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작품의 취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와 그가 처한 시대적 배경 그리고 집필 시 염두에 둔 사건이나 상황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고 앞서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삼회에 걸쳐서, 공자의 생애를 굵직한 사건들과 연계하여 정리해보도록 하자.
[좌전(左傳)]과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따르면, 공자는 BC 551년 노나라 양공(襄公) 22년에 숙량흘(叔梁紇)과 안씨(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머리 위가 볼록 튀어나온 것이 마치 언덕과도 같다고 하여 이름을 구(丘: 언덕, 구릉)라고 하였다.
당시는 주(周)나라 평왕(平王)이 국운(國運)을 쇄신하기 위해서 수도를 서쪽 호경(鎬京: 오늘날의 서안)에서 동쪽의 낙읍(洛邑: 오늘날의 낙양)으로 옮긴 후인 동주(東周) 즉 춘추(春秋)시기였다. 그런데 이때는 이미 천자(天子)의 위엄이 땅에 떨어져서 주변의 제후국(諸侯國)들은 형식적으로만 주나라를 따를 뿐, 실제로 뒤돌아서서는 자국의 부국강병을 위해서 전쟁도 불사하던 시기였다. 또한 신하가 임금을 따르지 않고 능멸하며, 심지어는 서슴지 않고 시해하던 대혼란의 상황들이 만연해있었다.
2. [좌전] <소공(昭公) 7년>과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맹희자(孟僖子)가 병이 들었을 때 공자를 달인(達人)이라고 칭찬하며, 그의 아들 맹의자(孟懿子) 즉 중손하기(仲孫何忌)와 남궁경숙(南宮敬叔)으로 하여금 공자의 제자가 되라고 유언했다. 그 말을 들은 공자는 허물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군자라고 그를 칭찬하며 맹희자의 두 아들을 제자로 맞이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공자 나이 17세였다. 맹의자는 맹희자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어서 노나라 경(卿)이 되는데, 여기서 종법제도(宗法制度)에 대해서 설명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종법제도란 혈연적 유대 관계를 이용하여 종족 관계를 발전시킨 것으로, 주나라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 때 최종적으로 확립되고 시행되었다. 이는 적장자(嫡長子: 본처의 장남) 계승 제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즉 천자의 적장자는 다시 천자가 되고 그 나머지 아들들은 제후(諸侯)가 되는 것이다. 이 제후는 공(公) 또는 왕(王)이 되어 분봉된 나라를 통치하게 되는데, 역시 그의 적장자는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고 그 나머지 아들들은 경(卿)이 된다. 마찬가지로 이 경의 적장자는 경이 되고, 그 나머지 아들들은 대부(大夫)가 된다. 대부의 적장자는 대부가 되고, 그 나머지는 사(士)가 된다. 그리고 사의 적장자는 사가 되고, 그 나머지는 민(民)이 되는 것이다. 예를 한 가지 들자면,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주인공인 유비(劉備)의 신분은 민(民)이었지만 후에 그가 촉(蜀)나라의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漢)나라의 황제인 유씨(劉氏)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역성혁명(易姓革命: 성씨가 다른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공자는 주공을 가장 존경하였고, 이에 주공이 확립한 예악제도와 종법제도를 숭상하여 따랐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공자에게 있어서 계급신분이란 바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으로, 이 계급신분을 지키고 따르는 것을 대단히 중시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노나라 환공(桓公)의 자손인 삼환(三桓) 즉 맹손씨(孟孫氏)와 숙손씨(叔孫氏) 그리고 계손씨(季孫氏)가 대대로 노나라의 경 자리를 계승하면서 임금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해서, 공자는 극도로 경계하였던 것이다.