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없어졌고, 비트겐슈타인의 조국의 일부분은 폴란드,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로 분할되었다. 4년간의 군복무와 1년 동안의 포로생활을 한 그로서는 (대부분 군복무를 마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무엇인가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죽음과 직면했던 그가 가고자 했던 길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상식과는 너무도 먼 것이었다. 그것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누나인 헬레네와 헤르미네 그리고 형인 파울과 주변의 친척들에게 모두 넘긴 것이었다. 이는 통념적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과연 왜 그랬을까? 아마도 그 이유는 비트겐슈타인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복잡한 사적 영역에 속하지만 다음과 같은 추정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즉 “스스로 벌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돈을 갖는데 대한 죄의식, 따라서 그가 막대한 유산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생각, 자신 만의 노력으로 자신을 시험해 보려는 욕구, 부에 수반되는 수많은 복잡함을 피하려는 압도적인 욕구 등” (G. Pitcher, 『비트겐슈타인의 哲學』, 29쪽)이 작용했을 것이다. 아마도 막대한 유산을 그대로 물려받았다면 오늘날의 비트겐슈타인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자신에게 무서우리만큼 신중한 자기비판을 엄격히 적용했으며 도덕적으로 정직해야만 한다는 청교도적 신념이 강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현대식 버전으로 말하면, 무소유로부터 얻을 수 있는 고통스러운 지적 탐구의 변증법적 즐거움을 몸으로 실천하고자 하는 그의 강철과도 같은 의지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다음은 시지포스의 신화를 연상케 하는 그의 말이다. “사람들은 계속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비틀거리고 넘어진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계속 스스로 노력해 나가는 것이다. 적어도 이것이 내가 일생동안 해야 했던 것이다. (위의 책, 30쪽) 자신의 앞에 주어진 삶을 이끌어가려는 비트겐슈타인의 의지는 강했지만, 앞으로 그에게 주어진 현실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해 31살의 나이에 사범대학에 등록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비트겐슈타인은 『논고』를 출간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순탄하지가 못했다. 프레게와 러셀로부터는 편지 혹은 만남이 있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 해 12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러셀과 만나 『논고』의 출판과 관련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아무튼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원고가 책으로 출판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레클람Reclam 출판사로부터 책의 출판을 거절 받고서 절망과 우울증이 다시 그를 괴롭혔다. 또다시 자살에 대한 충동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비트겐슈타인의 심정은 친구 엥겔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될 수 있다.
사실 내 정신 상태는 나를 매우 두렵게 합니다. 나는 전에 몇 번 그런 상태를 겪었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사실을 참아낼 수 없는 상태입니다. 매우 불안한 상태이지요. 그러나 내가 아는 단 한 가지의 치료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그 사실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수영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물에 빠져 손과 발을 허우적거리다가 머리를 물 밖으로 내놓은 채 있을 수 없다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내가 처한 입장입니다. 나는 자살하는 것이 더러운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물론 우리는 자신의 파괴를 의욕할 수 없지요. 그리고 자살의 행위와 관련된 것을 시각화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자살은 언제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목숨을 갑자기 끊을 수밖에 없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내가 믿음이 없다는 사실로 요약됩니다! (1920년 6월 21일, 레이 몽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1』, 264쪽.)
2.
