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에 걸쳐 유럽과 미국에서 구축된 ‘명작선집’과 그를 기반으로 하는 ‘문학사 서술’은 특정 작가와 작품들에 ‘정전(正典, canon)’의 지위를 부여하는 현상을 낳았다. 근대 이후 서구의 ‘정전 만들기’ 과정을 이전에도 늘 있어왔던 개별 작가 및 작품에 대한 품평(品評, criticism) 혹은 선집(選集, anthology)의 전통과 구분되는 현상으로 보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정전은 ‘정규 교육’의 교과과정에서 만인의 교양으로 다루어지면서 다른 작품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권위를 보장 받는다. 그런 면에서 정전의 형성은 ‘제도권에 의한 권위 부여’라는 특성을 지닌다. 정전은 작품을 읽는 불특정 다수, 혹은 비평 안목을 지닌 개인에 의한 취사선택이 아니라 모종의 권력을 지닌 특정한 이들이 의도적으로 ‘기획’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이러한 권력을 쥐어 주고 그 결과물에 권위를 부여하는 배후에는, 당대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또한 정전 형성 과정은 ‘보편적 기준에 대한 믿음’을 수반한다. ‘근대’의 출발이 그러했듯이, 정전은 지극히 서유럽적인 문학이 ‘보편’의 이름으로 전 세계에 선포되도록 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미 다양한 측면에서 정전 개념을 상대화하고 수정 보완해가고 있을 뿐 아니라 정전의 권위를 부정하고 그 해체를 주장하는 논의까지 적잖게 나와 있는 오늘에도, 여전히 ‘세계명작선집’(‘세계’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 제3세계의 작품 몇몇을 끼워 넣어 구색을 맞추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그리스로마문명에서 서유럽과 미국의 근현대 작품에 이르는 계보가 주류를 이루는)이 우리가 학교교육에서 배운 ‘문학의 정의와 범주’의 주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 및 작품을 일정한 기준으로 평가한 결과인 ‘선집’은 이제 독자를 넘어 다시 작가에게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15세기 후반, 조선의 국왕 성종은 자국 최고의 문학작품들을 뽑아서 선집을 만들도록 명한다. 건국 후 두 세 세대를 거치며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 문화의 융성을 자부하던 시점에, 자신의 왕조 조선은 물론 삼국시대부터 이 땅에 살았던 역대 문인들을 총망라한 작품 선집의 기획을 명한 것이다. 국왕이 발주한 이 과제의 최고 책임자는 조선조 문화 권력의 핵심인 대제학(大提學) 지위에 있었고 탁월한 시인이기도 했던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노사신, 강희맹, 양성지를 비롯한 22인의 당대를 대표하는 관료 문인들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각자 휘하의 실무진을 동원하여 이 국가적 사업을 일사분란하게 수행하여, 비교적 짧은 기간에 당대까지의 우리 문학 전반을 아우르는 선집을 편찬해 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책이, 7세기부터 15세기까지 약 500인의 작품 4,240편이 수록된 130권 분량의 <동문선(東文選)>이다.
우리의 책 문화사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문선>이지만, 정작 이 130권의 ‘방대한’ 문학선집은 바로 그 방대함 때문에 하나의 텍스트로서의 매력이 현격하게 반감된다. 500인에 가까운 작가들이 그야말로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처럼 ‘망라(網羅)’되어 있고, 개인의 서정과 문학적 상상력을 담은 작품들만이 아니라 실용을 목적으로 하는 공문서들까지 잡다하게 모여 있다. 게다가 국가가 주도한 문화 사업의 특성 상, 편찬자들의 개성적 시각마저 묻혀버렸다. 엄정한 기준에 의한 ‘선발’이 아니라 그저 보존을 위해 분류해서 모아놓은 ‘집성’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계속 가해진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동문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 시야를 확보할 디딤돌로, 앞서 살핀 서구 근대 정전의 두 가지 특징, 즉 ‘제도권에 의해 부여된 권위’와 ‘보편적 기준에 대한 믿음’을 빌려 본다. 전근대 한자문화권에서 이루어진 동문선의 편찬이 서구 근대의 정전 만들기와 직접 연관되지 않음은 물론이고, 어디에나 늘 있어온 문화 현상을 또 하나 제시함으로써 ‘정전’ 논의의 예각을 두루뭉술하게 만들려는 의도는 더욱 아니다. 어디까지나 관심의 초점은 <동문선>에 있다.
