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1)] 그로부터 시작된, 변화와 연속의 서사(福澤諭吉が仕掛けた近代化と歴史的連続性の物語)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사는 것, 한 사람에 두 몸이 있는 것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概略)』(1875) 서문에는 “마치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사는 것과 같고, 한 사람에 두 몸이 있는 것과 같다”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사실『문명론의 개략』은 후쿠자와의 『서양사정(西洋事情)』(1866-1870)이나 『학문을 권함(学問のすすめ)』(1872-1876)에 비하면 그렇게 베스트셀러라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 책이 자주 읽히게 된 것도 이차대전 이후나 되어서였다.
후쿠자와의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산다”라는 말은 정치체제의 극적인 전환을 거치면서 비극적인 체험을 한 세대에게 그들 자신의 사상적 체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줄 수 있는 긴요한 단서로 여겨졌다. 이 말은 개국 이전의 폐쇄적인 사회와 개국 이후의 급속한 서양화 물결 모두를 경험한 것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그 경험이야말로 일본의 ‘문명화’라는 과제에 대해 대처하기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선언으로 읽혔다. 또 한 번의 ‘개국’을 패전으로부터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그 경험에서 자신들이 받은 충격의 의미를 후쿠자와와 더불어 새롭게 읽어내려 했던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근대일본의 사상사적 방법의 형성(近代日本における思想史的方法の形成)」(1961)에서 이 말을 인용하며 “개국이란 결코 과거로부터 배울 수 없는 미지의 경험이기에 문명의 기초이론을 구축한다는 것은 실로 그(=후쿠자와)에게 전대미문의 실험”(1)이었다고 평하면서, 이것이야말로 후쿠자와의 ‘방법적 자각’의 기초를 이루는 인식이라고 했다. 마루야마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폐쇄적인 도쿠가와의 체제하에서 만들어진 정신 형태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서양문명의 이론을 자신의 것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곤란한 조건을 오히려 역이용하려 했던 사람이 바로 후쿠자와였다. 후쿠자와는 그 결정적인 곤란함을 ‘방법적으로 자각’함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유리한’ 조건으로 역전시키려 했던 것이다.
다만 마루야마는 일본 전통과 서양 문명 양쪽을 알고 있어서 좋았다든가, 서양의 문명화 조건과 유사한 요소를 일본의 역사 가운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발상을 안이한 절충주의, 근거 없는 동서조화론이라며 단호히 부정했다. 후쿠자와가 말한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산다”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 후쿠자와의 인식은 자신이 서양문명의 주창자 편에 서서 일본의 역사와 현 상황을 개탄한다거나, 서양의 ‘방법’을 일본의 ‘소재’와 연결 지으려는 지식인의 안락한 우월지향과는 완전히 다른, 자신의 앎의 기초를 묻는 방법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후쿠자와에 대한 마루야마류(類)의 평가는 1970년대까지의 정치사상 연구 분야에서 일종의 업계 전통과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지금도 어디선가 계속되고 있다.) 마루야마 자신『「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1986)에서 자신의 착안이 ‘한 몸으로…’라는 구절을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조금은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물론 다른 한편에서 새로운 세대(라고 자부하는)의 독자들은 후쿠자와의 저작이 모더니티의 문제성을 품고 있다고 보는데, 이들에게 마루야마가 내린 바와 같은 평가는 근대 국민국가 시스템을 칭찬하고 ‘문명’적 주체의 관점에서 아시아를 객체화하려 했던 오리엔탈리즘 사상가로서의 후쿠자와에 대해 너무 안이한 평가를 내린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실제로 마루야마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文明論之概略」を読む)』가 출간되었을 당시, 마루야마는 결국 국민국가를 상대화하지 못했다면서 그 점을 아쉬워하는, 그러나 주관적으로는 매우 호의적인 코멘트가 나왔던 것을 필자도 본 기억이 있다.
