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이다. 그의 사회학을 흔히 형식사회학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의 이해사회학 및 에밀 뒤르케임(Emile Durkhiem, 1858-1917)의 사회학적 칸트주의에 비견된다. 이 세 거장에 의해서 사회학적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는데, 이 전환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명백한 형태로 일어난 것이 짐멜이다. 짐멜은 사회를 사회적인 것으로 해체시켰으며 사회학을 역사철학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내가 보기에 짐멜의 사회학은 아직도 집단주의적-국가주의적 가치와 윤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사회에 아주 큰 이론적-실천적 함의를 갖는다.
1. 사회는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해체된다
짐멜은 1908년에 출간된 그의 사회학적 주저『사회학: 사회화 형식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기존의 사회학을 비판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사회학은 원래 상호작용하는 세력들이 이미 그 직접적인 담지자로부터 증발되어 이념적 단위가 되어버린 사회적 현상들에 한정되었다. 국가와 노동조합, 성직자 집단과 가족형태, 경제구조와 군대조직, 길드와 지역 공동체, 계급구성과 산업적 노동분업 ― 이 모든 것과 이와 유사한 거대한 조직과 시스템이 사회를 구성하고 사회에 대한 과학의 영역을 형성하는 듯하다(1).
여기에서 짐멜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스펜서와 그에게 영향을 받은 사회학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스펜서의 사회학은 사회의 구조, 그 구성요소들 사이의 관계, 사회의 운동법칙 또는 발전법칙 등을 인식대상으로 한다. 스펜서의 사회학은 말 그대로 사회에 관한 과학, 즉 ‘사회’ + ‘학’이다.
짐멜에 따르면 사회학을 사회에 관한 과학, 즉 ‘사회’ + ‘학’으로 규정한다면, 사회학은 독립적인 개별과학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며, 다시 말해 인간의 사고와 행위는 사회에서 그리고 사회에 의해서 결정되며, 따라서 인간에 관한 모든 과학은 동시에 사회에 관한 과학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에 속하지 않는 과학은 모두 필연적으로 사회학에 속하게 된다. 그리되면 사회학은 윤리학, 문화사, 경제학, 미학, 인구학, 정치학, 인류학 등과 구별되는 개별과학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보편과학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 경우 우리는 단지 기존의 모든 과학을 “하나의 커다란 냄비에 집어넣고는” 이 냄비에 ‘사회학’이라는 레테르를 붙이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2). 사회학은 사회에 관한 과학이라는 생각, 즉 사회학은 사회의 보편과학이라는 생각으로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짐멜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사고와 행위가 사회에서 그리고 사회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사실이 사회학을 사회에 관한 보편과학으로 만들 수 없는데, 이는 마치 화학, 식물학 그리고 천문학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인간 의식 속에서만 인식되고 그 전제조건에 예속된다는 사실 때문에 이 과학들이 심리학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이치와 같다.(3)
이처럼 짐멜은 사회학을 사회의 보편과학으로 파악하는 입장을 거부하면서 사회학을 다수의 개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호작용의 ― 내용이 아니라 ― 형식을 연구하는 과학으로 규정한다. 바로 이런 연유로 짐멜의 사회학은 일반적으로 형식사회학이라고 불린다. 짐멜은 사회에 대한 실체론적 개념을 단호히 거부하면서 사회를 개인들 사이의 다양한 상호작용의 총합과 동일시하며, 따라서 사회보다는 사회화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한다. 사회란 단지 상호작용에 의해서 결합된 개인들을 지칭하는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짐멜은 사회를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사건이자 과정이라고 규정한다. 사회란 개인들과 그들의 운명 그리고 발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기능에 다름 아니다. 이로써 사회는 개인들과 그들의 상호작용으로 해체되었다. 그리하여 사회가 고체적인 것에서 액체적인 것이 되었다. 사회가 “액화”(液化)되었다.(4) 사회를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해체하고 이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사회학, 사회의 실체화가 아니라 사회의 사건화와 과정화를 추구하는 사회학 ― 이는 사회학사에서 일어난 가장 의미심장한 패러다임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짐멜에 따르면 이러한 사회학의 패러다임 전환은 생명과학의 패러다임 전환에 비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생명과학에서는 심장, 신장, 폐, 위와 같이 비교적 크고 고정적이며 명백히 구분할 수 있는 신체기관으로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무한한 세포 내에서 진행되는 무한한 생명 현상과 과정으로 인식관심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짐멜은 1907년에 출간된 <사회학의 문제>에서 주장하기를, 비교적 크고 고정적인 신체기관에 한정된 생명과학은
신체의 형태와 기능의 차이점들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생명의 과정은 가장 작은 요소들인 세포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이들 세포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행되는 수많은 상호 작용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우리는 어떻게 세포들이 서로 결합하고 서로를 파괴하는가, 어떻게 서로가 동화되거나 화학적으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야만 비로소 신체가 그 형태를 구성하고 유지하거나 변화시키는 원리를 이해하게 된다. 심장과 허파, 위와 콩팥 그리고 뇌와 운동기관들 ― 이들 커다란 기관들은 세포라고 하는 생명의 기본 요소들과 이들 요소 사이의 상호 작용들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특수한 구조와 기능으로 발전한 결과이다. 그런데 가장 작은 요소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과정들이 ― 이것들은 물론 거시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비로소 결합되고 유지된다 ― 진정하고 근본적인 생명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코 이들 커다란 기관만을 통해서는 생명의 연관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5)