2. 조선의 국왕은 왜 문학선집을 만들었을까?
<동문선>의 편찬 주체는 국가다. 말하자면 제도권 그 자체인 것이다. 조선은 왜 이 방대한 문학선집을 국가적으로 기획했을까? 그리고 그 의도는 과연 성공했을까? 동문선은 어떻게 보급되고, 읽히고, 활용되고, 비판되고, 재구되었을까?
사실 한자문화권에서 선집의 전통은 유래가 깊다. 2천 년도 넘게 정전 중의 정전으로 읽혀온 것이 삼경(三經)인데, 그 중 하나인 <시경(詩經)>이 바로 당시 유행하던 시 가운데 300편을 엄선한 선집이다. 그리고 그 취사선택의 주체가 다름 아닌 공자(孔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때는 취사선택을 뜻하는 말로 ‘선(選)’이 아니라 ‘산(刪)’이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된다. 훌륭한 작품을 뽑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작품을 깎아내어 버리는 행위는, 결과적으로는 같을지 몰라도 그 말을 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좀 더 좋은 작품을 가려 뽑는 것에 비해서, 일정 기준에서 벗어나는 작품을 배제한다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보다 강하다. 실제로 <시경>을 둘러싼 가장 오래된 논쟁 가운데 하나가, 내용과 표현이 윤리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일부 작품들을 공자가 깎아 내버리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의 문제였다. 역으로, <시경>에 대한 해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여기에 뽑힌, 아니 깎여버리지 않고 남은 작품들이 독자의 심성을 ‘교화(敎化)’시키는 데 어떤 기능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었다. 공자의, 혹은 공자라는 이름으로 칭해진 ‘교화의 도구’로서의 문학관은 이후 한자문화권에서 문학을 정의하고 좋은 문학을 선별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유교의 나라,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동문선>을 편찬한 의도 역시 여기에서 출발한다.
① 문치교화(文治敎化)가 이전 시대보다 융성하니 문장은 찬란하여 후세에 전할 만합니다. 선집을 만들기에 알맞은 태평성대를 맞아 이제 새로운 책을 엮어서 성상의 안전에 올립니다.… 요순(堯舜)의 정신과 문학을 체득하고 계승하신 주상 전하께서는 시가 정치와 상통하는 점을 밝게 살피고 문장이 도(道)를 싣는 도구임을 깊이 생각하여 선현의 정수(精粹)를 모아 후학이 본보기로 삼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進東文選箋)
② 우리나라의 문장은 삼국 시대에 시작하여 고려 때에 융성하였고, 조선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 지금은 성군(聖君)께서 다스리시고 천지의 기운이 매우 융성한 때이니, 이제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인물들이 연이어 나올 것이 분명하다. (東文選序)
서거정이 <동문선>을 편찬하고 왕에게 올린 글과 그 서문이다. ①에서 우선 읽을 수 있는 것은 당대가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라는 선포이다. 왕명에 의해 편찬한 동문선을 왕에게 바치며 올린 글이라는 컨텍스트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이는 그대로 <동문선> 편찬의 핵심적인 의도이기도 하다.
