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00 vs. 1, 즉 10만 대 1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숫자일까? 정확한 사실인지 아닌지 잘은 모르겠지만, 옛날 어느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다. 옛날 한국전쟁 즉 6.25 전쟁 때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 가운데 실제로 인명을 살상하거나 상해를 입힌 총탄의 숫자가 10만발 당 ‘하나’ 라고 한다. 처음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숫자였다. 아마 허공에 대고 기관총을 난사했을 때 지나가던 참새 한 마리가 적중하여 떨어질 확률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영화 <씬 레드라인>(1999)의 한 장면
도대체 전쟁 중에 어떻게 사격을 하였기에 이런 숫자가 가능할까?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알고 난 지금 오히려 나는 이 숫자도 과장이 아닐까 싶다. 과연 누가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정확한 조준을 하고 사격을 할 수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도 뻔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인데, 왜 10만대 1이라는 숫자가 그렇게도 이해할 수 없는 비율의 숫자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준 영화가 있다. 바로 <씬 레드라인>이란 영화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전쟁’이란, 빗발치는 포탄과 귓가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총탄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돌격하는 영웅들로 가득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병사들은 먼지 속을 군화발로 누비며 용감하게 진격해 들어간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적진 속에 남겨진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은 용감하게 돌진한다.
그런데 미국의 영화철학자라 불리는 테렌스 맬릭 감독의 <씬 레드라인>의 병사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군이 점령한 고지를 계속 탈환하라는 대령의 명령에 불복하는 대위, 게다가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은 엄폐물 뒤에 찰싹 누워서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고개를 들고 죽음이 보이는 고지로 용감하게 진격해 나갈 수 있을까?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그렇게도 흔히 보았던 장면들이 실제로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인가를 아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알고 보면 당연하고 빤한 것인데도 우리는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전쟁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바로 20세기 동양철학의 경우 또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철학이 존재와 형이상학을 다룬다는 공식에 너무 골몰하 나머지 그 존재와 형이상학이 현실을 이해하는 개념이란 사실을 까먹었던 것은 아닐까?
문명의 ‘대조’에서 삶의 ‘유비’로
나는 동양 고전, 그것도 주로 2,000년이 넘는 아주 먼 옛날의 책을 읽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내가 읽어 온 이런 책들에 관한 저간의 평가나 주인공들은 대개가 다 고매하다. <논어>도 그렇고, <맹자>도 그렇고 하나같이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상하게 행동하고 고상하게 말한다. 우리는 그런 고상함을 담아 공자(孔子)나 맹자(孟子), 노자(老子)나 장자(莊子)를 철학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경합을 벌였던 핵심 개념은 도(道)이다. 이 도라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의 ‘로고스’(logos)처럼 우주의 이법이면서 실체이고 또한 말이고, 진리이기도 하다. 즉 도는 서구 철학의 로고스를 통해 이해된다. 이러한 논리의 요점은 간단하다. 공자나 노자와 같은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 또한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처럼 가장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사유를 통해 나름의 개념 ‘도’를 정초하였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이 네 가지 원인 즉 형상과 질료, 운동과 목적이 결합하여 하나의 책상과 걸상이 있는 것처럼, 도(道)는 하늘이 형상을 부여하고 땅이 형질을 주어 하나의 사물을 이루는 것과 유사한 자연철학의 원리 혹은 궁극의 실체였다는 식의 해석이 고대 중국의 ‘철학’을 구성해냈다. 하지만 이렇게 구성해낸 철학은 철학이지만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의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그것은 특히 서구 근대에 이르러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서양이 물질 중심이라면 동양은 정신 중심이고, 서양이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면 동양은 종합적이고 직관적이라는 식은 특히 1920-30년대에 유행한 형식이었다.
달리 말해 동양철학이 형성되던 과정의 ‘현실’은 우리가 사는 생활 세계가 아니라 서구 철학의 개념의 세계였다. 특히 동양철학의 개념들은 주로 서구의 것을 차용하면서 만들어지지만 동시에 서구 문명에 대한 규정과 대조(contrast)되는 방식으로 그 내용이 채워졌다. 그래서 기(氣)나 도(道)는 서구인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동아시아의 신비적인 그 무엇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제 서구의 문명이나 철학과 대조(contrast)하는 서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논어>의 공자나 <장자>의 장주(莊周)가 살던 시대가 아닐뿐더러, 서구의 문명이나 문화가 마치 남의 것인 듯이 생각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 못하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이제 물 건너간 비현실이라는 이야기다. 우리는 <씬 레드라인>의 병사들처럼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발버둥치는 과제가 있을 뿐이다.
하리수는 음(陰)인가 양(陽)인가?
2,000년대 초반의 어느 날, 강의를 끝내고 우연히 만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들은 생소한 단어가 있다. 그 때는 “몸매가 참 착하다!”는 말이 유행이었다. 선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낯설어서 나는 무슨 말이 그러냐고 물었다. 그 선배는 웃으면서 요즘 유행하는 표현이고, 마음이나 사람의 품성에 대해서가 아니라 몸매나 얼굴이 예쁠 때 ‘착하다’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낯선 단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한동안 내게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마음 씀씀이에 대해 ‘착하다’라는 말을 써 오던 2,000년의 전통에서 이 해괴한(?) 언어는 나에게는 그야말로 수수께끼였다. 어쩌면 동양철학이 부딪히고 씨름해야 하는 것은 현실의 이런 문제가 아닐까?