이처럼 생명과학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능했던 이유는 16세기 말에 세포 내의 생명 현상과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현미경이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의 전래적인 대상을 구성하는 구조물들로부터는 개인들의 체험에 존재하는 실제적인 사회의 삶이 전혀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개별적으로는 덜 범위가 작은 수많은 합성물이 […] 그들 사이에서 작용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삶은 불연속적인 수많은 체계들로 쪼개지고 말 것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들 사회적 형식들을 과학적으로 확정하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다른 한편 사회를 더 깊이 있게 이해함에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다. 이는 사회적 형식들은 일반적으로 아직 고정적이고 초개체적인 구조로 응결되지 않은 상태에 있으며, 또한 사회는 소위 발생하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줌을 의미한다. 물론 이 발생이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구명할 수 없는 태초에 시작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리고 매시간 일어나는 시작을 가리킨다. 사람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사회화가 맺어지고 풀리며 새로이 맺어진다. 사회화는 영원하게 흐르고 고동치면서 개인들을 결합시킨다. 설령 그것이 진정한 조직으로 발전하지 않는 경우에도 또한 그러하다.(6)
이런 식으로 짐멜이 자연과학적 현미경에 비유되는 ‘사회학적 현미경’을 가지고 관찰하는 사회란 예컨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 대해서 시기를 한다. 그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거나 같이 점심을 먹는다. 그들은 구체적인 이해관계와 전혀 상관없이 서로 공감하거나 또는 반감을 가지면서 접촉한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기도 하고, 서로는 서로를 위해서 옷을 입고 치장을 한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연결되는, 순간적인 또는 지속적인, 의식적인 또는 무의식적인, 덧없는 또는 중대한 이 모든 무수한 관계들(이 가운데 위에 언급한 예들은 아주 자의적으로 고른 것이다)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함께 묶는 것이다. 매일같이 그리고 매 시간마다 이와 같은 관계들이 형성되고 소멸되며, 새로이 시작되고, 다른 관계들에 의해서 대체되고, 그것들과 뒤섞인다.(7)
이 모든 것은 사회가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해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짐멜에게 사회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총합을 가리키는 이름에 다름 아니다. 사회란 사회적 상호작용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상호작용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회가 존재한다. 단 두 사람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상호작용을 하는 경우에도 사회는 존재한다. 예컨대 방금 인용한 바와 같이,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거나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길을 묻는 지극히 순간적인 상호작용의 경우에도 엄연히 사회가 존재한다. 두 직장 동료가 휴식시간에 자판기 앞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에도 엄연히 사회가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고정적이고 실체적인 사회의 개념은 유동적이고 과정적인 상호작용에 자리를 내주게 되며, 사회학의 인식관심이 사회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바뀐다. 다시 말해 사회학의 시선이 사회의 구조, 그 구성요소들 사이의 관계, 사회의 운동법칙 또는 발전법칙 등에서 개인들의 삶과 행위로,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 안에서 그리고 사회를 통해서 결정되는 개인들의 삶과 행위로 옮겨간다. 이제 사회학은 사회에 관한 과학, 즉 ‘사회’ +‘학’이 아니라 개인들의 삶과 행위,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화된 개인들의 삶과 행위에 관한 과학이 된다. 그것은 사회화에 관한 과학, 즉 ‘사회화’ +‘학’이 된다.
[다음 편에 계속]
주 1) Georg Simmel, Soziologie. Untersuchungen uber die Formen der Vergesellschaftung(1908): Georg Simmel Gesamtausgabe 11,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2a, 32쪽. 2) 같은 책, 14-15쪽. 3) 같은 책, 15쪽. 4) 이 개념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할 것. Heinz Bude, “Auflosung des Sozialen? Die Verflussigung des soziologischen ‘Gegenstandes’ im Fortgang der soziologischen Theorie”, in: Soziale Welt 39/1988, 4-17쪽. 5) 게오르그 짐멜,「감각의 사회학」.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2005 (김덕영ㆍ윤미애 옮김), 153-174쪽, 여기서는 153-154쪽. 6) Georg Simmel, 앞의 책(1992a), 32-33쪽. 7) 같은 책, 33쪽.
* '도서출판 길'로부터 허락을 받아 게재함 ([김덕영 칼럼] Aporia Review of Books, Vol.1, No.4, 2013년 12월)