문치교화(文治敎化)란 무력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문화와 교육을 통한 이상적인 정치를 말한다. 유교의 전통에서 한 시대, 한 나라의 문학은 그 정치적 성패의 반영(反映)으로 이해되었고, 동시에 문학이야말로 그 정치적 성패를 좌우하는 교화 수단으로 강조되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는 것은 대개 요순과 주공(周公), 공자의 시대인 삼대(三代: 夏殷周)를 선망하고 자기 시대는 그렇지 못함을 한탄하는 맥락으로 사용되는 예가 많다. 그러나 ②에서 보듯이 <동문선> 편찬의 주역들은 자기 시대야말로 시운(時運)이 고조하여 최고의 문학이 나올 때라고 하였다. 유교를 국시로 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그에 따라 각종 문물제도를 완비한 15세기 후반 조선의 자신감과 지향이 담긴 표현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태평성대가 유교의 통치이념인 문치교화(文治敎化)가 이루어진 결과라는 데에서, 문학이 시대의 반영이라는 생각은 문학은 교화의 수단이어야 한다는 이념과 행복하게 조우한다. 이제 문학 선집을 편찬하는 일은 조선의 교화를 드러내는 것이자, 그를 통해 조선을 교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문선>의 취사 기준은 교화의 결과를 잘 드러냈는가, 그리고 유교적 도를 싣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잘 수행했는가에 있다. “표현과 내용이 순정(醇正)하고 정치 교화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취했다”(東文選序)는 언급이 이를 뚜렷이 보여준다. 이러한 선집 기준이 의도하는 것은 결국 ‘전범(典範)’의 제시이다. 독자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후대의 작가들이 따라야 할 문학의 전범을 수립하고자 한 것이다. <동문선>의 편찬은 문학과 정치가 서로 상통하는 것이며 문학은 도를 담는 수단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전제 하에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전범을 제시하고자 한 국가적 기획이었다.
3. 국가가 부여한 권위, ‘문치교화의 전범’
조선 국왕과 고위층 관료 문인들이 <동문선>을 편찬하면서 표방한 ‘문치교화의 전범 수립’이라는 의도는 과연 성공하였을까? 그에 앞서, <동문선>의 체제와 구성을 잠시 살필 필요가 있다.
<동문선>은 전체 130권 가운데 사부(辭賦)와 시가 22권, 기문, 서발, 논설, 비지(碑誌) 등의 개인적인 산문이 70권이며, 나머지 38권은 국가 공용(公用) 문서 및 국가에 올리는 글인 교서(敎書), 제고(制誥), 비답(批答), 표전(表箋), 주의(奏議), 소차(疏箚) 등이다. 이들을 개별 문체로 세분해서 56종의 유형으로 제시하였다. 이 선집이 각 유형별 격식의 전범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한다.
이처럼 <동문선>에는 가능한 모든 유형의 문체가 총망라되었기 때문에, 특히 격식을 중요시하는 국가 공용문의 영역에서 실질적 전범으로서 널리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외교 및 의전(儀典) 문서의 어휘 선택이나 관례 적용 등의 기준이 되었으며, 시율과 문체 논의의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물론 개인적 서정의 발현을 위주로 하는 근대적 문학 개념과는 거리가 있지만,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공용문 작성이 문학 창작의 매우 중요한 영역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동문선>이 지니는 전범으로서의 위상은 그것대로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문선>편자들이 표방한 ‘문치교화’라는 내용적 전범성은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강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념에 반대하는 이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더 원론적으로 추구하는 이들에 의해서 비판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조선을 건국하고 국가적 기틀을 구축한 이들 역시 성리학에 의해 재해석된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았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시작된 몇 차례의 극심한 정쟁을 거치면서, 조선의 정치 주도세력은 주자성리학 원론에 더 충실한 정치개혁을 모토로 진출한, 이른바 ‘사림파(士林派)’로 교체된다. 이들은 동문선이 주자학 이념에 충실하지 못한 잡박한 선집이라고 강하게 비판하였고, 점차 국가적 정전(正典)으로서의 <동문선>의 이념적 지위는 희석된다.
초기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종직은 동문선에 반대하여 <동문수(東文粹)>를 직접 편찬하기도 하였다. ‘선(選)’이 아니라 ‘수(粹)’를 제목으로 삼음으로써, 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깎아내어 버린다는 ‘산(刪)’의 정신을 더 강조한 셈이다. 동문선이 그나마 조금은 느슨하게 수용하고 있는 다양한 삶과 가치의 양태들에까지 이념의 칼을 들이댄 점은, 보다 더 풍성한 문학 유산을 기대하는 후인의 입장에서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동시대의 성현은 김종직의 <동문수>를 두고 이미 이렇게 비판하였다. “글이 번화한 것을 싫어하여 다만 온후(醞厚)한 글만 취하였으니, 비록 의도한 규범은 이루었지만 메마르고 기세가 없어서 볼 만하지 못하게 되었다. … 이 무슨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 편견인가.” 그러나 어쨌든 조선의 이후 문화사는 김종직을 주류로 삼게 되었다. 이제 성리학이 국가가 표방하는 국시를 넘어서 개별 문인 학자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이념으로 한층 더 강화되어간 것이다. 이 또한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 추구한 문치교화의 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까?
