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전] <애공(哀公) 3년>과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가 60세일 때 계환자(季桓子)가 죽으며 아들 계강자(季康子)를 불러 “노나라는 흥성할 수 있었지만 내가 공자에게 죄를 지어 그렇지 못했으니, 네가 나를 이어 경이 되면 반드시 공자를 불러라!”라고 유언을 했다. 계환자가 구체적으로 공자에게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으니, 제나라에서 미인 80명을 뽑아 노나라로 보내고는 강락무를 추게 한 사건을 참고하기로 한다.
계강자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공자를 불러들이기로 했다. 하지만 대부 공지어(公之魚)가 극렬히 반대하자 결국 차선책으로 공자의 제자 염구(冉求)를 불러들여 신하로 삼는데, 자공은 노나라로 갈 차비를 하는 염구에게 “노나라에 가서 등용되면 꼭 스승을 모셔가 주시오.”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염구
그 이듬해 공자는 진(陳)나라에서 채(蔡)나라로 옮겨가고, 또 1년 뒤에는 잠시 섭(葉) 지역으로 옮겨가는데, [논어] 7장 <술이(述而)편>과 13장 <자로(子路)편>에 등장하는 섭공(葉公)과의 대화는 바로 이 때 즉 공자 나이 62세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
[좌전] <애공 6년>과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가 채(蔡)나라에 머문 지 3년이 되는 63세일 때 오(吳)나라가 진(陳)나라를 공격했고, 초(楚)나라는 그런 진(陳)나라를 돕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하면서 공자를 초빙했다. 공자가 초나라로 가려고 하자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대부들이 “공자는 어진 자이고 진나라와 채나라에 머무른 시간이 오래니, 필경 우리의 행위는 그의 뜻에 맞지 않을 것이다. 이제 공자가 초나라에 등용되면 우리의 행위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어 위험해진다.”라고 의논하고는 두려워하여 공자를 포위했고, 이에 공자 일행은 중간에서 식량까지 떨어지는 상황에 봉착했다.
두려움과 배고픔에 지친 제자들의 불만이 점점 커지자, 공자는 자로를 불러서 “나의 도(道)에 어떤 잘못이 있기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라고 묻는데, 자로는 “저희가 어질지 못하고 또 지혜롭지 못해서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실망한 공자는 곧 자공에게 같은 질문을 하고, 자공은 “스승의 도가 너무 커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조금 낮추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뒤이어 안회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자, 안회는 “스승의 도가 너무 커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치욕이고 또 인재를 기용하지 못하는 것은 지도자의 치욕입니다. 받아들여지지 못할 때 비로소 군자의 참모습이 드러나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에 공자는 “안씨 집안에 이런 인재가 있었던가! 네가 높은 자리에 있게 되면, 나는 네 밑에서 일하겠다!”라고 말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따라서 공자는 안회가 만약 대동사회에 태어났다면, 요임금이나 순임금과도 같은 성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안회]
결국 공자는 자공을 초나라로 보내 자기가 들판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리게 했고, 이에 초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여 풀려날 수 있었다. 공자 일행이 초나라에 도착하자 소왕(昭王)은 공자를 중용하려 했으나, 영윤(令尹)을 지내던 자서(子西)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게 되었다.
3.
[좌전] <애공 6년>에 따르면, 초나라 소왕이 병이 들어서 점을 쳤는데, 황하(黃河)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하지만 소왕이 이를 거절하자, 대부들이 거듭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청했다. 이에 소왕은 “하나라와 은나라 그리고 주나라 삼 대의 천자들께서는 제후들의 제사 범위를 정해주셨으니, 자기 영토를 넘지 않는 범위의 산천(山川)에게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그런데 황하는 우리의 영토 밖이니, 내 부덕함을 황하의 신께서 벌 줄만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공자는 이 말을 전해 듣고 다음과 같이 평한다.