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는 남궁경숙과 함께 주나라에 가서 노자(老子)를 만나 큰 깨달음을 얻었고, 주나라에서 노나라로 돌아오니 제자들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당시의 예(禮)에 따라 맹희자가 죽고 나서 3년의 부친상을 지낸 후에야 남궁경숙이 공자와 같이 갈 수 있었으므로, 최소한 공자 나이 20세 이후의 일일 것이다. 하지만 공자가 과연 노자를 만나서 예(禮)를 배웠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들이 다분히 있는데,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서 공자는 8차례에 걸쳐서 노담(老聃)이라는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 이제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잠시 살펴보면, 공자가 말하는 노담이 바로 노자를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용] 노자라는 사람은, 초나라 고현의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씨이고, 이름은 이, 자는 담이었으며, 주나라의 書庫(서고)를 지키는 사관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장차 노자에게 예에 대하여 묻고자 하였다. 노자가 말했다: “그대가 말하는 바는, 그 육신과 뼈가 모두 이미 썩었고, 오직 그 말만이 있을 따름이오. 게다가 군자는 때를 만나면 마차를 타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떠도는 것이오. 내가 들으니, 훌륭한 장사꾼은 깊숙이 숨겨 마치 비어있는 듯 하고, 군자가 덕이 가득차면 용모가 우매한 것처럼 보인다고 하오. 그대의 교기(교만함)와 다욕(탐욕), 태색(드러나는 표정)과 음지(도리를 어지럽힘)를 버리시오. 이는 모두 그대의 몸에 무익하오. 내가 그대에게 말해줄 것은 이와 같을 따름이오.” 공자가 떠나, 제자들에게 말했다: “새는, 내가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는, 내가 헤엄칠 수 있음을 알며; 짐승은, 내가 달릴 수 있음을 안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로 잡을 수 있으며, 나는 것은 활을 쏘아 잡을 수 있다. 용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 없으니,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른다. 내가 오늘 노자를 보았는데, 마치 용과도 같구나!”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았는데, 배움에 있어 스스로 숨기고 드러내지 않음에 힘썼다. 오랫동안 주나라에 있었지만, 주나라가 쇠해지는 것을 보고는, 이에 마침내 떠났다. 관(함곡관)에 이르러, 관지기 윤희가 말했다: “선생께서 장차 은둔하려 하시니, 어렵지만 저를 위해 저서를 해주십시오.” 그래서 노자는 이에 상, 하편을 저술했고, 도덕의 뜻 오천여 자를 말해주고는 떠났으니, 그 끝(노자가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을 알 수 없었다. [사기(史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증자가 공자에게 예(禮)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노담에게 들은 내용들을 인용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공자는 실제로 노자를 만나 예(禮)를 배웠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노자가 공자를 구(丘)라고 호칭한데서 공자가 당시에 아직 벼슬을 하지 않은 손아래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따르면, 공자는 20세에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노나라 소공이 리어(鯉魚: 잉어)를 보내 축하했으므로 아들의 이름을 리(鯉)라고 지었다고 하는데, 주지하다시피 [공자가어]는 현재 위서(僞書)로 판단되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참고만 하기로 한다.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노나라 소공 20년에 제(齊)나라 경공(景公)이 안영(晏嬰) 즉 안자(晏子)와 함께 노나라에 와서, 공자에게 진(秦)나라 목공(穆公)의 치세(治世)에 대해 물었다고 했는데, 이때는 공자 나이 30세가 되던 해였다. 또 같은 해에 정(鄭)나라 대부 자산(子産)이 죽었는데, 공자는 눈물을 흘리며 그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사랑을 따른 사람이었다며 슬퍼했다고 하니, 공자가 그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엿볼 수 있다.