한학자의 전좌(漢学者の前座)(2)
물론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산다”라는 말은 후쿠자와 자신 전반기 인생을 구체제 가운데 살아왔다는 인식을 표명한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구체제가 단지 문명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서의 의미 밖에는 갖지 못하는 것일까?
『후쿠자와 유치키 자서전(福翁自伝)』에 의하면 후쿠자와는 당시 사무라이(武士)의 자제치고는 늦게 학문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곧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었고 특히 『춘추좌씨전』은 몇 번이나 읽은 끝에 흥미로운 부분을 잘 암기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고『한학자의 전좌前座』정도는 되었다고 자랑하고 있다. 후쿠자와가 한학을 배웠다는 시라이시 쇼잔(白石照山)이라는 학자는 지쿠젠(筑前,지금의 후쿠오카)에서 유명한 한학자이자 의사이기도 했으며 가메이 난메이(亀井南溟) 계통에 속한 것을 자랑스레 여겼다. 가메이학(亀井学)은 오규 소라이학(荻生徂徠学)의 계통인데 가메이학의 관련 인맥으로는 분고(豊後, 지금의 오이타)의 고명한 교육자(한학과 서양과학을 함께 공부했다) 호아시 반리(帆足万里)나, 실천적인 교육가이었던 히로세 탄소(広瀬淡窓) 등이 있다. 그러므로 후쿠자와 역시 근세 후기 큐슈의 실학 학풍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후쿠자와의 사상과 혁신성이 서양의 충격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미 그것의 기초조건은 근세 후기의 지식사회 가운데 배태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사실 그러한 시각의 연구도 상당수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후쿠자와 저작을 읽으면 후쿠자와에게 서양문명은 갑자기 외부로부터 도래한 계시와 같은 것이 아니라 근세의 지식사회 내부에서 뚫고 나오려는 움직임과 적절한 타이밍에 맞물려 공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큰 틀에서 보면 후쿠자와를 이렇게 위치 짓는 것이 현재 관점에서도 타당할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는 헤겔적인 관점에서 사상이 사상을 내부로부터 지양해 간다는 서사를 선호하기 때문에 “한 몸으로 두 인생을 산다”라는 말 가운데서 ‘변증법’적인 계기를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한편 후쿠자와 사상이 근세로부터 계승해온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인식은 현대 국민국가라는 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국민국가 프로젝트를 개국,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갑자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도쿠가와 시대까지 그 문제성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아야 할 것으로 보는 해석의 단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독해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독자 입장에서 나온 해석일 뿐이다.
사족(士族)의 정신과 자유의 기풍(3)
후쿠자와의 말에서 원하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후쿠자와가 개국경험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도는 좀 번거롭기는 하지만 흥미진진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일본의 전통적 사상 내부로부터의 전회(轉回)와 전개(展開)라는 서사의 원류는 바로 후쿠자와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이 작업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현대의 우리는 후쿠자와 자신이 창안한 서사에 편승하고 있는 셈이다.
후쿠자와는 이미 『문명론의 개략』에서 일본의 역사적 전통 속에는 ‘자유’를 산출할 요인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고대 왕조인 주나라 말기에 이설쟁론(異説争論)이 전개되어 자유의 기풍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후로는 전혀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무가(武家) 정치의 시대가 열려 황실=‘지극히 존엄함(至尊)’과 무가(武家) 정권=‘지극히 강함(至强)’을 두 축으로 하는 정치체제가 성립함으로써 ‘자유의 기풍’이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인의 눈에는 중국이나 일본이 모두 같은 아시아적 전제 군주제로 보일 수 있어도 실제 그 내용은 대단히 달라서 후쿠자와가 “중국인이 무사(無事)를(4) 말한다면 일본인은 다사(多事)(5)다"라고 한 것이다”(『문명론의 개략』제2장). 후쿠자와는 이 가운데서 다원적인 주체와 사상이 경쟁을 벌이는 상태를 의미하는 ‘다사(多事)’라는 것을 ‘문명’의 기초 조건으로서 중시했다.