비트겐슈타인의 자살에 대한 충동은 친구 엥겔만의 충고로 극복한다. 1920년 7월 비트겐슈타인은 사범대학교 과정을 마치고 교원 자격증을 받는다. 교생으로 보내는 동안 포로수용소에서 만난 친구 루드비히 핸젤Ludwig Hänzel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포로수용소에서 핸젤이 강의하던 논리학 수업에 참석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를 알게 되었다. 핸젤은 자유의 몸이 되면 교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고 싶어하던 포로들에게 논리학 강의를 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그들은 정기적으로 토론을 하게 되었다. 이 때 비트겐슈타인은 핸젤에게 기호 논리학의 요점들을 소개했고, 『논고』의 사상들을 그에게 설명했다. 그들이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은 것도 바로 이 때였다. (레이 몽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I, 226~227쪽』) 이즈음 비트겐슈타인은 관념론과 실재론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실재론자이었던 프레게로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논문 「사고」Die Gedanke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서신으로 밝힌다. 그리고 프레게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를 이해하지 못한 채 4년 후 세상을 마감한다. 엄격한 논리주의를 추구했던 프레게로서는 비트겐슈타인의 『논고』가 신비주의로 둘러싸인 형이상학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보면 프레게는 물론 러셀조차 비트겐슈타인의 형이상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결국 무의미nonsense로 귀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의 실재론이 쇼펜하우어의 관념론과 바이닝거의 유아론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이 무엇보다도 종교에 대한 개인적 생각을 토대로 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점이 불행하다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계 속의 나,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다음의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언어의 한계들은 나의 세계의 한계들을 의미한다. (『논고』, 5.6)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도 없다. (5.61)
이러한 고찰은 유아론(唯我論)이 어느 정도까지 진리인가를 결정해 줄 열쇠를 준다. 요컨대 유아론이 뜻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다만 그것은 말해질 수는 없고, 스스로 드러날 뿐이다. (5.62)
나는 나의 세계이다. (小宇宙) (5.63)
주체는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세계의 한계이다. (5.632)
세계 속 어디에서 형이상학적 주체가 발견될 수 있는가? (5.633)
여기서 우리는 유아론이 함축한 것들이 엄격히 관철되면 그것은 순수한 실재론과 합치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유아론의 자아(自我)는 연장(延長)없는 점(點)으로 수축되고, 그것과 동격화(同格化)된 실재가 남는다. (5.64)
철학적 자아는 인간이 아니며, 인간 신체가 아니며, 또는 심리학이 다루는 인간 영혼도 아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주체, 세계의 한계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이다. (5.641)
즉 언어의 한계는 논리의 한계이며, 사유의 한계이다. 그리고 사유의 한계는 다시 세계의 한계이며, 존재의 한계이다. 사유의 한계는 사유 주체의 한계이며, 따라서 세계의 한계는 자아의 한계, 그리고 자아와 삶의 한계이다. 이를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논고』의 출발점은 그림이론이다. 그림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는 사실들의 논리적 그림이다. 논리적 그림으로서 우리 언어가 세계인 ‘나’의 의미를 드러낸다. 우리 언어에서 경험과 학문의 대상으로서 세계가 온전히 그리고 모조리 주어진다. 세계 앞에서 우리 언어는 멈추지 않는다. 이로부터 ‘언어적 유아론’ 혹은 ‘논리적 유아론’이 등장한다. 이러한 논리적 유아론을 밀고 나가면 다음을 알 수 있다. 즉, 뜻 앞에서라면 우리 언어는 그에 미치지 못하고 멈춘다. (학문의 대상으로서) 세계는 텅 비어 있다. 여기서 뜻의 소재는 바로 나 자신이라는, 철학에 자아가 등장하는 중대한 전환점이 발생한다. 뜻의 소재로서 혹은 의지로서 세계를 뜻으로 채우며 나의 의지는 어떤 높은 의미에서 세계-의지이다. 이는 ‘윤리’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를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윤리적 유아론’ethical solipsism이다. (한대석, “논리-철학논고의 근본 사상”, 42~43쪽 참조)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의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저 의지는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의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저 의지는 어떤 높은 의미에서 나의 의지이다.” (Notebooks, p.85)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도달한 유아론은 오로지 자신의 자아와 자신의 경험만이 존재함을 주장하는 일반적 의미의 유아론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5.6)는 말은 곧바로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생각할 수 없으며,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우리는 말할 수 없다.”(5.61)로 이어지는 데서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즉 ‘나의 언어’에서 ‘우리의 언어’로 전환한 데에는 나와 타자를 이어줄 수 있는 언어의 공적 사회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아무튼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실존existence의 문제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극복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유아론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으로 하여금 철학적으로 많은 문제들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유아론의 문제는 언어놀이, 놀이와 언어의 유사성, 가족 유사성, 규칙 따르기, 규칙 따르기의 역설, 사적 언어 논변, 뜻함, 봄과 ~로서 봄, 모순, 논리적 필연성, 행함 혹은 실천과 같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핵심 개념이나 주제와 얽혀 있으며,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는 프레게의 실재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논고』 이후의 시기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반-실재론(anti-realism)의 입장에 선다. 