“초나라 소왕은 큰 도를 안다. 그(소왕)가 나라를 잃지 않는 것은, 마땅하다! [하서(夏書)]에 이르기를: ‘저 도당(요임금)부터, 이 기 나라가 있었는데, 지금 그 도를 잃고, 그 기강을 어지럽혀, 이에 멸망했다.’ 또 이르기를: ‘진실로 이에서 나오니, 이에 있도다.’ 자기로 말미암아 상(常: 변치 않는 법도)을 따르는 것이, 옳다.”
참고로 여기서의 [하서]는 다름 아닌 [상서(尙書)] <하(夏)왕조편>을 일컫는다. 초나라 소왕이 죽자, 공자는 초나라에서 위(衛)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4.
[좌전] <애공 7년>에는 오(吳)나라의 태재(太宰)를 지내던 비(嚭)가 노나라의 계강자를 불러들였는데, 계강자는 공자의 제자 자공을 시켜 사절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하나는 당시 오나라 태재라는 벼슬을 하던 비가 노나라의 경(傾)이었던 계강자를 불러들이는 것은 당시의 예(禮)에 어긋나는 행위였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만큼 오나라의 힘이 강성했음에 반해 노나라는 오나라 눈치를 봐야할 정도로 쇄락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이러한 노나라의 세태를 보고는 “노나라와 위나라의 정치는 형제로다.”라고 한탄하기도 하는데, 이 말은 즉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 주공(周公)이 천자에게 분봉 받아 세운 노나라와 역시 문왕의 아들 강숙(康叔)이 세운 위나라는 본디 형제의 나라인데, 이제는 그 정치적 혼란스러움조차도 형제와 같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위나라의 형세가 얼마나 어지러웠는지는 잠시 후에 설명하기로 한다.
아울러서 이를 통해서도 공자가 왜 주공을 그토록 존경했는지 다시 한 번 설명할 수 있으니, 이미 언급했던 공자가 중시한 종법제도를 최종적으로 완성한 이가 주공이었다는 이유 외에도, 공자가 태어나 자라온 나라인 노나라의 시조가 다름 아닌 주공이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말년에 “심하구나, 나의 쇠약함이! 오래되었구나, 내가 다시 꿈에서 주공을 만나보지 못했음이!”라고 말하여, 자신의 포부인 소강사회로의 복귀가 끝내 이뤄질 수 없는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좌전] <애공 10년>과 [사기] <공자세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공자는 67세일 때 위나라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의 제자들 상당수가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으니, 이는 즉 공자의 제자들 대다수는 마음을 도(道) 자체의 수련에 두었다기보다, 직접적인 정치활동의 참여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안회에게 “등용되면 곧 행하고, 버리면 곧 간직하니, 오직 나와 너만이 이렇게 함이 있다.”라고 말하여,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 잠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기로 하자. 위나라 영공의 부인인 남자(南子)는 수많은 남자와의 사통(私通)으로 평판이 아주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공자를 만나보고 싶어 했으니, 공자는 극구 사양했으나 결국에는 예의상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자로는 몹시 불쾌해했고, 이에 공자는 “내가 비루하거나 악하다면, 하늘이 그것(나를)을 싫어한다! 하늘이 그것(나를)을 싫어한다!”라고 말하여 자로의 태도를 지적한 바 있다.
아무튼 남자의 부적절한 처신을 부끄러워 한 태자 괴외(蒯聵)는 그녀를 수치로 여겨 죽이려 했는데, 일이 실패하자 송(宋)나라로 도망갔다가 다시 진(晉)나라로 옮겼고, 위나라 영공은 오히려 그런 괴외를 제거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지만, 공자의 회유로 마음을 접게 된다.
5. [좌전] <애공 10년>과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가 초나라에서 위나라로 돌아온 이듬해인 59세 때 위나라 영공이 죽자, 부인 남자(南子)는 자기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이웃나라로 도피한 괴외의 아들 첩(輒)을 왕으로 앉혔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괴외가 오랫동안 나라 밖에서 떠돌자 제후들이 수차례 그를 꾸짖는 등, 위나라는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바로 이때 공자의 적잖은 제자들이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것이고, 나아가 위나라 임금은 공자를 등용하여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고자 하기도 했던 것이다.