이는 바로 후쿠자와 사상의 ‘방법’을 구성한다. 새로운 국가인 메이지로서는 심각한 내전이었다고 할 수 있는 세이난(西南) 전쟁(1877) 무렵부터 후쿠자와의 ‘방법’은 한층 더 명확해졌다. 개국 이전의 일본 정치체제가 딱히 의도한 바 없이 유지하고 있었던 ‘자유의 기풍’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려는 경향이 전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세이난 전쟁 무렵 후쿠자와가 남긴 메모 가운데는 “사츠마(薩摩, 지금의 가고시마) 사회를 평한다면, 번(藩)의 정치체제가 전제專制이기는 하지만 번사 상호간의 관계에는 자유자치의 풍이 있다. 그러니 (이들 번사는) 마치 자유정신을 가지고 전제군주에게 봉사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츠마의 군사가 강한 것은 특히 자치적으로 움직이는 동료들 간의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는 또 여기다 다시 덧붙여 적기를 이 무렵 읽었던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1873, 영역본)를 인용하면서 “전제정치 하에도 국권을 가진 인민은 있을 터, 틀림없이 논의들이 나올 것”이라고 적은 곳이 있다. 비록 ‘전제'이긴 했지만 그 안에 ‘자유 자치’ 정신이 살아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던 것을 높이 평가하여 후쿠자와는 그것이 바로 사츠마 번사가 가진 독립적 정신의 비밀이라고 말한다. (「각서(覚書)」,『후쿠자와 유키치 전집(福澤諭吉全集)』제7권)
이 메모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즈음 후쿠자와는 ‘자유’나 ‘독립’이 충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공심’과 함께 조합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동시에 그 공급원은 바로 전통과 관습에 있다는 서사를 분명히 선택했다. 여기에는 토크빌은 물론, 『문명론의 개략』에서 참조한 F. Guizot나 J. S. Mill 등 토크빌에게 영향을 주거나 또는 토크빌로부터 영향을 받은 서양인들의 저작도 도움이 되었다. 후쿠자와에게는 이러한 자유주의사상이 가리키는 방향성과 ‘공공심(公共心)’이란 이야기가 서로 합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분권론(分権論)』(1877)에서 후쿠자와는 토크빌을 참조하면서 “사족의 삶은 국사정치(國事政治)의 가운데 있으며”, 그 기풍은 정치적 이념(political idea)이라고 할 것으로 “국가의 공적사업에 마음을 기울이는 기풍”이라고 주장했다. ‘공공심’의 원천은 무사가 통치계급으로서 가져온 정신에 있다는 것이다. 이 저작보다 2년 전에 발표된『문명론의 개략』에서 “서양인민의 권력은 강철과도 같이 좀처럼 팽창하지 않는가 하면 수축도 하지 않는다. 반면 일본 무인의 권력은 고무처럼 그것이 접하고 있는 상대에 따라 간단히 팽창 수축을 일으켜 자신보다 못한 것을 만나면 부풀어 오르고 더한 것을 만나면 곧 움츠러 든다”라며 ‘무인’의 기풍을 엄하게 비판했던 것과 비교하면 사뭇 달라진 모습이다. 무사의 정신이란 무언가 훌륭한 것처럼 말하지만 상하관계의 망에 얽매여 상호감시와 평가의 시선 가운데, 허세를 부리거나 흠칫 물러선다거나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틀림없이 간파했을텐데 말이다.
전통과 자치의 정신
사족과 근세에 대한 후쿠자와의 재평가는 요약하자면 일종의 전통회귀를 통한 보수화라고 정리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볼까 한다.