이미 앞에서 [비트겐슈타인(3): 프레게와 러셀] 밝힌 것처럼, 프레게는 지질학에서 성공적 탐험이 새로운 지형의 발견과 충실한 기술(description)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실재론자에는 새로운 수학적 지형에 대한 발견과 충실한 기술은 수학의 성공을 보장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서 프레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컨대 우리가 피타고라스 정리에서 표현한 사고는 시간과 무관하게 참이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것과는 상관없이 사고Gedanke는 독자적으로 참이다. 그것은 어떤 소유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설령 누군가가 그 행성을 보기 전에도 그 행성은 다른 행성들과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사고는 피타고라스 정리가 발견된 시간부터 참인 것은 아니다. (Frege, Collected Papers, p.363)
[수학과 실재론의 관계. 자연과학이 물리적 세계를 기술하는 것처럼, 고전 수학의 이미지는 우리의 마음과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외적인 존재를 기술하는 것이 순수 수학이 갖는 본연의 자세임을 강조한다. 고전 수학이 기술하는 세계는 물리적 세계가 아니다. 고전 수학에서 기술된 대상들(자연수, 실수, 집합, 함수, 순서쌍 등등)은 추상적이며 변하지 않으며 수학적 대상들의 관계는 ‘필연적으로’necessary 성립한다는 실재론을 내 세운다 따라서 고전 수학은 수학적 진리에 대한 ‘발견’을 목표로 하며 그 목표는 수학적 영역에 관한 지도를 그리는 데 있다. (Wright, Wittgenstein on the Foundation of Mathematics, p.3) 이러한 프레게의 실재론을 수학기초론 혹은 수학철학에서는 ‘수학적 플라톤주의’mathematical Platonism 혹은 ‘플라톤적 실재론’Platonic realism이라 말한다. 수학적 플라톤주의에 열광적으로 기대고 있는 수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너무도 많다. 논리주의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프레게가 대표적이며,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보렐E. Borel, 허미드C. Hermite 등이 그러하며, 20세기 와서는 불완전성 정리로 유명한 쿠르트 괴델Kurt Gödel과 『황제의 새마음』의 저자인 펜로즈Roser Penrose등이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플라톤주의는 단일한 학설 혹은 철학적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수학적 발견이라는 그림으로 이루어진 은유적 표현들을 묶어놓은 것이다. 플라톤주의라는 명칭은 베르나이스P. Bernays가 1934년 행한 「수학에 있어서 플라톤주의에 대하여」라는 강연에서 공식적으로 붙여졌다. (Benacerraf and Putnam, Philosophy of Mathematics, 『수학의 철학』, 박세희 옮김, 아카넷, 396~416쪽, 참조)]
3.
1920년 7월 교사가 되는 훈련을 마친 후, 그리고 러셀에게 『논고』의 원고를 맡긴다. 이후 가을에 트라텐바흐Trattenbach에서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한다.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이 엥겔만에게 보낸 편지를 볼 것 같으면, 앞으로 자신이 가려는 초등교사의 길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예감을 했던 것 같다. “모든 악마가 다른 쪽으로 끌지 않는 한, 나의 인생은,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닐지라도, 매우 슬프도록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레이 몽크,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I』, 269쪽) 그랬다. 비트겐슈타인의 슬픈 노정은 당분간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천재에게 부딪친 일련의 시련들, 친구 핀센트의 죽음과 『논고』 출판의 어려움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그는 가난한 시골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판단했다. 어린 학생들에게 수학과 고전을 읽히면서 그들의 영혼을 개선시키는 것이 나름대로 유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몇 달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안정감을 되찾았으며 핸젤에게 학생들이 읽을 책들, 그림Grimm의 동화들, 『걸리버 여행기』, 레싱의 우화와 톨스토이의 전설 등과 같은 책들을 부탁했다. 그렇지만 마을사람들과 동료 선생들의 눈에는 비트겐슈타인이 그렇게 달갑게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주말마다 방문했던 비엔나 출신의 세련된 친구들로 인해 비트겐슈타인이 부유한 귀족 가문의 출신이라는 점과 그런 그가 보잘것없는 시골에서 교사생활을 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무튼 비트겐슈타인은 아이들에게 교육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을 직접 혼자 힘으로 사고하게끔 하고 그것도 아주 엄하게 실천하는 교육적 방법을 행했다. 수학을 중시했던 그로서는 아이들에게 매일 아침 두 시간씩 높은 수준의 수학(산수)를 가르쳤다. 문제는 그가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뺨때리기, 머리카락 잡아당기기와 같은 체벌을 했다는 것이다. 향후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체벌 문제는 결국 그의 교사생활을 그만두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1921년 봄과 여름 학기 동안 비트겐슈타인이 트라텐바흐에서 느꼈던 초기의 즐거움은 점점 혐오감으로 바뀌게 된다. 그 해 여름 방학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아비드 쇠렌과 함께 노르웨이를 여행한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 자신을 위해 지어진 오두막집을 보게 된다. 