하는 설득을 재연하지 않는다. 고대 정치철학이 ‘절제’를 통해 ‘잠재적 참주’의 열정을 억제하거나 ‘좋은 삶’으로 계도할 목적의 교육을 시도했다면, 마키아벨리는 ‘잠재적 참주’의 열정을 부추기거나 확대시키려고 노력한다. ‘반은 짐승이고 반은 인간’인 켄타우로스의 예도 결국 ‘젊은이의 무모함’과 ‘사자’와 ‘여우’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로 치환된다.
결국 마키아벨리의 잠재적 참주에 대한 설득은 ‘좋은 삶’에 대한 논의보다 ‘영광’과 ‘공포’에 초점을 둔 교육(paideia)으로 귀결된다. 『군주』 15장에서 19장까지 전개되는 군주의 자질에 대한 설명에서 보듯, 소크라테스 이후 지속된 ‘올바른 삶’의 기준들이 한꺼번에 허물어진다. 그리고 군주는 결코 귀족의 음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경고, 그러기에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충고가 말미를 장식한다. 즉 마키아벨리는 잠재적 참주를 대상으로 한 수사적 기법으로 철학적 성찰이 아니라 ‘자연인’의 욕구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강론』 3권 6장에서 ‘시에나의 참주(tiranno)’라고 불렀던 판돌포 페트루치도 『군주』 20장에서는 엄연히 ‘군주’(principe)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용인술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군주』 6장과 13장에서 ‘새로운 군주’로 묘사되는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Hieron)도 마찬가지다. 마키아벨리는 히에론의 잔인한 방법과 기만적 술수를 도덕적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인민의 지지’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는 것, 자기만의 군대를 확보했다는 것, 그리고 외세로부터 ‘다수’를 보호했다는 것만 강조한다. 최소한 이 세 가지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참주와 군주는 전혀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시대에 ‘권력 정치’(Machtpolitik)라는 말은 대다수에게 불쾌한 인상을 줄지 모른다. 비록 ‘권력’과 ‘정치’라는 말이 어느 사회에서도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묘사하는데 긴요하게 쓰이지만, 독재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권력’과 ‘정치’를 부정적인 어감을 섞어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일수록 마키아벨리의 ‘잠재적 참주’에 대한 충고를 다시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비록 소크라테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도덕적 삶의 내용은 담지 않았지만,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잡고자 한 사람들’의 권력욕을 시민적 자유를 회복하고 지켜주는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했고, ‘잠재적 참주’에게 시민적 자유가 보장된 제도의 설립과 유지만이 진정한 영광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러기에 소크라테스적 전통에서는 천박할 수 있겠지만, 젊고 야심에 찬 청년들이 참주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시민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려는 마키아벨리의 수사적 기법만큼은 높이 사야할 것이다.
* 『지배와 비지배: 마키아벨리 군주읽기』(민음사, 2013년 10월 1일 출간예정)의 에필로그 일부분을 게재한 것임.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2, 2013년 10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