다시 원래의 시점으로 돌아와서 [좌전] <애공 10년>과 [사기] <공자세가>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67세의 공자는 초나라에서 위나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이듬해 오(吳)나라는 노나라에게 백뢰(百牢: 제사에 쓸 가축 백인 분)를 요구했는데, 이는 주례(周禮) 즉 주나라의 예악제도에 부합되지 않는 지나치게 많은 분량이었다. 여기에다 오나라의 태재 비는 심지어 계강자까지도 불러들였는데, 계강자는 자공을 보내 교섭을 하고나서야 그것을 면할 수 있었다.
한편 위나라는 이 무렵 괴외의 아들 첩이 임금으로 있었는데, 괴외는 호시탐탐 위나라로 돌아가서 왕위를 되찾을 궁리를 하느라 나라 전체가 뒤숭숭한 분위기였으니, 당시 위나라에 머물면서 역시 오나라에게 수치를 받고 있던 노나라의 상황을 전해들은 공자가 어떠한 심경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좌전] <애공 11년>과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노나라와 제나라가 교외에서 전쟁을 했다. 이 때 노나라 군대가 강을 건너지 못하자, 공자의 제자 번지(樊遲)는 좌군(左軍)을 이끌던 염구에게 “군사들이 그대를 믿지 못하니, 상벌(賞罰)에 대해서 세 번 말하면 건너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염구가 번지의 말을 따르니, 정말로 노나라 군사들이 정말로 강을 건너 제나라 군사들과 용감하게 싸웠다.
그런데 노나라의 좌군과 달리 우군(右軍)은 오히려 도망을 갔고, 제나라 군사들이 노나라 군사들을 추격하게 되었다. 이때 우군에 있던 장수 맹지반(孟之反)은 일부로 뒤쳐져서 제나라 군대의 추격을 뿌리침으로써 자신의 부하들을 보호했으니, 공자는 [논어]에서 “맹지반은 자랑하지 않는다. 패전하여 도망갈 때 퇴각군의 후미에 쳐져 쫓아오는 적군들을 상대하다가, 성문을 들어가려할 때, 그 말을 채찍질하며, 말하기를: ‘감히 뒤쳐진 것이 아니라, 말이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하여 그의 겸손함을 칭찬한 바 있다.
결국 노나라는 제나라 군대를 물리쳤고,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염구의 공적을 치하하며 “그는 의(義)로운 사람이다!”라고 치켜세웠는데, 이는 제자인 염구가 군주인 애공과 노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운 공로를 치하한 것이다. 하지만 후에 염구가 계손씨 즉 계강자를 위해서 백성들을 착취하자 공자는 그를 맹비난하는데, [논어] 11장 <선진(先進)편>을 보면, “염구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너희들은 그를 조리돌리어 책망해도 좋다.”는 구절이 있다. 즉 이는 공자에게 있어서 의(義)는 중요하지만, 이 의로움 하나만으로 도(道)를 완성할 수는 없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염구가 계강자를 위해서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와 싸워 이기자, 계강자가 염구에게 군대에 대해서 배운 적이 있느냐고 묻고, 염구는 공자에게 배웠노라고 대답한다. 이에 결국 계강자는 공자의 능력을 깨닫고, 염구를 통해서 다시 공자를 노나라로 불러들이려 하였다. 또 때마침 위나라 공문자(孔文子)는 대숙질(大叔疾)을 공격하기 위해서 공자에게 계책을 물었고, 이에 공자는 “새는 나무를 선택할 수 있지만, 나무는 새를 선택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더군다나 계강자가 예의를 갖추어 공자를 영접하였으니, 공자는 비로소 노나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제 여기서 [좌전] <애공 11년>에 기록된 공문자(孔文子)와 대숙질(大叔疾)의 사건에 대해서 개략적으로 정리해보자. 위나라의 대숙질이 송(宋)나라로 도망가 자조(子朝)의 딸과 결혼했는데, 당시 관습에 따라 그녀의 여동생 역시 언니를 따라서 대숙질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이 둘째 딸이 매우 예뻤다고 한다. 