<동문선>에 실린 작품들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의 하나는, 내용보다는 특정한 격식 내에서 고도의 형식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작품들이 많고 때로는 통치자의 권위를 장식하는 효용을 극대화한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행정과 의례(儀禮)를 위한 국가 공용 산문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문학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데 일조한 성리학의 명분론이, 한편으로는 문학이 현실적 이익을 위한 장식과 수사로 떨어지는 데 대한 준엄한 비판으로 작용하기도 한 것이다.
4. 중국이라는 보편, 따라잡기와 끼어들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문선>은 우리나라 문학의 둘도 없는 보고(寶庫)이다. <동문선>에 실린 500인의 작가 가운데 오늘날까지 개인문집이 남아 있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현전하는 삼국, 신라, 고려 문헌이 너무나 적은 사정을 생각하면, 동문선이 아니었으면 이름마저 남지 않았을 작가들도 적지 않다. <동문선>을 편찬한 이들이 당시에 내세운 또 하나의 의도 역시, ‘우리나라 문학작품의 보존을 위한 집성’이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문학작품이다. 한(漢)나라나 당(唐)나라의 문학작품이 아니며 또한 송(宋)나라나 원(元)나라의 문학작품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문학작품이다. 역대의 문학작품들과 더불어 천지 사이에 나란히 유행해야 마땅하지, 사라져 없어져서 전해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東文選序)
우리나라의 문학작품을 포괄적으로 모으기 위해서 <동문선> 편찬 십 수 년 전에 이미 각 지방에 전해지는 작품들을 수집해서 올리라는 왕명이 하달되었다. 이렇게 작품의 보존을 위해 편찬된 <동문선>은 그 자체의 보존을 위해서도 각별한 조치가 취해져서, 발간과 함께 각지의 국고(國庫)에 보관되었다. 선조는 1592년 11월 11일, 임진왜란의 와중에도 잠시 소강의 틈을 타서 <실록(實錄)>과 <동문선(東文選)> 등의 서적들을 깊은 산 험한 곳이나 절도(絶島) 산중에 나누어 깊이 매장해서 뜻밖의 변을 대비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동문선> 편찬사업은 이후에도 몇 차례 이어졌다. 1518년 중종의 명으로 신용개 등이 <속동문선>을 편찬하였고, 1713년에는 숙종의 명으로 송상기 등에 의해 <(별본)동문선>이 편찬되었다. 이러한 3종의 <동문선>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국가적으로 재간되어 보급되었고, 민간의 각종 문헌에서 전대 인물 및 문학에 대한 문헌근거로 폭넓게 활용되었다. ‘우리나라 문학작품의 보존’이라는 편찬 목적이 적지 않은 결실을 거둔 셈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문학작품을 열심히 모으고 힘을 다해 보존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의미를 찾아가다 보면, 중국이라는 거대한 타자와 마주친다. <동문선> 편찬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본디 중국에 자국 문학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었고, 실제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사신들이 수시로 우리나라의 문학작품을 요구한 사례도 적지 않다. <(별본)동문선>의 경우는 애초에 청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요청으로 편찬한 것이다. 또 일본의 요청에 따라 동문선을 보내주었다는 기록들도 보인다. 동문선은 공식·비공식적으로 중국과 일본에 보급되었으며, 대외 유용성의 면에서도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나아가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의 문학작품을 강조하는 문맥을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동문선> 편찬을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거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는 몇 가지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 문제를 살피기에 앞서, <동문선>이라는 이름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해서 ‘동문선’은 ‘동문(東文)의 선(選)’이 아니라 ‘동(東)의 문선(文選)’이다. 중국의 문학선집인 <문선(文選)>의 동방 버전이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문선>은 중국 남조시대 소통(蕭統, 501~531)이 편찬한 것으로서,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문학선집이다. 모두 30권으로 선진(先秦)으로부터 자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작가 130인의 작품을 선정·수록했으며, 작품의 수는 800편에 가깝다. <동문선>은 바로 이 <문선>을 염두에 두고 그에 대응할 만한 문학선집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를 두고 조선왕조의 문화적 자부심이 반영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여전히 중국 중심의 보편문화 따라잡기에 불과한 것으로 폄하할 소지도 있다.