[좌전] <소공 25년>과 [사기] <공자세가>의 기록을 보면, 공자가 35세가 되던 해에 계손씨인 계평자(季平子)가 후소백(郈昭伯)과 닭싸움을 했는데, 가죽옷을 입은 계평자의 닭이 금속발톱을 채운 후소백의 닭에게 지자, 계평자는 분노하여 후소백을 질책했고, 이에 후소백은 계평자를 원망하게 되었다. 후에 공약(公若)과 공위(公爲)가 계평자를 칠 계획을 소공에게 아뢰자, 소공은 후소백의 의견을 묻게 되는데, 후소백은 닭싸움에서 생긴 복수심에 그래도 된다고 대답한다. 결국 소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계평자를 공격하자 계평자는 맹손씨 숙손씨와 힘을 합쳐 소공을 공격했고, 오히려 소공이 패하여 제(齊)나라로 달아나게 된다. 그렇게 노나라에 난이 일어나자 공자는 제나라로 가서 고소자(高昭子)의 가신이 되었고, 5년 전 제나라 경공이 안영과 함께 공자를 찾아와 진(秦)나라 목공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된 이유에 대해서 물었던 인연을 이용하여 경공과 접촉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삼환 즉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처럼 자기들끼리만 편들어 옹호하고 또 아랫사람이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면 군주를 진심으로 섬기고 따르는 어진 이가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여왔던 것이다.
이제 여기서 [좌전] <소공 29년>의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진(晉)나라 조앙(趙鞅)과 순인(荀寅)이 범선자(范宣子)가 지은 형법(刑法)을 큰 솥(정: 鼎)에 새겼다. 그러자 공자는 “진나라가 법도를 잃었으니, 곧 망할 것이다. 천자에게서 받은 법도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는 것이 도리인데, 이제 그 법도를 버리고 형벌로 다스리려하면, 백성들이 오로지 그 형벌에만 마음을 둘 것이니, 어찌 윗사람을 공경하고 자신의 본업을 지키겠는가? 범선자의 형법은 당시 나라의 혼란스러움을 제압하는 임시방편이었을 따름이다.”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공자는 백성들을 형벌로 다스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는데, 실제로 진(晉)나라는 공자의 예언대로 결국 망해서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한(韓)나라와 위(魏)나라 그리고 조(趙)나라로 분할되게 된다. 이를 좀 더 보충하여 설명하자면, 전국시대는 칠웅(七雄) 즉 7개의 나라가 할거한 국면을 일컫는데, 진(秦) 초(楚) 제(齊) 연(燕) 한(韓) 위(魏) 조(趙)나라가 그것이다. 이 중 한과 위 그리고 조나라는 진(晉)나라에서 분할된 나라이기 때문에 삼진(三晉)이라고도 일컫는데, 이 진(晉)나라가 한 위 조의 세 나라로 분할되는 때가 바로 전국시대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군웅할거의 국면을 끝내고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나라는, 다름 아닌 시황제(始皇帝)의 진(秦)나라이다.
4.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와 관련하여 또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때문에 군자의 예를 행함은, 삼가지 않을 수 없다. (예는) 여러 사람의 규율이니, 규율이 흩어지면 여러 사람이 무도해진다. [예기(禮記)] <예기(禮器)>
즉 예(禮)라는 것이 백성들을 이끄는 뼈대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공자는 이러한 예를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도리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는 통치에 있어서 왜 그토록 예(禮)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다스리던 대동(大同)사회와 이후의 소강(小康)사회를 불문하고, 상고(上古)의 태평성대를 구가한 성현들은 모두 덕(德)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세상이 가천하(家天下)의 소강사회가 되면서부터 세습을 예의로 삼고 자신을 위해서만 재물과 힘을 쓰자, 권모술수가 흥기하고 전쟁이 발생하였다. 이에 우 탕 문왕 무왕 성왕 주공 여섯 군자들은 기존의 대동사회를 이끈 통치자들의 이념에 예(禮)를 더 강화하여 시비를 선별함으로써 백성들에게 항상 그러함을 보여주었으니, 나라가 다시 평화를 찾게 되었다. 바로 여기서 공자가 추구하는 모습을 찾을 수 있으니, 그는 대동사회가 아닌 예(禮)로 절제하고 통제하는 소강사회로의 복귀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도와 덕 그리고 어질음과 의로움은, 예가 아니면 완성시킬 수 없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
공자는 어질음의 인(仁)과 의로움의 의(義) 심지어는 도(道)와 덕(德)에까지도 예(禮)라는 존재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공자가 말하는 도(道)는 대동이 아닌 바로 “소강사회의 도”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1, No.2, 2013년 10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