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주인으로 사츠마, 초슈, 토사, 히고(가고시마, 야마구치, 고우치, 사가의 옛 지명)에서 온 사무라이와 황실 및 귀족이 만든 메이지 정부는 아직 권력기반이 불안정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적 멤버들로 구성된 여행단을 1871년 파견해 아메리카, 유럽을 견학하게 했다. (본래 여행의 목적은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이었으나 일이 잘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 여행은 약 2년 정도 걸렸다. 이들이 국내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구래의 정치체제로 돌아가려 하면서 급격한 서양화에 반발했던 보수적인 세력과 메이지정부 하에서 권력이 특정 실력자에게 집중된 데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결탁해 반격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결국 이들 세력은 정부로부터 쫓겨났다. 그리고 메이지 신정부의 방침은 서양식의 국가 제도와 그에 걸맞은 국민교육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정해졌다. 이는 도쿠가와 정권말기부터 후쿠자와가 주장했던 방침에 거의 들어맞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메이지정부와 후쿠자와 사이에는 서로 엇갈리는 쟁점이 있었다. 그것은 ‘민심’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정부는 누차 ‘민심’을 잡음으로 여겼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그것을 정치에 주어진 환경(소여)으로 여겼다. 이제 그 점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1874년 메이지정부에 의해 쫓겨난 세력의 일부는 헌법과 의회제도 설립을 메이지정부에 요구하는 서원(誓願)을 냈다. 또 신정부에 대해 불만을 품은 구(舊)사무라이가 몇 차례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런가 하면 조선출병에 반대했던 메이지정부가 타이완에 파병한다고 하는, 도대체 새로운 정부이념에 충실한 세력이 어떤 세력인지 알 수 없는 사태가 이어졌다. 이즈음 후쿠자와 유키치는 바바 다츠이(일찍이 후쿠자와의 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당시 영국에 유학하고 있었다) 앞으로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현재 일본에서는 병란이 가라앉았지만, 마인드mind의 소동이 아직도 그칠 줄 모른다. 이후로도 점점 지속할 것이 틀림없는 기세다. 이러한 전에 없던 좋은 기회에, 구습의 혹닉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엘리먼트element를 유도하여 민심을 개혁하고 싶다. (1874년 10월 12일, 바바 다츠이에게 보내는 서한, 『후쿠자와 유키치 서한집』제1권)

또한 국민이 정부를, 마치도 신을 신앙하는 것과 같이 경외하는 상태는 오히려 국가에 위험할 뿐이라고 후쿠자와는 주장했다.

구시대의 정부는 실력으로 민(民)을 억누르지만, 현대의 정부는 민의 마음을 끌어들여 지배한다. 구시대의 정부는 민의 외면(外面)을 지배할 뿐이지만, 현대의 정부는 민의 내면을 지배한다. 구시대의 민은 정부를 귀신과도 같이 여겨 두려워하지만, 현대의 민은 정부를 신과 같이 숭상한다. … 정부가 솔선해서 (군대나 철도, 학교 등의 새로운) 사물을 도입하면 문명의 체재(體裁)은 정비된 듯 보이지만, 인민은 그것을 위해 스스로 사업을 일으킬 기력을 상실해 버려 오히려 문명의 정신은 쇠약해진다. … 인민은 문명을 정부가 주는 선물이라 생각해서, 의뢰심이 강해지고 정부에 대해 위축된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래서는 외국의 여러 나라와 문명화 경쟁을 해나갈 수 없다. 인민에게 독립의 기력이 없으면 문명의 체재만을 정비하면 할수록 거꾸로 민심은 위축되어 물러난다. (『학문을 권함』5편, 1874)

외형만의 문명화가 진행되면 개인이 독립적인 정신을 잃고, ‘민심’이 활력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은 아마도 처음에는 일본과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해 후쿠자와가 품었던 위구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1870년대 중반부터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가의 저작, 예를 들어 J. S. Mill, 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 (1861) 또는 H. Spencer, The Study of Sociology (1873)와 같은 저작을 읽으면서 후쿠자와는 이 문제를 문명화 일반에 따르는 위험으로 서양 각국에서도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1875년부터 1877년경에 쓴 자필 메모(글머리에 「각서(覺書)」라고 쓰여 있다)에서 그는 서양 각국에서도 ‘인심’이 통합됨은 이성적 판단에 의하기보다는 어떤 가치에 무조건 ‘경신혹닉’함에 의한 것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어떻게든 국가가 기능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문명이 진보한 나라에서도 그러하니 ‘일본의 인심’이 정치적 조작에 취약한 것은 당연한 일로, 이런 이유 때문에서라도 더욱 끈질기게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개인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후쿠자와는 생각했다.    