위에서 “이것은 한나라나 당나라의 문학작품이 아니며 또한 송나라나 원나라의 문학작품이 아니라, 바로 우리나라의 문학작품이다.”라고 천명한 데에서도 조선왕조의 문화적 자부심은 잘 드러난다. 중화문명의 본산지인 중국의 역대문학에 대응하여 그것과는 다른 ‘또 하나의 문학’으로서 자국문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동문선> 편찬은 자국문학이 존속시킬 만한 가치가 있는 질과 양을 갖추었음을 입증하고 제시하기 위한 정전 수립 기획이었던 것이다.
다만 이를 보편문화의 중심부가 만들어내는 정전에 대응하는 ‘또 하나의 정전’ 혹은 ‘대안의 정전’으로 간주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전근대 동아시아는 한자·한문을 매개로 한 중화문명을 일종의 보편문화로 인식하고 있었고, 조선은 그 가운데에서도 중화문명에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가장 높았던 나라이다. 따라서 자국문학이 한·당·송·원 등 중국의 역대문학과 ‘다르다’라고 할 때 그 ‘다름’의 층위는 그야말로 한과 송이 다르듯이 다르다는 것이지 한·당·송·원이 공통으로 추구한 중화문명과 다른 무엇이라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 중화문명의 이상인 유가경전의 도(道)에 얼마나 근접했는가가 <동문선>의 선집 관건이자 궁극적인 편찬 목적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동문선> 편찬이 보여주는 자국문학에 대한 자부심은, 보편문화가 만들어내는 정전의 기준에 스스로를 부합시켜서 보편정전의 일부분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의지로 읽을 여지도 있다. 중국이라는 보편 ‘따라잡기’를 넘어서 그 보편의 일부로 ‘끼어들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겠으나, 독자적인 무엇을 내세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한계를 동시에 지닌다. 마치 제3세계의 어떤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타고 세계문학선집에 실렸다고 해서 그 제3세계의 특정 문학이 오늘날 (많은 이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문학의 보편을 대신하거나 또 다른 보편으로 인정되지는 않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끼어들기’가 ‘따라잡기’를 넘어서는 지점은, 그 보편적 기준을 충족시킨 위에서 자신의 색채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편입됨으로써 오히려 자기 색깔을 존속시킬 수 있다는 역설은,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각 시대마다 보편문화의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동문선>은 중심부 정전에 대한 선망과 자국문학에 대한 자부 사이를 오가며 구축된 주변부 정전의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특정한 정치세력의 이념적 기준에 의해 기획된 국가 주도의 정전 구축 사업인 <동문선> 편찬은, 정치세력의 교체에 의해 그 전범성에 비판이 가해지기는 했으나 큰 맥락에서는 오히려 그 이념적 지향성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여전히 문체별 격식의 국가적 전범으로서 오랜 기간 활용되었고, 자국문학의 존속과 대외 전파라는 측면에서도 작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중국 중심의 전근대 동아시아 보편 정전의 일부에 편입되는 길을 통해 오히려 그 자국 문학의 색채를 견지하고 보존해 왔다.
오늘 정전에 대한 논의는 점차 더 개방되고 있다. 정전은 존재하며 유용하기도 하지만,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문학의 정의와 범주 역시 변화한다. 제3세계 문학작품이 세계명작선집에 들어가는 것은 보편에의 편입이기도 하지만 보편의 균열과 변화를 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동문선>의 이면에서, 중화문명이 곧 세계였던 시대에 그 안에서 인정받고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과는 다른 혹은 별개의 우리 것이 지닌 가치를 자부하고자 하는 욕망이 빚어내는 긴장을 본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Aporia Review of Books, Vol.1, No.3, 2013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