『분권론』에서는 모아서 가른 ‘권權’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점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분권’이란 말은 근세의 ‘직분’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개념이다. 즉 ‘분권’론이란 것은 단지 중앙집권에 대한 지방분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작은 집단부터 큰 사회에 이르기까지 중층화된 질서 가운데 각각의 층위에 고유한 자치 권한과 권리의 체계를 표현하기 위한 개념장치로서 근세에 생긴 ‘분(分)’이란 사고방식을 재활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조작은 다른 저작에서도 보인다. 『통속국권론(通俗国権論)』(1878)에서는 “일본국민은 박정하게도 보국의 마음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고 원래 백성 간의, 마을 간의 경쟁의식이 강할 뿐이다. 그렇지만 그 경쟁이 명예를 중하게 여기며 바른 도리를 지키기 위해 행하는 것이라 그것을 통해 인심(人心)의 결합이 생겨난다. 메이지 시대에도 자유를 존중하고 이 의식을 제대로 키움으로써 보국심의 기초가 되게 하였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직분’론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분권론』에서의 ‘사족의 기력氣力’에 대한 평가는 단지 나라를 생각하는 무사들의 기개가 근대 국가의 애국심의 기초였다고 주장하려 했던 것은 아니다. 근세의 ‘직분’ 사상을 자치적인 책임감의 중층적인 관계로 재평가한 것은 정확히 서양의 ‘봉건사회’에서처럼 다원적인 권리주체의 경쟁으로부터 공공의식이 성숙했다는 서사를 독자에게 제공하려는 전략이 내재해 있다.
후쿠자와가 소장했던 기조Guizot의 『유럽문명사(The History of Civilization in Europe)』(1870, 영역본)을 보면, ‘봉건사회’에서 신분, 직능 집단 등의 중간단체가 경쟁함으로써 사회적 활력이 생겨났다고 강조하는 부분에 “봉건의 자유는 한 사람의 자유에 있지 않다”라고 쓰여 있다. 이는 그러니까 근대에는 개인이 주체가 되는 자유가 필요하다는 의도에서 쓴 메모라기보다는 ‘봉건적 자유’를 자유의 전통적인 원천으로 보려는 발상에 착목한 메모일 가능성이 크다.
가령 이 뒤에도 후쿠자와는 국가의 교육방침이 복고주의로 전환하려 한 것을 비판한 「덕교지설(德敎之說)」(1883)에서 “도쿠가와의 봉건제도는 유학자를 중시하지 않고 사회에 긴요한 대사를 무사와 속리(俗吏)가 담당하게 했지만, 그 결과 중국 조선과 같이 유교가 사람들의 정신을 통제하게 하는 일 없이 오히려 정신의 운동을 자유로운 그대로 놔두게 되었다. 우리 일본의 무사는 곧잘 유교를 억제하여 자기 고유의 정신을 자유롭게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근세 일본에 학문의 정통주의가 성립하지 않았던 덕에 ‘정신 운동의 자유’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가하면 국회 개설 때는 의회제도가 원래 일본 전통에도 맞는 것이라 하면서 “일본의 봉건 군주는 장군이 되었거나 번주가 되었거나 명목상 전제 군주의 위치에 있었을 뿐 전제정치를 한 것은 아니다. 어쩌다 폭군이 나타났다 해도 사치를 누리거나 제멋대로의 행동을 하는 데 그쳐, 그것이 광포한 정치를 낳은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전제정치라 할 수 있는 실체가 없다 한다면 군주가 명군이 되었든지 혹은 바보가 되었든지 간에 정치적인 득실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명군名君을 모신 정부가 반드시 유능했던 것도 아니었고, 바보인 군주를 모셔서 꼭 정치가 엉망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국회가 나아갈 길(国会の前途)」(1890)라고 논했다.