일본의 인심은 국왕의 성덕을 믿으며, 대신이나 장군의 현명한 재능을 믿으며, 선생을 믿고, 지도자, 경영자를 믿고, 부모를 믿는 단계에 있다. 서양의 인심은 한 발짝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니라 정치를 믿고, 법률을 믿으며, 조약을 믿고, 개혁을 믿어, 이른바 스테이트 머쉬네리(국가기구)를 믿는 단계에 있다. 한 걸음 앞서거나 뒤서는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쪽의 믿음도 경신혹닉(輕信惑溺 역자주: 가벼이 믿어 미혹에 빠짐)에 지나지 않다는 점에서는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각서」, 게이오 의숙 편(編)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제7권)(1)

‘믿음’에 의존하는 것을 후쿠자와는 경계하는 편이었으나 그것은 문명이 진보함에 따라 얼마간 극복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일본보다 진보한 서양사회에서는 인격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신뢰한다는 점에서 한 발 앞서 있다고 하지만 ‘경신혹닉’이란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한편으로 사람들 각각의 정신구조가 지금과 같은 상태에서는 ‘경신(輕信)’을 이용하여 동기를 부여하는 심리 조작마저 없으면 정치체제가 기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견해가 차츰 불거지게 되었다. 그러한 경향이 확실해 진 것은 1880년대로, 이때는 사츠마 사무라이들의 반란이 진압되기는 했지만 메이지 정부에 대한 불만이 자유민권운동으로 고조되던 시기였다. 후쿠자와는 헌법과 의회에 의한 입헌군주체제를 바랐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진 사람들이 정부 안에도 존재했다. 하지만 메이지 정부는 민간의 정부비판이 고조되고 고관의 스캔들, 그리고 정권운영을 둘러싼 내부의 대립이 격화되자 결국 후쿠자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을 정부에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 후쿠자와의 언행은 비교적 신중했다. 반정부적인 감정을 부채질할 것이 아니라 ‘민심’의 동향을 신중하게 살펴서, 그것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민심’은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고, 권력자가 지도하는 바에 따라 특정한 가치를 향해 통합되어야 할 대상도 아니다. ‘민심’은 이미 주어진 것으로서 그것과 국가의 관계는, 상황과 그것을 제어하는 권력 시스템과의 관계와도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정부는 심한 혼란이 우려되는 경우에는 ‘민심’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지만, ‘민심’의 집합적인 성질은 물론이거니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자질조차 변화시키지 못한다. 『시사대세론(時事大勢論)』(1882)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여기서 ‘사회의 성질’이란 생각은 H. 스펜서의 『The Study of Sociology』, 제1장 ‘［사회학의］필요성’이라는 장의 다음과 같은 기술을 참조했을지도 모른다.

또, Walter Bagehot, 『The English Constitution』의 제2쇄 서문도 참고하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Bagheot는 ‘인심(public mind)이 흥분한 상태에 있을 때 정치가에게 무엇을 문제 삼아야 할지에 관한 선택의 자유는 없다.’라고 했다.(3)

어찌되었든 후쿠자와는 규율과 애국심을 갖춘 인민을 교육을 통해 길러내자는 식의 아름다운 말에 어떤 의미도 두지 않았다.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그것을 ‘정치사회’의 소용돌이로부터 떼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후쿠자와는 『시사대세론』로부터 한 달 후에 출판한 『제실론(帝室論)』에서 황실을 심리적 장치로 이용할 것을 제안한다. 결코 민족주의의 열광을 부채질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열기를 완화하기 위한 장치로서 말이다.(4)

국회의 정부(의회정치)는 두 개의 정당이 서로 경쟁하여, 물과 불처럼 혹은 한여름과 한겨울처럼 대립하지만, 황실은 다만 언제나 만년의 봄처럼, 인민이 그것을 우러르면 부드럽고 따뜻해지는 기운을 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의회제에 기초를 둔 정부가 반포하는 법령은 물처럼 냉정하여, 정에 호소하는 정도가 종이처럼 얇다. 하지만 황실의 은덕은 엿처럼 달아서, 인민이 그것을 우러르면 정치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게 된다. 이는 황실이 정치적 대립의 권역 바깥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서양의 어느 학자가 황실의 존엄한 위력을 논하면서 이를 일국의 완화력이라 평한 적이 있다. 그 의미가 심원하다. 우리나라의 황학자(惶學者; 국학자와 같이 천황의 신성을 강조하는 학자), 자유민권주의자, 그 어느 쪽이 이러한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을는지. (『제실론』(1882)) 

여기서 말한 ‘서양의 어느 학자’를 종래의 연구에서는 W. Bagehot를 가리킨다고 봤다. 『제실론』에 ‘바지오씨의 영국정치체제론’이라고 언급한 곳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Bagehot의 The English Constitution이 논의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격렬한 정치적 대립의 이유나 과정을 국민은 이해하지 못하므로, 국민의 감정을 완화하려면 ‘완화력’으로서 왕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Bagehot도 했다.  Bagehot에게서 ‘국민이 정파로 분열해도 왕실은 정파적 대립에 관계하지 않는다. 왕실은 정치적 실무(business)로부터 명확하게 선을 긋고 있기 때문에 반목에 휘말린다거나 신성을 손상하는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왕실의 신성성은 보존되고, 서로 대립하고 있는 어느 당파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리하여 무언가 눈에 보이는 상징이 필요한, 교육의 정도가 낮은 사람들에게 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한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70~80퍼센트의 사람들이 정(情)을 중요시하는 현상태에서, 차가운 법은 뜨거운 정을 억제하지 못하며, 어떤 재난을 불러일으킬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떠한 시대, 어떠한 정치체제를 막론하고, 적어도 천하공공의 재(財)를 끌어 모아 천하공공의 정치를 이루고자 한다면, 천하공중의 마음을 거두어, 그 정을 제어하고, 인심세정人心世情에 온화한 감정을 불러일으켜 그 ‘화기’가 봄과 같지 않으면, 정치가 잘 될 수 없다. 군주독재의 정치에서 이것이 잘 되면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고 한다. 입헌정치에서는 ‘민심의 다수를 얻었다’고 한다. 말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 의미는 사실 같다. (『병론兵論』(1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