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는 『군주』 15장에서 ‘미덕’(virtu)과 ‘악덕’(vizio)을 구분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응용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언뜻 보면 매우 난삽하고 정리되지 않은 목록일 뿐이다. 그러나 『군주』 16장부터 전개되는 군주의 ‘자질’에 대한 설명을 보다보면, 이렇듯 뒤죽박죽으로 나열된 목록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분류를 혼돈한 것도 아니고, 대충 써내려간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마키아벨리가 이 목록을 구체적인 목적을 갖고 기술했고,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체계적으로 배열했으며, 서술하면서도 거듭 수정한 하나의 노작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에게도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있다. 바로 ‘정치 공동체의 존속’이다. 종종 『군주』에서는 ‘국가를 유지해야’(mantenere lo stato)한다는 말로, 『강론』에서는 “보편적 안전”(la sicurta universale)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하지만, 주체가 ‘군주’에서 ‘시민’으로 전환되었을 뿐, 내용은 하나 같이 ‘정치 공동체의 존속’이다. 이때 ‘정치 공동체의 존속’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무엇보다 ‘시민적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군주』에서도 ‘자유로운 삶’(vivere libero)에 대한 찬사를 읽을 수 있듯이, 마키아벨리는 ‘시민적 자유’를 ‘공동체의 존속’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간주하는 ‘공화주의’의 이상을 공유했다. 다른 하나는 마키아벨리가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공화주의’의 이상을 가졌다는 것이다. 당시 인문주의자들도 ‘진정한 철학’이 ‘공동체의 존속’과 무관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들이 동경하던 ‘조화’와 ‘자치’의 베네치아는 마키아벨리가 꿈꾸던 공화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그렸던 공화정은 ‘갈등’을 통해 ‘자유’를 지키고 ‘제국’으로 팽창한 로마였다.
아마도 당시 지식인들은 ‘정치 공동체의 존속’을 ‘정치’뿐만 아니라 ‘도덕’의 잣대로 사용하는 것이 더 불편했을 것이다. 시민적 자유를 누구보다 중시했던 살루타티(Coluccio Salutati)도 철학적 관조가 이끄는 ‘좋은 삶’으로부터 동떨어진 ‘좋은 정치’가 있을 수 없다고 믿었고, 피렌체의 군사적 무장을 그토록 설파했던 브루니(Leonardo Bruni)도 ‘철학적 탐구’와 ‘정치적 헌신’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정치관을 고수했던 터다. 안팎으로 국가의 존속이 최대의 관심사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지식인들에게 ‘잘 사는 것’(eu zen)을 ‘사는 것’(zen)으로 대체하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자유로운 삶’이 곧 ‘좋은 삶’이라는 것을 설득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둘의 관계는 철학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 공동체의 존속’과 관련된 정치가의 숙제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 마키아벨리의 ‘악덕’(vizio)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군주』 15장은 당시 지식인들에 대한 도전이고, 궁극적으로는 스스로가 갖고 있는 판단 근거의 우월함을 설득하기 위한 논증이다. 그러기에 마키아벨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4권에서 제시된 덕목들을 매우 의도적으로 왜곡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중용’(mesotes)을 취하는 것을 탁월한 미덕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함’(arete)과 관련된 미덕들을 하나의 극단처럼 보이도록 배열한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낭비’와 ‘인색’의 두 극단사이의 중간을 취하는 ‘자유인다움’(eleutheriotes) 또는 ‘후함’(eleutherios)을 탁월한 품성으로 제시한다면, 마키아벨리는 ‘낭비’와 ‘인색’이 아니라 ‘후한’(liberale) 것과 ‘인색한’(misero) 것을 극단으로 제시한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어떤 것이 ‘악덕’이 인지 모르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증은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지식인들의 생각을 일반인들의 ‘상식’정도로 낮추려는 의도를 갖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는 ‘미덕’이 정치적으로는 ‘악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가 제시하는 10개의 미덕과 악덕의 짝은 ‘후함’을 제외하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록과 무관하게 구성된다. ‘포부가 큰 것’은 ‘인간미가 있는 것’로 교체되어 ‘오만’과 짝을 이루고, ‘꾸밈없음’은 ‘솔직함’으로 표현되었지만 ‘허풍’도 ‘비굴함’도 아닌 ‘약삭빠름’과 짝을 이룬다. ‘쉬운’ 성격은 ‘온화함’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딱딱하다’는 표현은 분노와 관련되기보다 인간관계와 관련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그 자체로 나쁜 것들, ‘잔인함’과 ‘음탕함’이 미덕과 짝이 되어 그 결과에 따라 다르게 판단될 여지가 있는 것으로 격상된다. 한마디로 마키아벨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함을 ‘그렇게 보이는 것’ 또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것’ 정도로 격하시킨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들을 해체시키려는 목적은 물론 ‘정치 공동체의 존속’이 미덕과 악덕을 구분하는 판단의 기준임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인문주의자들과 구별된 인식론적 체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차이가 극명하게 보이는 부분이 『군주』 16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르는 지식인들에게 ‘인색함’은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탐욕스러움’을 만족시키려는 사람들의 특성이라면, 마키아벨리에게 ‘인색함’은 ‘후하다는’ 평판을 유지하려다 오히려 ‘탐욕스럽다’는 비난을 받게 되는 세간의 평가일 뿐이다. 전자에게 ‘나쁘게 비쳐지는(phainesthai)’ 것은 ‘본질적인 것’ 또는 ‘고귀한 것’에 대한 열망이 인간적인 탐욕을 절제하지 못해 나타나는 결과라면, 후자에게 ‘인색하게 여겨지는(tenuto)’ 것은 ‘정치 공동체의 존속’이라는 결과를 대중들에게 보여주지 못해 발생하는 정치적 위기일 뿐이다.
이런 잣대에서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후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 국고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한다. 이미 『군주』 10장에서 작은 군주정이라 할지라도 ‘포위를 당해도 최소한 일 년은 버틸 수 있는 물자’를 확보해야한다고 말해서인지, 구체적 설명도 없이 “후하다는 평판을 유지하려 한다면, 인민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고, 혹독한 세금을 부과하고, 돈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모든 것들을 해야 할 필요”에 봉착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덧붙인다. ‘미덕’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따르다가 이후 고치려고 할 때, 군주가 얻을 것이라고는 ‘인색함이라는 불명예’ 뿐이라고 말이다. 이때 ‘인색함’은 ‘탐욕스러움’보다는 나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색함’은 최초부터 적용된다면 ‘다수’를 자기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악덕들”(vizi) 중 하나지만, ‘탐욕스러움’은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다수’와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기에 반드시 군주가 피해야할 악덕이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도 역시 ‘다수’의 지지를 잃으면 ‘정치 공동체의 존속’이 불가능하다는 것 하나 뿐이다.
키케로를 넘어서: ‘사자’와 ‘여우’
『군주』 17장에서는 6장 이후 처음으로 ‘새로운 군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잔인함’이 당시 기독교 윤리의 기초인 ‘온정’(caritas)과 짝을 이루어 새로운 군주가 반드시 알아야할 악덕으로 소개된다. 8장에서 이미 ‘잘 사용된 잔인함’(crudeulta bene usate)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로마 교회가 과시하던 ‘경건’(pieta)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과 함께 기독교 사회의 ‘사랑’(agape)을 대체할 ‘공포’(timore)의 유용성까지 보다 체계적인 논증이 전개되는 것이다. 당시 부패가 일상이 되어버린 로마 교회의 족적을 살펴보면, ‘잔인함’이라는 주제는 그리 낯을 붉힐 이야기도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나 다수에게 윤리를 가르치는 사제들의 설득체계를 하나씩 공격할 때마다, 분열을 일으킨 ‘소수’에게는 잔인하고 지배받지 않으려는 ‘다수’는 만족시키라는 당부를 할 때마다, ‘사랑’이 아니라 ‘공포’가 분열된 도시를 봉합할 것이라는 충고 속에 담긴 ‘반(反)기독교’적 입장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다.