후에 자조가 위나라로 건너가니, 위나라의 대부였던 공문자는 대숙질의 본 부인 즉 자조의 딸을 쫓아내고 자기의 딸을 대숙질에게 시집보냈는데, 대숙질이 오히려 자조의 둘째 딸 즉 옛 부인의 여동생을 몰래 불러내어 집까지 제공하자, 공문자는 자신의 딸과 옛 부인의 여동생 두 여자를 부인으로 삼은 대숙질의 모습에 분노하여 그를 공격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공자는 그런 공문자를 보고 “새는 나무를 선택할 수 있지만, 나무는 새를 선택할 수 없다.”라고 말했으니, 이는 “새(사람)가 나무(나라)를 선택하는 법이다. 따라서 이처럼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하는 공문자의 위나라를 떠나야겠다.”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공문자는 그러한 공자의 말에 놀라서 대숙질을 칠 계획을 그만두고, 공자가 떠나려 하는 것을 만류하였으며, 그의 딸을 다시 집으로 불러 들였다. 이는 공자 나이 68세 때의 일인데, 하지만 이 일이 있은 직후 공자는 결국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6.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가 56세에 노나라를 떠났다가 68세에 다시 돌아왔는데, 이때는 제자 수가 삼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후, 공자의 아들 리(鯉) - 자(字) 백어(伯魚) -가 50세를 일기로 죽었다. 결국 공자가 70세일 때 세상을 떠난 것인데, 이는 공자가 71세일 때 41세를 일기로 죽은 안회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공자는 애공 14년 즉 71세의 나이에 [논어] 18장 <미자(微子)편>에 나오는 “‘그 뜻을 낮추지 않고, 그 몸을 욕되이 하지 않은 이는, 백이와 숙제일 것이니?’ 유하혜와 소련을 말함에, ‘그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이 하였으나, 말이 윤리에 맞고, 행동이 생각에 맞았으니, 이러할 따름이다.’ 우중과 이일을 말함에, ‘은거하면서 말을 맘대로 했으나, 몸을 깨끗이 하고, 그침이 임시변통에 맞았다. 나는, 곧 이들과 달라서, 가함도 없고 불가함도 없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다시 번복하여 [논어] 15장 <위령공(衛靈公)편>의 “군자는, 죽을 때 이름이 드러나지 못할까(칭송받지 못할까) 근심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또 이어서 “나의 도가 행해지지 않았으니,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이름을 드러내겠는가?”라고 탄식하고는 역사서 [춘추(春秋)]를 집필하는데 전념했으니, “후세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춘추] 때문이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역시 [춘추]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역시 [사기] <공자세가>에 의하면, 안회는 애공 14년 즉 공자가 71세 때 죽었다고 한다. 또 [사기]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서 안회는 공자보다 30세 어리다고 했으니, 안회는 41세의 젊은 나이를 일기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같은 해에 제자 사마우(司馬牛) 역시 세상을 달리한다. 일설에 의하면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송나라 대부 환퇴가 사마우의 친형이라고 하는데, [좌전] <애공 14년>을 보면 틀림없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제 [논어] 12장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사마우(司馬牛)와 자하의 대화를 살펴보자.