방학을 보내는 중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아비드와 함께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목공소에서 일을 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이런 고된 노동을 택한 것은 자신이 직접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천성적으로 노동을 통한 ‘마음의 평정’을 얻는 것이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와 닿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 해 가을 러셀의 도움으로 빌헬름 오츠발드Wilhelm Ostwald가 편집하는 『자연철학연보』Annalen der Naturphilosophie라는 정기간행물에 『논고』의 독일어 판이 출판된다. 그렇지만 꼼꼼한 교정을 거치지 않은 출판의 결과는 논리 기호들의 오타들로 이루어진 최악의 상태였다. 『논고』의 영어판 버전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 때 1921년에서 1922년 겨울 동안 당시 약관 18세의 나이로 킹 대학의 학생이었던 천재 수학자 프랭크 램지Frank Ramsey가 『논고』의 영어 번역에 참여한다. 이 때 우여곡절 끝에 책의 제목이 라틴어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논리-철학 논고)로 결정된다. 이러한 결정에는 스피노자의 Tractatus Theologico-Politicus(신학-정치 논고)를 염두에 둔 무어의 제안이 작용했다. 1922년 가을 독영 대역본이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라는 제목으로 영국의 케간 폴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당시 비트겐슈타인은 책에 대한 인세는 물론 판매로부터 생기는 인세 역시 받지 못했다. 『논고』가 출판된 1922년 비트겐슈타인은 여러 가지 갈등의 국면을 이기지 못한 채 결국 트라텐바흐를 떠난다. 그 해 11월에 슈네베르크Schneeberg 산맥에 있는 푸흐베르크Puchberg의 초등학교로 전근했다. 여기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 『논고』는 비엔나와 캠브리지에서는 영향력 있는 책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23년 9월 램지는 푸흐베르크를 방문해달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편지를 받고 이에 흔쾌히 응한다. 램지는 9월 27일 푸흐베르크에 도착한 후 2주일가량 머물면서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오후 2시에서 저녁 7시까지 『논고』를 꼼꼼하게 읽는다. 비트겐슈타인과 램지의 우정 어린 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그는 이후 비트겐슈타인이 경제학자 케인즈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캠브리지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후일 비트겐슈타인이 『논고』 만으로도 박사학위를 얻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F. 램지는 21살의 나이에 킹 대학의 강사로 임명된다. 그렇지만 그는 1930년 26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램지에 대해서는 이후 관련된 논의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4.
1924년 9월 비트겐슈타인은 다시 한 번 트라텐바흐 옆 마을인 오테르탈Ottrerhal의 초등학교로 직장을 옮긴다. 그렇지만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비트겐슈타인의 역할은 거의 한계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그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사전』Wöterbuch für Volksschulen을 만들었다. 이 사전은 아이러니하게도 『논고』의 출판과 달리 약간의 인세도 받을 정도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오테르탈 초등학교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철저한 교육방식은 당시 학생들은 물론 학부모들에게조차 인정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서서히 비트겐슈타인을 가로막고 있는 절망의 그림자가 가장 진하게 드러나는 순간들이 그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스스로 천재임을 자부했던 비트겐슈타인 자신으로서는 이제야말로 방향전환을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 셈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절친한 친구였던 엥겔만은 당시 유럽의 반유태주의의 팽배로 인해 유럽에 거주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 입장을 갖는다. [엥겔만은 결국 1934년 유럽을 떠나 이스라엘의 텔 아비브로 간다. 그는 (1948년 후부터는 이스라엘 시민으로) 1963년 죽을 때 까지 그곳에 머물게 된다.] 때문에 캠브리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열망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서 캠브리지는 거의 자신을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줄 확실한 방향전환을 할 수 있는 메시아적인 장소이었다. 위기는 위기를 더욱 크게 만드는 법. 때문에 상황이 어려우면 문제는 더욱 커지는 법임을 우리 역시 잘 알고 있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으로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결정적 사건 하나가 터진다. 그것은 바로 비트겐슈타인의 학생이었던 11살의 요세프 하이드바우어Josef Haidbauer에 대한 과도한 체벌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아이가 실신한 탓에 사건의 심각성은 커질 수밖에 없었고, 사건의 당사자였던 비트겐슈타인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초등학교 교사로서의 생활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절망의 나락에 끝없이 추락해 본 사람은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삶에서 그 이상 떨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완전히 바닥의 상태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위기 속에서 구원이 자란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향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은 더욱 더 강철과 같은 올곧은 생각들을 퍼트릴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 던지는 두 개의 의문문. 그대에게 닥친 현재의 고난(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마라! 어차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길은 우연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