그러기에 『군주』 18장은 마키아벨리에게서 ‘자연’이나 ‘신’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를 찾고자하는 사람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서 마키아벨리는 키케로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든 법의 원천이라고 믿고 있던 ‘신’과 ‘자연’까지 현실이란 명목에서 거부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키케로에게 ‘신의’(fides)는 매우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키케로가 『의무론』에서 밝히듯, ‘신의’는 한편으로는 ‘정의의 기초’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참된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타인들의 호의’다. 따라서 ‘신의’는 진정한 ‘영광’의 조건이자, 도덕적으로 악한 것에 유익함이란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잣대 중의 하나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전쟁 중이라고 할지라도 약속을 지켜야한다는 키케로의 충고를 ‘그럴 수 있으면 좋은 것’으로 제쳐두고, 기만적이거나 교활한 언행이라도 ‘정치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잘 사용해야하는 것’으로 강조한다. 이미 키케로를 따른 사람들의 선택지와는 전혀 다른 선택지를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기만’에 대한 평가에서 키케로와 마키아벨리는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마키아벨리가 『군주』 18장에서 키케로가 사용한 ‘사자’와 ‘여우’의 비유까지 빌린 이유도 이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키케로도 ‘진지함’만으로는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는 말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의무론』 1권 41절에서 보듯, 키케로는 ‘힘’에 대해서는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만 신뢰를 배반하면서도 마치 선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행동하는 ‘속임수’(fraude)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 반면 마키아벨리는 ‘힘’과 ‘기만’ 모두를 사용해야하고, 특히 ‘기만’을 사용할 줄 알아야한다고 충고한다. 키케로를 따르는 사람들은 ‘도덕적 선’과 ‘유용한 것’이 타협해야할 정치적 필요에 대한 자각은 필요하다고 느꼈겠지만, ‘여우’의 방식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반드시 “알아야”(saprere)할 상황에 강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사자’만큼이나 ‘여우’가 되는 것에 항상 관심을 기울여야한다.
마키아벨리의 ‘근거 있는’ 악명
마키아벨리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상당부분 일리가 있는 것들이다. 혹자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현실주의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일축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 그쳤다면, 인간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보는 기독교 윤리관에서 마키아벨리의 충고가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제한된 폭력의 행사만을 언급했다면, ‘힘’이란 짐승에게 속한 것이지만 예외적인 경우에는 필요하다는 키케로의 신중함으로부터 마키아벨리의 정치가 구별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인간의 ‘좋은 삶’을 향한 열정을 부정하지 않았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삶’에 대한 성찰로부터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이 이탈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서는 ‘폭력’과 ‘공포’가 정치의 본질로 자리를 잡고, ‘기만’과 ‘눈가림’까지 용인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기에 마키아벨리가 지금까지 받아왔던 악평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폄하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가 무분별한 정치적 탐욕까지 정당화했다거나, 일관된 잣대도 없이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판단했다고 단언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위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충고도, “기만을 통해 많은 것을 감추어야한다”는 당부도, 일관된 판단 근거에서 나온 말이다. 바로 ‘정치 공동체의 존속’이다. 물론 ‘기만’과 ‘눈가림’에 마키아벨리만큼 개방적인 사상가는 오늘날에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세상의 이러한 측면”(questa parte del mondo)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너무나도 도덕적으로 ‘진지한’ 현자에게 나라를 어떻게 맡길 수 있겠느냐고 반문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문뜩 ‘신’의 권위를 대변했던 교황도 자기가 원하는 바를 ‘기만’을 통해 성취했던 시대에, ‘신중함’을 상황에 맞는 처신으로 믿는 지식이 상식이 되어버린 시대에, 마키아벨리의 몰도덕적 현실주의에 엄격한 도덕적 잣대만을 들이대는 것이 현명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가능하면 선한 것으로부터 떠나지 않아야하겠지만, 필요한 경우 어떻게 악해질 수 있는지도 알아야한다”는 충고 속에서, ‘정치 공동체의 존속’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통찰력을 읽어낼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도 더 필요할 지도 모를 일이다.
곽준혁(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 copyrights@aporia. 이 저작을 인터넷 상에 게재할 권리는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이 게시물은 아포리아님에 의해 2013-09-01 18:32:00 아포리아 칼럼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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