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는 후쿠자와가 1880년대 후반부터 정치적 대립의 ‘완화력’으로서, 황실이 ‘민심수습’을 위한 핵심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개인의 독립심 함양과 경쟁의 효용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진 바 없으나, 그것만으로는 정치적 공동체가 기능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황실을 ‘정치사외政治社外(정치권 밖)’의 ‘민심수습’ 장치로 보자는 후쿠자와의 제안은 메이지 정부 사람들을 매우 곤혹스럽게 했다. 메이지 정부의 법제도 정비에 지도적인 역할을 한 이노우에 고와시는 “후쿠자와가 지지신보에 낸 제실론帝室論이 세간의 갈채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관리 중에도 찬동의 뜻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아 보입니다. 후쿠자와는 영국에서 국왕은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는 설을 전적으로 따르고 있습니다. 즉 의원내각제를 설립하자는 것입니다. 어설픈 지식만 가지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 설득의 교묘함에 심취하여 진상을 간파하지 못합니다.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며 분개했다. (「이노우에 고와시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내는 편지, 1882년 4월」)(1)

후쿠자와의 영향력에 저항하기 위해, 이노우에 고와시는 곧 부하인 오오모리 쇼이치(내무성에서 지방자치제도 정비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가 미노루(쿠가 카츠난이라는 호로 알려져 있다. 후에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논조의 신문 『니폰』을 창간했다）에게 명하여, 월터 배젓(Walter Bagehot)의『영국정치체제론』을 일부 번역하게 했다.

이노우에가 분노한 이유는 후쿠자와의 주장이 메이지 국가의 정당성을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메이지 정부의 지도자들도 그와 생각이 같았다. 이토 히로부미의 경우, 헌법 초안을 작성하면서　“아국은 종교의 힘이 미약하여, 국가의 기축이 될 만한 것이 없다. ... (불교, 신도神道는) 종교로서 민심을 끌어 모을 힘이 부족하다. 아국의 기축이 되어야 할 것은 단지 황실뿐이다.”(1888년 6월 18일, 헌법초안추밀원회의에서의 연설, 『추밀원회의필기』1, 「헌법초안」)라고 발언했다.

후쿠자와의 제안은 이토 히로부미의 인식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메이지 정부의 정치 지도자도 헌법과 의회를 만드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욱 ‘민심수습’을 위한 심리적 장치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노우에 고와시가 후쿠자와의 저작에 분개한 진짜 이유는 메이지 국가의 ‘민심수습’ 장치를 그 장치로 제어할 대상인 국민에게 출판물의 형태로 폭로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후쿠자와의 논의는 국민의 감정적 통합 중심을 설계한 의도를 해설한 셈인데, ‘민심수습’의 장치에 대해 그것이 한낱 장치 따위가 아니라는 점을 계속해서 역설하지 않으면 메이지 국가 자체가 희극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쿠자와가 보기에는 이 장치의 중요성에 대해 민간의 토론장에서 공적으로 논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이나 냉소를 위해서가 아닌 그 자체 성취해야할 진지한 과제였다.

추밀원이 헌법초안을 심의하는 한편 재야에서는 대동단결운동이라는 정부비판 연합세력이 한창 활발하게 움직이던 1888년, 후쿠자와는 새삼 다시 황실의 국민통합기능을 논한 『존왕론尊王論』을 썼다. 여기서 황실을 ‘극심한 병증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필요한 완화제’에 비유하든가, 싸움을 중재하는 ‘부모’에 비유한 것이 아마도 정부를 화나게 했을 것이다. (『존왕론』, 1888,년, 게이오 의숙편『후쿠자와 유키치 전집』제9권）후쿠자와에 의하면 국회의 운영 원리는 네 편 내 편으로 갈려서 다수를 차지하려 경쟁하는 것(‘다수주의’)이므로 경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경쟁의 외부에서 ‘완화제’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며, 이는 ‘책략’ 따위가 아니라 필요한 분업이었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황실이 역사적인 권위일 뿐 아니라, 근대입헌국가에서 일종의 정치적 기능을 분담한다는 주장은 정부 내부에서 발언이라면 모르지만 국민에게 알려주어서는 안 될 말이었다. 한편 후쿠자와의 입장에서는 역사적으로 믿음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그것이 사실인지 여부를 떠나 일종의 정치적 합의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한낱 권력투쟁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아니고, 다만 그 합의를 기반으로 국가를 설계하려면 당당하게 국민에게 합의를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후쿠자와가 『제실론』, 『존왕론』으로 시도해 본 것은 바로 그 요청이었으며, 메이지 정부에게 그것은 동업자 이외에 절대 비밀로 하는 것이 관례인 술수를 밝힌 글이었다.  

후쿠자와는 초기 저작에서 도쿠가와 정치체제가 대단히 경직된 권위주의적 체제이며 그 때문에 국민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대외적으로 일본을 위기에 처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880년대 후반부터의 저작에서는 도쿠가와 체제의 교묘한 권력분산기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좀 전에 후쿠자와와 메이지 정부는 황실이 정치적 상징 기능을 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했다고 하였는데,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후쿠자와는 주도면밀하게 주장을 세워 나갔다. 그는 헌법과 의회가 일본의 국가제도상 본래부터 바람직한 원리로 간주되어 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즉 ‘민심수습’의 장치까지 포함해 헌법과 의회는 이미 일본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제도적 지혜였으며, 일본 국민에게 암묵적으로 양해되어 왔다는 것이다. 도쿠가와 체제는 ‘전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다원화된 권력 주체가 상호간에 경쟁하고, 억제하는 체제였다고 말한다. 