동양철학의 자연관을 잘 보여주는 ‘음양’(陰陽)의 개념을 예로 들어 보자. 본래 ‘양’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 산의 남쪽과 강의 북쪽 유역을 일컫는 말이다. 이와 달리 ‘음’은 햇볕이 들지 않는 그늘을 가리키며 햇볕이 잘 들지 않는 강의 남쪽과 산의 북쪽 지역을 가리킨다. 이렇게 짝을 이루어 쓰이는 음양의 개념은 한(漢) 나라 때 우주론적인 체계를 갖추어 음양오행이란 개념으로 정착되었다.
그래서 이 짝 개념은 남자와 여자, 낮과 밤, 여름과 겨울 등등 다양한 주변의 현상이나 사물에 적용되는 자연철학과 형이상학의 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가 나오는 글에서는 매번 “한 번은 한 번은 양이 되는 것, 그것을 일컬어 도(道)라 한다”는 <주역>의 사상은 우주와 사물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는 중요한 근거였다. 동양철학의 강의는 대개 거기에서 멈추고, 이런 사유방식이 서구와 얼마나 다른가가 설명의 초점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사실 이런 문제를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작 우리 사회에서는 호적제의 폐지, 남녀 역할의 변화 등 과거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커다란 변화를 겪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동양철학의 현실에서 음양은 “트랜스젠더 하리수는 음(陰)인가 양(陽)인가?” 하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현실을 사유하는 것이 문제를 사유하는 것이 아닐까?
서극 감독의 영화 <동방불패>에서 주인공은 ‘규화보전’이란 기이한 무공을 연마한 후에 신체적으로까지 여성으로 변화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주인공 동방불패는 이제 여자와의 관계가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그는 어쩌면 무공(武功)을 통해 트랜스젠더가 된 사람으로 간주해도 무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통 사회의 음양 이론은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삶의 유비, 현실 속의 ‘문제’를 찾아서
또 이런 예를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서구 뱀파이어의 대표자인 드라큘라 백작과 동양의 신선(神仙)은 모두 우주를 흐르는 시간의 법칙을 거스른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이러한 거스름 혹은 시간의 정지를 보는 시각은 매우 다르다. 게다가 드라큘라는 다른 인간의 피를 섭취하는 악(惡)으로 표상되며 그가 활동하는 시간은 밤으로서 선악의 대비가 충만하게 깔려 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신선은 노화(老化)자체를 긍정적으로 보면서 거기에 덕(德)과 선(善),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한다. 도대체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보면 드라큘라의 몸 그 자체가 악을 표상한다면, 신선의 몸 그 자체는 선을 표상한다. 여기서 나는 동서의 대비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몸 자체에 대한 선악(善惡)을 말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과거의 논의에서 <몸과 마음>은 이분법적으로 사유되면서 신체는 악의 원천이거나 그 가능성으로, 마음은 인간의 도덕성과 사회성의 원천으로 파악되어 왔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과 같은 고령화 사회에서 ‘나이든 몸’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한다. 요컨대 우리가 이제 철학을 연습한다는 것, 달리 말해 우리 스스로 철학하기를 시작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텍스트 속의 개념들의 의미를 천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삶이 마주한 새로운 문제들에 마주하는 일이다.
앞으로 이어질 글에서 우리가 말하는 ‘연습’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마주한 현실의 문제와 ‘철학적으로 대면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공자나 맹자, 노자와 장자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퇴계나 율곡이 생각하고 실천했던 그 시대와 지금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인간이 부딪히는 현실의 문제는 어떤 면에서는 늘 중첩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을 삶의 유비적 차원이라고 말하고 싶다.
고대 중국에서 ‘덕’(德)의 개념은 세습적 특권에 대립하는 말이었다. 어떤 이들은 혈연과 출신에 의해 지위와 신분이 세습되는 귀족사회에서, 새로이 등장한 사람들은 후천적 노력을 통해 성취된 덕을 지닌 자야말로 천하를 다스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노자>의 또 다른 이름인 <도덕경>(道德經)은 그러한 가르침들을 모아 놓은 지침서이기도 했다.
또, 인간의 본성이 선한가 악한가를 두고 서로 다른 의견을 보여주었던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오늘날 사회생물학과 진화심리학 논의에서 매우 중요한 논쟁을 벌여왔다. 본성인가 양육인가 하는 오랜 논쟁을 새롭게 점화했던 것이다. 이런 논쟁에 대해 맹자와 순자의 사상적 입장은 과연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바로 이런 물음들이 우리가 연습해야 하는 새로운 문제, 새로운 현실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물음들을 제기하고 논의하면서 고전을 재해석하기도 할테고, 문제에 충실한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의 문제를 사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우리의 철학을 창조하는 것이자 우리 삶을 보다 풍요롭게 사유하는 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바로 거기에 동양철학의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닐까?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2, No.1, 2014년 1월, 김시천, 경희대학교 교양교육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