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컨대 고대 중국인은 불교와 만남으로써 과거나 현재와 완전히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교 수용 전, 중국의 미래 상상은 요임금, 순임금으로 대변되는 이상적 과거의 재현이 주를 이뤘다. 현재도 마찬가지였다. 옛적 성군의 태평성대를 오늘날에 재현함이 경세의 목표였다. 그렇다 보니 미래는 과거나 현재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설정되지 않았다. 불교의 번역은 이에 일대 충격을 가해 지옥이나 극락 같은, 과거나 현재와는 패러다임 자체가 완전히 다른 미래를 사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중국문화의 핵인 시에 미친 영향도 지대했다. 아니, 불교의 번역 없이는 두보나 이백 같은 대가가 배출될 수 없었다. 고대 중국인은 불경을 번역하면서 비로소 자기 말을 이론적으로 대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됐다. 사상 최초로 자기 언어를 분석적으로 바라보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표음문자인 산스크리트어를 표의문자인 한문으로 바꾸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전까지는 중국어 외의 타민족의 말을 어엿한 말이라고 여기지 않았기에, 자기 말을 타자에 비추어 객관화할 계기가 갖춰지질 않았다. 불경 번역 전까지 번역이랄 것이 없었던 까닭이다.
불경 번역이 실은 다른 언어를 자기 언어와 대등하게 여겼던 최초의 사건이었던 셈이다. 덕분에 중국인들은 자기 언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잡게 되었다. 한참 전부터 그렇게 사용해왔던 자기 언어가 네 가지 성조로 구성됐음도 이때 처음 알았다. 음의 성질도 변별하여 평성과 측성 식으로 이론화했다. 말을 어떻게 결합해야 더욱 아름다운 소리를 조직하게 되는지, 그 법칙도 촘촘하게 구축해냈다. 중화의 핵인 한시, 그것의 가장 진화된 형식인 5, 7언 근체시는 이렇게 하여 완성될 수 있었다. 게다가 불교와 만난 한시는 그 깊이와 높이가 한층 심원해지고 고양되었다. ‘시의 나라(詩國)’이기도 한 중국에서 번역된 불교는 어느덧 시를 짓고 논하는 데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됐던 것이다.
시가뿐만이 아니었다. 쿠마라지바가 불교를 번역할 즈음, 포교 과정서 유포된 불경 속 이야기들로 중원의 이야기 세계는 한창 풍요로워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공자의 시대 한참 전부터 중원을 유지하고 갱신해오던 중요한 문명 장치였다. 번역된 불교는 거기에 색다른 자양분을 공급, 중원의 서사와 상상, 허구의 세계를 한결 알록달록하게 구성해냈다. 중국이 사대기서라 명명하며 자랑스레 내놓는 <서유기>나 지금도 널리 향유되는 경극이 있게 된 데에는 번역된 불교가 공급한 자양분이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음이다.
불교의 번역은 철학적 지층도 다채롭게 변주해냈다. 쿠마라지바를 전후한 시대에 번역된 불교는 앞선 시대의 유가와 도가 사상에 사변의 깊이를 가하고 직관의 넓이를 더해 현학이란 사뭇 독특한 중국적 사유체계를 일궈냈다. 불교 철학이 유교와 도교 철학과 결합되어 훗날 ‘유-불-도 삼교 통합’이란 도저한 흐름을 빚어내기 시작했음이다. 여기에 현장법사가 번역을 통해 신유식종을 설파하자 불교 철학은 더는 ‘서역의 것’이 아니게 됐다. 그것은 지식인에게 익혀야 하는 ‘기본’으로
학습되었고
내면화되었다.
훗날 송대 주희가 불교를 척결하고자 성리학을 집대성했지만 도리어 “전통 유학에 불교를 입혀 성리학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했던 명대 양명학도 마찬가지였다. 불교가 양명학의 근간에 외양만 달리 하여 알알이 박혔기에 그렇다. 이 둘을 아우른 명칭인 이학이 몽골의 원 제국 이래 1000년 가까이 한자권을 석권했음을 보건대, 강고한 자기중심적 문명에 스며들어 그것마저 변주해내는 번역의 힘 덕택에 오늘날 중국문명이 한층 풍요롭고 유의미해졌음을 부인할 수는 없게 된다.
■ 번역이 일궈낸 중국적 사회주의
명대 중엽 이후에는 예수회 선교사를 통해 ‘제2차 서학의 물결’이 도래하기 시작했다. 서구 근대가 이룩한 과학적 성과뿐 아니라 선원근법 등 예술적 성취가 속속 중국에 유입되었다. 중국의 지적 자산도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구로 흘러들어갔다. 그렇게 중국과 서구는 번역의 중재를 통해 변이되고 있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 드디어 중국과 서구는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적 야욕이 늘 문제됐지만 그럼에도 중국은 서구를 꾸준히 번역해갔다. 여기에는 조정과 재야가 따로 없었다. 근대적 무기의 위력을 경험한 청 조정은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명분 아래 북경과 상해 등지에 서구 과학기술을 중국어로 옮기는 번역기관을 세웠다. 라마르크의 ‘용불용설’ 같은
진화학설을
비롯하여
서구 근대과학이 일궈낸 성과가 담긴 수백 종의 책이 그렇게 번역되었다.
지식인들은 그들대로 중국이 부강한 근대국가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서구의 자양분을 활발하게 번역해 들였다. 엄복은 <진화와 윤리> <국부론>같이 서구 근대를 정초한 지적 자산을 번역 소개하여 당대 중국을 크게 뒤흔들었다. 서구 근대의 걸작도 번역됐다. 임서는 <로빈슨 크루소> <아이반호> 같은 작품을 옮김으로써 근대적 감각과 상상을, 또 의식을 중원으로 적극 끌어들였다.
물론 중국이 근대화하는 과정이 평탄치는 않았다. 그러나 결국에는 ‘중국적 사회주의’를 드넓은 강역에 펼쳐냈다. 서구 근대를 번역함으로써 중국은 자기 문명에 또 다른 켜를 쌓는 데 성공했음이다. 불교를 번역함으로써 인도의 불교가 아닌 중화가 풍요로워졌듯이, 서구 근대가 빚은 사회주의를 중국화함으로써 사회주의가 아닌 중화가 보존됐던 것이다. 나아가 중국은 그렇게 일궈낸 문명의 소산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디지털-네트워크 시대에 걸맞도록 재차 번역하고 있다. 아날로그적 문화자산을 디지털 문화자산으로 번역하고 이를 여러 언어로 바꿔 전 세계로 퍼트리고 있다.
번역이 문명에 스며들어 그것을 변이해내는 힘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번역을 통해 중국의 문화자산이 지구촌 곳곳에서 구실을 할 때 중국이 미래세계의 문명표준으로 우뚝 설 수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