사마우: “사람들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나 홀로 없구나.” 자하: “내가 듣기로는: 죽고 사는 것은 자연의 이치가 있고, 부와 귀는 하늘에 있다. 군자가 공경하여 허물이 없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함에 있어 공손하고 예가 있으면, 사방의 바다 안(온 세상)이, 모두 형제이다. 군자가 어찌 형제 없음을 근심하겠는가?”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환퇴는 경공(景公)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전권을 휘둘렀는데, 경공이 그를 경계하여 제거하려고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반란이 결국 실패하자 위나라로 도망갔다가, 다시 제나라로 가서 진성자(陳成子)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때 제나라에 있던 동생 사마우는 환퇴가 제나라로 오자, 오나라로 피했다가 다시 송나라로 돌아온다. 그 후 진(晉)나라의 조간자(趙簡子)와 제나라의 진성자가 불러들이자, 사마우는 그들의 부름에 길을 나섰다가 노나라의 수도 외곽에서 죽게 되는데, 이때 공자는 71세였다. 환퇴가 제나라로 오자 사마우는 오나라로 피한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사마우와 그의 형 환퇴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좌전] <애공 14년>과 [사기]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가 대략 71세일 때 삼환 중 하나인 숙손씨의 마부였던 서상(鉏商)이 기이한 짐승을 잡았다. 공자가 보고는 기린(麒麟)이라고 했는데도 서상이 풀어주지 않고 잡아가자, 이에 공자가 한탄하면서 [논어] 9장 <자한(子罕)편>의 “봉황이 오지 않고, 팔괘도(八卦圖)가 나타나지 않으니, 내 일생이 곧 끝나가는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인 73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는 어쩌면 정말로 더 이상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좌절하여 삶의 끈을 놓아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와 관련하여 [논어] <선진(先進)편>의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민자건이 곁에서 (공자를) 모심에, 온화하였고; 자로는, 의지가 굳세었으며; 염구와 자공은 안온하였으니, 공자가 (이러한 태도를) 즐거워하셨다. (하지만) ‘자로와 같은 이는,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사기]의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공자가 위나라에서 노나라로 다시 돌아온 후 72세가 되었을 때, 자로는 위나라 출공(出公) 첩(輒)의 대부인 공회(孔悝)가 다스리는 지역의 읍재(邑宰: 고을 원님)를 맡고 있었다. 이때 영공(靈公)의 부인인 남자(南子)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달아났던 첩의 아비 괴외(蒯聵)는 공회와 결탁하여 출공을 쫓아내고 임금이 되는데, 그가 바로 위나라 장공(莊公)이다. 이 소식을 들은 자로는 자신이 섬기는 군주를 배신한 공회를 죽이려했고, 자고(子羔)가 이를 말렸지만 결국 듣지 않고 공회를 죽이려하다가 오히려 목숨을 잃게 된다. 공자는 노나라에 있으면서 위나라가 혼란스럽다는 말을 듣고 “자고는 돌아오겠지만, 자로는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했으니, 공자는 이처럼 자로의 굳건한 성격을 간파하고 그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처럼 의도한 도(道)를 세상에 알리고자 한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친아들 그리고 자식과도 같이 아끼던 제자 안회 사마우 자로 등을 연거푸 자신보다 먼저 저세상으로 보내야 했으니, 정말이지 공자는 더 이상 세상에 남아있어야 할 의미를 찾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7.
[좌전] <애공 16년>에 따르면, 공자는 이 해 73세를 일기로 끝내 삶의 끈을 놓게 된다. 이에 애공은 “하늘이 선량하지 못하여, 잠시나마 그가 곁에서 과인(一人)을 보필하지 못하게 하니, 나 홀로 외로이 우울하도다. 이제 스스로를 단속할 수 있는 본보기를 잃었구나!”라며 슬퍼했는데, 이 말을 들은 자공은 “임금께서는 노나라에서 천수를 누리실 수 없을 것이다. 살아있을 때는 기용하지 않고, 죽어서야 애도하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또 스스로를 ”과인(一人)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천자(天子)나 쓸 수 있는 호칭이니 역시 예(禮)가 아니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실제로 [좌전] <애공 27년>에는 애공이 삼환(三桓)을 제거하려다 오히려 월나라로 도망갔다는 기록이 있으니, 여기서도 공자가 지적한 바 있는 자공의 말에 신중치 못한 모습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남다른 예측능력 역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는 공자가 죽은 뒤에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당시 위나라의 재상이었던 자공이 자사를 찾았다가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는, 혹시 병을 앓고 있는 것이 아닌지 물었다. 이에 자사는 “내가 듣기로는 재물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고 하고, 도를 배우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병들었다고 하오. 나는 가난하지만 병들지는 않았소.”라고 말했고, 자공은 자기가 한 말을 평생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하는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서하(西河)에 머무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후에 아들이 죽자 너무나도 서럽게 울다가 결국 눈이 멀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하의 이러한 태도는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모자란다.”는 과유불급(過猶不及)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니, 향후 예(禮)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하자.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4, 2013년 12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