자치와 공공심이란 서사의 공과
이렇게 후쿠자와는 일본의 근세를 근대화로 가기 위한 기초조건이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을 이끌어 냈다. 그렇다면 과연 ‘훌륭하군’이라면서 이 논문을 끝마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가 못하다. 「각서」와 후쿠자와의 초고를 연구 조사할 수 있는 우리로서는 후쿠자와가 의도적으로 서사를 선택 직조하면서 독자에게 그 서사를 편안한 마음으로 믿어 보시라고 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했던「각서」에서 후쿠자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본의 인심은 실로 국왕의 덕성을 믿고, 대신이나 장군의 현명한 재능을 믿으며, 선생을 믿고, 우두머리, 남편을 믿고, 부모를 믿는다는 단계에 있다. 서양의 인심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정치를 믿고, 법률을 믿으며, 조약을 믿고, 개혁을 믿어 이른바 스테이트 머쉬네리(state machinery=국가기구)를 믿는다는 단계에 있다. 한 걸음 앞서거나 뒤서는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쪽도 경신혹닉(輕信惑溺)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이는 곧 서양선진국의 ‘인심’이라는 것에 대해 음미하거나 비판하는 법 없이, ‘믿음’이야말로 국가를 성립시키는 조건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단지 서양의 ‘인심’이 믿고 있는 것은 제도나 이념이라는 픽션이며 바로 이 점에서 서양은 ‘한 걸음’ 앞서 있다는 것이다.
후쿠자와는 ‘문명화’를 위해 ‘인심’이 믿을 수 있는 서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본 전통의 ‘다사多事’, ‘자치’, ‘공공심’이 미처 의식되지 못했을 뿐 항상 존재해 왔으며 그것들이야말로 일본이 ‘문명화’하기 위한 거점이 될 수 있다는 ‘허망에 걸어본다’는 것이다(마루야마 마사오의 ‘전후 민주주의의 허망에 걸어본다(’戦後民主主義の虚妄にかける)라는 표현을 차용했다.『증보판 현대정치사상과 행동(現代政治の思想と行動)』,「증보판 후기」1864).
후쿠자와가 지식사회에 남긴 유산에는 공도 있지만 과도 있다. 공이라 하면 ‘전제’라고 여겨진 무가지배 제도가 ‘정신의 자유’를 낳는다든지, 신분제도에 의한 지배가 ‘자치의 습관’을 낳는다는 역설을 명석하게 이론화하는 데 사회과학자의 시선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일본의 지식인 역사에 남는 후쿠자와의 커다란 공적이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는 역사에 커다란 짐이 되기도 했다. 일본 ‘고유’의 봉건제도나 ‘사족의 기력’을 ‘자치의 습관’이나 ‘정신의 자유’의 전통적 기원이라고 보아, 그것을 ‘문명’과 ‘독립’의 서사로서 제시하는 것은 분명 ‘인심’을 응집시키기 위한 구심점을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의도를 알고 있었을 것이 분명한 지식인들은 그 후로도 경신혹닉(軽信惑溺)(6)으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근대 일본의 역사에서 전쟁이나 식민지통치, 경제위기라는 문제를 만났을 때 지식인들은 ‘인심’의 (그것도 일본 국내만이 아닌 ‘아시아’나 ‘세계’ 인심의) 위기 극복을 기도하면서 손쉬운 대로 일본의 ‘봉건’이나 ‘무사 정신’, ‘자치의 전통’와 같은 개념을 동원하여 휘두르다가, 결국엔 자신들이 그것의 미혹에 빠져 일본의 우월성을 정당화하는데 그 개념들을 이용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일본에 ‘전후 민주주의’가 도입된 후에도 그리고 20세기가 되어서도 비슷한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후쿠자와는 ‘학자’들의 지력을 과대평가했던 셈이다.
[역주]
(1) 원문은 본래 후쿠자와의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시조始造”임.
(2) 前座 (講談·落語 등에서)본 프로그램에 앞선 견습 출연.
(3) 士族: 무사의 가문.
(4) 지존(至尊)의 지위와 지강(至强)의 힘이 하나가 된 순전한 독재정치를 말함.
(5)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
(6) 믿음이 부족하면 미혹에 빠진다.
● 이 글은 저자가 「에도에서 메이지로: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시작된 변화와 연속의 서사(江戸から明治へ:福沢諭吉が仕掛けた変化と連続の物語)」『대항해(大航海)』7권, (일본:신서관(新書館) 2008년6월。현재 폐간)을 수정, 재구성한 것임.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 마츠다 고이치로(松田宏一郎), 일본 릿쿄대학 법학부 교수; 윤채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