　

막부의 정치는 백방으로 권력을 평균화하여, 누군가가 특히 우위를 점해 득세하게 하지 않고, 또 누군가가 특히 불만을 품는 일도 없게 하여, 정권(중앙권력)에 장애가 없는 한, 중인(중간계급을 의식한 용어)이상 되면, 세간에서 명망있는 자가 납득할 수 있도록, 각자의 지위에 만족하게 함으로써 중앙 권력을 유지하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혹은 교묘히 정권에 침투해 기반을 빼앗는(몰래 확보하는) 것이라 하여도 좋을 터이다. 아니면 사물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틈을 타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라 하겠다. (「시정이언施政邇言」『지지신보』1888년 1월 9일)

후쿠자와는 도쿠가와 체제를 평가하면서 국가를 통합하는 권력은 실은 다양한 여러 권력주체의 ‘평균’ 위에 놓여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도쿠가와 국가는 중심 권력의 명령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자동기계’처럼 움직인다.

도쿠가와 방식의 정풍政風(정치방식)은 여러 해의 습관을 키우는 것으로 국민의 성질을 일정한 것으로 하여, 전국의 안녕은 마치 자동기계에 의해 유지되는 것처럼 되었다. 그러니 막부에도 제번諸藩에도 항상 현명한 군주와 재상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260년에 걸쳐 300개 번 전체를 평균적으로 관찰하면 암군暗君과 우매한 재상이 다수 있었지만, 그 지배자의 현명함과 우매함은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적고, 그들이 현명하다 해도 그 힘을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은 아님과 동시에 우매하다 하여 또는 난폭한 군주라 하여 그 난폭함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대, 어떤 번에서도 시정施政의 잘되고 못됨에 그렇게 득실이 없었다는 것은 봉건정치의 근본 즉, 사람에 의존하지 않고 제도 관습에 의존하였던 증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국 도쿠가와 정부의 봉건제도는 고대로부터 도쿠가와 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문명이 이루어온 바의 정점에 이른 것으로, 금일 우리들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높이 평가해야 점이 결코 적지 않다. (「일본국회기원」『지지신보』1889년 2월 14）

후쿠자와는 ‘봉건’이라는 역사적 경험이 가져온 정치적 효능으로서 권력주체의 경쟁, 상호억제만이 아니라 ‘자동기계’와 같은, 국민의 ‘자치’ 능력 형성을 평가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곧 일본 역사에서 진시황, 수양제와 같은 폭군을 볼 수 없는 이유이다. 위로는 절대군주가 없는 한편 아래의 백성에게는 자치의 여지가 남아 있어(어떤 계층도) 다소나마 활동할 여지가 있음은 간단히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이나 조선 등지의 국민이 활발한 폭군 아래 신음하고, 이제까지 ‘자동’ (자동 메커니즘과 같은 통치 시스템)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면, 중국이나 조선이 일본과 같은 단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국회의 전도前途」, 『지지신보』1890년 12월 10일∼20일)

여기서 ‘탈아’적 주장을 읽어내기란 간단하다. 하지만 논의의 초점은 아시아에 대한 경멸에 있지 않다. 역사로부터 어느 정도 긍정적인 서사를 이끌어 내,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전개할 수 있는지 여부에 논의의 초점이 있다. 물론 이 논의는 민족주의 감정과의 연결을 염두에 두고 있다. ‘자치의 제도, 관습’에서 ‘일본 문명’은 ‘동양 전제’와는 이질적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위에서 인용한 논설에서 후쿠자와는 ‘일본은 국토가 동양에 있어, 중국 조선과 이웃한다고는 하지만, 그 정사政事와 인정이 인접국과는 완전히 달라서, 일본의 체재體裁가 겉으로는 전제국가와 같으나, 내부의 실제를 들여다보아 자세히 알면 알수록 점점 일본의 제도가 전제가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된다.’라고 했다. (「국회의 전도」)

　

후쿠자와는 일본 황실이 무가정권이 지배한 시대에도 ‘권력의 평균’ 요소로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는 황실이 권력자의 의도와 별도로 ‘전제’화를 막는 기능을 한다고 하면서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중국·조선에서 보이는 황제의 ‘전제’와는 다른 원리가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권위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분권적인 ‘봉건’제도가 역설적으로 국민의 자치 습관을 낳았으며 이것이 또 메이지 국가의 기초가 되었다고 말한다. 후쿠자와는 메이지 국가가 천황의 권위와는 별도로 역사에 기초를 둔 정치체제라는 논리를 도입했다. 이처럼 제한된 제권력의 상호억제와 국민의 ‘자치’를 원리로 한다면 새롭게 설립된 메이지 국가의 ‘입헌 정치체제’는 단지 서양선진국의 모방이 아니며, 역사적인 정당화가 가능해진다. 이 주장에는 분명 후쿠자와의 ‘민심’ 조작적 의도가 들어있다. 그러나 단지 후쿠자와는 평가의 대상이 되는 정치 시스템의 포인트를 해설하고, 그 다음 그 평가에 대해 독자의 합의를 구할 따름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물론 후쿠자와가 역설한, 일본 입헌주의의 역사적 근거라는 서사를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 하지만 현대에도 누군가 후쿠자와처럼 정치적 주장에 역사를  끌어들여 이용하면 지식인들조차 쉽게 거기에 걸려드는 것을 본다. 게다가 거기에 걸려든 지식인들은 입헌주의와 자유주의 가치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과연 헌정적 애국심(Constitutional Patriotism)을 주장하는 현대지식인들이 후쿠자와와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